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아베의 불패 신화] 장기 집권 구상-아베노믹스 추진력 떨어지나
[무너진 아베의 불패 신화] 장기 집권 구상-아베노믹스 추진력 떨어지나
2기 정권 출범 5년 만에 도쿄도 의회 선거에서 ‘역사적 패배’... 아베 1강 체제의 일본 정치판 흔들 일본에서 7월 2일 치러진 도쿄도 의회 선거에서 아베신조(安部晋三) 총리가 이끄는 자민당이 참패하면서 일본 정국이 요동치고 있다. 정원 127명의 의원을 뽑는 이날 선거에서 고이케 유리코(小池百合子) 도쿄 도지사가 이끄는 도민퍼스트회가 50명 출마에 49석을 얻으면서 제 1당에 올랐다. 지역 신당이 제1당이 된 셈이다. 도민퍼스트회의 도정 연정파트너인 공민당은 23명이 출마하고 23명이 당선해 같은 숫자의 의석을 얻은 자민당과 나란히 공동 2위 의석의 정당이 됐다. 공명당은 일본 국정에서는 자민당과 손잡은 연정파트너이지만 도쿄 도정에선 고이케의 도민퍼스트회와 손잡고 있다. 중앙의회와 지방의회에서 서로 다른 정당이나 정치결사체와 손잡고 각기 다른 연정을 구성하고 있는 셈이다. 도민퍼스트회가 추천한 무소속 6명과 도정 연정파트너인 생활자 네트 1석을 합친 7석도 사실상 고이케의 영향권 안에 있다. 그 외 공산당이 19석, 민진당이 5석, 유신당이 1석을 각각 차지했다. 도쿄도 의회 선거는 전국적인 선거가 아니지 않느냐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현재 민심을 알아볼 수 있는 풍향계인 것은 분명하다. 이를 바탕으로 앞으로 정국 향배를 전망할 수도 있다. 이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내용이다. 아사히신문은 선거 전날인 1일자에서 도쿄도 선거와 그 직후의 총선 결과는 역사적으로 관련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분석 결과에 따르면 도쿄도 선거에서 집권당과 야당의 의석 수 변화는 그 직후의 국정선거(중의원 도는 참의원)의 의석 수 변동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실제 사례를 살펴보자.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총리 내각(1993년 8월 9일~1994년 4월 28일 재임, 일본신당, 비자민비공산 연립) 집권 직전에 치른 도쿄도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은 의석 비율을 기존 37.8%에서 34.4%로 비슷하게 지켰다. 기존 1.6%에 지나지 않았던 호소카와의 일본신당은 15.6%로 의석을 크게 늘렸다. 이 선거 이후 처음으로 치러졌던 1993년 7월 18일 제40회 총선(중의원선거)에서 자민당은 기존 43.4%과 비슷한 43.6%의 의석을 차지해 큰 변화가 없었지만 그전까지 한 석도 없었던 일본신당은 6.7%의 의석을 얻는 기염을 통했다. 이를 통해 호소카와의 일본신당은 자민당과 공산당을 제외한 7개 야당을 모아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1955년 이후 38년 만에 자민당을 집권당의 위치에서 끌어내리고 정권 교체를 실현했다. 정치 불신으로 신당 창당이 붐을 이룬 가운데 비자민 독립 정당인 일본신당이 도쿄도 의회 선거에서 열풍을 일으킨 것은 변화의 뚜렷한 징조였던 것이다.
2009년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 내각(2009년 9월 16일~2010년 6월 8일 재임, 민주·사민·국민 연립)이 성립되기 직전의 상황도 비슷하다. 당시 도쿄도 의회 선거에서 이전까지 37.8%였던 자민당의 의석 비율이 29.9%로 떨어졌다. 대조적으로 민주당 의석 비율은 26.8%에서 42.5%로 크게 늘었다. 이 선거 이후 첫 총선거였던 2009년 8월 30의 제45회 총선에서 자민당은 말 그대로 참패를 당했다. 62.5%에 이르던 의석 비율이 24.8%로 떨어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한마디로 의석이 반 토막 이하가 된 것이다. 반면 민주당의 약진은 눈부셨다. 24%였던 의석 비율이 64.2%로 2.5배 이상으로 늘어나는 대승을 거두면서 정권을 차지해 하토야마 총리의 시대를 열었다.
