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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EOPOLITICS OF EAST ASIA - 문제는 과거사가 아니라 전략이다

THE GEOPOLITICS OF EAST ASIA - 문제는 과거사가 아니라 전략이다

역사문제 공조로 이득 취하려는 중국과 방어에 나선 미국 사이에서 길 잃은 한국



“하얼빈에 안중근 의사 기념관을 건설하도록 직접 지시했다.” 3월 24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박근혜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의 말이다. 시진핑은 박 대통령을 만나자마자 3월 말 인천에서 치러질 중국 인민군 유해 인계식을 언급하며 “진심으로 감사드린다”고 사의를 표했다. 박 대통령 또한 안중근 의사 기념관 건설이 “한중 우호협력관계의 좋은 상징”이라고 화답하며 향후 한중일 과거사 분쟁에서 중국과 공조를 강화해나갈 것임을 시사했다.

국제관계에서는 영원한 적도 아군도 없다는 통설에 비춰보면 중국의 과거사 공조 시도를 좋게만 보기는 어렵다. 이수훈 경남대 교수는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동북아에서 중국과 일본이 노골적으로 부딪치는 단계에 들어섰다”며 이 단계에서 한국이 “곤란한 상황으로 빠져들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고 우려했다. 향후 불거질 과거사 갈등에서 “중국이 ‘우리가 당신들 안중근 의사 기념관 짓는 거 도와줬으니 이번엔 우리를 도와 달라’고 요구하면 우리는 딱히 거절할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날이 머지않았을지도 모른다. 과거사를 둘러싼 중국의 공격 수위는 갈수록 높아진다. 시진핑은 3월 28일 베를린 쾨르버재단이 주최한 공개강연에서 “70여 년 전 일본이 난징시를 침략하면서 30만 명 이상의 중국인을 도살했다”며 난징대학살로 일컬어지는 당시의 참상이 “중국인의 뼛속 깊이 사무쳐 있다”고 강도 높게 비판했다.

한 국가의 수반이 국제무대에서 과거사를 두고 타국을 비판하는 일은 드물다. 게다가 난징에서 살해당한 중국인이 30만 명 이상이라는 것은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은 중국측의 주장이며, 공개적인 자리에서 거론하기에는 극히 민감한 문제다. 중국도 이를 잘 알기 때문에 지도자가 나서서 난징대학살의 구체적인 내용을 언급한 적은 없었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즉각 성명을 내고 “살해당한 중국인 수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다”며 “중국 지도자가 제3국에서 그런 발언을 한 것은 비생산적인 일”이라고 반박했다.

중국과 일본 사이에선 과거사 분쟁뿐 아니라 센카쿠열도(중국명 댜오위다오)를 둘러싼 영토 분쟁도 벌어지고 있다. 한국이 계속해서 중국과 과거사 문제로 공조를 이어간다면 향후 불거질 중일 간 갈등에서 한국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처지에 처할 가능성이 있다. 한일관계가 악화되면서 한일 정상회담이 한 차례도 개최되지 않는 사이 박 대통령과 시진핑은 벌써 4차례나 정상회담을 가졌다. 취임 후 1년이 갓지난 두 정상이 4차례나 정상회담을 가진 것은 이례적이다. 한국이 얼마나 중국과 가까워지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중국의 대전략중국이 한국을 가까이하고 일본을 멀리하는 것은 동북아의 앞날을 내다본 중국의 대전략의 일부다. 안중근 의사 기념관 건립을 둘러싼 중국의 태도 변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한국이 중국측에 안중근 의사 기념 표지석을 세워달라고 요청하기 시작한 것은 2006년이다.

당시 하얼빈에서 사업을 하던 이진학 안중근평화재단이사장은 2006년 자비 1억7000만원을 들여 하얼빈시에 안중근 동상을 건립했지만 “공공장소에 외국인 동상을 세울 수 없다”는 중국 정부의 방침에 따라 철거당했다. 결국 이 동상은 지하실에 보관하다가 2009년 안중근 의사 의거 100주년을 맞아 한국으로 건너왔다.

