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처업계, 트로트 시장을 닮았다?
벤처업계, 트로트 시장을 닮았다?
네이버·카카오의 아성을 넘을 스타 벤처는 이제 더 이상 나오지 않는 것일까? 벤처 버블 붕괴 후 괄목할만한 벤처기업이 부재한 원인과 대응 방안을 찾아봤다. 만약, 이미자·나훈아·조용필·혜은이·소방차 등이 지금도 가장 인기 많은 ‘스타’라면 가요계와 음악산업은 어떻게 됐을까? 트로트 시장을 보면 쉽게 짐작된다. 1980년대 중·후반은 트로트 르네상스 시대였다. 현철·송대관·태진아·주현미·설운도는 당대의 최고 스타였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 트로트 시장은 급격히 침체됐다. 이들의 계보를 이을 스타가 없었기 때문이다. 2000년대 들어 장윤정·박현빈·홍진영 등이 트로트 스타의 명맥을 잇고 있지만 아무래도 역부족이다. 반면 일반 가요계는 이선희·서태지와 아이들·김건모·신승훈·HOT·GOD·빅뱅·소녀시대·엑소 등이 슈퍼스타의 계보를 이으며 시장을 키웠다.
한국 벤처업계는 어디에 가까울까? 오래전부터 벤처업계에선 “벤처 1·2세대를 뛰어넘을 스타 CEO가 보이지 않는다”는 넋두리가 흘러나왔다. 과장이 아니다. 벤처업계 관계자들에게 ‘요즘 가장 잘나가는 벤처 CEO가 누구냐?’고 물으면 대개는 답을 주저하거나 겨우 한두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벤처업계의 현실이다. 과거엔 달랐다. 흔히 벤처산업은 정부 육성책으로 성장했다고 말하지만, 벤처를 키운 것은 8할이 걸출한 스타 CEO들이었다. 1980년대로 돌아가 보자. 이범천·이민화·조현정·이용태·정문술·김익래·장흥순·변대규…. 이들은 벤처기업인이면 누구나 인정하는 ‘벤처의 전설’로 통한다. 벤처라는 말조차 생소했던 1980년대, 이들은 ‘무서운 아이들’로 불렸다.
‘젊은 엔지니어들이 꿈을 불사르고 있는 이들 젊은 기업들은 일반 중소기업에 비해 3배 빠른 성장속도로 질주, 산업계 곳곳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들 기술기업들은 1980년 이후 전자·정밀화학 등 첨단분야에서 벤처(모험) 산업시대의 도래를 예고해 주고 있다. … (중략)… 이들 기술집약기업들은 과거 기술 외적인 요인들에 의해 자라왔던 기업풍토와 달리 젊음과 두뇌를 밑천으로 삼고 전력질주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점의 하나다.’
1983년 초 한 경제신문에 실린 기사 중 일부다. 젊음·꿈·두뇌·돌풍…. 1인당 국민소득이 1500달러 수준이던 시절, 벤처의 등장은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이들은 1997년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기 십 수년 전에 이미 한국경제에 벤처 비즈니스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 무녀리는 큐닉스컴퓨터라는 회사였다. 카이스트 전산공학박사 1호인 이범천 대표가 1981년 후배 4명과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 있는 낡은 주택에 세들어 만든 회사였다. 일하는 방식은 새로웠다.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고 20평짜리 방에서 먹고 자는 벤처의 전형 그대로였다. 큐닉스는 1981년 말 8비트컴퓨터, 1982년 16비트컴퓨터, 한글·영문 워드프로세서 개발에 성공하며 설립 1년 만에 흑자를 냈고, 1996년에는 매출 1300억원대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범천 대표가 후배에게 경영을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난 1997년 큐닉스는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부도를 내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범천 대표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한 번 뿌려진 씨앗은 무서운 기세로 퍼졌다. 1983년에는 인하대 전자공학과에 재학 중이던 조현정 대표가 소프트웨어 전문기업인 비트컴퓨터를 설립했다. 