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천장에서 꽃들이 비처럼 내려와

천장에서 꽃들이 비처럼 내려와

영국의 설치미술가 레베카 루이스 로, 구리선에 꿴 꽃들을 천장에서 늘어뜨린 ‘공중정원’으로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 극대화시켜
지난 8월 막을 내린 미국 샌프란시스코 챈드런 갤러리의 ‘뷰티 오브 디케이’ 전시회 광경.
영국의 설치미술가 레베카 루이스 로(35)는 10대 시절 어느 여름에 있었던 일을 잊지 못한다. 당시 케임브리지셔의 한 대저택에서 정원사로 일하던 그녀의 아버지는 어느날 온 가족을 데리고 집에서 가까운 펜랜드 들판으로 갔다. 하늘하늘한 옥스아이 데이지 꽃이 들판 가득 피어 있었던 걸로 봐서 6월 말이나 7월 초쯤이었다.

“난 꽃에 관심이 없었다”고 로가 런던 동부에 있는 자신의 작은 갤러리에서 말했다. “당시 난 남자친구를 사귈 나이였다. 원예나 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아버지와 여동생은 데이지 꽃의 사진을 찍었고 어머니는 그림을 그렸지만 로는 사춘기 특유의 부루퉁한 표정으로 들판 한가운데 우두커니 앉아 있었다.

그런데 그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그곳에 앉아 있다 보니 식구들은 간데 없고 사방이 데이지 꽃 천지였다. ‘세상에, 놀라워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버지에게 듣기로는 들판이 그렇게 꽃으로 가득 차는 날은 연중 하루나 이틀뿐이다. 그때의 인상이 어찌나 강렬했던지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그때의 감동을 어떻게 재현할 수 있을까? 어떻게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게 됐다.”

로는 오랫동안 가슴 속에 간직해온 그 순간의 감동을 최근 전시회를 통해 사람들과 나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챈드런 갤러리에서 열린 ‘뷰티 오브 디케이(The Beauty of Decay) 전’에서 관람객들은 천장에서 바닥까지 내려오는 반짝이는 구리선 사이를 헤치고 다녔다. 그 구리선에는 거베라와 장미, 스타티스 꽃송이 8000개가 달려 있었다.

로는 2003년부터 꽃을 이용한 3차원 작품을 제작해 왔다. 생화를 대량으로 사서 유급 조수들을 동원해 꽃송이 하나하나를 구리선에 꿰었다. 꽃을 이용한 그녀의 전시회는 샌프란시스코에서처럼 꽃이 가득 매달린 구리선을 천장에서 늘어뜨리는 경우가 많다. 그 사이를 걷다 보면 천상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선이 더 빽빽하게 밀집된 경우엔 마치 세상이 뒤집혀 거꾸로 된 초원 아래를 걷는 기분이다.

구리선에 매달린 꽃들은 서서히 마르면서 죽어간다. ‘양귀비 꽃’처럼 붉은색과 오렌지색, 노란색이 크림색, 황갈색, 담홍색으로 바랜다. 작품의 주안점이 색채에서 형태로, 생생하고 피상적인 생명에서 좀 더 깊이 있고 견고한 구조로 자연스럽게 옮겨간다. 말하자면 피부 밑의 해골 같은 형태라고 할까?

전시회가 끝나면 꽃들을 구리선에서 떼어내 무산성(acid-free) 용지에 싸서 보관했다가 다시 사용한다. “버려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로가 말했다. “모든 게 내 기록보관소에 보관된다.”

지난 8월 25일 영국 남서부 레시워스 가든 시의 브로드웨이 갤러리에서 개막한 전시회는 이 기록보관소에 보관된 작품들로 구성됐다. 6주일 동안 계속되는 이 전시회에서는 기존 작품들과 그동안 그녀가 수집한 꽃들을 모두 모아 만든 새 설치 작품을 선보인다. 오는 12월엔 그녀가 ‘아트 바젤’에 출품했던 설치 작품이 ‘아트 바젤 마이애미’로 자리를 옮겨 전시된다.

