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전쟁영웅에서 반역자로
미국 전쟁영웅에서 반역자로
미 육군 중령 제이슨 애머린은 전쟁영웅이었다. 그는 2001년 10월 말 미 육군 특수부대 A팀과 함께 아프가니스탄 남부에 도착했다. 당시는 모두가 전쟁이 쉽게 끝나며 목표가 명확하다고 말했다. 9·11 테러를 복수하고, 탈레반 정권을 무너뜨린 뒤 철수하면 된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로부터 14년 뒤 애머린 중령은 미국 연방의회에 나가 왜 자신이 아직도 싸우고 있는지 설명해야 했다.
그는 지난 1월까지 미 국방부에서 근무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포로로 잡힌 보 버그달 병장을 석방시키는 임무를 띤 육군팀을 이끌었다. 그의 임무는 버그달 병장만이 아니라 파키스탄에서 탈레반과 연계된 민병대가 억류하던 민간인 인질 6명도 무사히 데려나오는 것으로 확대됐다. 애머린 중령이 그 임무를 맡았을 때 버그달 병장은 거의 4년째 억류돼 있었다. 그는 베트남전 이래 가장 오래 잡혀 있던 전쟁포로였다.
2013년 애머린 중령은 탈레반과 여러 차례 비밀 협상을 벌이며 인질을 석방시키는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관료주의 때문에 번번이 벽에 부닥쳤다. 파키스탄의 탈레반 지휘부보다 미국의 연방기관들과 입씨름을 더 많이 해야 했다. 견디다 못한 그는 해병 참전군인 출신으로 하원 군사위원회의 던컨 헌터 의원(공화당)에게 도움을 청했다.
헌터 의원은 척 헤이글 국방장관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육군과 국무부, 미 연방수사국(FBI), 여러 정보기관, 국방부 사이의 승강이를 중지시켜 달라고 청원서를 보냈다.
지난해 5월 버그달 병장은 쿠바 관타나모 기지에 수용된 탈레반 테러 용의자 5명과 맞교환으로 풀려났다. 그러자 헌터 의원은 애머린 중령이 중재한 훨씬 나은 협상 조건이 무시됐다며 격분했다. 더구나 캐나다인 2명과 어린이 1명이 포함된 서방 민간인 6명은 풀려나지 못했다. 그들은 대테러전에서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파키스탄 정부가 보호하는 탈레반 연계 테러단에 억류돼 있었다.
지난 1월 미 중앙정보국(CIA)이 운용하던 드론이 발사한 미사일로 그 인질 중 국제구호요원 워런 웨인스타인이 사망했다. 하루 뒤 애머린 중령은 국방부에서 면직됐다. 미군범죄수사대(CID)가 그를 수사하기 시작했다. 급여 지급이 중지됐고 퇴역은 보류됐다.
헌터 의원은 애머린 중령이 FBI의 인질구조 영역을 침범한 데 대한 보복성 조치라고 말했다. 인질은 파키스탄에 계속 억류돼 있고, 애머린 중령에 대한 수사는 지지부진하며, 국방부 내사과가 CID의 수사를 다시 조사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애머린 중령은 지난 6월 상원 청문회에서 증언하며 자신에게 찍힌 ‘반역자’라는 낙인이 터무니없다고 항변했다. “내가 이 자리에 선 것은 내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군인은 보복당할 위험 없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2001년 9월 11일 아침 당시 미 육군 대위였던 애머린이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한 식당에 갔을 때 9·11 사태가 터졌다. 천인공노할 그 테러의 배후는 오사마 빈 라덴이 분명했다. 그날 밤 애머린과 그의 그린베레 팀은 전쟁에 동원됐다. 다음 달 그들은 파키스탄에서 하미드 카르자이를 만났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남부를 거점으로 하던 파슈툰 반군의 떠오르는 지도자로 나중에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됐다.
