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큼 다가온 ‘미래 금융’] 내가 바로 움직이는 은행이다
[성큼 다가온 ‘미래 금융’] 내가 바로 움직이는 은행이다
화폐·동전 사라지고 말만으로 송금... 보안 좌우할 바이오인증 발전 거듭
100여년 간 별 다른 변화가 없었던 한국인의 금융생활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앞두고 있다. 핀테크와 정보통신기술(ICT)의 발전에 따라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혁신적인 금융환경이 속속 마련되고 있다. 한마디로 ‘미래 금융’이 목전에 도래한 상황이다. 화폐 없는 세상?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미래 금융’의 모습은 어떤 것이고, 우리 곁에 얼마나 가깝게 다가왔는지 진단해본다. 미혼의 회사원 박모씨는 일찌감치 기상했다. 자취생활 중인 그는 출근 준비를 마친 후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삼각김밥과 우유 등 1700원어치의 물품을 구입한 후 2000원과 교통카드를 내밀었다. 편의점 직원은 잔돈 300원을 교통카드에 충전시켜준 후 박씨에게 돌려줬다. 출근길 전철 안에서 지인의 아버지 장례식이 있다는 사실이 떠오른 박씨는 스마트폰을 꺼내 지인과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은 후 문자메시지로 조의금을 송금했다. 돈을 보내고 있자니 정작 자신의 전세 계약금을 아직 보내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다. 재차 스마트폰을 꺼내 눈동자를 맞춰 홍채인증을 하고 거래은행 인터넷뱅킹으로 수천만원의 계약금을 보냈다. 직장에서 박씨의 첫 업무는 거래처에 결제대금을 보내는 일이었다.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으로 대금 처리를 했다. 적지 않은 대금을 지급해 잔고가 바닥나자 박씨는 회계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비트코인을 충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눈여겨본 주가연계증권(ELS) 상품에 가입하기 위해 그 상품을 판매하는 증권사 계좌를 개설했다. 스마트폰 영상통화를 통해 증권사 측에 자신의 얼굴과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자 계좌는 쉽게 개설됐다. 앞서 가입했다가 조기에 환급받은 ELS 가입액은 크라우드펀딩 업체를 통해 시중금리보다 높은 이자를 받고 빌려주기로 했다. 가까운 미래에 도래할 한국인의 금융생활을 가상으로 꾸며본 내용이다. 모두 이미 우리 생활에서 현실화했거나 구체적인 연구가 시작돼 조만간 현실화할 내용들이다. 19세기 말 최초의 근대 은행이 설립된 이후 100여년 간 별 다른 변화가 없었던 한국인의 금융생활은 가장 큰 변화를 앞두고 있다. 한마디로 ‘미래 금융’이 목전에 도래한 셈이다.
가장 큰 틀의 변화는 수천년의 역사를 지닌 화폐 경제가 막을 내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주역은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디지털통화(Digital Currency)다. 디지털통화는 거래의 매개체 또는 가치저장 수단 등으로 사용되는 디지털 단위를 말한다. 금전적 가치가 현물화폐가 아닌 전자적 형태로 저장되고, 경우에 따라 화폐를 대신해 활용된다. 중앙은행이나 금융회사 등 공인기관이 발행하지 않는다는 특징도 있다. 가상화폐(Virtual currency)나 암호화화폐(Crypto-currency)로 불리기도 한다.
대표적인 디지털통화가 비트코인이다. 2009년 1월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가명의 개발자가 개발한 글로벌 디지털 가상 화폐다. 현재 전체 디지털통화 시가총액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비트코인 개발자는 올해 5월에서야 호주의 사업가 겸 컴퓨터 공학자인 크레이그 스티븐 라이트(47)으로 밝혀졌다. 비트코인은 디지털 통화의 대명사다. 사람들은 아직도 디지털 통화 자체를 비트코인으로 통칭하곤 한다. 비트코인의 뒤를 이어 이 더리움(Ethereum)·라이트코인(Litecoin) 등 유사한 방식디지털통화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디지털통화는 700여개에 달한다. 한국에서의 디지털통화 거래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비트코인 거래소 중 거래 규모가 큰 상위 3개사의 지난해 1월~올해 10월 중 거래량은 1조5064억원이며, 올해 월평균 거래량은 지난해보다 6% 정도 증가했다.