그러던 중국이 돌연 태도를 바꾼 것은 2013년이었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해 안중근 표지석 설치를 요청하자 중국은 되려 200㎡가 넘는 규모의 기념관을 설립하겠다고 답해온 것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조양현 국립외교원 교수는 한 언론 인터뷰에서 “경제분야에서 한국의 제1 교역상대가 된 중국이 역사문제로 한국과 공조해 일본을 압박하려는 건 장기적으로 한미동맹의 약화를 겨냥한 것일 수 있다”고 말했다. “동북공정으로 갈등을 빚었던 사실을 감안하면 중국과 역사인식을 공유하는 건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다.” 안중근 기념관 설립을 비롯한 중국의 과거사 공조 제의는 과거사 문제를 빌미로 한국을 중국쪽으로 끌어당기려는 중국의 전략이라는 분석이다.

한국 정부도 이를 모르진 않는 듯하다. 아사히신문에 따르면 한중 정상회담 직후 한국 정부가 낸 보도자료에 시진핑의 안중근 기념관 관련 발언은 포함됐지만 이에 대한 박 대통령의 화답은 들어가지 않았다. 아사히신문은 외교 소식통을 인용해 “한일관계 개선을 원하는 미국 앞에서 이 문제를 강조하지 않으려는 의식이 나타난 것”이라고 분석했다.

한국이 일본과 멀어지면서 중국에 가까워지는 현상은 미국의 입장에서도 달가운 일이 아니다. 오바마 미 대통령이 발벗고 나서서 한미일 정상회담을 성사시킨 이유다. 이번 한미일 정상회담에서 오바마가 강조한 부분은 이 삼각공조에서 미국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오바마는 정상회담 모두발언에서 “합동 군사 훈련이나 미사일 방어 등을 포함해 외교적, 군사적 협력을 심화할 수 있는 구체적인 조치를 논의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고 말했다. 아시아로의 중심축 이동을 추진하는 미국으로서는 북한을 빌미로 한미일 군사협력을 강화하는 것이 동북아에서 영향력을 키우는 최선의 전략이다.

중국과 미국이라는 두 대국의 대전략사이에서 한국은 어떻게 대처하고 있을까? 지금까지는 양쪽 모두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어 보인다. 한중 정상회담과 한미일 정상회담이 잇따라 치러진 뒤 한국 정부가 발간하는 매체정책브리핑은 한중 정상회담 결과를 “북핵불용 및 북한비핵화에 대한 양국의 공동인식을 재확인했다”고 평가했다. 동시에 한미일 정상회담에 대해서는 “박 대통령과 미일 양국 정상은 북핵 등 대북현안 해결을 위한 3국의 단합된 대응 필요성에 대해 공감했다”고 전했다. 미국과 일본, 중국이 모두 한국의 입장에 동조했다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선뜻 이해하기는 어렵다. 한중 정상회담 뒤에 개최된 미중 정상회담에서 양국은 대북정책을 놓고 극심한 의견 대립을 보였기 때문이다. 벤 로즈 백악관 국가안보부보좌관은 회담 결과를 보고하는 자리에서 “북한은 아직 진지하게 협상 테이블에 앉겠다는 의도를 보여주지 않았다”며 북한이 먼저 비핵화 조치를 취하지 않는 한 6자회담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기존의 입장을 견지했다. 중국측은 6자회담 재개가 북핵문제를 해결할 유일한 방안이라고 맞받았다. 이 역시 그동안 고수했던 입장이다. 북핵 해결 방안을 둘러싼 해묵은 갈등이 되풀이된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국의 선택통일 문제도 마찬가지다. 중국과 미국은 모두 표면적으로 한반도 평화통일을 바란다고 하지만 구체적인 내용에서는 차이가 크다. 이번 한중 정상회담에서 시진핑은 “남북 양측의 자주적이고 평화적인 통일 실현을 희망한다”고 말했다. 시진핑이 남북통일을 언급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지만, 남북통일에 ‘자주’라는 단어를 끼워놓은 데는 다른 뜻이 있다.

