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페르니쿠스 후예에게 배운다] 끊임없는 지적 호기심 ‘유럽의 실리콘밸리’로 부상
[코페르니쿠스 후예에게 배운다] 끊임없는 지적 호기심 ‘유럽의 실리콘밸리’로 부상
폴란드 차세대 산업 역군 ‘왜·어떻게’로 무장... 수많은 스타트업, 강소기업 배출 결실
“10년 전이요?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입니다.” 지난 12월 11~18일(현지시간) 폴란드 취재 중 만난 현지 관계자들은 “10년 전쯤 와봤다”는 기자의 말에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답했다. 배경에는 무섭게 성장한 폴란드 경제가 있다. 세계 11위의 경제 규모를 가진 한국은 폴란드보다 분명 앞서 있지만 미래에도 그럴 것이란 보장은 없다. 경제학자 피터 블레어 헨리는 “선진국이더라도 경제 성장이 둔화됐다면 신흥국이 빠른 성장 과정에서 보인 강점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폴란드의 고성장 비결과 한국이 놓치고 있는 부분, 도시재생사업의 순기능, 동유럽 진출 기업의 현황과 전망 등을 짚어봤다. 지난 12월 14일(이하 현지시간) 오후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 자리한 ‘코페르니쿠스 과학센터(Copernicus Science Centre)’. 약 300명의 관람객이 우주와 지구를 탐험하듯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꼬마 관람객부터 장난기 많은 초등학생, 여드름 난 중·고등학생까지 다양했다. 수염이 덥수룩한 어른 관람객도 종종 눈에 띄었다. 16세기에 지동설을 주장하며 세계 과학계의 판도를 바꾼 폴란드 천문학자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이름을 따 2010년 설립된 이곳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자연스레 기초과학에 흥미를 갖게 하는 ‘체험형 전시물’로 가득하다.
센터 안은 관람객이 전시물 하나하나를 레버나 버튼 등으로 직접 조작하면서 과학적 원리를 터득할 수 있게 꾸며졌다. 1층 전시장의 ‘버뮤다 삼각지대’를 주제로 한 전시물 앞에 서봤다. 1609년 이후 17척의 선박과 15대의 비행기가 사라졌다는 불가사의한 그곳. 핸들을 돌리자 수조 안에서 크고 작은 물결이 형성되면서 원리를 보여줬다. 바닷물과 파도를 형상화한 것이다. 자그맣고 느린 파도가 먼저 치고, 이어 크고 빠른 파도가 친다. 이 현상이 반복되면 작은 파도와 큰 파도가 서로 얽히면서 보통 파도의 10배 크기에 달하는 ‘이상 파랑(波浪)’이 발생, 선박 등이 구조를 요청할 틈도 없이 침몰하게 한다. 통상 파도는 해수면과 바람의 마찰로 심해지는데, 북대서양의 폭풍우가 이 일대의 이상 파랑 현상을 심화시킨다. ‘아!’ 원리를 이해한 순간 전시물 옆에 설치된 모니터가 퀴즈를 냈다. “선박들은 왜 불가사의하게 실종됐을까요?” 그러자 ‘1번. 지구 자기장의 교란’ ‘2번. 태양복사’ ‘3번. 메탄가스 거품’이란 선택지가 제시됐다. 오답을 지우고 정답을 맞히라는 삼지선다(三枝選多)의 의미가 아니다. 세 개의 선택지 모두 정답이거나, 현재 정답으로 추정되는 내용이기 때문이다. 3번을 클릭하자 ‘해저에서 자연적으로 생성된 메탄가스가 해수면 위로 떠오르면서 많은 거품을 만들고, 거품은 선박을 에워싼다. 이 원리로 바닷물이 공기보다 가벼워지면 선박이 부력을 잃으면서 침몰할 수 있다’고 알려줬다. 1번이나 2번을 클릭해도 비슷한 식이다. 