애머린의 팀은 아프가니스탄 북부로 침투한 미군 팀보다 더 어렵고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북부의 마자리샤리프 부근에 도착한 팀은 CIA의 지원을 받는 반탈레반 연합체 북부동맹군과 함께 말을 타고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남부의 부족 지역에선 반탈레반 연합조직이 없었다.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최대 도시 칸다하르는 탈레반의 실질적 수도였다. 미군은 칸다하르를 두고 치열한 전투를 예상했다. 카르자이는 애머린에게 칸다하르 북쪽의 우루즈간주 주도 타린 코트의 탈환을 미군이 돕는다면 탈레반에 치명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위험한 지역에 애머린이 이끈 그린베레가 블랙호크 헬기에서 뛰어내렸다. 그들은 파슈툰 반군에 잘 융합되기 위해 수염을 기르고, 양털 재킷과 모자 달린 옷으로 위장했다.
미군 지휘부는 카르자이가 반군 300명 이상을 조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애머린은 첫 전투를 준비하는데 몇 주가 걸린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린베레가 그곳에 투하된 지 48시간도 채 안 돼 타린 코트 주민들이 봉기해 탈레반 주지사를 사살했다. 애머린의 팀은 사흘 동안 잠을 못 잔 상태였다. 그들에겐 한 가지 방법뿐이었다. 소총만 가진 아프간 반군 몇 십 명의 도움만으로 탈레반의 맹습으로부터 타린 코트를 방어해야 했다.
그들은 탈레반의 반격이 시작될 넓은 계곡과 비탈길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지역에 진지를 구축했다. 전술적으로 유리한 고지였지만 아프간 반군은 수많은 탈레반 트럭이 먼지를 날리며 몰려오는 것을 본 순간 그냥 도망쳤다. “그들은 완전히 공황 상태였다”고 애머린이 2002년 미국 공영방송 PBS에서 돌이켰다. 통역관이 없어 3만 피트 상공에 F-18 전투기 3대가 날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그들을 안심시킬 수 없었다.
애머린의 팀은 공중 지원을 요청했다. 전투기가 폭탄과 기관총으로 탈레반을 공격했다. 트럭이 하나씩 폭파되자 탈레반은 결국 퇴각했다. 카르자이가 이끈 반군이 타린 코트 후방에서 탈레반의 소규모 반격을 저지하면서 전투는 승리로 끝났다. 타린 코트의 한 성직자는 미군이 없었다면 주민 전부 탈레반의 손에 죽었을 것이라고 카르자이에게 말했다. 미군의 도움으로 권력을 눈앞에 두게 된 카르자이는 애머린과 공동 목표에 합의했다. “칸다하르로 진격해 전쟁을 끝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과 아프간 반군 연합이 남쪽으로 진격했을 때 일이 틀어졌다. 12월 5일 아침 샤왈리 코트 외곽에서 미군 폭격기 B-52가 잘못된 좌표를 전달 받고 900㎏짜리 위성 유도 폭탄을 애머린의 팀 바로 위에 떨어뜨렸다. 그린베레 대원 3명과 아프간 반군 27명이 사망했고, 나머지 모두 부상했다. 애머린도 다리에 파편이 박혔다. 사흘 뒤 칸다하르가 함락됐다. 탈레반 최고지도자 물라 무함마드 오마르가 혼다 모터사이클 뒤에 올라타고 탈출했다.
애머린의 팀은 은성 훈장 3개, 동성 훈장 7개, 명예전상장 11개를 받았다. 그의 이야기는 에릭 블렘이 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숨 바칠 가치 있는 유일한 명분(The Only Thing Worth Dying For)’으로 널리 알려졌다. 2002년 1월 애머린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9·11 사태 후 첫 국정연설에 초청됐다. 그는 뉴욕을 방문해 증권거래소의 마감종을 쳤고 CBS·폭스·CNBC 방송과 인터뷰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로 돌아가 전쟁에서 그를 대신할 젊은 생도들에게 국제관계와 아랍어를 가르쳤다. 그러다가 국방부로 발탁되면서 그 화려한 경력을 망치게 될 명령을 받았다.