화폐 없는 사회의 도래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지만 ‘동전 없는 사회’는 다르다. 이미 구체적인 그림이 나오기 시작했고 동전 없는 사회의 원형으로 볼 만한 서비스가 개시됐다. 한국은행은 동전 없는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시범사업의 첫 단계로 내년 상반기부터 편의점에서 잔돈을 선불식 교통카드에 충전해주는 서비스를 시작하기로 했다. 편의점에서 현금으로 상품을 산 후 거스름돈이 발생하면 이를 동전으로 돌려받는 대신, 교통카드에 충전해 돌려받는다는 얘기다. 이게 현실화하면 소비자들은 거스름돈을 동전으로 받아 주머니에 보관해야 하는 불편을 줄일 수 있고, 한은은 매년 수백억원에 달하는 동전 제조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된다. 한은은 일단 편의점과 교통카드로 시범사업을 시행한 후 범위를 점차 확대해나갈 방침이다. 시범사업 시행 후 성과가 좋으면 거스름돈을 교통카드뿐만 아니라 신용카드에 충전해주거나 본인의 은행 계좌에 직접 송금해주는 방식도 추진할 예정이다. 대상 업종도 편의점뿐 아니라 소액 결제가 많아 잔돈이 많이 발생하는 약국이나 대형마트 등으로 확대할 방침이다. 한은이 예상하는 시범사업 종료 시점은 2020년. 불과 4년 후면 상당한 수준의 ‘동전 없는 사회’가 도래할 수 있다는 얘기다. 이미 민간에서는 동전 없는 사회의 맹아가 싹터있다. 국민은행이 11월 초부터 전국 영업점에서 고객이 현금으로 공과금 등을 납부한 후 생기는 거스름돈을 고객 계좌에 입금해주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잔돈을 네이버페이 등의 포인트로 돌려주는 편의점들도 적지 않다.
화폐 없는 사회와 동전 없는 사회의 토대는 이미 마련돼 있다. 한국은 최근 들어 현금 사용이 줄어들고 신용카드를 비롯한 전자결제 수단의 이용이 급격히 늘어난 국가다. 한국은행이 전국의 성인 남녀 2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인이 가장 많이 이용한 지급수단은 신용카드로 전체(건수 기준)의 39.7%를 차지했다. 전년의 31.4%에서 급격히 증가하며 현금을 추월했다. 이와 달리 현금은 2014년 38.9%에서 2015년 36.0%로 크게 줄었다. 금액 기준으로 보면 격차는 더 확연하다. 현금은 29.0%에 불과했고 신용카드는 40%(40.7%)를 돌파했다. 점점 현금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은 사회가 되고 있다는 의미다.
간편결제와 간편송금 서비스 역시 화폐 없는 사회의 도래를 앞당길 신무기다. 간편결제 서비스는 모바일·온라인 등에서 공인인증서나 카드번호를 입력하지 않고 편리하게 결제하는 기능을 말한다. 중국 알리바바의 간편결제 서비스인 알리페이의 급성장은 한국에서의 간편결제 열풍을 몰고 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분기 말 현재 스마트폰에 기반한 간편결제 이용실적은 하루 평균 81만 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2.9% 폭증했다. 간편결제로 거래되는 금액도 하루 평균 207억원으로, 지난해 2분기보다 53.3% 늘어났다.
개별 업체별로는 네이버의 네이버페이가 160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하면서 승승장구하고 있고, 원조격인 카카오페이도 1300만 명이라는 만만치 않은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간편결제의 대중화를 불러온 건 역시 삼성페이다. 온라인·모바일 기반의 서비스인 네이버페이 등과 달리 하드웨어 기반의 간편결제 시스템인 삼성페이는 삼성 스마트폰의 대중성과 결제 방식의 범용성 덕택에 빠른 속도로 확산했다.
스마트폰을 활용한 간편송금서비스는 10월 말 기준으로 이미 12개 은행이 도입했다. 상대방의 계좌번호를 몰라도 스마트뱅킹 애플리케이션(앱)에 상대방의 휴대전화 번호나 이름만 입력하면 공인인증서 없이 간편하게 송금할 수 있다. 간편송금은 비금융권에서도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카카오톡의 카카오페이 송금은 선불 형태로 미리 충전한 금액 내에서 대화 상대방에게 바로 돈을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이다.