폴란드의 과학 교육이 ‘무엇(what)’을 고르는 데만 급급한 주입식이라기보다는 원리, 즉 ‘왜(why)’와 ‘어떻게(how)’를 학생들 스스로 깨닫도록 하는 데 초점을 뒀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이외에도 ‘지형’ ‘타이태닉호’ ‘풍차’ ‘로제타 위성(혜성 탐사선)’ 등 무궁무진한 주제로 구성된 체험형 전시물이 관람객을 반긴다. 지형 전시물에서는 모래를 쌓아올려 등고선을 만들어 볼 수 있고, 침몰한 타이태닉호의 일부를 재현한 전시물에서는 기울어진 배에 올라 생존법을 고민해볼 수 있다. 시내 한 공립학교에 다니는 관람객 카샤(15)는 “책으로 배웠던 내용들을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며 “장래희망인 과학자가 되려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코페르니쿠스의 후예, 폴란드인들은 지금 지식혁명에 열심이다. 실제 1주일여 간의 현지 취재에서 정부와 산업계, 학계 관계자들로부터 가장 많이 들었던 단어 중 하나가 ‘지식(knowledge)’이다. 마치에이 팔코브스키 폴란드 외교부 경제협력담당 사무관은 “근래 폴란드 사회의 화두는 ‘지식을 향상시켜야 한다’는 것”이라며 “지식 기반의 경제 성장만이 디지털 경제 시대에 밝은 미래를 보장해주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중에서도 고성장의 열쇠이자, 4차 산업혁명(제조업과 최신 정보통신기술(ICT)의 융합으로 경쟁력·효율성 제고와 부가가치 창출을 노리는 차세대 산업혁명)의 기반이 될 과학 분야에 대한 교육과 학습 열기가 뜨겁다. 한국이 1970년대 들어 ‘과학이 곧 경제 발전의 원동력’이라는 슬로건 하에 과학입국(科學立國)으로 압축적인 고성장을 이끌어냈던 전례를 연상시킨다. 차이점이 있다면 폴란드는 좀 더 21세기에 어울리는 방법으로 원리 위주의 지식을 쌓고 있다는 것, 그리고 저성장 늪에 빠진 한국은 과거보다 오히려 이런 일에 소극적으로 변모했다는 사실이다. 최근 폴란드 정부가 야심차게 도입한 코딩(컴퓨터 프로그래밍) 교육 프로그램 ‘코딩 마스터스(Coding Masters)’도 이를 보여주는 사례다. 아이러니하게도 한국 기업이 기여를 했다. 1996년 폴란드에 진출한 삼성전자가 2013년 현지 인재 육성과 사회책임경영(CSR) 차원에서 시작한 이 프로그램은 5~6세의 유치원생부터 중·고교생, 교사들까지가 모두 교육 대상이다. 태블릿과 퍼즐 등을 활용, 이들이 코딩을 친숙하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도록 하는 데 주안점을 뒀다. 교육 참가자들의 뜨거운 호응을 눈여겨본 폴란드 정부는 올 들어 전국 15만 명의 학생을 대상으로 코딩 마스터스를 공식 도입했다. 정부 차원에서 삼성과 같은 글로벌 민간 기업의 노하우를 흡수, 자국 발전에 보탬이 되도록 힘쓴 것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12월 16일 바르샤바에서 만난 삼성 현지 법인의 야체크 르기 에비치 PA(Public Affairs)담당 이사는 코딩 교육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코딩은 21세기의 새로운 언어입니다. 어떻게 기계와 소통할 수 있을 것이냐에 대한 해법을 제시해주니까요. 1차로 아이들이 컴퓨터에 관심을 갖게 하고, 원리를 알게 하며, 2차로 창의력과 상상력, 사고력 등을 기르도록 하는 게 목표입니다.” 그는 “가까운 미래에 유럽연합(EU)에서만 100만 명의 프로그래밍 분야 채용이 필요해진다는 통계도 있다”면서 “디지털화(digitalization)의 중요성이 그만큼 크다”고 덧붙였다. 미국과 영국 같은 선진국들이 이미 공교육에 코딩 과목을 포함시키면서 코딩 교육 강화에 나섰듯, 폴란드도 디지털 경제 시대에 다양한 ICT 분야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인재 육성에 힘써야 한다는 얘기다.