2009년 당시 일병이던 버그달은 파키스탄 국경에서 40㎞ 떨어진 곳에 배치된 뒤 실종됐다(탈영으로 알려졌다). 2주가 채 안 돼 그가 파키스탄으로 납치됐다는 첩보가 입수됐다. 그가 행방불명된 지 2일 뒤 그 지역의 탈레반 사령관 물라 상긴 자드란은 무자비한 무장조직 하카니 네트워크를 대신해 그를 납치했다고 주장했다. 납치가 그들의 사업 모델이었다. 그들은 버그달을 손에 넣기 9일 전 가장 가치 높은 인질을 잃었다. 뉴욕타임스 기자 데이비드 로드였다. 그는 억류된 지 7개월 만에 탈출에 성공했다. 버그달이 그 대신 탈레반과 하카니의 가장 소중한 인질이 됐다.
버그달은 현역병으로서 그의 안전은 미 국방부의 중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미군은 파키스탄에 들어갈 수 없었다. 국제법과 외교적 필요성 때문에 구출 임무는 백악관의 지시에 따라 CIA나 특수부대가 수행해야 했다.
국방부에서 애머린의 팀은 철저한 조사에 착수했다. 그는 지난 6월 상원 청문회에서 “인질구출 노력이 4년간 실패한 이유는 관련된 모든 정부 기관을 조율하는 사령탑이 없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조사 결과 아무도 구출하려 하지 않는 민간인 인질도 파키스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들도 우리 임무에 포함시켰다.”
그 마지막 요점은 뼈 있는 지적이었다. 애머린이 말한 ‘아무도’는 해외에서 납치된 미국 시민을 책임지는 기관인 FBI였다. 애머린의 팀은 FBI의 손이 닿지 않는 중앙아시아에서 미군이 10여 년에 걸쳐 확보한 방대한 정보망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의 팀은 주요 목표 3가지를 정했다. 실행 가능한 포로교환 방안을 강구하고, 탈레반을 협상테이블로 다시 불러오며, 미국 정부의 잘못된 인질구출 정책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첫째와 둘째 목표에선 진전이 이뤄졌다. 미군 정보국은 버그달과 민간인 인질이 억류자에게 부담이 됐다고 보고했다. 지난해 봄 국방부의 한 관리는 AP 통신에 탈레반이 미군 인질과 관련해 협상 의사를 타진해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연방 기관들은 다른 쪽으로 일을 진행했다.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목적이 상충되는 방식이었다. 결국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헌터 의원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낸 청원서에 이렇게 썼다. “국방부, 미군 중부 사령부, 합참본부, 미군 특수전 사령부, 국무부, CIA, FBI, 국가안보국(NSA) 등이 전부 이 작전에 개입했다. 모든 기관의 조율과 협력이 필수적이다.”
헌터 의원의 청원에도 그런 조율과 협력이 전혀 이뤄지지 않자 애머린의 팀은 독자적으로 일을 추진했다. 미국 연방 교도소에서 종신형을 살고 있는 탈레반 소속 마약 두목 하지 바시르 누르자이와 인질 7명 모두를 교환하는 협상을 계속했다.
헌터 의원은 그 협상을 적극 지지했다. 그는 백악관과 헤이글 국방장관에게 “버그달 석방을 위한 모든 계획을 주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부서는 국방부”라고 조언했다. 국무부와 국방부 관리들은 헌터 의원에게 양 부서가 “긴밀하게 협력하고 상호 보완하겠다”며 진행 상황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은 곧바로 잊혀졌다. 탈레반에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버그달이 5월 31일 석방됐을 때 헌터 의원은 사전 통보를 받지 못했다. 미국 정부는 누르자이 대신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된 탈레반 포로 5명을 석방했다. 그중 2명은 사령관급이었다.
정치적 초점이 석방된 탈레반 포로가 제기할 수 있는 위협에 맞춰지면서 애머린과 헌터 의원이 처음부터 제기했던 문제는 주목 받지 못했다. 파키스탄에 민간인 6명이 억류돼 있으며, 그들의 운명을 손에 쥔 FBI는 파키스탄에서 인질구출 작전을 수행할 자원도 법적 권한도 없다.