하토야마가 총리에 오르기 직전 일본 정계는 ‘자민당 피로증’을 겪고 있었다. 당시 자민당 정권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2001년 4월 26일~2006년 9월 26일) 총리의 1980일 장기집권(역대 연속 재직 3위) 이후 뒤를 이은 총리 3명이 모두 1년 간의 단기 재직에 그치면서 표류하고 있었다. 당시 51세의 나이로 전후 최연소 총리에 올라 1기 내각(2013년 다시 총리가 된 다음은 2기)을 이끌었던 아베 신조(2006년 9월 26일~2007년 9월 26일 재임, 자민·공명 연립)가 366일,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2007년 9월 26일~2008년 9월 24일) 총리가 365일, 아소 다로(麻生太朗, 2008년 9월 24일~2009년 9월 16일) 총리가 358일의 단명 총리에 각각 이름을 올렸다. 고이즈미가 총리에서 물러난 뒤 매년 9월만 오면 총리가 또 바뀔 때가 왔다는 비아냥거림이 흘러나왔을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 치러졌던 도쿄도 의회 선거는 정권 교체의 신호탄이었다. 리더십의 부족과 자민당의 실정, 각종 스캔들 속에서 정권 교체를 갈구하던 국민의 여망이 도쿄도 의회 선거에서 표면으로 드러났고 중의원 선거에서 입증된 셈이다. 2013년 아베 총리가 재임 중 치러졌던 참의원선거의 결과도 직전에 치러졌던 도쿄도 의회 선거와 상당히 높은 ‘싱크로율’을 보였다. 아베도 도쿄도 의회 선거의 결과가 국정선거(중의원이나 참의원 등 중앙정부 관련 전국 선거)의 결과와 이어지는 상황을 겪었다. 차이가 있다면 영향이 중의원 총선이 아닌 참의원 선거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당시 도쿄도 의회 선거 결과 기존 30.7%의 의석을 차지하고 있던 자민당은 비율을 46.5%로 크게 불렸다. 민주당의 경우 33.9%의 의석 비율이 11.8%로 후퇴했다. 선거 결과는 아베의 세력 확대와 민주당의 퇴조로 요약됐다. 자민당은 여세를 몰아 2013년 7월 21일 치러진 참의원 선거에서도 판세를 뒤집었다. 참의원은 그전까지 민주당이 36.4%의 의석을 차지해 1당이었으며 자민당은 28.1%를 차지하는 데 그쳤다. 하지만 선거 결과 자민당이 53.7%의 의석을 차지했다. 비록 개헌선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안정적인 과반수를 차지한 것이다. 민주당은 이 선거 결과 참의원에서 과반 의석을 잃은 것은 물론 차지하는 의석 비율이 14%에 그치면서 세력이 더욱 축소됐다. 이로써 아베는 2012년 중의원, 2013년 참의원, 2014년 중의원, 그리고 2016년 참의원 선거에서 연이어 승리하면서 4연속 승리의 역사를 썼다. 아베는 여세를 몰아 연내에 조기 총선을 실시해 개헌에 필요한 의석을 충분히 확보한 뒤 ‘전쟁할 수 있는 일본’에 필요한 개헌을 더욱 적극적으로 추진할 것으로 예상됐다. 특히 아베노믹스를 표방한 아베에 대한 지지 확인의 효과가 있었다. 사실 2007년 총리에서 물러난 아베는 절치부심하다가 2012년 12월 26일 재집권에 성공해 다시 총리에 올랐다. 전후 총리를 한 번 했던 인물이 물러났다가 다시 총리에 오른 것은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총리 이후 64년 만에 처음이었다. 요시다는 1946년 5월 22일 집권하고 1947년 5월 퇴진했다가 이듬해 10월 15일 다시 총리에 올랐다. 요시다는 이후 1954년 12월 10일까지 총리에 재임해 가쓰라 다로(桂太郞, 1901년 6월 2일부터 도합 3차에 걸쳐 통산 2886일 재임),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1964년 11월 9일~1972년 7월 7일 통산 2798일 재임),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85년 12월 22일 초대 총리로 시작해 도합 4차에 걸쳐 통산 2720일 재임)에 이어 장기 재임 4위를 기록했다. 요시다는 처음 총리에서 물러난 뒤에도 계속 자민당 총재직을 보유하고 있다가 다시 총리가 된 경우다. 자민당 총재와 총리에서 일단 물러났던 인물이 다시 자민당 총재에 뽑힌 것은 아베가 처음이다.