폴란드인들의 학구열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코페르니쿠스 또는 두 차례나 노벨상을 받은 마리 퀴리(1867~1934) 같은 천재들을 배출한 역사와 민족 DNA의 영향일까. 일부 작용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지적 호기심(epistemic curiosity)’이라는 키워드로 짚어보는 편이 바람직해 보인다. <큐리어스> 의 저자 이언 레슬리는 지적 호기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깊이 있는 지식과 이해, 더 많은 노력을 요하면서 방향성을 한층 부여한 종류의 호기심.’
이에 따르면, 기업이나 국가 입장에서는 지적 호기심이 ‘다양성 호기심(새로운 것이라면 흥미를 보이는 성질)’이라는 원료를 금으로 바꿔내면서 혁신에 불을 지필 수 있게 만드는 촉매제나 다름없다. 또한 당면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뒷받침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임선하 전 서울시 교육 복지종합지원센터장도 말한다. “지적 호기심은 정보에 대한 굶주림에서, 혹은 자신의 지식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식한 데서 생긴다.”
폴란드인의 뿌리 깊은 지적 호기심과 이를 동반한 배움에 대한 노력들은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같은 날 찾은 바르샤바경제대학(SGH). 폴란드 제일의 경제대학으로 1906년 설립된 이곳은 한 해에 58개국 학생 800여명이 유학하러 올 만큼 대외적으로도 명성이 높다. 헝가리 등 가까운 동유럽은 물론 독일과 프랑스 같은 선진국, 중국과 인도 같은 먼 나라에서도 온다. 유학생들은 창의성을 중시하고 강렬한 지적 호기심이 오가는 이 대학 특유의 분위기에 미래를 걸었다. 대학 관계자는 “거의 모든 강의가 3개 국어로 진행된다. 폴란드어와 영어, 제3의 언어가 필수로 포함된다”며 “채용에 나선 기업들도 이를 매력적으로 느낀다”고 했다.
약 1만5000명의 학생 중 10%가량은 취업이 아닌 창업을 준비한다. 이들은 많은 워크숍을 통해, 또한 66개의 동호회 활동을 통해 창업 아이디어에 대한 사교적이면서도 열띤 토론을 한다. 이들의 지적 호기심은 ‘어떻게 하면 혁신적인 스타트업을 차릴 수 있을까’로 뻗어나간 지 오래다. 경제대학이지만 커리큘럼 안에는 금융이나 마케팅 외에 빅데이터 같은 최신 ICT도 포함됐다. 해당 내용을 배우기를 희망하는 학생 수요가 많은데다 학교 측도 ‘경제+ICT’의 융합형 전문가를 길러내는 데 팔을 걷어붙였기 때문이다. 이는 성과로 이어진다. 졸업생이 만든 스타트업들은 전자상거래나 게임 등 다양한 ICT 분야로 진출 중이다. 구글 등 글로벌 기업이 여는 아이디어 경연대회의 입상자도 많이 배출됐다. 이처럼 융합형의 우수한 인재들이 대거 육성되거나 ‘스스로’ 자라나면서 폴란드 산업계도 탄력을 받고 있다. 특히 수많은 ‘히든 챔피언(강소기업)’을 통해 제조업 강국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웃나라 독일처럼, 폴란드도 최근 많은 중소기업이 강소기업으로 거듭나면서 주목받고 있다. 이들 강소기업은 카본 등 첨단 소재, 인공혈액 같은 최신 의료 기술, 가상현실(VR) 콘텐트, 우주개발, 항공 등의 고부가가치 사업 분야에서 두각을 보이고 있다. 그 중심에는 지적 호기심으로 똘똘 뭉친 폴란드산(産) 고급 인력이 있다.