최근엔 간편송금이 더욱 진화하고 있다. KEB하나은행은 문자메시지로 받는 사람과 송금 금액을 은행 대표번호로 전송하면 자동으로 고객이 지정한 계좌로 송금되는 ‘텍스트뱅킹’을 내놨다. 스마트폰 뱅킹 로그인이나 보안매체, 공인인증서 등을 통해 별도의 인증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송금이 가능하다. 대부분의 간편송금 시스템이 하루 30만~50만원으로 제한돼 있는데 반해 이 문자뱅킹은 하루에 300만원까지 송금할 수 있다.
말로 송금하는 시대도 곧 도래할 전망이다. 우리은행은 자사 스마트뱅킹 메신저인 위비톡 대화창에서 음성을 활용해 송금을 하는 방식의 간편송금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대화창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스마트폰에 대고 ‘누구에게 몇만원 보내줘’라고 말한 후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송금이 이뤄지는 형태다. 우리은행은 이르면 내년 1월 중에 이 시스템을 선보일 계획이다. 집이 은행화하는 ‘홈뱅킹 시대’도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예전처럼 은행 창구를 찾아가 은행원이나 자동화기기와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된다. 대표적인 게 비대면 계좌 개설이다. 비대면 계좌 개설은 말 그대로 금융소비자가 예금·증권 등 상품에 가입할 때 금융사 점포를 방문하지 않고 영상통화 등의 수단을 통해 실명을 확인한 후 계좌를 개설하는 제도다. 영상통화를 통해 자신의 얼굴과 주민등록증·운전면허증 등을 보여주면 집에 앉아서도 계좌를 개설할 수 있다. 은행은 지난해 말부터, 증권사는 올해 2월부터 서비스가 시작됐다. 신한은행은 자사의 모바일 금융앱인 써니뱅크에서 여권을 인증수단으로 사용할 수 있는 비대면 계좌 개설 서비스를 개시했다. 이렇게 되면 주민등록증이 발급되지 않은 만 14세 이상의 미성년자 고객들이나 국내 거주 외국인들도 스마트폰을 통해 계좌 개설 서비스를 이용할 수 있다. 저축은행도 비대면 계좌 개설 시스템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바이오인증도 금융의 신세계를 열어줄 신무기다. 대표적인 게 홍채인증 시스템이다. 우리은행·KEB하나은행·신한은행 등 주요 시중은행은 이미 삼성전자와 손을 잡고 모바일 뱅킹에 홍채인증을 도입했다. 홍채인증이 가능한 갤럭시노트7의 출시에 발맞춘 조치였다. 예상 밖의 노트7 단종 사태가 터지면서 현재 홍채인증 시스템의 확산에는 제동이 걸린 상태다. 하지만 내년 출시 예정인 삼성전자의 갤럭시S8이나 LG전자의 최고급 휴대폰인 G6에 홍채인증 시스템이 담길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조만간 활력을 되찾을 전망이다. 금융정보화추진협의회가 최근 바이오정보 분산관리 표준을 제정한 것도 홍채인증 등 바이오인증 확산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인다. 금융결제원은 연내에 분산관리센터를 활용할 금융회사를 모집하고 센터를 시험 운영한 후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바이오인증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분산관리 체제가 도입되면 바이오인증의 보안성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분산관리 표준에 따르면 바이오 정보 금융거래를 하는 고객의 홍채 등 바이오 정보를 두 개로 분할해서 각각 금융회사와 분산관리 센터에 보관하다가 거래할 때 합쳐서 인증하는 방식이 적용된다. 이에 따라 은행권 홍채인증 도입 확대에 탄력이 붙을 수 있게 될 전망이다.