비트컴퓨터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2만9000여 명의 성화 봉송자의 인적사항과 구역별 성화 이동 위치를 컴퓨터로 확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 이범천 대표, 김종길 삼보트라이젬 대표와 함께 ‘한국 컴퓨터의 새별’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조현정 회장은 현재도 비트컴퓨터를 이끌면서 한국소트트웨어협회장을 맡고 있다. 1985년에는 이민화라는 걸출한 스타가 등장했다. 당시 32세로 카이스트에 재학 중이던 이민화 대표가 설립한 메디슨은 초음파진단기 국산화와 수출에 성공하며 벤처의 대명사로 불렸다. 이민화 대표는 제품 개발만큼 인재 육성에도 힘을 썼다. 지금까지 메디슨 출신이 창업한 벤처만 100여 곳에 달한다. 이민화 대표는 이후 벤처기업협회 초대 회장을 맡았고 현재는 카이스트 초빙교수와 창조경제연구회 이사장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청년들만 벤처 비즈니스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서 18년간 일했던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은 1983년 40대 중반 나이에 반도체 장비 검사업체인 미래산업을 창업했다. 미래산업은 일취월장하며 미국 나스닥 시장에도 상장했다. 1999년 미국 라이코스와 함께 라이코스코리아라는 조인트벤처를 설립한 정 전 회장은 2001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 카이스트에 500여 억원을 기부하는 등 벤처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한국에 퍼스널컴퓨터 시대를 연 주인공으로 꼽히는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 역시 창업 당시 나이가 40대 후반이었다. 삼보는 1980년대 말 매출 1000억원을 돌파했고 2000년에는 4조원을 넘어섰다. 하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 후유증으로 2005년 부도가 났다. 이후 이용태 전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현재는 차남인 이홍선 대표가 삼보컴퓨터의 뿌리를 이어가고 있다. 벤처 태동기로 불리는 1980년대에는 이 밖에도 김익래(다우기술)·김광태(퓨처시스템)·장흥순(터보테크)·정철(휴먼컴퓨터)·변대규(휴맥스) 등 벤처 스타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1990년대는 그야말로 벤처의 황금기였다. 벤처 생태계가 본격적으로 형성되기 시작한 것도 이때다. 1990년 6월 1일 인터넷 전용선을 통해 처음으로 미국과 인터넷이 연결됐다. 1993년에는 한국통신이 인터넷 상용화 서비스에 들어갔고, 1996년에는 코스닥 시장이 개설됐다. 이듬해에는 벤처특별법이 제정됐다. 1980년대 선배들을 보며 꿈을 꿨던 ‘벤처 키즈’들은 이런 환경에서 대중적인 인기를 끌며 수퍼스타로 부상했다. 1989년 서울대 컴퓨터동아리 선후배와 함께 한글 워드프로세서인 ‘아래아 한글’을 개발한 이찬진 현 포티스 대표는 1990년 한글과 컴퓨터를 창업했다. 이찬진 대표는 1996년 당시 국내 최고 여배우였던 김희애씨와 결혼해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이 밖에도 1990년대 초에는 김형순(로커스)·박병엽(팬택)·김광수(두인전자)·홍성범(세원텔레콤)·안영경(핸디소프트)·장영승(나눔기술)·김장중(이스트소프트)·오상수(새롬기술)·허진호(아이네트) 등 다양한 하드·소프트웨어 벤처들이 줄줄이 등장했고 관련 업계에 파란을 일으켰다.