바르샤바 외곽에 위치한 ‘비고시스템(VIGO System S.A.)’도 고부가가치 사업과 수준 높은 엔지니어(기술자)들로 유명한 강소기업이다. 직원 수가 80여 명에 불과하지만 ICT를 활용한 적외선 탐지 설비 분야에서 기술력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이 회사는 2015년에 전체 소득이 2007년 대비 3.6배가 됐고, 그중 90% 이상이 폴란드가 아닌 유럽과 미국 등 해외에서 발생했다. 루카시 피에카르스키 비고시스템 이사는 “미 항공우주국(NASA)이 진행하는 우주개발 사업과 유럽우주국(ESA)의 화성 탐사 프로젝트 ‘엑소마스(ExoMars)’에 파트너로 참여 중”이라며 “우주개발 외에도 교통·국방·의료 등의 분야에서 우리 기술력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그는 “이 분야는 복잡하고 독특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만 숙련된 기술자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이들이 새로운 기술에 완전히 적응할 만큼 실력을 갖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공장을 견학하던 도중 한 기술자가 재미있는 말을 했다. “복잡해서 쉽진 않지만 늘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데 힘쓰고, 늘 새로운 일에 도전합니다. ‘카피캣(독창적이지 않고 다른 기업 제품을 모방해 만드는 것)’은 완강히 거부합니다.” 은연중 지적 호기심을 드러냈다. 호기심 많고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고급 인력이 많다는 점은 고부가가치 사업을 추구하는 글로벌 기업들이 그만큼 투자하기 좋은 환경이라는 사실을 의미한다. 2015년 기준 바르샤바에만 글로벌 기업의 연구개발(R&D)센터 약 150곳이 들어섰다. 3~4년 새 부쩍 진출이 늘었다. 삼성 외에도 구글·마이크로소프트(MS)·IBM·오라클 같은 공룡들이 R&D센터를 세웠다. 젊은 인재들의 호기심이 이들 R&D센터가 가진 무형의 자산이다. 서울에도 있는 ‘구글 캠퍼스’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 행선지로 바르샤바를 택했다. 업무 프로세스 아웃소싱(BPO), 셰어드서비스센터(SSC) 같은 고부가가치 아웃소싱 거점도 나날이 확대되고 있다. 바르샤바 등 27개 도시에서 BPO와 SSC, R&D 형태의 아웃소싱 기업만 850곳이 넘고 19만 명 이상의 고급 인력이 이들 기업에서 일하고 있다. 대부분은 학·석사급 이상의 고학력자다. 폴란드가 ‘유럽의 실리콘밸리’로 부상하고 있다는 말이 나오는 배경이다. 블룸버그는 한 보도에서 폴란드를 ‘유럽·중동에서 투자하기 가장 좋은 나라’로 꼽기도 했다.
12월 13일 바르샤바 도심에서 승용차로 3시간쯤 달려 도착한 남동부 소도시 시비드니크에 있는 헬리콥터 제조사 ‘PZL-시비드니크’도 폴란드에 투자한 글로벌 기업 중 하나다. 세계 3대 헬기 제조사인 이탈리아 업체 ‘레오나르도헬리콥터스’가 대 주주인 이 회사는 650여 명의 기술자를 포함, 3000여 명의 직원이 모인 폴란드 공장에서 헬기를 디자인·생산하고 있다. 군용부터 소방용까지 다양한 라인업이다. 크르지스토프 크리스토브스키 PZL-시비드니크 부사장은 “헬기 사업은 그 특수성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지만, 폴란드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헬기 생산국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우수한 기술자들을 보유한 덕분이라는 얘기다. 실제 헬기를 생산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유럽에서는 폴란드를 포함한 5개국(이탈리아·영국·독일·프랑스)뿐이며 범위를 넓혀도 미국과 중국, 러시아 정도다. 일본조차 이 명단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 회사는 폴란드에서 헬기를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폴란드에 기술을 전수하면서 윈-윈(win-win)을 도모하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 서유럽 등에 비해 합리적인(낮은) 비용에 근로자를 쓸 수 있다는 측면도 있지만(2014년 기준 폴란드의 월평균 임금은 678유로로 EU 회원국 평균치인 1489유로의 절반 수준), 단순히 이 때문만은 아니다. 값싸면서도 우수한 기술자들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현수 코트라(KOTRA) 바르샤바무역관 차장은 “폴란드 청년들은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갖췄고, 일을 배우는 속도가 빨라 글로벌 기업들이 선호한다”고 전했다. 