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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17) | 정도전의 재상론] 보스는 보스답게, 참모는 참모답게

[김준태의 보스와 참모의 관계학(17) | 정도전의 재상론] 보스는 보스답게, 참모는 참모답게

정도전, 이성계의 한계 보완하며 전폭적 지원받아 … 참모가 보스에 무조건 순종하면 폐단 생겨



촉한의 황제 유비는 자신의 수석참모인 제갈량을 두고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다”라고 말한 적이 있다. 수어지교(水魚之交)라는 고사성어를 유래한 이 말은 보스와 참모의 관계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물고기는 물이 없으면 살지 못하고, 물은 물고기 없이는 의미를 실현할 수 없듯이, 보스와 참모는 진정한 한 팀이 될 때 비로소 빛을 발한다. 이 연재에선 한 팀을 이루는 바로 그 과정에 주목한다. 어떻게 보스를 선택하고 참모를 선택하는지, 어떤 식으로 관계를 맺으며 서로에게 도움이 되었는지 역사 속의 사례로 살펴본다.
정도전 영정. / 사진. 중앙포토
1383년(우왕 9년) 가을, 함경도 함주에 주둔해 있는 이성계(李成桂, 1335~1408년)의 군막을 찾은 정도전(鄭道傳, 1342~1398년)은 호령이 엄격하고 군대가 정연한 모습을 보고 “참으로 훌륭합니다. 이런 군대를 가지고 무슨 일을 못하겠습니까?”라고 말했다[삼봉집]. “그게 무슨 말이오”라고 묻는 이성계에게 “외적을 충분히 격퇴할 수 있겠다는 뜻”이라고 말을 돌리기는 했지만 아마도 그는 생각했을 것이다. 이성계가 자신의 꿈을 실현하게 해주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줄 힘을 제공해주리라고 말이다.

이후 이성계의 참모가 된 정도전은 여러 난관을 뚫고 새 왕조를 개창하여 주군인 이성계를 왕으로 만들었다. 자신의 철학과 비전이 투영된 국가체제질서를 구상하고 이를 현실에 구현해냄으로써 ‘조선의 설계자’라고도 불리게 된다. 이 과정에 대한 이야기는 익히 잘 알려져 있으니 굳이 반복하지는 않겠지만 그가 재상의 역할과 권한을 강조한 부분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시사점을 갖는다. 이번 회에서는 정도전이 남긴 논설을 통해 그가 재상을 중시한 이유는 무엇이며 재상과 임금 사이의 바람직한 역할 설정은 어떠해야 한다고 보았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우선 정도전이 저술한 [경제문감(經濟文鑑)] 중 ‘상업(相業, 재상의 업무)’이라는 글을 보자. 여기서 정도전은 임금과 재상의 역할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임금이 재상을 논함에 있어, 자신의 뜻에 맞추는 것만을 구하고 자기를 바루어 주는 것을 구하지 않으며, 사랑스러운 것만을 취하고 두려워할 만한 것을 취하지 않으면 그 임금은 직분을 잃은 것이다. 또한 의당 임금을 바르게 해야 할 재상이, 옳은 것으로 그른 것을 바꾸는 일을 임무로 삼지 않고 임금의 뜻만을 좇아 화합하고 순종하는 것만을 능사로 삼으며, 세상을 경륜하고 만물을 주재하는 일로 마음을 삼지 않고 몸이나 용납되어 은총을 굳히는 일만으로 술수를 삼는다면 그 재상은 직분을 잃은 것이다.” 임금은 자신의 말을 잘 따르고 복종하는 사람이 아니라 자신을 더 나아지게 만들어줄 수 있는 사람을 재상으로 발탁해야 하며, 재상도 부귀나 은총을 구하지 말고 오로지 임금을 올바르게 만드는 일에 헌신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상은 왕의 방종을 견제하는 존재
그런데 재상의 직분이 이것뿐이라면 굳이 재상을 둘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임금을 바르게 하는 소임은 간언을 담당하는 부처나 관리들이 담당하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재상의 직을 설치하는 것은 무엇보다 임금의 한계 때문이다. 요순(堯舜)임금의 시대라면 나라 안에서 가장 인품이 훌륭하고 능력이 뛰어나며 현명한 사람이 왕이 되었겠지만, 세습 군주제 하에서는 그렇지 못하다. 정도전의 말을 빌리면 “무릇 임금 중에는 우매한 사람도 있고 현명한 사람도 있으며 강건한 사람도 있고 유약한 사람도 있는 등 한결같지가 않다. 그러므로 총재(재상)는 임금의 장점을 북돋워주고 단점을 바로잡아야 한다. 임금이 옳은 일을 하면 받들어 실행하고 그른 일을 하면 막아야 한다. 임금으로 하여금 지나치거나 모자람이 없이 가장 올바른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인도해야 하는 것이다.”[조선경국전]. 세습을 통해 왕위를 잇는 사람들이 모두 제대로 된 자질을 갖출 수는 없는 노릇이기 때문에 대신 신하 중에서 뛰어나고 훌륭한 사람을 재상으로 삼아 임금의 한계를 보완하게 한다는 것이다. 재상은 왕의 방종을 견제하고 판단실수를 예방하며 과오를 바로잡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정도전은 이러한 재상의 권한을 강화하고 그것을 제도화하고자 했는데, 임금의 능력에 따라 재상의 역할을 이랬다 저랬다 조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론 훌륭한 성군이 나오는 것이 최선이겠지만 복권당첨처럼 그것을 기다리기보다는 아예 훌륭한 이를 재상으로 뽑아 그가 국정을 담당하도록 하는 구조를 정착 시킴으로써 정치를 예측가능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그렇다면 임금은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놀기만 하는가? 그것은 아니다. 통치자로서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는 임금은 재상에게 권위와 힘을 부여할 수 있는 존재다. 적임자를 찾아 재상으로 발탁하고, 재상이 마음껏 자신의 역량을 발휘할 수 있도록 믿고 지원하며, 재상을 방해하는 장애물을 제거하는 등의 역할을 하면 된다. 바로 태조 이성계가 모범 사례를 보여주는데, 그는 정도전을 재상으로 삼아 국정의 전권을 부여하다시피 했고, 사병혁파 등 개혁의 과정에서 발생한 반발을 왕의 권위로 제압하며 정도전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정도전이 짧은 시간 동안 새 왕조의 기틀을 상당 부분 잡아 놓을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태조의 지원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순종파 CEO는 득보단 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도전의 모델, 즉 뛰어난 능력을 갖춘 재상이 임금의 위임을 받아 정치의 전면에 나서는 형태는 현실에서 중대한 위험 요인을 가지고 있다. 권력의 속성상 이를 공유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뿐만 아니라, 재상의 업무가 임금과 겹치는 부분이 많기 때문에 재상의 역할이 강화될수록 임금은 그것을 자신에 대한 침범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이다. 재상에게 권한을 주어 국정을 담당하게 하다가도 하루아침에 해임하거나 숙청하는 일이 잦았던 것은 그래서이다.