크라우드펀딩은 예금·대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혁신할 수 있다. 그동안에는 은행이나 금융사에서만 돈을 빌리고 맡길 수 있었다. 하지만 크라우드펀딩은 업체가 대출자와 수요자를 적당한 금리로 중계해주는 시스템이다. 여윳돈을 빌려주고 싶으면 크라우드펀딩 업체에 의향을 밝히기만 하면 된다. 5000만 국민이 모두 마음만 먹으면 은행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미래 금융의 도래가 저절로 이뤄지는 건 아니다. 아직은 해결해야 할 문제도 분명히 존재한다. 디지털통화의 경우 익명성을 바탕으로 자금세탁·탈세·마약 및 무기밀매 등 불법거래에 악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미국에서는 실크로드라는 사이트가 비트코인을 이용해 마약 총기 등을 밀거래했다가 폐쇄되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에서도 유사 디지털통화를 발행한 후 불법 다단계 방식으로 판매해 370억원대 자금을 편취한 일당이 적발되기도 했다. 간편송금 시스템도 아직은 송금 가능한 금액이 적다는 한계가 있다. 홍채인증 시스템은 전술한 대로 노트7 사태 때문에 주춤한 상황이다. 100년 이상 기존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던 한국인이 하루 아침에 새로운 시스템으로 전환한다는 것도 무리가 있다.
하지만 미래 금융의 도래가 아주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세계의 흐름이 그렇다. 최근 외신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중앙은행인 스웨덴 릭스방크가 앞으로 2년 안에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스웨덴 정부는 이미 ‘화폐 없애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금을 내고 버스조차 탈 수 없고, 교회에도 헌금함 대신 카드 리더가 설치됐다. 스웨덴의 6대 주요 은행 중 5곳은 현금 취급을 중단했다. 노르웨이도 2020년까지 ‘화폐 없는 세상’을 실현하기로 했고, 덴마크도 이르면 내년부터 상거래 때 현금 거래를 금지하기로 했다. 일본은 지난 5월 비트코인 등을 결제수단으로 인정하는 자금 결제법 개정안을 만들었다. 미쓰시비도쿄 UFJ는 비트코인 거래소인 코인베이스와 전력적 제휴를 맺기도 했다. 미국 텍사스주는 비트코인을 화폐로 간주하는 판결을 냈다. 기술 발전 속도를 감안하면 우리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일 내에 미래 금융이 우리 목전에 도래해 있을 수도 있다. 건전한 미래 금융의 도래를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건 제도의 확립이다. 이미 비트코인 업계에서는 디지털통화와 관련된 제도가 없어 업계의 건전한 성장을 저해할 가능성이 있다는 우려가 나오고 있다. 정부도 11월 17일 디지털통화 제도화 태스크포스(TF)를 구성해 내년 1분기 중으로 디지털통화 관련 제도를 만들기로 했다. 우리 정부도 비트코인을 화폐로 인정하는 방안을 추진한다는 의미다.
‘미래 금융’은 산업적으로도 중요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국은 미래 금융업의 선두권이라고 볼 수 없는 상황이다. KPMG와 H2 Ventures가 매년 발표하는 ‘글로벌 핀테크 톱100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업체는 단 한 곳도 100위 이내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와 달리 중국은 8개사나 포함됐다. 심윤보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원은 “최근 중국 핀테크 급성장의 배경에는 핀테크산업에 우호적인 정책 환경이 자리잡고 있다”며 “국내 금융당국도 동 산업의 규제, 감독에만 집중하지 말고 기술 발전의 자유도를 최대한 부여하고 규제는 사후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으로 규제 패러다임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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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여년 간 별 다른 변화가 없었던 한국인의 금융생활이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앞두고 있다. 핀테크와 정보통신기술(ICT)의 발전에 따라 과거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혁신적인 금융환경이 속속 마련되고 있다. 한마디로 ‘미래 금융’이 목전에 도래한 상황이다. 화폐 없는 세상? 더 이상 불가능한 일이 아니다. ‘미래 금융’의 모습은 어떤 것이고, 우리 곁에 얼마나 가깝게 다가왔는지 진단해본다. 미혼의 회사원 박모씨는 일찌감치 기상했다. 자취생활 중인 그는 출근 준비를 마친 후 근처 편의점으로 향했다. 삼각김밥과 우유 등 1700원어치의 물품을 구입한 후 2000원과 교통카드를 내밀었다. 편의점 직원은 잔돈 300원을 교통카드에 충전시켜준 후 박씨에게 돌려줬다. 출근길 전철 안에서 지인의 아버지 장례식이 있다는 사실이 떠오른 박씨는 스마트폰을 꺼내 지인과 문자메시지를 주고받은 후 문자메시지로 조의금을 송금했다. 돈을 보내고 있자니 정작 자신의 전세 계약금을 아직 보내지 않았다는 생각이 났다. 재차 스마트폰을 꺼내 눈동자를 맞춰 홍채인증을 하고 거래은행 인터넷뱅킹으로 수천만원의 계약금을 보냈다. 직장에서 박씨의 첫 업무는 거래처에 결제대금을 보내는 일이었다. 가상화폐인 비트코인으로 대금 처리를 했다. 적지 않은 대금을 지급해 잔고가 바닥나자 박씨는 회계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비트코인을 충전해달라고 부탁했다. 퇴근 후에는 집에서 눈여겨본 주가연계증권(ELS) 상품에 가입하기 위해 그 상품을 판매하는 증권사 계좌를 개설했다. 스마트폰 영상통화를 통해 증권사 측에 자신의 얼굴과 주민등록증을 보여주자 계좌는 쉽게 개설됐다. 앞서 가입했다가 조기에 환급받은 ELS 가입액은 크라우드펀딩 업체를 통해 시중금리보다 높은 이자를 받고 빌려주기로 했다.