폴란드투자청(PAIZ)에 따르면 폴란드는 인력의 외국어 구사 역량이 뛰어나 1개 기업 내에서도 50~60개 국어를 쓴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인구 대비 대학생 비율은 동유럽 국가 중 가장 높다. 여기에 유럽 중앙에 위치해 독일·프랑스·러시아 등과 인접한 지리적 이점, 폴란드 정부가 확보한 1058억 유로(약 133조원) 규모의 막대한 EU 기금(2014~2020년 배정), 사회간접자본(인프라) 확대, 정치적 불확실성 해소 등이 더해지면서 시너지 효과가 생겨났다. 고성장은 그 과정에서 거둔 달콤한 결실이었다. 폴란드는 EU에 가입한 2004년 무렵부터 지난해까지 경제 규모가 거의 2배로 성장했다. 국제통화기금(IMF)에 따르면 지난해 폴란드의 국내총생산(GDP)은 4674억 달러(약 562조원)로 세계 25위였다. 1989년 민주화 이후 경제 자유화를 추진, 사회주의에서 시장 경제 체제로 선회한 것을 감안해도 놀라운 성장세다. 2005년 이후 10년 간 GDP 성장률은 연평균 3.9%로 유럽연합(EU) 회원국 평균(0.9%)의 4배 이상이었다. 특히 글로벌 금융위기 직후인 2009년 28개 EU 회원국이 마이너스 성장(-4.4%)에 신음할 동안 폴란드는 도리어 2.8% 성장하는 저력을 과시했다. 이후로도 성장률이 매년 EU 평균치를 크게 상회하면서 EU 내 ‘모범생’이 됐다. 이 기간 EU에서 한 번도 역성장하지 않은 나라는 폴란드가 유일하다. 이런 폴란드를 비롯한 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등 동유럽 4개국, 일명 ‘비셰그라드(V4)’는 우수한 노동력과 기술력을 바탕으로 급성장하면서 악전고투 중인 EU의 새 엔진으로 떠올랐다.
물론 폴란드는 적잖은 과제에도 직면해 있다. 예컨대 강소기업이 계속 늘고 있지만, 자국 기술을 앞세워 세계적으로 이름난 대기업은 많지 않다. 글로벌 선도 기업의 탄생이 절실한 시점이다. 더구나 2020년이 지나면 EU 기금이 소진돼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할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장밋빛 미래를 기대해볼 수 있는 이유는 지식혁명과 함께 지적 호기심으로 무장한 젊은 인재가 많기 때문이다. 폴란드 정부도 R&D에 2020년까지 76억 유로(약 9조5400억원)의 추가 예산을 배정하면서 인재 지원에 소매를 걷어붙였다. 매년 GDP의 2% 이상을 R&D에 투자한다는 목표다. 2007년 문을 연 폴란드 국립R&D센터(NCBR)는 2011년부터 국립 연구 프로그램을 가동해 산학 연계를 강화하고 ICT와 바이오, 신재생에너지 등 고부가가치 산업 연구 활성화에 나섰다. 폴란드가 기술자 우대 풍토를 조성하고, 4차 산업혁명에 걸맞은 숙련된 고급 인력 육성에 나서면서 지속 가능한 경제 발전을 도모하고 있는 부분은 저성장 시대를 맞은 한국에도 시사점을 주고 있다.큐리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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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년 전이요? 그때와는 완전히 다른 나라입니다.” 지난 12월 11~18일(현지시간) 폴란드 취재 중 만난 현지 관계자들은 “10년 전쯤 와봤다”는 기자의 말에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답했다. 배경에는 무섭게 성장한 폴란드 경제가 있다. 세계 11위의 경제 규모를 가진 한국은 폴란드보다 분명 앞서 있지만 미래에도 그럴 것이란 보장은 없다. 경제학자 피터 블레어 헨리는 “선진국이더라도 경제 성장이 둔화됐다면 신흥국이 빠른 성장 과정에서 보인 강점을 배울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폴란드의 고성장 비결과 한국이 놓치고 있는 부분, 도시재생사업의 순기능, 동유럽 진출 기업의 현황과 전망 등을 짚어봤다. 지난 12월 14일(이하 현지시간) 오후 폴란드 수도 바르샤바에 자리한 ‘코페르니쿠스 과학센터(Copernicus Science Centre)’. 약 300명의 관람객이 우주와 지구를 탐험하듯 호기심 가득한 표정으로 전시장을 둘러보고 있었다. 유치원생으로 보이는 꼬마 관람객부터 장난기 많은 초등학생, 여드름 난 중·고등학생까지 다양했다. 수염이 덥수룩한 어른 관람객도 종종 눈에 띄었다. 16세기에 지동설을 주장하며 세계 과학계의 판도를 바꾼 폴란드 천문학자 니콜라스 코페르니쿠스(1473~1543)의 이름을 따 2010년 설립된 이곳은 아이부터 어른까지 자연스레 기초과학에 흥미를 갖게 하는 ‘체험형 전시물’로 가득하다.