정도전도 이러한 문제를 인식했던 것 같다. 그는 “재상이 오로지 지성으로 임금을 섬겨야 그 사귐이 굳어져 풀어지지 않으며, 또한 임금의 마음을 열어야만 자신을 보전함에 탈이 없게 된다”고 했다. 또한, 정자(程子, 정이천)의 말을 인용하며 “신하 된 도리는 마땅히 그 빛나고 아름다운 것을 속에 머금고 드러내지 않으며, 착한 것이 있으면 임금에게 돌려야 바름을 얻었다고 할 수 있다”고 말한다. 권력이나 화려한 영광을 누리려 하지 말고 공을 세우면 모두 임금의 것으로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지극한 정성으로 임금을 섬겨야 임금 역시 재상을 믿고 임무를 맡긴다는 것이다. 그래야 비로소 다치지 않고 몸을 보전할 수 있다는 것이 정도전의 생각이다.

이러한 정도전의 주장은 거의 대부분 오너 체제로 운영되고 있는 한국의 재벌기업에도 적용되는 이야기다. 창업자야 그만한 자질을 갖추고 있다 하더라도 2세, 3세, 4세로 이어지는 후계자들도 모두 능력이 있고 뛰어나길 기대할 수는 없는 법이다. 따라서 훌륭한 능력을 갖춘 전문경영인을 위촉하고 권한을 부여하며 자신은 그를 지원하는 일에 집중하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그것이 기업뿐 아니라 오너 자신에게도 보다 좋은 결과를 가져다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오너들은 형식적으로 전문경영인을 활용할 뿐 일일이 지배하고 군림하려 든다. 전문경영인도 마찬가지다. 보스를 올바른 길로 이끌기 위해 노력하기보다는 자리를 지키기 위해 오너의 뜻을 무조건 좇으며 순종하는 경우가 많다. 바로 이로부터 수많은 폐단이 양산되고 있다는 점에서 임금과 재상의 역할, 그리고 각자의 자세에 대한 정도전의 주장을 참고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김준태 - 칼럼니스트이자 정치철학자. 성균관대와 동 대학원에서 공부하고 성균관대 유교문화연구소와 동양철학문화연구소를 거치며 한국의 정치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사상을 연구한 논문을 다수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군주의 조건]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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