터키의 ‘숨은 전쟁’
터키의 ‘숨은 전쟁’
베타트(16, 신분 노출을 우려해 성은 밝히지 않았다)는 전쟁의 상흔 탓에 애늙은이 같다. 여름방학 동안 총격전과 폭탄테러가 없었다면 간호사가 되기 위해 지금쯤 학교로 돌아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지금 돌로 쌓은 임시 바리케이드 곁의 길모퉁이에서 서성인다. 뒷편 골목 벽엔 총알로 패인 흔적으로 가득하고 스프레이 페인트로 그린 쿠르드족 분리독립 영웅들의 초상과 혁명을 상징하는 소련식 붉은 별이 선명하다. 바리케이드 너머의 거리에선 중년의 가게 주인들이 하루 전 경찰의 총격으로 산산이 부서진 유리창 잔해를 쓸어낸다.
베다트는 “정부가 이 부근에는 감히 못 들어온다”고 말했다. “우리가 이곳을 해방구로 선포했다.”
이곳은 시리아가 아니라 터키 동남부의 최대 도시 디야르바키르다. 2000만 명에 이르는 터키 쿠르드족의 수도격이다. 지난 7월 말부터 디야르바키르의 유서 깊은 수리치 구역에선 주민 5만 명이 높은 바리케이드 뒤에서 생활한다. 터키 정부의 손이 못 미치는 곳이다.
디야르바키르만 그런 게 아니다. 친쿠르드족 매체 디클레 통신(DIHA)에 따르면 터키 정부는 동남부 지역에서 최소한 17개 도시의 통제권을 잃었다. 지난 10주 동안 산발적인 전투로 터키 보안군 120명 이상, 쿠르드족 민병대 350명 이상(터키 정부의 추산)이 사망했다. 지난 10월 10일엔 수도 앙카라의 친쿠르드족 평화시위 동안 터키 최악의 폭탄테러가 발생해 최소한 97명이 목숨을 잃었다.
불행의 씨앗은 역사에 있다. 이슬람 수니파에 속하는 쿠르드족은 고유 언어와 문자를 가졌지만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국과 터키가 자치 약속을 저버리고 소수민족으로 전락시켰다. 현재 터키에 약 2000만 명, 이란에 800만 명, 이라크에 700만 명, 시리아에 2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다야르바키르 부근의 작은 도시 실반에서 활동하는 쿠르드계 반군단체 쿠르드노동자당(PKK) 소속의 페르만 아메드 같은 프로 게릴라들에겐 전쟁 목표가 분명하다. 그는 “쿠르디스탄 통일을 이룰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쿠르드족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넓은 산악지대로 터키 동남부와 이란 서북부, 이라크 동북부와 시리아 동북부에 걸쳐 있다). “우리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 그러나 최근의 극심한 폭력사태에 휘말린 쿠르드족 주민 대다수에겐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 실반에서 수학교사로 일하는 오즈구르는 “우린 터키에서 독립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터키인과 동등한 권리를 원할 뿐이다. 공포에 떨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고 싶다.”
몇 달 전만해도 터키 정부와 쿠르드족은 평화협상을 곧 타결할 듯했다. 지난 40년 동안 PKK는 터키 정부군과 전쟁을 벌여 4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를 불렀지만 근년 들어 새로 생긴 온건노선의 쿠르드계 정당 인민민주당(HDP)은 쿠르드족 주민에게 총알 대신 투표로 싸울 것을 촉구했다. 지난 2월 터키 정부는 HDP 대표단을 이스탄불의 웅장한 돌마바체 궁전에 초청해 공식 협상을 시작했다. PKK도 무장해제에 응할 수 있다는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터키 정부는 하급 반군 대원들을 사면하고 터키 동남부의 붕괴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대규모 투자도 계획했다.