센터 안은 관람객이 전시물 하나하나를 레버나 버튼 등으로 직접 조작하면서 과학적 원리를 터득할 수 있게 꾸며졌다. 1층 전시장의 ‘버뮤다 삼각지대’를 주제로 한 전시물 앞에 서봤다. 1609년 이후 17척의 선박과 15대의 비행기가 사라졌다는 불가사의한 그곳. 핸들을 돌리자 수조 안에서 크고 작은 물결이 형성되면서 원리를 보여줬다. 바닷물과 파도를 형상화한 것이다. 자그맣고 느린 파도가 먼저 치고, 이어 크고 빠른 파도가 친다. 이 현상이 반복되면 작은 파도와 큰 파도가 서로 얽히면서 보통 파도의 10배 크기에 달하는 ‘이상 파랑(波浪)’이 발생, 선박 등이 구조를 요청할 틈도 없이 침몰하게 한다. 통상 파도는 해수면과 바람의 마찰로 심해지는데, 북대서양의 폭풍우가 이 일대의 이상 파랑 현상을 심화시킨다.
체험형 전시물 가득한 코페르니쿠스 과학센터
이외에도 ‘지형’ ‘타이태닉호’ ‘풍차’ ‘로제타 위성(혜성 탐사선)’ 등 무궁무진한 주제로 구성된 체험형 전시물이 관람객을 반긴다. 지형 전시물에서는 모래를 쌓아올려 등고선을 만들어 볼 수 있고, 침몰한 타이태닉호의 일부를 재현한 전시물에서는 기울어진 배에 올라 생존법을 고민해볼 수 있다. 시내 한 공립학교에 다니는 관람객 카샤(15)는 “책으로 배웠던 내용들을 더 명확히 이해할 수 있었다”며 “장래희망인 과학자가 되려면 지금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원리 깨치는 지식혁명에 열중
“코딩은 21세기의 새로운 언어”
12월 16일 바르샤바에서 만난 삼성 현지 법인의 야체크 르기 에비치 PA(Public Affairs)담당 이사는 코딩 교육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했다. “코딩은 21세기의 새로운 언어입니다. 어떻게 기계와 소통할 수 있을 것이냐에 대한 해법을 제시해주니까요. 1차로 아이들이 컴퓨터에 관심을 갖게 하고, 원리를 알게 하며, 2차로 창의력과 상상력, 사고력 등을 기르도록 하는 게 목표입니다.” 그는 “가까운 미래에 유럽연합(EU)에서만 100만 명의 프로그래밍 분야 채용이 필요해진다는 통계도 있다”면서 “디지털화(digitalization)의 중요성이 그만큼 크다”고 덧붙였다. 미국과 영국 같은 선진국들이 이미 공교육에 코딩 과목을 포함시키면서 코딩 교육 강화에 나섰듯, 폴란드도 디지털 경제 시대에 다양한 ICT 분야를 능숙하게 활용하는 인재 육성에 힘써야 한다는 얘기다.
폴란드인들의 학구열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코페르니쿠스 또는 두 차례나 노벨상을 받은 마리 퀴리(1867~1934) 같은 천재들을 배출한 역사와 민족 DNA의 영향일까. 일부 작용한 것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지적 호기심(epistemic curiosity)’이라는 키워드로 짚어보는 편이 바람직해 보인다. <큐리어스> 의 저자 이언 레슬리는 지적 호기심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깊이 있는 지식과 이해, 더 많은 노력을 요하면서 방향성을 한층 부여한 종류의 호기심.’