버그달 교환의 파문에도 백악관과 FBI는 점증하는 세계적 인질위기 소식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2012년 말과 2013년 초 미국인 여러 명이 내전으로 파괴된 시리아에서 취재하고 구호 작업을 하다가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에 억류됐다. 인질 사건이 증가하면서 중동으로 번지자 미국에서 관료주의 수렁도 더 커졌다.
지난해 5월 시사잡지 애틀랜틱의 소유주 데이비드 브래들리는 IS에 잡힌 인질의 부모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다. 브래들리는 정부의 관료주의를 헤쳐나가도록 그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간지 뉴요커의 로렌스 라이트 기자가 쓴 기사에 따르면 정부 요원들이 브래들리와 인질 가족을 계속 방해했다. 국무부 관리들은 테러단체와 대화한 그들을 기소하겠다고 위협했다(사실 FBI도 은밀히 IS와 대화를 시도했다). 정부 기관들이 인질구출보다 영역다툼에 집착하면서 인질 가족들은 좌절했다.
특히 FBI의 보복심이 강했다. 라이트 기자는 인질의 페이스북 프로필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한 FBI의 무능부터 인질 부모에게 상충되는 정보를 전달한 것까지 다양한 문제를 들춰냈다. 정부 외부에서 제시된 해결책은 아무리 좋아도 무시됐다.
지난해 12월 백악관은 인질구출 정책의 총체적인 재검토를 지시했고 애머린 중령의 상원 청문회 증언 2주 후 정책 개정을 발표했다. “정부의 인질사건 대응, 특히 인질 가족과의 소통에서 많은 개선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백악관은 브래들리 같은 독립적인 중재자 같은 외부의 도움을 허용하고 ‘민간 차원에서 인질범과의 대화’를 처음 허용했다. 그러나 인질 석방을 위해 몸값을 지불하지 않는다는 방침은 그대로 유지됐다. 정부는 몸값을 지불하는 민간인을 기소할 권한을 갖고 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은밀하게 파키스탄부터 필리핀까지 테러단에 몸값을 지불해왔다.
백악관은 헌터 의원의 지적 중 일부를 수용해 해외 인질구출을 위한 정부기관간의 통합 기구를 설립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기구는 FBI 본부에 설치될 예정이다. 헌터 의원은 “겉치레에 불과한 개혁”이라고 말했다. “미국 인질정책과 관련된 논란은 FBI에서 시작해 FBI에서 계속될 뿐이다.” 헌터 의원은 애머린 중령이 현재 겪는 곤경의 배후도 FBI라고 주장했다. “영역 침범에 대한 FBI의 보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제이슨 애머린 미 육군 중령이다.”
상원은 아프가니스탄전의 영웅 애머린 중령이 왜 갑자기 ‘반역자’로 낙인 찍혔는지 FBI와 미 육군에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육군의 조사 결과를 불문하고 버그달 병장이 풀려나면서 애머린 중령은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다. 애머린 중령과 헌터 의원의 노력으로 미흡하지만 정부 기관들을 아우르는 통합 기구가 설립돼 남은 인질을 안전하게 석방시킬 가능성도 커졌다.
2001년 11월 초 애머린과 그의 팀이 아프가니스탄 남부에서 전투를 준비할 때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실제 적보다 상부 지휘계통과 싸워야 하는 것을 더 걱정해야 하는 ‘빌어먹을’ 전쟁이다.’ 14년 뒤인 지금도 그 전쟁은 계속된다.
애머린 중령은 상원 청문회 증언에서 “시스템이 망가졌다는 내 지적이 옳지 않은가?”라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처한 곤경이 알려지면서 미군 장병들과 자신이 가르친 웨스트포인트 출신 장교들의 지지가 쇄도했다고 말했다. “그들이 전쟁에 나가면 난 그들의 안위가 걱정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워싱턴에 있는 내 안위를 걱정한다.”
- MICHAEL AMES NEWSWEEK 기자 /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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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지난 1월까지 미 국방부에서 근무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포로로 잡힌 보 버그달 병장을 석방시키는 임무를 띤 육군팀을 이끌었다. 그의 임무는 버그달 병장만이 아니라 파키스탄에서 탈레반과 연계된 민병대가 억류하던 민간인 인질 6명도 무사히 데려나오는 것으로 확대됐다. 애머린 중령이 그 임무를 맡았을 때 버그달 병장은 거의 4년째 억류돼 있었다. 그는 베트남전 이래 가장 오래 잡혀 있던 전쟁포로였다.