그러나 휴전 2년 후인 지금 다시 전투가 벌어지면서 터키의 넓은 지역이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1990년대 유혈 사태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PKK는 시가전을 피하고 대부분 산악지대에서만 활동했다. 하지만 지금은 놀랍게도 무장 반군이 터키 여러 도시의 거리를 순찰한다. 그런 곳은 터키 경찰만이 아니라 기자들도 출입할 수 없다(반군은 터키 기자 대다수를 불신한다). 지난 9월처럼 경찰이 PKK 거점을 대대적으로 공격할 때를 제외하곤 대부분 보도조차 되지 않는다. 터키 내부에 ‘숨은 전쟁’이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정치적 야심 탓이 크다. 그는 2002년 정권을 잡았을 땐 쿠르드족의 친구를 자처하며 그들의 권리를 옹호했다. 터키 국수주의 비판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쿠르드어 방송과 쿠르드어 교육을 허용했다. 또 자신이 정치적인 이슬람주의자로서 쿠르드족과 마찬가지로 이전까지 터키 정부의 박해를 받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2011년 디야르바키르의 유세 연설에서 “여러분의 형제인 나도 시를 낭송한 죄로 징역을 살았다”고 말했다(실제로 그는 한 공공집회에서 이슬람 시를 인용한 뒤 체포돼 9개월 투옥된 적이 있다). “국가 시스템이 쿠르드족 형제들에게 고통을 안겼다는 사실을 잘 안다. 강압적인 통합 정책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그러자 쿠르드족 주민은 그가 이끄는 이슬람주의 정당 정의개발당(AKP)을 전폭 지지했다. 그해 총선에서 AKP는 쿠르드족이 다수인 주의 의석 38석 중 26석을 차지했다. 2012년엔 터키 정부가 PKK 설립자 압둘라 오칼란(1999년 체포된 이래 마르마라해의 작은 감옥섬에 홀로 갇혀 있었다)과 막후 협상도 개시했다.
그러나 시리아 내전이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지난해 상황이 급변했다. 시리아 정부가 힘을 잃자 그곳의 쿠르드족은 터키 국경 지역에 사실상의 해방구를 설치했다. 지난해 10월 시리아의 쿠르드족 도시 코바니가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에 포위되자 에르도안 대통령은 터키의 쿠르드족이 동족을 도우러 넘어가지 못하도록 국경을 봉쇄하려 했다.
시리아의 쿠르드족 민병대는 미군의 대규모 공중 지원 덕분에 코바니를 사수했지만 도시가 폐허로 변하고 주민 20만 명 이상이 터키로 탈출하면서 에르도안 대통령과 쿠르드족 사이의 신뢰가 무너졌다. 쿠르드족 유권자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AKP를 저버리고 카리스마 강한 젊은 당수 셀라하틴 데미르타스가 이끄는 HDP를 지지했다.
지난여름 쿠르드족 정치인들은 터키 보안기관들이 IS와 내통해 시리아의 쿠르드족을 공격한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게다가 지난 10월 10일 HDP가 주최한 앙카라의 평화시위에서 치명적인 폭탄테러가 발생하면서 불신의 골은 더 깊어졌다. 격분한 데미르타스 당수는 터키 정부를 테러 배후로 지목하며 “손에 피를 묻힌 살인자들”이라고 맹비난했다.
지난 6월 총선에서 HDP는 13%의 득표율로 쿠르드계 정당으로선 처음 의회에 진출했다. 반면 AKP는 2002년 이래 처음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터키의 진보 진영(친유럽 세속파로 2013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주도해 이스탄불 게지 공원을 몇 주 동안 점거하면서 정부와 대치했다)은 AKP의 장기 집권을 막으려면 HDP가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 터키 정부의 우선순위가 뒤바뀌었다. 라마잔 페크고즈 DIHA 편집장은 “정부의 정책이 쿠르드족 끌어안기에서 HDP 파괴로 돌변했다”고 말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평화협상보다 집권 유지를 최우선으로 삼는다. AKP가 총선에서 패하자 그가 전쟁을 일으켰다.”