이에 따르면, 기업이나 국가 입장에서는 지적 호기심이 ‘다양성 호기심(새로운 것이라면 흥미를 보이는 성질)’이라는 원료를 금으로 바꿔내면서 혁신에 불을 지필 수 있게 만드는 촉매제나 다름없다. 또한 당면한 수많은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을 뒷받침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한다. 임선하 전 서울시 교육 복지종합지원센터장도 말한다. “지적 호기심은 정보에 대한 굶주림에서, 혹은 자신의 지식이 불충분하다는 것을 인식한 데서 생긴다.”
폴란드인의 뿌리 깊은 지적 호기심과 이를 동반한 배움에 대한 노력들은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다. 같은 날 찾은 바르샤바경제대학(SGH). 폴란드 제일의 경제대학으로 1906년 설립된 이곳은 한 해에 58개국 학생 800여명이 유학하러 올 만큼 대외적으로도 명성이 높다. 헝가리 등 가까운 동유럽은 물론 독일과 프랑스 같은 선진국, 중국과 인도 같은 먼 나라에서도 온다. 유학생들은 창의성을 중시하고 강렬한 지적 호기심이 오가는 이 대학 특유의 분위기에 미래를 걸었다. 대학 관계자는 “거의 모든 강의가 3개 국어로 진행된다. 폴란드어와 영어, 제3의 언어가 필수로 포함된다”며 “채용에 나선 기업들도 이를 매력적으로 느낀다”고 했다.
약 1만5000명의 학생 중 10%가량은 취업이 아닌 창업을 준비한다. 이들은 많은 워크숍을 통해, 또한 66개의 동호회 활동을 통해 창업 아이디어에 대한 사교적이면서도 열띤 토론을 한다. 이들의 지적 호기심은 ‘어떻게 하면 혁신적인 스타트업을 차릴 수 있을까’로 뻗어나간 지 오래다. 경제대학이지만 커리큘럼 안에는 금융이나 마케팅 외에 빅데이터 같은 최신 ICT도 포함됐다. 해당 내용을 배우기를 희망하는 학생 수요가 많은데다 학교 측도 ‘경제+ICT’의 융합형 전문가를 길러내는 데 팔을 걷어붙였기 때문이다. 이는 성과로 이어진다. 졸업생이 만든 스타트업들은 전자상거래나 게임 등 다양한 ICT 분야로 진출 중이다. 구글 등 글로벌 기업이 여는 아이디어 경연대회의 입상자도 많이 배출됐다.
대학에선 ‘경제ICT’ 융합 교육
바르샤바 외곽에 위치한 ‘비고시스템(VIGO System S.A.)’도 고부가가치 사업과 수준 높은 엔지니어(기술자)들로 유명한 강소기업이다. 직원 수가 80여 명에 불과하지만 ICT를 활용한 적외선 탐지 설비 분야에서 기술력을 널리 인정받고 있다. 이 회사는 2015년에 전체 소득이 2007년 대비 3.6배가 됐고, 그중 90% 이상이 폴란드가 아닌 유럽과 미국 등 해외에서 발생했다. 루카시 피에카르스키 비고시스템 이사는 “미 항공우주국(NASA)이 진행하는 우주개발 사업과 유럽우주국(ESA)의 화성 탐사 프로젝트 ‘엑소마스(ExoMars)’에 파트너로 참여 중”이라며 “우주개발 외에도 교통·국방·의료 등의 분야에서 우리 기술력을 필요로 한다”고 했다. 그는 “이 분야는 복잡하고 독특한 기술을 필요로 하지만 숙련된 기술자를 구하는 데 어려움이 없다. 이들이 새로운 기술에 완전히 적응할 만큼 실력을 갖췄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덧붙였다. 공장을 견학하던 도중 한 기술자가 재미있는 말을 했다. “복잡해서 쉽진 않지만 늘 새로운 기술을 배우는 데 힘쓰고, 늘 새로운 일에 도전합니다. ‘카피캣(독창적이지 않고 다른 기업 제품을 모방해 만드는 것)’은 완강히 거부합니다.” 은연중 지적 호기심을 드러냈다.