일본에서는 총리(내각총리대신)를 지낸 인물이 자리에서 물러났다가 나중에 중의원 총선거에서 이기거나 집권당 총재선거에서 승리해 총리로 다시 집권해 꾸린 내각을 제2차 아무개 내각이라고 부른다. 같은 총리 아래에서 일부 각료(국무대신)만 바꾸면 제 몇차 개조내각이라고 추가로 붙인다. 아베의 경우 고이즈미 총리의 자민당 총재 임기가 끝나면서 2006년 9월 20일 치러진 총재 선거에서 승리해 그해 9월 26일 총리에 올랐다. 이를 ‘제1차 아베 내각’이라고 부른다. 2007년 9월 26일 총리에서 물러난 아베는 정확하게 5년 뒤인 2012년 9월 26일 치러진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당선해 당시 야당이던 자민당의 총재가 됐다. 이어 12월 16일 치러진 제46회 총선에서 압승해 두 번째로 총리에 올랐다. 이를 ‘제2차 아베 내각’이라고 한다. 중간에 한번 개각을 했는데 이를 ‘제2차 아베 개조내각’이라고 부른다. 아베는 2014년 12월 14일 총선에서 다시 한 번 승리해 ‘제3차 아베 내각’을 구성했으며 2015년 10월 7일 개각해 ‘제3차 아베 제1차 개조내각’을, 2016년 8월 3일 다시 한 번 개각해 ‘제3차 아베 제2차 개조내각’을 각각 꾸렸다.
이런 아베는 이번 도쿄도 의회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2012년 재집권 이래 네 차례의 중·참의원 선거에서 연속으로 승리해 ‘불패 신화’를 썼다. 그런 그가 선거에서 진 것은 재집권 이후 처음이다. ‘아베 1강(强) 체제’라고 지적을 받았던 아베 독주에 제동이 걸렸다. 1강 체제는 아베가 선거에서 패배하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평가다. 특히 아베식 불통의 국정 운영은 이번 선거에서 최대 쟁점으로 부상하면서 선거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평가 받았다. 그간 아베 총리는 철저히 자신과 코드가 맞거나 오랫동안 친했던 사람을 내각에 주로 등용하는 정실 인사를 해왔다. 1차 내각 때부터 계속돼온 ‘아베식 인사 스타일’이다. 이는 ‘도모다치(친구) 내각’이라는 비아냥을 받았지만 아베가 승승장구할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베의 1강 체제가 장기화하면서 여기저기에서 파열음이 들렸다. 실력보다 친분이 발탁의 배경이던 ‘팀 아베’의 구성원들이 차츰 국정에 집중하지 못하고 각종 망언과 스캔들에 휩싸이면서 아베 정권의 부담으로 작용하는 분위기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도쿄도의회 선거 참패의 배경엔 아베 자신이 사학 비리에 관련된 것과 함께 자신이 발탁한 측근들이 연이어 사고를 친 것이 상당한 악재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방위상이다. 이나다는 선거 기간인 6월 27일 방위성과 자위대를 선거에 이용하려는 뉘앙스의 발언으로 역풍을 불렀다. 이나다는 방송 앵커로 일하다 2005년 아베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해 아베의 두터운 신임 속에서 행정상과 방위상에 차례로 오른 아베의 사람이다. 망언으로 유명한 시모무라 하쿠분(下村博文) 자민당 간사장 대행(도쿄도 지부연합회장)의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이 주간지에 폭로되면서 아베 정권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시모무라는 2006년 1차 내각 때 관방부장관을 지낸 데 이어 2012년 재집권 이후 2차 내각과 3차 내각에서 연속으로 문부과학상을 지내면서 반한 교과서 지침 작성에 몰두했던 인물이다. 시모무라는 선거 패배 직후 “국정 문제로 큰 역풍이 불어 엄중한 결과가 됐다. 책임을 느낀다”고 말했다. 비선 정치인들이 정권의 존망과 관련한 문제를 일으킨 셈이다. 아베로서는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힌 형국이 됐다.