2013년 애머린 중령은 탈레반과 여러 차례 비밀 협상을 벌이며 인질을 석방시키는 방법을 찾았다. 그러나 미국 정부의 관료주의 때문에 번번이 벽에 부닥쳤다. 파키스탄의 탈레반 지휘부보다 미국의 연방기관들과 입씨름을 더 많이 해야 했다. 견디다 못한 그는 해병 참전군인 출신으로 하원 군사위원회의 던컨 헌터 의원(공화당)에게 도움을 청했다.
헌터 의원은 척 헤이글 국방장관과 버락 오바마 대통령에게 육군과 국무부, 미 연방수사국(FBI), 여러 정보기관, 국방부 사이의 승강이를 중지시켜 달라고 청원서를 보냈다.
지난해 5월 버그달 병장은 쿠바 관타나모 기지에 수용된 탈레반 테러 용의자 5명과 맞교환으로 풀려났다. 그러자 헌터 의원은 애머린 중령이 중재한 훨씬 나은 협상 조건이 무시됐다며 격분했다. 더구나 캐나다인 2명과 어린이 1명이 포함된 서방 민간인 6명은 풀려나지 못했다. 그들은 대테러전에서 미국의 핵심 동맹국인 파키스탄 정부가 보호하는 탈레반 연계 테러단에 억류돼 있었다.
지난 1월 미 중앙정보국(CIA)이 운용하던 드론이 발사한 미사일로 그 인질 중 국제구호요원 워런 웨인스타인이 사망했다. 하루 뒤 애머린 중령은 국방부에서 면직됐다. 미군범죄수사대(CID)가 그를 수사하기 시작했다. 급여 지급이 중지됐고 퇴역은 보류됐다.
헌터 의원은 애머린 중령이 FBI의 인질구조 영역을 침범한 데 대한 보복성 조치라고 말했다. 인질은 파키스탄에 계속 억류돼 있고, 애머린 중령에 대한 수사는 지지부진하며, 국방부 내사과가 CID의 수사를 다시 조사하는 상황이 돼버렸다.
애머린 중령은 지난 6월 상원 청문회에서 증언하며 자신에게 찍힌 ‘반역자’라는 낙인이 터무니없다고 항변했다. “내가 이 자리에 선 것은 내 임무를 수행했기 때문이다. 군인은 보복당할 위험 없이 임무를 수행할 수 있어야 한다.”
2001년 9월 11일 아침 당시 미 육군 대위였던 애머린이 카자흐스탄 알마티의 한 식당에 갔을 때 9·11 사태가 터졌다. 천인공노할 그 테러의 배후는 오사마 빈 라덴이 분명했다. 그날 밤 애머린과 그의 그린베레 팀은 전쟁에 동원됐다. 다음 달 그들은 파키스탄에서 하미드 카르자이를 만났다. 그는 아프가니스탄 남부를 거점으로 하던 파슈툰 반군의 떠오르는 지도자로 나중에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 됐다.
애머린의 팀은 아프가니스탄 북부로 침투한 미군 팀보다 더 어렵고 위험한 상황에 처했다. 북부의 마자리샤리프 부근에 도착한 팀은 CIA의 지원을 받는 반탈레반 연합체 북부동맹군과 함께 말을 타고 작전을 수행했다. 그러나 남부의 부족 지역에선 반탈레반 연합조직이 없었다.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최대 도시 칸다하르는 탈레반의 실질적 수도였다. 미군은 칸다하르를 두고 치열한 전투를 예상했다. 카르자이는 애머린에게 칸다하르 북쪽의 우루즈간주 주도 타린 코트의 탈환을 미군이 돕는다면 탈레반에 치명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 위험한 지역에 애머린이 이끈 그린베레가 블랙호크 헬기에서 뛰어내렸다. 그들은 파슈툰 반군에 잘 융합되기 위해 수염을 기르고, 양털 재킷과 모자 달린 옷으로 위장했다.