삼성·구글·MS·오라클 등 글로벌 IT 기업 집결
12월 13일 바르샤바 도심에서 승용차로 3시간쯤 달려 도착한 남동부 소도시 시비드니크에 있는 헬리콥터 제조사 ‘PZL-시비드니크’도 폴란드에 투자한 글로벌 기업 중 하나다. 세계 3대 헬기 제조사인 이탈리아 업체 ‘레오나르도헬리콥터스’가 대 주주인 이 회사는 650여 명의 기술자를 포함, 3000여 명의 직원이 모인 폴란드 공장에서 헬기를 디자인·생산하고 있다. 군용부터 소방용까지 다양한 라인업이다. 크르지스토프 크리스토브스키 PZL-시비드니크 부사장은 “헬기 사업은 그 특수성 때문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지만, 폴란드는 세계에서 몇 안 되는 헬기 생산국 중 하나”라고 강조했다. 우수한 기술자들을 보유한 덕분이라는 얘기다. 실제 헬기를 생산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유럽에서는 폴란드를 포함한 5개국(이탈리아·영국·독일·프랑스)뿐이며 범위를 넓혀도 미국과 중국, 러시아 정도다. 일본조차 이 명단에 포함되지 않는다. 이 회사는 폴란드에서 헬기를 판매하는 데 그치지 않고 폴란드에 기술을 전수하면서 윈-윈(win-win)을 도모하고 있다.
기업 입장에서 서유럽 등에 비해 합리적인(낮은) 비용에 근로자를 쓸 수 있다는 측면도 있지만(2014년 기준 폴란드의 월평균 임금은 678유로로 EU 회원국 평균치인 1489유로의 절반 수준), 단순히 이 때문만은 아니다. 값싸면서도 우수한 기술자들을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현수 코트라(KOTRA) 바르샤바무역관 차장은 “폴란드 청년들은 유창한 외국어 실력을 갖췄고, 일을 배우는 속도가 빨라 글로벌 기업들이 선호한다”고 전했다. 폴란드투자청(PAIZ)에 따르면 폴란드는 인력의 외국어 구사 역량이 뛰어나 1개 기업 내에서도 50~60개 국어를 쓴다는 통계가 있을 정도다. 인구 대비 대학생 비율은 동유럽 국가 중 가장 높다. 여기에 유럽 중앙에 위치해 독일·프랑스·러시아 등과 인접한 지리적 이점, 폴란드 정부가 확보한 1058억 유로(약 133조원) 규모의 막대한 EU 기금(2014~2020년 배정), 사회간접자본(인프라) 확대, 정치적 불확실성 해소 등이 더해지면서 시너지 효과가 생겨났다.
10년 간 GDP 성장률 연평균 3.9%
물론 폴란드는 적잖은 과제에도 직면해 있다. 예컨대 강소기업이 계속 늘고 있지만, 자국 기술을 앞세워 세계적으로 이름난 대기업은 많지 않다. 글로벌 선도 기업의 탄생이 절실한 시점이다. 더구나 2020년이 지나면 EU 기금이 소진돼 재정적으로 어려움에 처할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장밋빛 미래를 기대해볼 수 있는 이유는 지식혁명과 함께 지적 호기심으로 무장한 젊은 인재가 많기 때문이다. 폴란드 정부도 R&D에 2020년까지 76억 유로(약 9조5400억원)의 추가 예산을 배정하면서 인재 지원에 소매를 걷어붙였다. 매년 GDP의 2% 이상을 R&D에 투자한다는 목표다. 2007년 문을 연 폴란드 국립R&D센터(NCBR)는 2011년부터 국립 연구 프로그램을 가동해 산학 연계를 강화하고 ICT와 바이오, 신재생에너지 등 고부가가치 산업 연구 활성화에 나섰다. 폴란드가 기술자 우대 풍토를 조성하고, 4차 산업혁명에 걸맞은 숙련된 고급 인력 육성에 나서면서 지속 가능한 경제 발전을 도모하고 있는 부분은 저성장 시대를 맞은 한국에도 시사점을 주고 있다.큐리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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