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환영의 CEO를 위한 인문학-역사를 만든 ‘죽은 백인 남자들’(20)
김환영의 CEO를 위한 인문학-역사를 만든 ‘죽은 백인 남자들’(20)
2000년대에 새로 나온 경제학 개론·원론서 곳곳에도 1970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새뮤얼슨 교수의 영향이 묻어 있다. 1948년에 발간된 『경제학』은 당시 MIT에서 전공 필수였던 학부 경제학 강의 교재로 저술됐다. 명료한 것으로 유명한 『경제학』의 저술 목표는 ‘학생들이 경제학을 이해할 수 있고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헤겔(1770~1831)의 정반합(正反合·thesis, antithesis, synthesis) 3단계 변증법 논리에 따르면 ‘하나의 주장인 정(正)과 모순되는 다른 주장인 반(反)은 더 높은 종합적인 주장인 합(合)으로 통합되는 과정’을 거친다. 경제학에서는 신고전파의 미시경제학이 정(正), 존 메이너드 케인스(1883~1946) 이론을 중심으로 하는 거시경제학이 반(反), 폴 새뮤얼슨(1915~2009)이 이룩한 ‘신고전파 종합(neoclassical synthesis)’이 합(合)이다. 신고전파 종합을 달리 표현하면 이중경제(二重經濟·mixed economy)다. 혼합경제(混合經濟)로도 불리는 이중경제를 우리 표준국어대사전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사기업의 자유로운 경제 활동을 인정하면서 국가가 적극적으로 경제 활동을 행하여 공공 기업을 육성하는 경제. 완전 고용의 달성과 불황의 극복을 목적으로 한다’. 이중·혼합 경제를 또 달리 표현하면 ‘중도주의 경제’다. ‘경제학의 아버지’인 애덤 스미스(1723~1790)의 『국부론』(1776)이나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인 존 메이너드 케인스의 『고용·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1936)을 읽지 않고도 경제학 학위를 충분히 받을 수 있다. 대부분 경제학 분야에서 그렇다.
그러나 2009년 타계한 폴 새뮤얼슨 교수의 『경제학』을 읽지 않은 경제학도는 드물다. 1990년대, 2000년 대에 새로 나온 경제학 개론·원론서 곳곳에도 1970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새뮤얼슨 교수의 영향이 묻어 있다. 그가 ‘저작권’을 주장할 만하다.
1948년에 발간된 『경제학』은 당시 MIT에서 전공 필수였던 학부 경제학 강의 교재로 저술됐다. 명료한 것으로 유명한 『경제학』의 저술 목표는 ‘학생들이 경제학을 이해할 수 있고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19판까지 나왔다. 41개 언어로 번역돼 400만 부 이상 팔렸다. 새뮤얼슨 교수는 3년에 한 번꼴로 개정판을 냈다. 그는 1988년 AP통신과 인터뷰하면서 “좋은 책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지속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리라는 것은 몰랐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일화도 있다. 당시 세 쌍둥이가 태어나 생활비가 더 필요했는데 새뮤얼슨 교수의 친구들이 ‘책을 써서 돈 벌라’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인 에드워드 글레이저 교수는 2009년 12월 14일 뉴욕 타임스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버드대 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첫 학기 미시경제이론을 가르친다. 적어도 한 시간에 다섯 번씩은 새뮤얼슨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새뮤얼슨 교수가 2009년 12월 13일 매사추세츠 주 벨몬트에 있는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그가 70년 가까이 근무한 매사추세츠공대(MIT)가 발표했다. 엔터테인먼트 분야 유명 인사의 일거수일투족이 큰 관심을 끄는 세태에서 위대한 학자의 사망은 조용히 묻히는 뉴스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현대인의 관심이 온통 경제 문제에 쏠려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얄궂은 일이기도 하다. 그는 생각보다 우리 삶 가까이 있다. 국가와 기업의 정책 결정 배경에 그가 있다. 새뮤얼슨 교수는 경제학의 고전학파와 케인스학파의 이론을 접목시켜 신고전학파를 이끈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경제학』은 미국에 케인스의 이론을 전파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그는 자신과 케인스 이론의 관계를 어떻게 봤을까. 새뮤얼슨 또한 케인스를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라고 인정했다. 그가 뽑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3대 경제학자는 애덤 스미스, 케인스와 레온 발라(Leon Walras)였다. 그러나 새뮤얼슨 교수는 케인스에 대한 회의도 많이 했다. 처음 케인스를 접했을 때에는 회의적이었으며, 말년에는 스스로를 ‘포스트케인지언(post-Keynesian)’이나 ‘카페테리아 케인지언(Cafeteria Keynesian)’이라고 표현했다. 카페테리아 케인지언은 ‘카페테리아 가톨릭 신자(Cafeteria Catholic)’를 흉내 낸 표현이다. 낙태·피임·동성애·혼전관계 등의 문제에 대해 교리를 따르지 않는 ‘이름뿐인 가톨릭 신자’라는 뜻이다.