미군 지휘부는 카르자이가 반군 300명 이상을 조직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애머린은 첫 전투를 준비하는데 몇 주가 걸린다고 예상했다. 그러나 그린베레가 그곳에 투하된 지 48시간도 채 안 돼 타린 코트 주민들이 봉기해 탈레반 주지사를 사살했다. 애머린의 팀은 사흘 동안 잠을 못 잔 상태였다. 그들에겐 한 가지 방법뿐이었다. 소총만 가진 아프간 반군 몇 십 명의 도움만으로 탈레반의 맹습으로부터 타린 코트를 방어해야 했다.
그들은 탈레반의 반격이 시작될 넓은 계곡과 비탈길이 내려다 보이는 높은 지역에 진지를 구축했다. 전술적으로 유리한 고지였지만 아프간 반군은 수많은 탈레반 트럭이 먼지를 날리며 몰려오는 것을 본 순간 그냥 도망쳤다. “그들은 완전히 공황 상태였다”고 애머린이 2002년 미국 공영방송 PBS에서 돌이켰다. 통역관이 없어 3만 피트 상공에 F-18 전투기 3대가 날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 그들을 안심시킬 수 없었다.
애머린의 팀은 공중 지원을 요청했다. 전투기가 폭탄과 기관총으로 탈레반을 공격했다. 트럭이 하나씩 폭파되자 탈레반은 결국 퇴각했다. 카르자이가 이끈 반군이 타린 코트 후방에서 탈레반의 소규모 반격을 저지하면서 전투는 승리로 끝났다. 타린 코트의 한 성직자는 미군이 없었다면 주민 전부 탈레반의 손에 죽었을 것이라고 카르자이에게 말했다. 미군의 도움으로 권력을 눈앞에 두게 된 카르자이는 애머린과 공동 목표에 합의했다. “칸다하르로 진격해 전쟁을 끝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미군과 아프간 반군 연합이 남쪽으로 진격했을 때 일이 틀어졌다. 12월 5일 아침 샤왈리 코트 외곽에서 미군 폭격기 B-52가 잘못된 좌표를 전달 받고 900㎏짜리 위성 유도 폭탄을 애머린의 팀 바로 위에 떨어뜨렸다. 그린베레 대원 3명과 아프간 반군 27명이 사망했고, 나머지 모두 부상했다. 애머린도 다리에 파편이 박혔다. 사흘 뒤 칸다하르가 함락됐다. 탈레반 최고지도자 물라 무함마드 오마르가 혼다 모터사이클 뒤에 올라타고 탈출했다.
애머린의 팀은 은성 훈장 3개, 동성 훈장 7개, 명예전상장 11개를 받았다. 그의 이야기는 에릭 블렘이 쓴 뉴욕타임스 베스트셀러 ‘목숨 바칠 가치 있는 유일한 명분(The Only Thing Worth Dying For)’으로 널리 알려졌다. 2002년 1월 애머린은 조지 W 부시 대통령의 9·11 사태 후 첫 국정연설에 초청됐다. 그는 뉴욕을 방문해 증권거래소의 마감종을 쳤고 CBS·폭스·CNBC 방송과 인터뷰했다. 그는 웨스트포인트 사관학교로 돌아가 전쟁에서 그를 대신할 젊은 생도들에게 국제관계와 아랍어를 가르쳤다. 그러다가 국방부로 발탁되면서 그 화려한 경력을 망치게 될 명령을 받았다.
2009년 당시 일병이던 버그달은 파키스탄 국경에서 40㎞ 떨어진 곳에 배치된 뒤 실종됐다(탈영으로 알려졌다). 2주가 채 안 돼 그가 파키스탄으로 납치됐다는 첩보가 입수됐다. 그가 행방불명된 지 2일 뒤 그 지역의 탈레반 사령관 물라 상긴 자드란은 무자비한 무장조직 하카니 네트워크를 대신해 그를 납치했다고 주장했다. 납치가 그들의 사업 모델이었다. 그들은 버그달을 손에 넣기 9일 전 가장 가치 높은 인질을 잃었다. 뉴욕타임스 기자 데이비드 로드였다. 그는 억류된 지 7개월 만에 탈출에 성공했다. 버그달이 그 대신 탈레반과 하카니의 가장 소중한 인질이 됐다.