선거 참패는 지난 4년 반 동안 추진돼 아베의 최대 업적으로 거론돼온 아베노믹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위상은 7월 4일 자신의 파벌인 기시다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아베 정권의 경제정책 바탕인 아베노믹스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가 지적한 것은 아베노믹스가 ‘격차’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아베노믹스가 성장 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양극화 해소나 분배 문제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시다는 “경제 정책은 ‘격차’라는 부작용에 대해서도 적절히 대응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다. 기시다는 자위대의 존재 근거를 헌법에 명기하자는 아베의 주장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아베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자민당 간사장은 “역사적인 패배임을 인정해야 한다”며 “도민퍼스트회가 이긴 게 아니라 자민당이 패배한 선거”라고 지적했다. 자민당이 패배했으니 당대표인 아베 총리가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고이케 도쿄도지사도 기득권 세력을 정조준하면서 아베의 인기를 넘보고 있다. 고이케는 아베를 등진 정치인이지만 극우정책에 관한 한 서로 통한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게다가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 잡는 다양한 퍼포먼스에 강해 대중정치인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하지만 정당을 자주 옮겨 다니고 화합형이라기보다 좌충우돌형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얻고 있다.
이처럼 아베의 도쿄 의회 선거 패배는 아베노믹스와 개헌 등 일본 정계의 아젠다를 흔들고 있다. 수많은 인물이 아베의 자리를 노리고 달려들고 있는 형국이다. 아베가 올 여름을 어떻게 넘기고 가을 정국을 맞을지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다. 아베는 언제까지 총리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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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도 선거는 민심의 풍향계
1993년 호소카와 모리히로(細川護熙) 총리 내각(1993년 8월 9일~1994년 4월 28일 재임, 일본신당, 비자민비공산 연립) 집권 직전에 치른 도쿄도 선거에서 집권 자민당은 의석 비율을 기존 37.8%에서 34.4%로 비슷하게 지켰다. 기존 1.6%에 지나지 않았던 호소카와의 일본신당은 15.6%로 의석을 크게 늘렸다. 이 선거 이후 처음으로 치러졌던 1993년 7월 18일 제40회 총선(중의원선거)에서 자민당은 기존 43.4%과 비슷한 43.6%의 의석을 차지해 큰 변화가 없었지만 그전까지 한 석도 없었던 일본신당은 6.7%의 의석을 얻는 기염을 통했다. 이를 통해 호소카와의 일본신당은 자민당과 공산당을 제외한 7개 야당을 모아 비자민비공산 연립정권을 수립하기에 이르렀다. 1955년 이후 38년 만에 자민당을 집권당의 위치에서 끌어내리고 정권 교체를 실현했다. 정치 불신으로 신당 창당이 붐을 이룬 가운데 비자민 독립 정당인 일본신당이 도쿄도 의회 선거에서 열풍을 일으킨 것은 변화의 뚜렷한 징조였던 것이다.