총선이 끝난 지 몇 주만에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PKK가 터키 보안군을 공격해 수십 명을 사살했다. 그 보복으로 보안군은 PKK 동조자로 의심되는 주민을 공격했다. PKK 소속으로 실반에서 반군을 이끄는 아메드는 “우리 쿠르드족은 정체성과 문화, 언어를 지키려고 지난 40년 동안 싸웠다”고 말했다. “우리 조국은 4부분으로 쪼개졌다. 시리아 북부의 로야바는 현재 해방됐다. 이제 쿠르디스탄의 북부를 해방시키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공격을 시작한 건 아니다. 터키의 국가 시스템이 우리를 공격했다. 우리는 진정 평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그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쿠르드족의 해방구 선언은 오히려 AKP에 득이 될지 모른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의회의 과반 의석을 되찾을 생각으로 오는 11월 조기 총선을 선언했다. 만약 쿠르드족이 투표를 거부하면 HDP의 득표율이 10% 아래로 떨어져 의석 전부를 잃을 수 있다. PKK는 공격 받으면 방어하겠지만 총선 때까지 먼저 공격하진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터키 정부가 안전을 이유로 쿠르드족의 투표 참여를 막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다.
그 결과에 따라 단기적이 될 수도 있지만 HDP의 의회 진출은 6000만 명의 터키인과 소수민족 쿠르드족 간의 관계 정상화에 청신호를 보냈을 뿐 아니라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적 술책도 막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02년 집권 이래 중대한 정치적 도전에 직면하면 늘 총선을 실시했다. 세속주의를 지향하는 군부가 도전할 때나 사법부가 AKP의 이슬람주의 법제정을 막으려 했을 때가 대표적이다. 터키인은 총선 때마다 AKP를 지지해 과반 의석을 만들어줬다. 그 대가로 에르도안 대통령은 국민에게 안정과 번영을 안겼다. 터키는 국내총생산(GDP)이 10년 만에 3배로 늘었고 지역 강국의 지위를 누린다.
동시에 에르도안 대통령은 갈수록 권위주의적이 됐다. 현재 그는 대통령 권한 확대를 위한 개헌에 집착한다(그 때문에 이번 조기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 확보를 간절히 원한다). 게다가 터키는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투옥된 기자가 많다. 지난 9월 초 PKK 공격으로 터키 보안군 30명이 사살되자 AKP의 사주를 받은 폭도가 몽둥이를 들고 반정부 노선 신문 휴리예트의 사무실을 습격해 ‘반역한’ 기자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휴리예트의 세다트 에르긴 편집장은 “공포와 민주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여 그들과 맞섰다. 그가 당국에 보호를 요청하자 경찰은 오히려 그 신문의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쿠르드족 사이에선 폭력이 유일한 답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다. 1980년 16세의 나이로 체포돼 20년 동안 옥살이를 한 살리 세즈긴은 “쿠르드족이 터키 정부에서 얻어낸 양보는 전부 다 투쟁과 피의 산물이었다”고 말했다. “정부가 자발적으로 우리에게 양보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는 사형을 선고 받고 계속 처형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중에 그는 교도소의 열악한 상황에 항의해 단식 투쟁과 분신으로 자살한 PKK 순교자들과 함께 수감생활을 했다. 교도소에서 글을 배운 세즈긴은 그 경험을 책 2권으로 펴냈다. 그는 “투쟁을 포기하면 패배자가 된다는 사실을 감옥에서 배웠다”며 “끝까지 싸우는 사람만이 승리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준다. 쿠르드족이 얻은 정치적 양보는 평화협상과 휴전, 건설적인 타협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PKK의 순교 미화와 숭배, 체게바라 식의 카리스마적 상징주의는 뿌리가 너무 깊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쪽이든 정치인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폭력을 동원한다면 베다트 같은 청소년이 아버지가 쓰던 소총만이 아니라 해묵은 피해의식으로 무장한 채 길모퉁이에서 배회하는 비극이 계속될 것이다.
- OWEN MATTHEWS NEWSWEEK 기자 / 번역 이원기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베다트는 “정부가 이 부근에는 감히 못 들어온다”고 말했다. “우리가 이곳을 해방구로 선포했다.”