버그달은 현역병으로서 그의 안전은 미 국방부의 중대한 문제였다. 그러나 미군은 파키스탄에 들어갈 수 없었다. 국제법과 외교적 필요성 때문에 구출 임무는 백악관의 지시에 따라 CIA나 특수부대가 수행해야 했다.
국방부에서 애머린의 팀은 철저한 조사에 착수했다. 그는 지난 6월 상원 청문회에서 “인질구출 노력이 4년간 실패한 이유는 관련된 모든 정부 기관을 조율하는 사령탑이 없기 때문이었다”고 말했다. “조사 결과 아무도 구출하려 하지 않는 민간인 인질도 파키스탄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래서 그들도 우리 임무에 포함시켰다.”
그 마지막 요점은 뼈 있는 지적이었다. 애머린이 말한 ‘아무도’는 해외에서 납치된 미국 시민을 책임지는 기관인 FBI였다. 애머린의 팀은 FBI의 손이 닿지 않는 중앙아시아에서 미군이 10여 년에 걸쳐 확보한 방대한 정보망에 접근할 수 있었다.
그의 팀은 주요 목표 3가지를 정했다. 실행 가능한 포로교환 방안을 강구하고, 탈레반을 협상테이블로 다시 불러오며, 미국 정부의 잘못된 인질구출 정책을 수정하는 것이었다. 첫째와 둘째 목표에선 진전이 이뤄졌다. 미군 정보국은 버그달과 민간인 인질이 억류자에게 부담이 됐다고 보고했다. 지난해 봄 국방부의 한 관리는 AP 통신에 탈레반이 미군 인질과 관련해 협상 의사를 타진해왔다고 말했다. 그러나 연방 기관들은 다른 쪽으로 일을 진행했다. 때로는 은밀하게 때로는 목적이 상충되는 방식이었다. 결국 아무런 성과가 없었다.
헌터 의원은 오바마 대통령에게 보낸 청원서에 이렇게 썼다. “국방부, 미군 중부 사령부, 합참본부, 미군 특수전 사령부, 국무부, CIA, FBI, 국가안보국(NSA) 등이 전부 이 작전에 개입했다. 모든 기관의 조율과 협력이 필수적이다.”
헌터 의원의 청원에도 그런 조율과 협력이 전혀 이뤄지지 않자 애머린의 팀은 독자적으로 일을 추진했다. 미국 연방 교도소에서 종신형을 살고 있는 탈레반 소속 마약 두목 하지 바시르 누르자이와 인질 7명 모두를 교환하는 협상을 계속했다.
헌터 의원은 그 협상을 적극 지지했다. 그는 백악관과 헤이글 국방장관에게 “버그달 석방을 위한 모든 계획을 주도하기에 가장 적합한 부서는 국방부”라고 조언했다. 국무부와 국방부 관리들은 헌터 의원에게 양 부서가 “긴밀하게 협력하고 상호 보완하겠다”며 진행 상황을 알려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약속은 곧바로 잊혀졌다. 탈레반에 훨씬 유리한 조건으로 버그달이 5월 31일 석방됐을 때 헌터 의원은 사전 통보를 받지 못했다. 미국 정부는 누르자이 대신 관타나모 수용소에 수감된 탈레반 포로 5명을 석방했다. 그중 2명은 사령관급이었다.
정치적 초점이 석방된 탈레반 포로가 제기할 수 있는 위협에 맞춰지면서 애머린과 헌터 의원이 처음부터 제기했던 문제는 주목 받지 못했다. 파키스탄에 민간인 6명이 억류돼 있으며, 그들의 운명을 손에 쥔 FBI는 파키스탄에서 인질구출 작전을 수행할 자원도 법적 권한도 없다.