내년 초 로는 다른 6명의 국제 미술가와 함께 덴마크 순회전시회에 참여한다. 유럽연합(EU)이 ‘2017 유럽의 문화 수도’로 선정한 덴마크 오르후스 시가 주최하는 프로그램의 일부다. 로의 꽃 전시회는 런던 빅토리아 앤 알버트 박물관과 뉴욕 타임스 스퀘어에서도 열렸었다. 호주 멜버른의 한 쇼핑몰 지붕에는 무려 10만 송이의 꽃으로 이뤄진 반영구적 작품이 설치됐다. 그녀의 전시회 사상 최대 규모다. “이 작품은 당초 10년 간 전시를 목표로 설치됐다”고 그녀는 말했다.
런던 시티 센터에 설치된 ‘시티 가든’(2016).
로의 스튜디오는 그녀의 집이기도 하다. 빅토리아 시대 초기에 지어진 가옥을 개조한 건물들이 늘어선 이 구역에는 갤러리와 멋진 빈티지 의류점, 24시간 편의점 등이 들어섰다. 게다가 이 길에는 런던에서 가장 유명한 일요 꽃시장이 있다. 로의 남편은 매주 일요일이면 그녀에게 꽃을 한 다발씩 사다 주는데 꽃꽂이는 그의 몫이다. 벽돌로 된 건물 전면은 진열장에 전시된 작품들이 돋보이도록 검은색 페인트로 칠했다. 지난 8월 초에는 거꾸로 매달린 짙은 청색 수국이 진열장을 가득 메웠다.

안으로 들어가면 갤러리 벽에 로가 사진가 톰 하트포드와 함께 제작한 작품들이 걸려 있다. 얀 데 헤엠, 암브로시우스 보스하르트, 발타사르 판 데르 아스트 등 네덜란드 황금시대 화가들의 정물화를 재현한 작품들로 꽃 사이에 현대 의상을 입은 작은 조각상을 놓아두는 등 파격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방 한가운데를 거의 다 차지한 테이블에서는 여자 4명이 구리선에 오렌지색 밀짚꽃을 꿰어 그 선들을 ‘나이키’라고 쓰인 종이상자 안에 담았다. 나이키의 주문으로 제작 중인 작품이다. 의류업계에서 로의 작품을 가장 먼저 이용한 쪽은 고급 패션하우스다(패션은 자연의 명품 브랜드인 꽃을 사랑한다). 에르메스는 2011년 런던 로열 오페라 하우스 ‘플로랄 홀’의 유리 지붕을 장식할 꽃을 로에게 주문했다(유명 브랜드가 신인 예술가를 무시한다는 생각을 가졌다면 버려라. 에르메스는 온라인에서 ‘꽃을 이용한 미술’을 검색해 로를 찾아냈다).

로가 처음으로 꽃을 작품에 이용한 건 2003년 뉴캐슬대학에서 미술 공부를 할 때였다. “음식과 사탕, 모직 원단, 꽃 등을 이용한 3D 회화 작품을 계획했다”고 그녀는 말했다. “당시 난 꽃을 꽃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뭐든 팔레트로 이용할 수 있는 재료를 찾고 있었다.”

그녀는 작품이 잘 안 풀려 고심하던 중에 여름 방학을 맞아 집에 갔다. 아버지의 모판에 화려한 색상의 큰 다알리아 꽃이 잔뜩 심겨져 있었다. “내가 아버지에게 ‘이 꽃들이 예쁘게 잘 마를 것 같으냐?’고 묻자 아버지는 ‘그렇다’며 ‘아주 예쁘게 마른다’고 대답했다”고 로는 전했다. “그래서 9월에 학교로 돌아갈 때 자동차 한가득 다알리아 꽃을 싣고 갔다.”