이곳은 시리아가 아니라 터키 동남부의 최대 도시 디야르바키르다. 2000만 명에 이르는 터키 쿠르드족의 수도격이다. 지난 7월 말부터 디야르바키르의 유서 깊은 수리치 구역에선 주민 5만 명이 높은 바리케이드 뒤에서 생활한다. 터키 정부의 손이 못 미치는 곳이다.
디야르바키르만 그런 게 아니다. 친쿠르드족 매체 디클레 통신(DIHA)에 따르면 터키 정부는 동남부 지역에서 최소한 17개 도시의 통제권을 잃었다. 지난 10주 동안 산발적인 전투로 터키 보안군 120명 이상, 쿠르드족 민병대 350명 이상(터키 정부의 추산)이 사망했다. 지난 10월 10일엔 수도 앙카라의 친쿠르드족 평화시위 동안 터키 최악의 폭탄테러가 발생해 최소한 97명이 목숨을 잃었다.
불행의 씨앗은 역사에 있다. 이슬람 수니파에 속하는 쿠르드족은 고유 언어와 문자를 가졌지만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연합국과 터키가 자치 약속을 저버리고 소수민족으로 전락시켰다. 현재 터키에 약 2000만 명, 이란에 800만 명, 이라크에 700만 명, 시리아에 200만 명 정도가 살고 있다.
다야르바키르 부근의 작은 도시 실반에서 활동하는 쿠르드계 반군단체 쿠르드노동자당(PKK) 소속의 페르만 아메드 같은 프로 게릴라들에겐 전쟁 목표가 분명하다. 그는 “쿠르디스탄 통일을 이룰 때까지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쿠르드족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넓은 산악지대로 터키 동남부와 이란 서북부, 이라크 동북부와 시리아 동북부에 걸쳐 있다). “우리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 그러나 최근의 극심한 폭력사태에 휘말린 쿠르드족 주민 대다수에겐 문제가 그리 간단치 않다. 실반에서 수학교사로 일하는 오즈구르는 “우린 터키에서 독립하기를 원치 않는다”고 말했다. “터키인과 동등한 권리를 원할 뿐이다. 공포에 떨지 않고 정상적으로 살고 싶다.”
몇 달 전만해도 터키 정부와 쿠르드족은 평화협상을 곧 타결할 듯했다. 지난 40년 동안 PKK는 터키 정부군과 전쟁을 벌여 4만 명 이상의 인명 피해를 불렀지만 근년 들어 새로 생긴 온건노선의 쿠르드계 정당 인민민주당(HDP)은 쿠르드족 주민에게 총알 대신 투표로 싸울 것을 촉구했다. 지난 2월 터키 정부는 HDP 대표단을 이스탄불의 웅장한 돌마바체 궁전에 초청해 공식 협상을 시작했다. PKK도 무장해제에 응할 수 있다는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터키 정부는 하급 반군 대원들을 사면하고 터키 동남부의 붕괴된 경제를 되살리기 위한 대규모 투자도 계획했다.
그러나 휴전 2년 후인 지금 다시 전투가 벌어지면서 터키의 넓은 지역이 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1990년대 유혈 사태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도 PKK는 시가전을 피하고 대부분 산악지대에서만 활동했다. 하지만 지금은 놀랍게도 무장 반군이 터키 여러 도시의 거리를 순찰한다. 그런 곳은 터키 경찰만이 아니라 기자들도 출입할 수 없다(반군은 터키 기자 대다수를 불신한다). 지난 9월처럼 경찰이 PKK 거점을 대대적으로 공격할 때를 제외하곤 대부분 보도조차 되지 않는다. 터키 내부에 ‘숨은 전쟁’이다.
