배임·횡령 공방 3년 만에 판정승
배임·횡령 공방 3년 만에 판정승
재판을 받고 나온 박찬구(65) 금호석유화학 회장의 표정은 밝지 않았다. 법원이 검찰의 공소사실 대부분에 대해 무죄판결을 내린 덕분에 형인 박삼구 회장과의 경영권 전쟁에서 이긴 셈이지만 100% 승리한 건 아니라서인 듯했다. 1심 재판부는 자본시장법 위반, 약속어음 발행 관련 특정경제범죄가중처벌법상 횡령·배임 등 큰 죄목으로 기소된 박찬구 회장에 대해 검찰의 구형량보다 매우 가벼운 징역 2년6개월, 집행유예 4년을 선고했다.
법원은 판결문에서 박찬구 회장이 자회사인 금호피앤비화학을 통해 아들(박준경 상무)에게 34억원을 대여해 회사에 손해를 끼친 혐의를 유죄로 인정했다. 다만, 박준경 상무가 대여금을 전부 변제해 실제 손해가 발생하지는 않았다는 점을 고려했다고 판시했다.
앞서 검찰은 박 회장이 273억원을 횡령·배임하고 미공개정보를 이용해 102억원의 손실을 피했다는 혐의로 기소했고, 지난해 12월 10일 징역 7년, 벌금 300억원을 구형했었다. 이번 1심 재판에서 유죄가 인정된 횡령·배임액은 34억원이다. 금호석유화학 관계자는 “유죄 부분 역시 절차상 하자가 있었을 뿐 박 회장이 배임을 지시한 것은 아니다”며 “검찰이 항소를 한다면 1심에서 유죄를 받은 부분에 대해서도 무죄를 입증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날 11시경 재판을 받고 나온 박찬구 회장은 본사가 있는 서울 중구 수표동 인근에서 임직원들과 칼국수를 먹었다. 금호석유화학 관계자는 “그제야 긴장이 풀린 듯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편한 표정이었다”고 전했다. 점심 식사 자리엔 장남 박준경(35) 상무도 함께했다.
박 회장은 이 자리에서 “준경이 너 때문에 이렇게 된 거야”라며 농담을 하고, 딸(주형씨)이 보낸 ‘사랑해요’라는 문자 메시지를 임직원들에게 보여주는 여유를 보이기도 했다. 식사를 마친 박 회장은 회사로 들어가 ‘임직원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이라는 글을 인트라넷에 올렸다. 내용은 이렇다.
“유죄 부분은 절차상 하자일 뿐”‘오늘 1심 결과에 대해서는 다소 아쉬움이 있지만, 혐의의 많은 부분이 밝혀졌음을 임직원 분들과 함께 나눌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물론 이번 판결은 확정된 것이 아니며, 검찰이 항소할 경우 저도 항소를 검토해 1심에서 유죄판결난 부분에 대해 적극적으로 무죄를 주장하여 입증할 예정입니다.
금호아시아나그룹과의 악연으로 비롯된 검찰의 무리한 기소로 3년간 이어진 길고 지루한 공방 속에서도 끝까지 공정성을 잃지 않고 실체적 진실을 밝혀준 재판부와 본인의 무죄를 믿고 성원해주신 임직원 여러분께도 거듭 감사 드립니다 …(중략)… 앞으로도 계속 금호석유화학그룹인으로서 원칙과 품위를 지키며 업무에 정진해 주기를 바랍니다.’
금호석유화학이 아시아나항공 1대 주주 되나?이번 재판은 금호그룹 분리경영을 둘러싼 박삼구·찬구 형제 갈등에서 비롯됐다<표 참조> .
재계 일각에서는 이번 판결로 금호그룹 형제 간 오랜 갈등이 화해 분위기로 돌아설 수 있을 것이라는 관측이 나온다. 하지만, 그동안 쌓인 앙금을 풀기엔 좀 더 많은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2006년 금호그룹이 대우건설을 인수한 이후 불거진 유동성 위기로 두 형제는 등을 돌렸다.
대우건설 인수를 반대한 박찬구 회장은 그룹에서 독립을 결심했고, 박삼구 회장은 동생을 2009년 7월 해임했다. 이후 분리경영을 놓고 두 형제 갈등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번 재판 직전까지도 그랬다. 금호석유화학 관계자는 “지난해 말 금호아시아나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박삼구 회장이 ‘찬구가 나를 괴롭혔는데 가만두지 않겠다’고 발언했다는 내부자 증언이 있다”며 “재판 과정에서도 박삼구 회장 측근들이 거짓 증언을 하며 박찬구 회장을 궁지로 몰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금호아시아나그룹 관계자는 “그런 발언이 있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라고 했다. 사내 게시글에서 ‘금호아시아나그룹과의 악연’을 강조한 박찬구 회장은 1심 재판 직후 임직원들과의 식사자리에서도 “형이 너무한 것 아니었느냐”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금호석유화학 측은 그동안 “이번 재판이 박삼구 회장 측의 악의적인 제보에 의해 시작됐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 정황은 있다. 언론에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재판 과정에서 대검찰청의 ‘최초 내사 기록’이 공개됐는데, 박삼구 회장 측근들이 검찰 수사에 적극 협조한 것으로 드러났다. 금호석유화학 관계자는 “금호아시아나 쪽에서는 부인하려 하지만, 박삼구 회장 측이 제공한 자료를 갖고 검찰 수사가 시작돼 기소까지 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제 관심은 오는 3월 아시아나항공 주주총회로 모인다. 금호그룹에서 사실상 분리 독립한 금호석유화학은 아시아나항공 지분 12.6%를 보유하고 있다. 박삼구 회장이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금호산업은 아시아나항공 지분 30%를 가진 최대주주다. 그런데, 아시아나항공은 금호산업 지분 13.05%를 갖고 있어 상법(제369조 3항)에 따라 상호출자한 지분율이 10%를 초과해 의결권이 제한된다. 다시 말해 아시아나항공이 금호산업 지분을 10% 이하로 낮추지 않으면 금호산업은 아시아나항공 주총에서 의결권을 행사하지 못한다. 박삼구 회장의 금호산업 대신 박찬구 회장의 금호석유화학이 1대 주주로 올라설 수 있다는 얘기다.
그동안 양측은 아시아나항공 의결권과 경영권을 놓고 치열한 물밑 신경전을 벌여왔다. 금호석유화학 관계자는 “양측 갈등이 풀리기엔 오랜 시간이 필요할 것”이라며 “모든 것은 박삼구 회장에 달렸다”고 말했다. 두 형제는 검찰 수사와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1년에 최소 여섯 차례(명절, 창업주인 고 박인천 회장 내외 기일, 타계한 형인 박성용·박정구 회장 기일) 집안 행사에 함께 참석했지만 화해는 물론 대화조차 나누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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