현대 경제학도들이 새뮤얼슨을 피하기 힘든 이유는 그의 연구 분야가 여러 경제학 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그는 경제학방법론·경제성장론·후생경제학·재정이론·국제경제학·소비자이론·경제사 등의 분야에서 600편 이상의 논문을 썼다. MIT 출판부는 새뮤얼슨의 논문들을 7권으로 묶어 발행했다. 새뮤얼슨은 자신이 ‘경제학의 마지막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라고 생각했다. 같은 학과 동료가 뭘 하는지 같은 분야가 아니면 모르는 현실을 고려할 때 그의 말은 타당하다.
그러나 새뮤얼슨은 경제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스페셜리스트(specialist) 중의 스페셜리스트이기도 했다. 2009년 12월 15일자 뉴욕 타임스 칼럼에서 폴 크루그먼은 영국 역사가·철학자인 아이자이아 벌린(Isaiah Berlin)의 사상가 분류법을 빌려 고인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벌린은 ‘고슴도치와 여우(The Hedgehog and the Fox·1953)’라는 에세이에서 ‘많은 것을 두루 아는 사람’을 여우로, ‘중요한 한 가지를 깊이 아는 사람’을 고슴도치로 비유했다. 크루그먼에 따르면 새뮤얼슨은 ‘중요한 여러 가지를 많이 아는 사람’이었다. 평생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내놓기 힘든 게 학자의 인생인데 새뮤얼슨은 경제학에 8개의 아이디어를 내놨다는 것이다.
새뮤얼슨 교수가 ‘경제학자의 경제학자(an economist’s economist)’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운도 작용했다. 하이드파크고등학교에 다닐 때 한 선생의 영향으로 주식 시장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1932년 1월 2일 오전 8시를 자신이 경제학자로 태어난 시각으로 기억했다. 토머스 맬서스(1766~1834)의 인구론에 대한 강의를 시카고대에서 들은 날이다.
새뮤얼슨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천재성과 성실성을 겸했다. 유머 감각도 뛰어났다. 그에겐 읽은 책의 내용을 모두 기억하는 천부적인 머리가 있었다. 시카고대에 16세에 입학했으며 1985년 은퇴 후에도 연구를 계속했다. 하버드대 대학원 시절 이미 국제적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해야 할 것이면 빨리 하는 게 좋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연구할 때에는 세 시간 정도 집중한 다음 쉬면서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썼다. 새뮤얼슨은 미국 대선에 출마한 존 F. 케네디(1917~1963)의 ‘경제학 과외선생’이었다. 1961년 1월 5일 ‘미국 경제 상황에 대한 새뮤얼슨 보고서’가 케네디 당선인에게 제출됐다. 경기 침체로 치닫고 있는 미국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세금 감면이 필요하다는 내용이 포함됐다. 미국 제35대 대통령에 취임한 케네디는 새뮤얼슨에게 미 대통령경제자문위원회(CEA) 의장 자리를 제안했으나 새뮤얼슨은 “내가 믿는 것을 말하고 쓰는 일을 할 수 없는 자리를 바라지 않는다”며 거절했다. 새뮤얼슨은 ‘워싱턴DC에 일주일 이상 머물지 않았다’는 것을 자랑 삼아 말하기도 했다.
새뮤얼슨의 가계는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지금은 하버드대 학생의 30%가 유대인이다. 케네스 애로, 밀턴 프리드먼, 폴 크루그먼, 조셉 스티글리츠 등 내로라 하는 경제학자는 다수가 유대인이다. 새뮤얼슨이 하버드대 교수가 되지 못한 것은 그가 폴란드에서 이민 온 유대인이자 케인지언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그의 성격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말이다.