근대 은행 설립 100여년 만에 획기적 변화
가장 큰 틀의 변화는 수천년의 역사를 지닌 화폐 경제가 막을 내릴 수도 있다는 점이다. 주역은 ‘비트코인’으로 대표되는 디지털통화(Digital Currency)다. 디지털통화는 거래의 매개체 또는 가치저장 수단 등으로 사용되는 디지털 단위를 말한다. 금전적 가치가 현물화폐가 아닌 전자적 형태로 저장되고, 경우에 따라 화폐를 대신해 활용된다. 중앙은행이나 금융회사 등 공인기관이 발행하지 않는다는 특징도 있다. 가상화폐(Virtual currency)나 암호화화폐(Crypto-currency)로 불리기도 한다.
대표적인 디지털통화가 비트코인이다. 2009년 1월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가명의 개발자가 개발한 글로벌 디지털 가상 화폐다. 현재 전체 디지털통화 시가총액의 90%를 차지하고 있다. 비트코인 개발자는 올해 5월에서야 호주의 사업가 겸 컴퓨터 공학자인 크레이그 스티븐 라이트(47)으로 밝혀졌다. 비트코인은 디지털 통화의 대명사다. 사람들은 아직도 디지털 통화 자체를 비트코인으로 통칭하곤 한다. 비트코인의 뒤를 이어 이 더리움(Ethereum)·라이트코인(Litecoin) 등 유사한 방식디지털통화가 우후죽순처럼 늘어나고 있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현재 전 세계적으로 유통되는 디지털통화는 700여개에 달한다. 한국에서의 디지털통화 거래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비트코인 거래소 중 거래 규모가 큰 상위 3개사의 지난해 1월~올해 10월 중 거래량은 1조5064억원이며, 올해 월평균 거래량은 지난해보다 6% 정도 증가했다.
화폐 없는 사회의 도래까지는 조금 더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이지만 ‘동전 없는 사회’는 다르다. 이미 구체적인 그림이 나오기 시작했고 동전 없는 사회의 원형으로 볼 만한 서비스가 개시됐다. 한국은행은 동전 없는 사회를 구현하기 위한 시범사업의 첫 단계로 내년 상반기부터 편의점에서 잔돈을 선불식 교통카드에 충전해주는 서비스를 시작하기로 했다. 편의점에서 현금으로 상품을 산 후 거스름돈이 발생하면 이를 동전으로 돌려받는 대신, 교통카드에 충전해 돌려받는다는 얘기다. 이게 현실화하면 소비자들은 거스름돈을 동전으로 받아 주머니에 보관해야 하는 불편을 줄일 수 있고, 한은은 매년 수백억원에 달하는 동전 제조비용을 절감할 수 있게 된다.
디지털통화 입지 갈수록 탄탄해져
화폐 없는 사회와 동전 없는 사회의 토대는 이미 마련돼 있다. 한국은 최근 들어 현금 사용이 줄어들고 신용카드를 비롯한 전자결제 수단의 이용이 급격히 늘어난 국가다. 한국은행이 전국의 성인 남녀 250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조사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한국인이 가장 많이 이용한 지급수단은 신용카드로 전체(건수 기준)의 39.7%를 차지했다. 전년의 31.4%에서 급격히 증가하며 현금을 추월했다. 이와 달리 현금은 2014년 38.9%에서 2015년 36.0%로 크게 줄었다. 금액 기준으로 보면 격차는 더 확연하다. 현금은 29.0%에 불과했고 신용카드는 40%(40.7%)를 돌파했다. 점점 현금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은 사회가 되고 있다는 의미다.