벤처 창업 열기가 절정에 달한 것은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다. 코스닥 시장 개설을 전후로 국내에는 ‘벤처 군단’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신생 벤처가 급증했다. 벤처군단 앞의 길을 열어준 것은 인터넷이었다. 이때 선배 세대를 뛰어 넘는 스타 벤처 CEO가 대거 등장했고, 지금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의사이면서 국내 처음으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인 ‘V3’를 개발한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가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한 게 1995년이다. 이때를 전후로 연예인 못지 않은 주목을 받은 벤처 CEO는 손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다. 서울대 공대 86학번 동기로 각각 네이버와 한게임을 창업한 후 2000년 NHN으로 합병한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과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을 비롯해 이재웅(다음)·김택진(엔씨소프트)·김정주(넥슨)·송병준(게임빌) 등이 대거 등장했다. 이들뿐 아니다. 나성균·박인환(네오위즈)·박흥호(나모인터렉티브)·이성민(엠텍비전)·김영삼(아이러브스쿨)·전제완(프리첼)·이동형(싸이월드)·이성민(엠텍비전)·남민우(다산네트웍스)·황철주(주성엔지니어링)·김동연(텔슨전자)·황기수(코아로직)·박성찬(다날)·양덕준(레인콤)·이철상(VK)·박지영(컴투스)·김병관(솔루션 홀딩스, 현 웹젠 대표)·박관호(위메이드)·민동진(멜파스) 등 열거하기 힘든 스타 CEO들이 벤처 중흥을 이끌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테헤란밸리에서는 개도 수표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뜨거웠던 시절은 2001년 코스닥 버블 붕괴와 벤처기업인이 연루된 각종 ‘게이트’가 터지면서 한순간에 막을 내렸다. 스타 벤처들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준 코스닥 시장은 2000년 초 2800포인트를 돌파한 후 급전직하했다. 1999~2000년 사이에 주가가 2만% 오른 리타워텍, 9000% 급등한 한국디지털라인을 비롯해 새롬기술·터보테크·골드뱅크·장미디어 등이 대부분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정현준(한국 디지탈라인)·장흥순(터보테크)·오상수(새롬기술) 등은 영어의 몸이 됐고, 김진호(골드뱅크)·김정률(그라비티)·김형순(로커스)·장성익(3R) 등은 횡령과 배임·주가조작·분식회계 혐의를 받으며 지탄의 대상이 됐다. 2002년 정부가 벤처 건전화 대책을 발표하고, 2003년 코스닥 시장 퇴출 요건이 강화되면서 화려했던 벤처 붐은 꺼졌다. ‘벤처=비리·거품’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벤처는 더 이상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스타도 사라졌다. 실제로 2003년 이후 거의 10년간 벤처업계에는 새로운 별이 떠오르지 않았다. 벤처기업협회 관계자는 “이때를 점잖게는 조정기 또는 침체기로 분류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암흑기였다”고 말했다.
그 사이 벤처업계는 절대 강자가 시장을 독식하는 구조로 변했다. 정부는 벤처기업이 3만 개를 돌파했다며 자랑하지만, 벤처 생태계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진단하는 벤처기업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젊은이들의 창업가 정신은 실종됐고 벤처 산업을 지탱할 유능한 인력 유입도 미흡했다. 또한 민간 벤처캐피털(VC)에서 투자를 받은 벤처가 10개 중 1개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벤처의 질도 떨어졌다. 한 번 실패하면 재기하기 힘든 환경도 여전하다.
그나마 최근엔 희망의 빛이 보인다. 1990년대 중후반 인터넷 혁명과 정부의 파격적 지원, 뜨거운 창업 열기가 섞여 이뤄낸 벤처 붐과 비슷한 환경이 조성되고 있다. 특히 2010년 이후 스마트폰이 대중화되면서 소셜 네트워크서비스(SNS)를 기반으로 한 스타 벤처도 속속 등장하고 있다. 관련 업계에선 3세대 벤처 스타로 2014년 세콰이아캐피탈과 블랙록으로부터 4억 달러를 투자받고, 지난해 손정의 소프트뱅크 회장에게서 10억 달러 투자를 이끌어낸 김범석 쿠팡 대표를 첫 손에 꼽는다. 이 밖에도 배달음식 검색 및 주문 서비스인 ‘배달의 민족’으로 유명한 김봉진 우아한형제들 대표와 이정웅(선데이토즈)·김가람(더블유게임즈)·김세중(젤리버스)·이원영(제니퍼소프트)·박병열(헬로네이처) 등이 벤처 스타의 명맥을 잇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1~2세대의 아성을 넘보기에는 역부족이다. 대중적인 인지도도 그렇고 새로운 장르를 연 걸출한 스타도 아직 보이지 않는다. 이와 관련 1세대 벤처기업인인 이민화 카이스트 교수는 “한국 벤처가 양적으로 많이 성장했다지만 우물 안 개구리”라며 “글로벌 시장에서 활약하는 스타 CEO가 등장해야 더 많은 젊은이가 벤처의 꿈을 꾸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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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벤처업계는 어디에 가까울까? 오래전부터 벤처업계에선 “벤처 1·2세대를 뛰어넘을 스타 CEO가 보이지 않는다”는 넋두리가 흘러나왔다. 과장이 아니다. 벤처업계 관계자들에게 ‘요즘 가장 잘나가는 벤처 CEO가 누구냐?’고 물으면 대개는 답을 주저하거나 겨우 한두 사람의 이름이 나온다. 벤처업계의 현실이다.