새뮤얼슨은 하버드대에서 조지프 슘페터(1883~1950), 바실리 레온티예프(1906~1999) 등 최고의 스승에게 배웠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기도 했다. 박사학위 논문 구두 심사가 끝났을 때 슘페터 교수가 레온티에프 교수에게 물었다. “우리가 통과했나요?” 새뮤얼슨 학생이 아니라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들을 심사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하버드는 새뮤엘슨에게 ‘고작’ 강사자리를 주었다. 한 달 후 MIT는 그에게 조교수 자리를 제안했다. 새뮤엘슨은 MIT에서 ‘고속 승진’했다. 1940년 조교수, 1944년 부교수, 1947년 정교수가 됐다. 25살 때 조교수, 32살 때 정교수가 된 것이다. 50여 년 동안 ‘전성기’ 때의 새뮤얼슨은 한 달에 한 편꼴로 주요 논문을 쏟아 냈다. 그가 MIT로 간 것은 하버드로서는 큰 손실이었다. MIT는 1941년 경제학 박사 과정을 개설했고 MIT 경제학과는 하버드·시카고·프린스턴·스탠퍼드를 멀찌감치 따돌리기도 했다. 60년대 중반에는 미 법무부의 독점금지 담당 부서가 MIT 경제학과가 국립과학재단(NSF)의 펠로십(fellowship) 을 너무 많이 받는다는 점을 우려할 정도가 됐다.
새뮤얼슨은 학자의 사회적 기능을 중시했다. 그는 뉴스위크에 1966년부터 1981년까지 칼럼을 썼다. 한국 독자들을 위해서는 YBM 발간 <시사영어연구> 에 2008년 12월까지 20여 년간 칼럼을 실었다. 37편이 2010년 『새뮤얼슨 교수의 마지막 강의』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그에 대한 평가가 칭찬 일변도는 아니다. 경제학자가 점쟁이는 아니지만 그의 예측은 여러 번 빗나갔다. 특히 소련 경제를 과대평가하며 『경제학』의 1989년판에선 이렇게 썼다. ‘많은 회의론자들이 예전에 믿었던 것과는 달리 소련 경제는 사회주의 통제경제가 작동하고 번성할 수 있다는 증거다’. 1970년대에는 매년 초 파이낸셜타임스(FT)에 미국의 신년 경기예측을 내놨는데 많은 경우 빗나갔다.
새뮤얼슨은 ‘수리경제학(mathematical economics)의 아버지’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경제분석의 기초(Fou-ndation of Economic Analysis)』(1941)는 수리경제학의 바이블이 됐다. 심하게 말한다면, 경제학은 응용수학의 한 분과처럼 돼 버렸다. 그가 경제학에서 창의성의 여지를 줄였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월스트리트발 금융 위기의 뿌리가 그가 주도한 경제학의 수리화에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당파성이 지적되기도 한다. 그는 ‘골수 민주당원’이었다. 조지 W. 부시의 8년이 불필요한 비극이라고 생각했으며 버락 오바마의 당선에 환호했다.
새뮤얼슨 교수는 복 많은 사람이었다. 1985년 70세 나이로 공식적으로는 은퇴했다. ‘은퇴’라는 단어는 그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은퇴 후에도 MIT로 계속 출근했다. 94세까지 살면서 별세 수개월 전까지 경제 칼럼을 썼다. 별다른 지병 없이 살다가 병석(病席)에 눕고 나서 얼마 안 돼 세상을 떴다. 그와 마찬가지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최고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빈곤과의 전쟁’의 주역이었으며, 35개의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 새뮤얼슨 교수는···
1915년 5월 15일: 미국 인디애나 주 게리에서 출생
1935년: 시카고대 학사
1936년: 하버드대 석사
1938년: 메리언과 결혼(4남 2녀와 손자·손녀 15명을 둠)
1941년: 하버드대 박사
1940~2009년: MIT 교수·명예교수
1947년: 『경제 분석의 기초(Foundations of Economic Analysis)』발간
1947년: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John Bates Clark Medal) 수상
1948년: 『경제학(Economics: An Introductory Analysis)』발간
1951년: 미국 계량경제학회 회장
1961년: 미국 경제학회 회장
1965~68년: 미국 국제경제학회 회장
1966년: MIT 최고의 영예인 ‘기관 교수(Institute Professor)’
1970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1978년: 아내 메리언 새뮤얼슨 사망
1981년: 리샤와 결혼
1996년: 미국 국가과학상(National Medal of Science) 수상
2009년 12월 13일: 매사추세츠 주 벨몬트에서 사망
※ 새뮤얼슨의 말말말 ● 나는 누가 어떤 나라의 법을 만드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그 나라의 경제학 교과서를 쓴다면 말이다.