다알리아 꽃송이를 낚싯줄에 꿰는 데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그 낚싯줄들을 정사각형 형태로 배열해 학교의 설치 공간 천장에 매달았다. “공중에 그림을 그린 것 같았다. 관람객과 작품 사이의 상호작용을 지켜보면서 거기엔 색채를 뛰어넘는 뭔가가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그토록 집착하던 색채가 그렇게 중요한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보다는 인간과 자연의 상호작용과 점차 물기가 말라가면서 완전히 다른 재질로 변하는 꽃의 변신이 더 중요하게 느껴졌다.”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녀가 어린 시절 펜랜드 들판에서 받은 감동을 다른 사람들과 공유할 수 있었다.
2015년 런던의 첼시 꽃 박람회에 출품된 ‘초원’.
로의 아버지는 일찌감치 딸에게 미술에 대한 영감과 재료 선택의 아이디어를 불어넣어줬을 뿐 아니라 미술품 수집의 세계로 그녀를 안내했다. 그녀는 네덜란드 황금시대의 정물화에 특히 관심이 많았다. 로는 그 그림들이 ‘시간을 포착했다’는 점에 매료됐다. 그 작품들은 매우 인공적인 구도로 그려졌다. 화병에 꽃을 되는대로 꽃아 그 자리에서 재빨리 그린 반 고흐와는 정반대다. 꽃과 과일의 조합이 계절에 맞지 않고 불균형하다. 로는 그 작품들을 재현하다가 균형을 맞추기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거기 그려진 꽃들은 중력을 무시한다.

요즘 로는 작품에 쓸 꽃 대부분을 네덜란드에서 사들인다. 지구 환경을 생각해 그 해에 지나치게 많이 생산돼 남아도는 품종을 구입할 때가 많다. 네덜란드 화훼 산업의 규모는 엄청나서 그녀가 멜버른에서 설치 작업을 할 때도 암스테르담에서 꽃을 들여오는 게 환경에 더 이롭지 않을까 생각했을 정도다. 하지만 결국 호주 현지에서 생산된 꽃 15만 송이를 사용했다.

로의 작품 약 90%가 공공장소에 설치된 대형 작품이다. 하지만 그녀의 갤러리에 가면 그런 작품들의 한정판 컬러 사진(장당 약 1500파운드)을 구입할 수 있다. 그녀는 또 개인 주문도 받는다. 3000~8000파운드 정도의 가격으로 집에 그녀의 작품을 설치할 수 있다. 가격이 수천 파운드나 하는 꽃 설치 작품이 시들기 시작할 때 불만을 표한 사람은 지금까지 한 명도 없었다. ‘꽃이 시드는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것을 잠깐 보고 버리는 게 아니라 평생 감상할 수 있는 아름다운 조각 재료로 인식하게 해준다’는 로의 주장을 받아들였기 때문인 듯하다. 로는 챈드런 전시회의 관람객들이 작품을 보고 매우 즐거워했다고 말했다. “사람들은 꽃 사이를 걸으면서 ‘아!’ 하고 감탄사를 터뜨리곤 했다.”

로는 이런 즐거움을 더 퍼뜨리는 게 꿈이다. 그녀는 런던 테이트 모던 미술관의 터빈홀을 사람들이 집 정원에서 꺾어 기증한 꽃으로 채우고자 한다. 그 거대한 공간에 가득 찬 아름다운 꽃들을 보며 즐거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들판에서 꽃에 넋을 잃고 앉아 있던 그 10대 소녀가 기쁘지 않겠는가?

- 이사벨라 로이드 뉴스위크 기자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비상계단 몰래 깎아"...대구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

2"올림픽 휴전? 러시아만 좋은 일"...젤렌스키, 제안 거부

3일론 머스크, 인도네시아서 '스타링크' 서비스 출범

4취업 준비하다 봉변...日 대학생 인턴, 10명 중 3명 성희롱 피해

5주유소 기름값 또 하락...내림세 당분간 이어질 듯

6아이폰 더 얇아질까..."프로맥스보다 비쌀 수도"

7 걸그룹 '뉴진스', 모든 멤버 법원에 탄원서 제출

8 尹 "대한민국은 광주의 피·눈물 위 서 있어"

9성심당 월세 '4억' 논란...코레일 "월세 무리하게 안 올려"

실시간 뉴스

1"비상계단 몰래 깎아"...대구 아파트에서 일어난 일

2"올림픽 휴전? 러시아만 좋은 일"...젤렌스키, 제안 거부

3일론 머스크, 인도네시아서 '스타링크' 서비스 출범

4취업 준비하다 봉변...日 대학생 인턴, 10명 중 3명 성희롱 피해

5주유소 기름값 또 하락...내림세 당분간 이어질 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