수퍼스타 사라진 벤처업계
‘젊은 엔지니어들이 꿈을 불사르고 있는 이들 젊은 기업들은 일반 중소기업에 비해 3배 빠른 성장속도로 질주, 산업계 곳곳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이들 기술기업들은 1980년 이후 전자·정밀화학 등 첨단분야에서 벤처(모험) 산업시대의 도래를 예고해 주고 있다. … (중략)… 이들 기술집약기업들은 과거 기술 외적인 요인들에 의해 자라왔던 기업풍토와 달리 젊음과 두뇌를 밑천으로 삼고 전력질주하고 있는 것이 두드러진 점의 하나다.’
1983년 초 한 경제신문에 실린 기사 중 일부다. 젊음·꿈·두뇌·돌풍…. 1인당 국민소득이 1500달러 수준이던 시절, 벤처의 등장은 신선하고 충격적이었다. 이들은 1997년 ‘벤처기업육성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제정되기 십 수년 전에 이미 한국경제에 벤처 비즈니스라는 새로운 장르를 열었다. 무녀리는 큐닉스컴퓨터라는 회사였다. 카이스트 전산공학박사 1호인 이범천 대표가 1981년 후배 4명과 서울 동대문구 신설동에 있는 낡은 주택에 세들어 만든 회사였다. 일하는 방식은 새로웠다. 출퇴근 시간이 따로 없고 20평짜리 방에서 먹고 자는 벤처의 전형 그대로였다. 큐닉스는 1981년 말 8비트컴퓨터, 1982년 16비트컴퓨터, 한글·영문 워드프로세서 개발에 성공하며 설립 1년 만에 흑자를 냈고, 1996년에는 매출 1300억원대의 중견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러나 이범천 대표가 후배에게 경영을 맡기고 일선에서 물러난 1997년 큐닉스는 외환위기의 파고를 넘지 못하고 부도를 내며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이범천 대표는 미국으로 이민을 가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
하지만 한 번 뿌려진 씨앗은 무서운 기세로 퍼졌다. 1983년에는 인하대 전자공학과에 재학 중이던 조현정 대표가 소프트웨어 전문기업인 비트컴퓨터를 설립했다. 비트컴퓨터는 1988년 서울 올림픽 때 2만9000여 명의 성화 봉송자의 인적사항과 구역별 성화 이동 위치를 컴퓨터로 확인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개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이듬해에는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에 이범천 대표, 김종길 삼보트라이젬 대표와 함께 ‘한국 컴퓨터의 새별’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되기도 했다. 조현정 회장은 현재도 비트컴퓨터를 이끌면서 한국소트트웨어협회장을 맡고 있다. 1985년에는 이민화라는 걸출한 스타가 등장했다. 당시 32세로 카이스트에 재학 중이던 이민화 대표가 설립한 메디슨은 초음파진단기 국산화와 수출에 성공하며 벤처의 대명사로 불렸다. 이민화 대표는 제품 개발만큼 인재 육성에도 힘을 썼다. 지금까지 메디슨 출신이 창업한 벤처만 100여 곳에 달한다. 이민화 대표는 이후 벤처기업협회 초대 회장을 맡았고 현재는 카이스트 초빙교수와 창조경제연구회 이사장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청년들만 벤처 비즈니스에 뛰어든 것은 아니었다.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에서 18년간 일했던 정문술 전 미래산업 회장은 1983년 40대 중반 나이에 반도체 장비 검사업체인 미래산업을 창업했다. 미래산업은 일취월장하며 미국 나스닥 시장에도 상장했다. 1999년 미국 라이코스와 함께 라이코스코리아라는 조인트벤처를 설립한 정 전 회장은 2001년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후 카이스트에 500여 억원을 기부하는 등 벤처인의 존경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한국에 퍼스널컴퓨터 시대를 연 주인공으로 꼽히는 이용태 전 삼보컴퓨터 회장 역시 창업 당시 나이가 40대 후반이었다. 삼보는 1980년대 말 매출 1000억원을 돌파했고 2000년에는 4조원을 넘어섰다. 하지만 무리한 사업 확장 후유증으로 2005년 부도가 났다. 이후 이용태 전 회장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고, 현재는 차남인 이홍선 대표가 삼보컴퓨터의 뿌리를 이어가고 있다. 벤처 태동기로 불리는 1980년대에는 이 밖에도 김익래(다우기술)·김광태(퓨처시스템)·장흥순(터보테크)·정철(휴먼컴퓨터)·변대규(휴맥스) 등 벤처 스타들이 잇따라 등장했다.