● 모든 대의명분에는 얼마간의 비효율성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 행복이란 동료들보다 약간 돈이 많은 것이다. 학계에서는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 경제학자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았으나 경기에는 한 번도 나가지 않은 운동 선수와 같다.
● 정치인들은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 세계 금융위기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별로 아는 게 없다는 것이다.
● 진보는 모방에의 초대다.
● 크게 보면 아시아의 정부는 두 종류다. 젊고 취약한 민주 정부와 늙고 취약한 권위주의 정권이다.
● 투자는 페인트가 마르거나 잔디가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같아야 한다. 짜릿한 흥분을 바란다면 800달러를 들고 라스베이거스로 가라.
※ 김환영은…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울대 외교학과,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시사영어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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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인스학파 이론 접목시켜 신고전학파 이끌어
그러나 2009년 타계한 폴 새뮤얼슨 교수의 『경제학』을 읽지 않은 경제학도는 드물다. 1990년대, 2000년 대에 새로 나온 경제학 개론·원론서 곳곳에도 1970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새뮤얼슨 교수의 영향이 묻어 있다. 그가 ‘저작권’을 주장할 만하다.
1948년에 발간된 『경제학』은 당시 MIT에서 전공 필수였던 학부 경제학 강의 교재로 저술됐다. 명료한 것으로 유명한 『경제학』의 저술 목표는 ‘학생들이 경제학을 이해할 수 있고 즐길 수 있게’ 하는 것이었다. 19판까지 나왔다. 41개 언어로 번역돼 400만 부 이상 팔렸다. 새뮤얼슨 교수는 3년에 한 번꼴로 개정판을 냈다. 그는 1988년 AP통신과 인터뷰하면서 “좋은 책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지속적인 영향력을 갖게 되리라는 것은 몰랐다”고 말했다. 흥미로운 일화도 있다. 당시 세 쌍둥이가 태어나 생활비가 더 필요했는데 새뮤얼슨 교수의 친구들이 ‘책을 써서 돈 벌라’고 권유했다는 것이다.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인 에드워드 글레이저 교수는 2009년 12월 14일 뉴욕 타임스 기고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하버드대 박사 과정 학생들에게 첫 학기 미시경제이론을 가르친다. 적어도 한 시간에 다섯 번씩은 새뮤얼슨의 존재를 느끼게 된다.”
새뮤얼슨 교수가 2009년 12월 13일 매사추세츠 주 벨몬트에 있는 자택에서 별세했다고 그가 70년 가까이 근무한 매사추세츠공대(MIT)가 발표했다. 엔터테인먼트 분야 유명 인사의 일거수일투족이 큰 관심을 끄는 세태에서 위대한 학자의 사망은 조용히 묻히는 뉴스거리밖에 되지 않았다. 현대인의 관심이 온통 경제 문제에 쏠려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얄궂은 일이기도 하다. 그는 생각보다 우리 삶 가까이 있다. 국가와 기업의 정책 결정 배경에 그가 있다.
천재성과 성실성 겸한 경제학자로 평가받아
현대 경제학도들이 새뮤얼슨을 피하기 힘든 이유는 그의 연구 분야가 여러 경제학 영역에 걸쳐 있기 때문이다. 그는 경제학방법론·경제성장론·후생경제학·재정이론·국제경제학·소비자이론·경제사 등의 분야에서 600편 이상의 논문을 썼다. MIT 출판부는 새뮤얼슨의 논문들을 7권으로 묶어 발행했다. 새뮤얼슨은 자신이 ‘경제학의 마지막 제너럴리스트(generalist)’라고 생각했다. 같은 학과 동료가 뭘 하는지 같은 분야가 아니면 모르는 현실을 고려할 때 그의 말은 타당하다.