간편결제와 간편송금 서비스 역시 화폐 없는 사회의 도래를 앞당길 신무기다. 간편결제 서비스는 모바일·온라인 등에서 공인인증서나 카드번호를 입력하지 않고 편리하게 결제하는 기능을 말한다. 중국 알리바바의 간편결제 서비스인 알리페이의 급성장은 한국에서의 간편결제 열풍을 몰고 왔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2분기 말 현재 스마트폰에 기반한 간편결제 이용실적은 하루 평균 81만 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82.9% 폭증했다. 간편결제로 거래되는 금액도 하루 평균 207억원으로, 지난해 2분기보다 53.3% 늘어났다.
개별 업체별로는 네이버의 네이버페이가 1600만 명의 회원을 보유하면서 승승장구하고 있고, 원조격인 카카오페이도 1300만 명이라는 만만치 않은 회원을 보유하고 있다. 간편결제의 대중화를 불러온 건 역시 삼성페이다. 온라인·모바일 기반의 서비스인 네이버페이 등과 달리 하드웨어 기반의 간편결제 시스템인 삼성페이는 삼성 스마트폰의 대중성과 결제 방식의 범용성 덕택에 빠른 속도로 확산했다.
스마트폰을 활용한 간편송금서비스는 10월 말 기준으로 이미 12개 은행이 도입했다. 상대방의 계좌번호를 몰라도 스마트뱅킹 애플리케이션(앱)에 상대방의 휴대전화 번호나 이름만 입력하면 공인인증서 없이 간편하게 송금할 수 있다. 간편송금은 비금융권에서도 쉽게 이용할 수 있다. 카카오톡의 카카오페이 송금은 선불 형태로 미리 충전한 금액 내에서 대화 상대방에게 바로 돈을 보낼 수 있는 시스템이다.
최근엔 간편송금이 더욱 진화하고 있다. KEB하나은행은 문자메시지로 받는 사람과 송금 금액을 은행 대표번호로 전송하면 자동으로 고객이 지정한 계좌로 송금되는 ‘텍스트뱅킹’을 내놨다. 스마트폰 뱅킹 로그인이나 보안매체, 공인인증서 등을 통해 별도의 인증절차를 거치지 않아도 송금이 가능하다. 대부분의 간편송금 시스템이 하루 30만~50만원으로 제한돼 있는데 반해 이 문자뱅킹은 하루에 300만원까지 송금할 수 있다.
말로 송금하는 시대도 곧 도래할 전망이다. 우리은행은 자사 스마트뱅킹 메신저인 위비톡 대화창에서 음성을 활용해 송금을 하는 방식의 간편송금 시스템을 개발하고 있다. 대화창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스마트폰에 대고 ‘누구에게 몇만원 보내줘’라고 말한 후 비밀번호를 입력하면 송금이 이뤄지는 형태다. 우리은행은 이르면 내년 1월 중에 이 시스템을 선보일 계획이다.
집이 은행이 되는 ‘홈뱅킹 시대’
바이오인증도 금융의 신세계를 열어줄 신무기다. 대표적인 게 홍채인증 시스템이다. 우리은행·KEB하나은행·신한은행 등 주요 시중은행은 이미 삼성전자와 손을 잡고 모바일 뱅킹에 홍채인증을 도입했다. 홍채인증이 가능한 갤럭시노트7의 출시에 발맞춘 조치였다. 예상 밖의 노트7 단종 사태가 터지면서 현재 홍채인증 시스템의 확산에는 제동이 걸린 상태다. 하지만 내년 출시 예정인 삼성전자의 갤럭시S8이나 LG전자의 최고급 휴대폰인 G6에 홍채인증 시스템이 담길 가능성이 크다는 전망이 나오면서 조만간 활력을 되찾을 전망이다. 금융정보화추진협의회가 최근 바이오정보 분산관리 표준을 제정한 것도 홍채인증 등 바이오인증 확산에 힘을 실어줄 것으로 보인다. 금융결제원은 연내에 분산관리센터를 활용할 금융회사를 모집하고 센터를 시험 운영한 후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바이오인증 서비스를 제공할 예정이다. 분산관리 체제가 도입되면 바이오인증의 보안성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분산관리 표준에 따르면 바이오 정보 금융거래를 하는 고객의 홍채 등 바이오 정보를 두 개로 분할해서 각각 금융회사와 분산관리 센터에 보관하다가 거래할 때 합쳐서 인증하는 방식이 적용된다. 이에 따라 은행권 홍채인증 도입 확대에 탄력이 붙을 수 있게 될 전망이다.