2009년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총리 내각(2009년 9월 16일~2010년 6월 8일 재임, 민주·사민·국민 연립)이 성립되기 직전의 상황도 비슷하다. 당시 도쿄도 의회 선거에서 이전까지 37.8%였던 자민당의 의석 비율이 29.9%로 떨어졌다. 대조적으로 민주당 의석 비율은 26.8%에서 42.5%로 크게 늘었다. 이 선거 이후 첫 총선거였던 2009년 8월 30의 제45회 총선에서 자민당은 말 그대로 참패를 당했다. 62.5%에 이르던 의석 비율이 24.8%로 떨어지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한마디로 의석이 반 토막 이하가 된 것이다. 반면 민주당의 약진은 눈부셨다. 24%였던 의석 비율이 64.2%로 2.5배 이상으로 늘어나는 대승을 거두면서 정권을 차지해 하토야마 총리의 시대를 열었다.
하토야마가 총리에 오르기 직전 일본 정계는 ‘자민당 피로증’을 겪고 있었다. 당시 자민당 정권은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2001년 4월 26일~2006년 9월 26일) 총리의 1980일 장기집권(역대 연속 재직 3위) 이후 뒤를 이은 총리 3명이 모두 1년 간의 단기 재직에 그치면서 표류하고 있었다. 당시 51세의 나이로 전후 최연소 총리에 올라 1기 내각(2013년 다시 총리가 된 다음은 2기)을 이끌었던 아베 신조(2006년 9월 26일~2007년 9월 26일 재임, 자민·공명 연립)가 366일, 후쿠다 야스오(福田康夫, 2007년 9월 26일~2008년 9월 24일) 총리가 365일, 아소 다로(麻生太朗, 2008년 9월 24일~2009년 9월 16일) 총리가 358일의 단명 총리에 각각 이름을 올렸다. 고이즈미가 총리에서 물러난 뒤 매년 9월만 오면 총리가 또 바뀔 때가 왔다는 비아냥거림이 흘러나왔을 정도였다. 그런 가운데 치러졌던 도쿄도 의회 선거는 정권 교체의 신호탄이었다. 리더십의 부족과 자민당의 실정, 각종 스캔들 속에서 정권 교체를 갈구하던 국민의 여망이 도쿄도 의회 선거에서 표면으로 드러났고 중의원 선거에서 입증된 셈이다.
‘전쟁할 수 있는 일본’에 필요한 개헌 앞두고…
1강 체제의 불통식 국정 운영
일본에서는 총리(내각총리대신)를 지낸 인물이 자리에서 물러났다가 나중에 중의원 총선거에서 이기거나 집권당 총재선거에서 승리해 총리로 다시 집권해 꾸린 내각을 제2차 아무개 내각이라고 부른다. 같은 총리 아래에서 일부 각료(국무대신)만 바꾸면 제 몇차 개조내각이라고 추가로 붙인다. 아베의 경우 고이즈미 총리의 자민당 총재 임기가 끝나면서 2006년 9월 20일 치러진 총재 선거에서 승리해 그해 9월 26일 총리에 올랐다. 이를 ‘제1차 아베 내각’이라고 부른다. 2007년 9월 26일 총리에서 물러난 아베는 정확하게 5년 뒤인 2012년 9월 26일 치러진 자민당 총재선거에서 당선해 당시 야당이던 자민당의 총재가 됐다. 이어 12월 16일 치러진 제46회 총선에서 압승해 두 번째로 총리에 올랐다. 이를 ‘제2차 아베 내각’이라고 한다. 중간에 한번 개각을 했는데 이를 ‘제2차 아베 개조내각’이라고 부른다. 아베는 2014년 12월 14일 총선에서 다시 한 번 승리해 ‘제3차 아베 내각’을 구성했으며 2015년 10월 7일 개각해 ‘제3차 아베 제1차 개조내각’을, 2016년 8월 3일 다시 한 번 개각해 ‘제3차 아베 제2차 개조내각’을 각각 꾸렸다.