그러나 새뮤얼슨은 경제학의 거의 모든 분야에서 스페셜리스트(specialist) 중의 스페셜리스트이기도 했다. 2009년 12월 15일자 뉴욕 타임스 칼럼에서 폴 크루그먼은 영국 역사가·철학자인 아이자이아 벌린(Isaiah Berlin)의 사상가 분류법을 빌려 고인에 대한 찬사를 보냈다. 벌린은 ‘고슴도치와 여우(The Hedgehog and the Fox·1953)’라는 에세이에서 ‘많은 것을 두루 아는 사람’을 여우로, ‘중요한 한 가지를 깊이 아는 사람’을 고슴도치로 비유했다. 크루그먼에 따르면 새뮤얼슨은 ‘중요한 여러 가지를 많이 아는 사람’이었다. 평생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내놓기 힘든 게 학자의 인생인데 새뮤얼슨은 경제학에 8개의 아이디어를 내놨다는 것이다.
새뮤얼슨 교수가 ‘경제학자의 경제학자(an economist’s economist)’가 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운도 작용했다. 하이드파크고등학교에 다닐 때 한 선생의 영향으로 주식 시장에 관심을 갖게 됐다. 그는 1932년 1월 2일 오전 8시를 자신이 경제학자로 태어난 시각으로 기억했다. 토머스 맬서스(1766~1834)의 인구론에 대한 강의를 시카고대에서 들은 날이다.
새뮤얼슨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그는 천재성과 성실성을 겸했다. 유머 감각도 뛰어났다. 그에겐 읽은 책의 내용을 모두 기억하는 천부적인 머리가 있었다. 시카고대에 16세에 입학했으며 1985년 은퇴 후에도 연구를 계속했다. 하버드대 대학원 시절 이미 국제적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해야 할 것이면 빨리 하는 게 좋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연구할 때에는 세 시간 정도 집중한 다음 쉬면서 마음이 무의식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서도록 유도하는 방법을 썼다.
존 F. 케네디 대통령의 ‘경제학 과외선생’
새뮤얼슨의 가계는 폴란드계 유대인이다. 지금은 하버드대 학생의 30%가 유대인이다. 케네스 애로, 밀턴 프리드먼, 폴 크루그먼, 조셉 스티글리츠 등 내로라 하는 경제학자는 다수가 유대인이다. 새뮤얼슨이 하버드대 교수가 되지 못한 것은 그가 폴란드에서 이민 온 유대인이자 케인지언이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 그의 성격에도 문제가 있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말이다.
새뮤얼슨은 하버드대에서 조지프 슘페터(1883~1950), 바실리 레온티예프(1906~1999) 등 최고의 스승에게 배웠다. 청출어람(靑出於藍)이기도 했다. 박사학위 논문 구두 심사가 끝났을 때 슘페터 교수가 레온티에프 교수에게 물었다. “우리가 통과했나요?” 새뮤얼슨 학생이 아니라 하버드대 경제학과 교수들을 심사하는 자리였던 것이다.
하지만 하버드는 새뮤엘슨에게 ‘고작’ 강사자리를 주었다. 한 달 후 MIT는 그에게 조교수 자리를 제안했다. 새뮤엘슨은 MIT에서 ‘고속 승진’했다. 1940년 조교수, 1944년 부교수, 1947년 정교수가 됐다. 25살 때 조교수, 32살 때 정교수가 된 것이다. 50여 년 동안 ‘전성기’ 때의 새뮤얼슨은 한 달에 한 편꼴로 주요 논문을 쏟아 냈다. 그가 MIT로 간 것은 하버드로서는 큰 손실이었다. MIT는 1941년 경제학 박사 과정을 개설했고 MIT 경제학과는 하버드·시카고·프린스턴·스탠퍼드를 멀찌감치 따돌리기도 했다. 60년대 중반에는 미 법무부의 독점금지 담당 부서가 MIT 경제학과가 국립과학재단(NSF)의 펠로십(fellowship) 을 너무 많이 받는다는 점을 우려할 정도가 됐다.
새뮤얼슨은 학자의 사회적 기능을 중시했다. 그는 뉴스위크에 1966년부터 1981년까지 칼럼을 썼다. 한국 독자들을 위해서는 YBM 발간 <시사영어연구> 에 2008년 12월까지 20여 년간 칼럼을 실었다. 37편이 2010년 『새뮤얼슨 교수의 마지막 강의』라는 제목으로 출간됐다.