버그달 교환의 파문에도 백악관과 FBI는 점증하는 세계적 인질위기 소식을 감추기에 급급했다. 2012년 말과 2013년 초 미국인 여러 명이 내전으로 파괴된 시리아에서 취재하고 구호 작업을 하다가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에 억류됐다. 인질 사건이 증가하면서 중동으로 번지자 미국에서 관료주의 수렁도 더 커졌다.
지난해 5월 시사잡지 애틀랜틱의 소유주 데이비드 브래들리는 IS에 잡힌 인질의 부모를 자신의 집으로 초청했다. 브래들리는 정부의 관료주의를 헤쳐나가도록 그들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주간지 뉴요커의 로렌스 라이트 기자가 쓴 기사에 따르면 정부 요원들이 브래들리와 인질 가족을 계속 방해했다. 국무부 관리들은 테러단체와 대화한 그들을 기소하겠다고 위협했다(사실 FBI도 은밀히 IS와 대화를 시도했다). 정부 기관들이 인질구출보다 영역다툼에 집착하면서 인질 가족들은 좌절했다.
특히 FBI의 보복심이 강했다. 라이트 기자는 인질의 페이스북 프로필을 바꿀 수 없다고 주장한 FBI의 무능부터 인질 부모에게 상충되는 정보를 전달한 것까지 다양한 문제를 들춰냈다. 정부 외부에서 제시된 해결책은 아무리 좋아도 무시됐다.
지난해 12월 백악관은 인질구출 정책의 총체적인 재검토를 지시했고 애머린 중령의 상원 청문회 증언 2주 후 정책 개정을 발표했다. “정부의 인질사건 대응, 특히 인질 가족과의 소통에서 많은 개선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백악관은 브래들리 같은 독립적인 중재자 같은 외부의 도움을 허용하고 ‘민간 차원에서 인질범과의 대화’를 처음 허용했다. 그러나 인질 석방을 위해 몸값을 지불하지 않는다는 방침은 그대로 유지됐다. 정부는 몸값을 지불하는 민간인을 기소할 권한을 갖고 있다. 하지만 미국 정부는 은밀하게 파키스탄부터 필리핀까지 테러단에 몸값을 지불해왔다.
백악관은 헌터 의원의 지적 중 일부를 수용해 해외 인질구출을 위한 정부기관간의 통합 기구를 설립하기로 했다. 그러나 그 기구는 FBI 본부에 설치될 예정이다. 헌터 의원은 “겉치레에 불과한 개혁”이라고 말했다. “미국 인질정책과 관련된 논란은 FBI에서 시작해 FBI에서 계속될 뿐이다.” 헌터 의원은 애머린 중령이 현재 겪는 곤경의 배후도 FBI라고 주장했다. “영역 침범에 대한 FBI의 보복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례가 제이슨 애머린 미 육군 중령이다.”
상원은 아프가니스탄전의 영웅 애머린 중령이 왜 갑자기 ‘반역자’로 낙인 찍혔는지 FBI와 미 육군에 답변을 요구하고 있다. 육군의 조사 결과를 불문하고 버그달 병장이 풀려나면서 애머린 중령은 주어진 임무를 완수했다. 애머린 중령과 헌터 의원의 노력으로 미흡하지만 정부 기관들을 아우르는 통합 기구가 설립돼 남은 인질을 안전하게 석방시킬 가능성도 커졌다.
2001년 11월 초 애머린과 그의 팀이 아프가니스탄 남부에서 전투를 준비할 때 그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실제 적보다 상부 지휘계통과 싸워야 하는 것을 더 걱정해야 하는 ‘빌어먹을’ 전쟁이다.’ 14년 뒤인 지금도 그 전쟁은 계속된다.
애머린 중령은 상원 청문회 증언에서 “시스템이 망가졌다는 내 지적이 옳지 않은가?”라고 물었다. 그는 자신이 처한 곤경이 알려지면서 미군 장병들과 자신이 가르친 웨스트포인트 출신 장교들의 지지가 쇄도했다고 말했다. “그들이 전쟁에 나가면 난 그들의 안위가 걱정됐다. 하지만 지금은 그들이 워싱턴에 있는 내 안위를 걱정한다.”
- MICHAEL AMES NEWSWEEK 기자 /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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