크라우드펀딩은 예금·대출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혁신할 수 있다. 그동안에는 은행이나 금융사에서만 돈을 빌리고 맡길 수 있었다. 하지만 크라우드펀딩은 업체가 대출자와 수요자를 적당한 금리로 중계해주는 시스템이다. 여윳돈을 빌려주고 싶으면 크라우드펀딩 업체에 의향을 밝히기만 하면 된다. 5000만 국민이 모두 마음만 먹으면 은행이 될 수 있다는 의미다.
물론 미래 금융의 도래가 저절로 이뤄지는 건 아니다. 아직은 해결해야 할 문제도 분명히 존재한다. 디지털통화의 경우 익명성을 바탕으로 자금세탁·탈세·마약 및 무기밀매 등 불법거래에 악용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미국에서는 실크로드라는 사이트가 비트코인을 이용해 마약 총기 등을 밀거래했다가 폐쇄되는 일이 벌어졌다. 한국에서도 유사 디지털통화를 발행한 후 불법 다단계 방식으로 판매해 370억원대 자금을 편취한 일당이 적발되기도 했다. 간편송금 시스템도 아직은 송금 가능한 금액이 적다는 한계가 있다. 홍채인증 시스템은 전술한 대로 노트7 사태 때문에 주춤한 상황이다. 100년 이상 기존 시스템에 익숙해져 있던 한국인이 하루 아침에 새로운 시스템으로 전환한다는 것도 무리가 있다.
하지만 미래 금융의 도래가 아주 먼 미래의 일이 아니라는 점도 부인할 수 없다. 세계의 흐름이 그렇다. 최근 외신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중앙은행인 스웨덴 릭스방크가 앞으로 2년 안에 디지털 화폐를 발행하는 것을 검토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스웨덴 정부는 이미 ‘화폐 없애기’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현금을 내고 버스조차 탈 수 없고, 교회에도 헌금함 대신 카드 리더가 설치됐다. 스웨덴의 6대 주요 은행 중 5곳은 현금 취급을 중단했다. 노르웨이도 2020년까지 ‘화폐 없는 세상’을 실현하기로 했고, 덴마크도 이르면 내년부터 상거래 때 현금 거래를 금지하기로 했다. 일본은 지난 5월 비트코인 등을 결제수단으로 인정하는 자금 결제법 개정안을 만들었다. 미쓰시비도쿄 UFJ는 비트코인 거래소인 코인베이스와 전력적 제휴를 맺기도 했다. 미국 텍사스주는 비트코인을 화폐로 간주하는 판결을 냈다. 기술 발전 속도를 감안하면 우리 예상보다 훨씬 이른 시일 내에 미래 금융이 우리 목전에 도래해 있을 수도 있다.
글로벌 핀테크 100대 기업에 한국 회사 없어
‘미래 금융’은 산업적으로도 중요하다. 하지만 아쉽게도 한국은 미래 금융업의 선두권이라고 볼 수 없는 상황이다. KPMG와 H2 Ventures가 매년 발표하는 ‘글로벌 핀테크 톱100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 업체는 단 한 곳도 100위 이내에 포함되지 않았다. 이와 달리 중국은 8개사나 포함됐다. 심윤보 하나금융경영연구소 연구원은 “최근 중국 핀테크 급성장의 배경에는 핀테크산업에 우호적인 정책 환경이 자리잡고 있다”며 “국내 금융당국도 동 산업의 규제, 감독에만 집중하지 말고 기술 발전의 자유도를 최대한 부여하고 규제는 사후적으로 적용하는 방식으로 규제 패러다임을 전환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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