그에 대한 평가가 칭찬 일변도는 아니다. 경제학자가 점쟁이는 아니지만 그의 예측은 여러 번 빗나갔다. 특히 소련 경제를 과대평가하며 『경제학』의 1989년판에선 이렇게 썼다. ‘많은 회의론자들이 예전에 믿었던 것과는 달리 소련 경제는 사회주의 통제경제가 작동하고 번성할 수 있다는 증거다’. 1970년대에는 매년 초 파이낸셜타임스(FT)에 미국의 신년 경기예측을 내놨는데 많은 경우 빗나갔다.
새뮤얼슨은 ‘수리경제학(mathematical economics)의 아버지’다. 그의 박사학위 논문인 『경제분석의 기초(Fou-ndation of Economic Analysis)』(1941)는 수리경제학의 바이블이 됐다. 심하게 말한다면, 경제학은 응용수학의 한 분과처럼 돼 버렸다. 그가 경제학에서 창의성의 여지를 줄였다는 의견이 있는가 하면 심지어는 월스트리트발 금융 위기의 뿌리가 그가 주도한 경제학의 수리화에 있다는 주장도 있다.
그의 당파성이 지적되기도 한다. 그는 ‘골수 민주당원’이었다. 조지 W. 부시의 8년이 불필요한 비극이라고 생각했으며 버락 오바마의 당선에 환호했다.
새뮤얼슨 교수는 복 많은 사람이었다. 1985년 70세 나이로 공식적으로는 은퇴했다. ‘은퇴’라는 단어는 그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은퇴 후에도 MIT로 계속 출근했다. 94세까지 살면서 별세 수개월 전까지 경제 칼럼을 썼다. 별다른 지병 없이 살다가 병석(病席)에 눕고 나서 얼마 안 돼 세상을 떴다. 그와 마찬가지로 노벨 경제학상을 수상한 최고의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는 ‘빈곤과의 전쟁’의 주역이었으며, 35개의 명예 박사학위를 받았다.
※ 새뮤얼슨 교수는···
1915년 5월 15일: 미국 인디애나 주 게리에서 출생
1935년: 시카고대 학사
1936년: 하버드대 석사
1938년: 메리언과 결혼(4남 2녀와 손자·손녀 15명을 둠)
1941년: 하버드대 박사
1940~2009년: MIT 교수·명예교수
1947년: 『경제 분석의 기초(Foundations of Economic Analysis)』발간
1947년: 존 베이츠 클라크 메달(John Bates Clark Medal) 수상
1948년: 『경제학(Economics: An Introductory Analysis)』발간
1951년: 미국 계량경제학회 회장
1961년: 미국 경제학회 회장
1965~68년: 미국 국제경제학회 회장
1966년: MIT 최고의 영예인 ‘기관 교수(Institute Professor)’
1970년: 노벨경제학상 수상
1978년: 아내 메리언 새뮤얼슨 사망
1981년: 리샤와 결혼
1996년: 미국 국가과학상(National Medal of Science) 수상
2009년 12월 13일: 매사추세츠 주 벨몬트에서 사망
※ 새뮤얼슨의 말말말 ● 나는 누가 어떤 나라의 법을 만드는지 상관하지 않는다. 내가 그 나라의 경제학 교과서를 쓴다면 말이다.
● 모든 대의명분에는 얼마간의 비효율성을 감수할 만한 가치가 있다.
● 행복이란 동료들보다 약간 돈이 많은 것이다. 학계에서는 그리 힘든 일이 아니다.
● 경제학자들은 고도의 훈련을 받았으나 경기에는 한 번도 나가지 않은 운동 선수와 같다.
● 정치인들은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것을 사람들에게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이 듣고 싶어 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 세계 금융위기에 대해 우리가 아는 것은 우리가 별로 아는 게 없다는 것이다.
● 진보는 모방에의 초대다.
● 크게 보면 아시아의 정부는 두 종류다. 젊고 취약한 민주 정부와 늙고 취약한 권위주의 정권이다.
● 투자는 페인트가 마르거나 잔디가 자라는 것을 지켜보는 것과 같아야 한다. 짜릿한 흥분을 바란다면 800달러를 들고 라스베이거스로 가라.
※ 김환영은… 중앙일보 논설위원. 서울대 외교학과, 스탠퍼드대 중남미학 석사, 정치학 박사. 쓴 책으로 『마음고전』, 『세계사의 오리진을 만나다』 『세상이 주목한 책과 저자』 등이 있다.시사영어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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