1990년대 벤처 황금기 연 스타 CEO들
벤처 창업 열기가 절정에 달한 것은 199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다. 코스닥 시장 개설을 전후로 국내에는 ‘벤처 군단’이라는 말이 나올 만큼 신생 벤처가 급증했다. 벤처군단 앞의 길을 열어준 것은 인터넷이었다. 이때 선배 세대를 뛰어 넘는 스타 벤처 CEO가 대거 등장했고, 지금도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의사이면서 국내 처음으로 컴퓨터 바이러스 백신인 ‘V3’를 개발한 안철수 국민의당 공동대표가 안철수연구소를 설립한 게 1995년이다. 이때를 전후로 연예인 못지 않은 주목을 받은 벤처 CEO는 손으로 꼽기 어려울 정도다. 서울대 공대 86학번 동기로 각각 네이버와 한게임을 창업한 후 2000년 NHN으로 합병한 이해진 네이버 이사회 의장과 김범수 카카오 이사회 의장을 비롯해 이재웅(다음)·김택진(엔씨소프트)·김정주(넥슨)·송병준(게임빌) 등이 대거 등장했다. 이들뿐 아니다. 나성균·박인환(네오위즈)·박흥호(나모인터렉티브)·이성민(엠텍비전)·김영삼(아이러브스쿨)·전제완(프리첼)·이동형(싸이월드)·이성민(엠텍비전)·남민우(다산네트웍스)·황철주(주성엔지니어링)·김동연(텔슨전자)·황기수(코아로직)·박성찬(다날)·양덕준(레인콤)·이철상(VK)·박지영(컴투스)·김병관(솔루션 홀딩스, 현 웹젠 대표)·박관호(위메이드)·민동진(멜파스) 등 열거하기 힘든 스타 CEO들이 벤처 중흥을 이끌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테헤란밸리에서는 개도 수표를 물고 다닌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뜨거웠던 시절은 2001년 코스닥 버블 붕괴와 벤처기업인이 연루된 각종 ‘게이트’가 터지면서 한순간에 막을 내렸다. 스타 벤처들에게 엄청난 부를 안겨준 코스닥 시장은 2000년 초 2800포인트를 돌파한 후 급전직하했다. 1999~2000년 사이에 주가가 2만% 오른 리타워텍, 9000% 급등한 한국디지털라인을 비롯해 새롬기술·터보테크·골드뱅크·장미디어 등이 대부분 몰락의 길을 걸었다. 정현준(한국 디지탈라인)·장흥순(터보테크)·오상수(새롬기술) 등은 영어의 몸이 됐고, 김진호(골드뱅크)·김정률(그라비티)·김형순(로커스)·장성익(3R) 등은 횡령과 배임·주가조작·분식회계 혐의를 받으며 지탄의 대상이 됐다. 2002년 정부가 벤처 건전화 대책을 발표하고, 2003년 코스닥 시장 퇴출 요건이 강화되면서 화려했던 벤처 붐은 꺼졌다. ‘벤처=비리·거품’이라는 인식이 퍼지면서 벤처는 더 이상 동경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렇게 스타도 사라졌다. 실제로 2003년 이후 거의 10년간 벤처업계에는 새로운 별이 떠오르지 않았다. 벤처기업협회 관계자는 “이때를 점잖게는 조정기 또는 침체기로 분류하는데 엄밀히 말하면 암흑기였다”고 말했다.
그 사이 벤처업계는 절대 강자가 시장을 독식하는 구조로 변했다. 정부는 벤처기업이 3만 개를 돌파했다며 자랑하지만, 벤처 생태계가 제대로 돌아가고 있다고 진단하는 벤처기업인은 찾아보기 힘들다. 젊은이들의 창업가 정신은 실종됐고 벤처 산업을 지탱할 유능한 인력 유입도 미흡했다. 또한 민간 벤처캐피털(VC)에서 투자를 받은 벤처가 10개 중 1개에도 미치지 못할 만큼 벤처의 질도 떨어졌다. 한 번 실패하면 재기하기 힘든 환경도 여전하다.
3만 개 넘었지만 절대강자가 시장독식
- 김태윤 기자 pin2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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