무엇이 잘못됐을까? 레제프 타이이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정치적 야심 탓이 크다. 그는 2002년 정권을 잡았을 땐 쿠르드족의 친구를 자처하며 그들의 권리를 옹호했다. 터키 국수주의 비판자들의 반대를 무릅쓰고 쿠르드어 방송과 쿠르드어 교육을 허용했다. 또 자신이 정치적인 이슬람주의자로서 쿠르드족과 마찬가지로 이전까지 터키 정부의 박해를 받았다고 강조했다. 그는 2011년 디야르바키르의 유세 연설에서 “여러분의 형제인 나도 시를 낭송한 죄로 징역을 살았다”고 말했다(실제로 그는 한 공공집회에서 이슬람 시를 인용한 뒤 체포돼 9개월 투옥된 적이 있다). “국가 시스템이 쿠르드족 형제들에게 고통을 안겼다는 사실을 잘 안다. 강압적인 통합 정책의 시대는 이제 끝났다.”
그러자 쿠르드족 주민은 그가 이끄는 이슬람주의 정당 정의개발당(AKP)을 전폭 지지했다. 그해 총선에서 AKP는 쿠르드족이 다수인 주의 의석 38석 중 26석을 차지했다. 2012년엔 터키 정부가 PKK 설립자 압둘라 오칼란(1999년 체포된 이래 마르마라해의 작은 감옥섬에 홀로 갇혀 있었다)과 막후 협상도 개시했다.
그러나 시리아 내전이 갈수록 치열해지면서 지난해 상황이 급변했다. 시리아 정부가 힘을 잃자 그곳의 쿠르드족은 터키 국경 지역에 사실상의 해방구를 설치했다. 지난해 10월 시리아의 쿠르드족 도시 코바니가 급진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에 포위되자 에르도안 대통령은 터키의 쿠르드족이 동족을 도우러 넘어가지 못하도록 국경을 봉쇄하려 했다.
시리아의 쿠르드족 민병대는 미군의 대규모 공중 지원 덕분에 코바니를 사수했지만 도시가 폐허로 변하고 주민 20만 명 이상이 터키로 탈출하면서 에르도안 대통령과 쿠르드족 사이의 신뢰가 무너졌다. 쿠르드족 유권자는 에르도안 대통령의 AKP를 저버리고 카리스마 강한 젊은 당수 셀라하틴 데미르타스가 이끄는 HDP를 지지했다.
지난여름 쿠르드족 정치인들은 터키 보안기관들이 IS와 내통해 시리아의 쿠르드족을 공격한다고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게다가 지난 10월 10일 HDP가 주최한 앙카라의 평화시위에서 치명적인 폭탄테러가 발생하면서 불신의 골은 더 깊어졌다. 격분한 데미르타스 당수는 터키 정부를 테러 배후로 지목하며 “손에 피를 묻힌 살인자들”이라고 맹비난했다.
지난 6월 총선에서 HDP는 13%의 득표율로 쿠르드계 정당으로선 처음 의회에 진출했다. 반면 AKP는 2002년 이래 처음 과반 의석 확보에 실패했다. 터키의 진보 진영(친유럽 세속파로 2013년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주도해 이스탄불 게지 공원을 몇 주 동안 점거하면서 정부와 대치했다)은 AKP의 장기 집권을 막으려면 HDP가 유일한 희망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룻밤 사이 터키 정부의 우선순위가 뒤바뀌었다. 라마잔 페크고즈 DIHA 편집장은 “정부의 정책이 쿠르드족 끌어안기에서 HDP 파괴로 돌변했다”고 말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평화협상보다 집권 유지를 최우선으로 삼는다. AKP가 총선에서 패하자 그가 전쟁을 일으켰다.”