이런 아베는 이번 도쿄도 의회 선거에서 참패하면서 정치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2012년 재집권 이래 네 차례의 중·참의원 선거에서 연속으로 승리해 ‘불패 신화’를 썼다. 그런 그가 선거에서 진 것은 재집권 이후 처음이다. ‘아베 1강(强) 체제’라고 지적을 받았던 아베 독주에 제동이 걸렸다. 1강 체제는 아베가 선거에서 패배하는 원인을 제공했다는 평가다. 특히 아베식 불통의 국정 운영은 이번 선거에서 최대 쟁점으로 부상하면서 선거 패배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평가 받았다. 그간 아베 총리는 철저히 자신과 코드가 맞거나 오랫동안 친했던 사람을 내각에 주로 등용하는 정실 인사를 해왔다. 1차 내각 때부터 계속돼온 ‘아베식 인사 스타일’이다. 이는 ‘도모다치(친구) 내각’이라는 비아냥을 받았지만 아베가 승승장구할 때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아베의 1강 체제가 장기화하면서 여기저기에서 파열음이 들렸다. 실력보다 친분이 발탁의 배경이던 ‘팀 아베’의 구성원들이 차츰 국정에 집중하지 못하고 각종 망언과 스캔들에 휩싸이면서 아베 정권의 부담으로 작용하는 분위기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 도쿄도의회 선거 참패의 배경엔 아베 자신이 사학 비리에 관련된 것과 함께 자신이 발탁한 측근들이 연이어 사고를 친 것이 상당한 악재로 작용했다는 평가다. 대표적인 인물이 이나다 도모미(稻田朋美) 방위상이다. 이나다는 선거 기간인 6월 27일 방위성과 자위대를 선거에 이용하려는 뉘앙스의 발언으로 역풍을 불렀다. 이나다는 방송 앵커로 일하다 2005년 아베의 권유로 정치에 입문해 아베의 두터운 신임 속에서 행정상과 방위상에 차례로 오른 아베의 사람이다.
아베 약점 비집고 차기 인물들 출사표
선거 참패는 지난 4년 반 동안 추진돼 아베의 최대 업적으로 거론돼온 아베노믹스에 대한 비판으로 이어지고 있다. 기시다 후미오(岸田文雄) 위상은 7월 4일 자신의 파벌인 기시다파가 주최한 세미나에서 아베 정권의 경제정책 바탕인 아베노믹스를 수정할 필요가 있다고 역설했다. 그가 지적한 것은 아베노믹스가 ‘격차’를 만들고 있다는 점이다. 아베노믹스가 성장 쪽에 초점을 맞추고 있어 양극화 해소나 분배 문제에도 신경을 써야 한다는 것이었다. 기시다는 “경제 정책은 ‘격차’라는 부작용에 대해서도 적절히 대응해 나가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성장과 분배의 균형을 강조했다. 뿐만 아니다. 기시다는 자위대의 존재 근거를 헌법에 명기하자는 아베의 주장에 반대 입장을 분명히 했다. 아베의 강력한 경쟁자였던 이시바 시게루(石破茂) 전 자민당 간사장은 “역사적인 패배임을 인정해야 한다”며 “도민퍼스트회가 이긴 게 아니라 자민당이 패배한 선거”라고 지적했다. 자민당이 패배했으니 당대표인 아베 총리가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고이케 도쿄도지사도 기득권 세력을 정조준하면서 아베의 인기를 넘보고 있다. 고이케는 아베를 등진 정치인이지만 극우정책에 관한 한 서로 통한다는 평가를 듣고 있다. 게다가 유권자의 마음을 사로 잡는 다양한 퍼포먼스에 강해 대중정치인으로 인기몰이를 하고 있다. 하지만 정당을 자주 옮겨 다니고 화합형이라기보다 좌충우돌형 정치인이라는 평가를 얻고 있다.
이처럼 아베의 도쿄 의회 선거 패배는 아베노믹스와 개헌 등 일본 정계의 아젠다를 흔들고 있다. 수많은 인물이 아베의 자리를 노리고 달려들고 있는 형국이다. 아베가 올 여름을 어떻게 넘기고 가을 정국을 맞을지 관심이 집중되는 이유다. 아베는 언제까지 총리 자리를 지킬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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