송민순 전 외교부 장관은 JTBC 정관용 라이브에 출연해 “자주라는 것은 다시 말해 외세의 개입 없이 통일해야 된다”는 뜻이라고 분석했다. “한반도에 지금 있는 외세는 어디입니까? 미국이거든요.” 이런 관점에서 보면 시진핑이 말하는 자주적 통일은 미국을 배제하고 “우리 민족끼리” 통일 문제를 논의하자는 북한의 입장과 유사하다. 한국과 일본을 중심으로 동북아 지역 내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미국 뜻과는 배치된다.

미국과 중국이 대립 중인 바로 그 문제에 대해 중국과 “공동인식을 재확인”하는 동시에 미국과 “공감”했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 “박 대통령이 국제무대에서 제시하는 대북정책은 원칙적인 내용이 대부분이라 타국 정상들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한 북한전문가는 지적했다. 구체적인 내용이 없으니 입장이 다른 양측으로부터 지지를 받는다는 것이다. “박 대통령의 대북정책을 보면 알맹이가 없다는 느낌을 받는다. 이번에 발표한 드레스덴 선언도 그렇다. 북한식으로는 주민들이 행복해질 수 없으니 한국식으로 바꾸자는 건데, 그러자면 북한에서는 반발할 수밖에 없다. 이런 식으로는 신뢰가 형성되기 어렵다.”

사실 이런 딜레마는 2013년부터 드러났다. 박 대통령은 2013년 5월 한미 정상회담을 가진 데 이어 6월에는 한중 정상회담을 가졌고, 각 회담이 끝난 뒤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한미 정상회담 후 발표한 한미동맹 60주년 기념 공동선언문에서는 “박 대통령이 주창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등을 통해 북한이 국제사회의 의무를 준수토록”하고 “북한의 도발로부터 양국 국민들을 보호하기 위해 북한의 미사일 위협에 대한 공동의 대응 노력과 함께, 정보·감시·정찰 체계 연동을 포함한 포괄적이고 상호 운용가능한 연합방위력을 지속 강화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했다. 북한 주민들의 “기본적인 인권 개선을 촉구”한다는 내용도 담겼다.

그런데 바로 다음 달인 6월 한중 정상회담 이후 발표한 한중 미래비전 공동성명은 내용이 조금 달랐다. 중국측은 “박근혜 대통령이 주창한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구상을 환영하고, 남북관계 개선 및 긴장 완화를 위하여 한국측이 기울여온 노력을 높이 평가했다”며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지지했다.

또 “양측은 한국과 북한이 한반도 문제의 직접 당사자로서 당국간 대화 등을 통해 한반도 문제 해결을 위하여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데 의견을 같이 했다”고 선언하며 당사자로서 당국간 대화에 초점을 맞췄다. 똑같은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놓고 미중 양측의 지지를 받았지만 그 내용에 있어서는 미국과 중국의 대북정책 차이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결국 문제는 한국의 대전략이 어디로 향하느냐에 달렸다. 아사바 유키 니가타현립대 교수는 한국이 일본과 갈등하는 근본적인 이유 또한 “전략의 차이”라고 주장했다. “한일 협력이 전혀 이뤄지지 않는 배경에는 과거사 문제도 있지만, 그보다 동북아를 보는 관점의 차이가 더 크게 작용한다”고 아사바는 말했다.

일본은 미국과 중국이 언젠가 충돌하리라는 전제 하에 미일 동맹 중심의 외교전략을 세웠지만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평화로운 공존이 가능하다고 보는 듯하다는 것이다. “만약 과거사만이 유일한 문제였다면 군사정보협정 등 중요한 분야에서는 협력이 이뤄졌을만도 하다. 과거사 문제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어떻게든 해결이 된다고 보지만 세계관은 정권이 교체된다 해도 바뀌기 어렵다. 때문에 설령 과거사 문제가 해결된다고 해도 한일관계가 크게 개선되기는 어렵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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