총선이 끝난 지 몇 주만에 폭력사태가 벌어졌다. PKK가 터키 보안군을 공격해 수십 명을 사살했다. 그 보복으로 보안군은 PKK 동조자로 의심되는 주민을 공격했다. PKK 소속으로 실반에서 반군을 이끄는 아메드는 “우리 쿠르드족은 정체성과 문화, 언어를 지키려고 지난 40년 동안 싸웠다”고 말했다. “우리 조국은 4부분으로 쪼개졌다. 시리아 북부의 로야바는 현재 해방됐다. 이제 쿠르디스탄의 북부를 해방시키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우리가 공격을 시작한 건 아니다. 터키의 국가 시스템이 우리를 공격했다. 우리는 진정 평화를 위해 노력했지만 그들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쿠르드족의 해방구 선언은 오히려 AKP에 득이 될지 모른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의회의 과반 의석을 되찾을 생각으로 오는 11월 조기 총선을 선언했다. 만약 쿠르드족이 투표를 거부하면 HDP의 득표율이 10% 아래로 떨어져 의석 전부를 잃을 수 있다. PKK는 공격 받으면 방어하겠지만 총선 때까지 먼저 공격하진 않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터키 정부가 안전을 이유로 쿠르드족의 투표 참여를 막을 수도 있다는 우려가 있다.
그 결과에 따라 단기적이 될 수도 있지만 HDP의 의회 진출은 6000만 명의 터키인과 소수민족 쿠르드족 간의 관계 정상화에 청신호를 보냈을 뿐 아니라 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치적 술책도 막을 수 있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된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2002년 집권 이래 중대한 정치적 도전에 직면하면 늘 총선을 실시했다. 세속주의를 지향하는 군부가 도전할 때나 사법부가 AKP의 이슬람주의 법제정을 막으려 했을 때가 대표적이다. 터키인은 총선 때마다 AKP를 지지해 과반 의석을 만들어줬다. 그 대가로 에르도안 대통령은 국민에게 안정과 번영을 안겼다. 터키는 국내총생산(GDP)이 10년 만에 3배로 늘었고 지역 강국의 지위를 누린다.
동시에 에르도안 대통령은 갈수록 권위주의적이 됐다. 현재 그는 대통령 권한 확대를 위한 개헌에 집착한다(그 때문에 이번 조기 총선에서 과반수 의석 확보를 간절히 원한다). 게다가 터키는 세계에서 중국 다음으로 투옥된 기자가 많다. 지난 9월 초 PKK 공격으로 터키 보안군 30명이 사살되자 AKP의 사주를 받은 폭도가 몽둥이를 들고 반정부 노선 신문 휴리예트의 사무실을 습격해 ‘반역한’ 기자들을 죽이겠다고 위협했다. 휴리예트의 세다트 에르긴 편집장은 “공포와 민주주의는 공존할 수 없다”여 그들과 맞섰다. 그가 당국에 보호를 요청하자 경찰은 오히려 그 신문의 ‘대통령 명예훼손’ 혐의를 조사하기 시작했다.
쿠르드족 사이에선 폭력이 유일한 답이라는 생각이 뿌리 깊다. 1980년 16세의 나이로 체포돼 20년 동안 옥살이를 한 살리 세즈긴은 “쿠르드족이 터키 정부에서 얻어낸 양보는 전부 다 투쟁과 피의 산물이었다”고 말했다. “정부가 자발적으로 우리에게 양보한 것은 하나도 없다.” 그는 사형을 선고 받고 계속 처형된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중에 그는 교도소의 열악한 상황에 항의해 단식 투쟁과 분신으로 자살한 PKK 순교자들과 함께 수감생활을 했다. 교도소에서 글을 배운 세즈긴은 그 경험을 책 2권으로 펴냈다. 그는 “투쟁을 포기하면 패배자가 된다는 사실을 감옥에서 배웠다”며 “끝까지 싸우는 사람만이 승리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말이 틀렸다는 것을 알려준다. 쿠르드족이 얻은 정치적 양보는 평화협상과 휴전, 건설적인 타협의 산물이었다. 하지만 PKK의 순교 미화와 숭배, 체게바라 식의 카리스마적 상징주의는 뿌리가 너무 깊어 좀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어느 쪽이든 정치인들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폭력을 동원한다면 베다트 같은 청소년이 아버지가 쓰던 소총만이 아니라 해묵은 피해의식으로 무장한 채 길모퉁이에서 배회하는 비극이 계속될 것이다.
- OWEN MATTHEWS NEWSWEEK 기자 / 번역 이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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