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상 더 떨어지는 ‘사’자 전문직] 쇠퇴기 지나 쇠락기로 접어드나?
[위상 더 떨어지는 ‘사’자 전문직] 쇠퇴기 지나 쇠락기로 접어드나?
과잉 공급과 높은 임대료에 ‘몸값’ 떨어져… 대집단·부유층만 살아남는 양극화 심화
변호사·의사·공인회계사·약사 등의 이른바 ‘사’자 전문직은 높은 연봉과 사회적 지위가 보장된 직업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선망의 직업’이나 ‘이상적인 배우자감’을 꼽을 때 빠짐없이 거론된 직종이다.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들 전문직에 대한 평가도 예전과 확 달라졌다. 평생이 보장된 직업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사’자 전문직이 되기 위한 시간과 비용 투자까지 고려하면 과거 대비 메리트가 크게 떨어졌다는 분석이다. 같은 전문직이더라도 집안의 재산 등 이른바 ‘백그라운드’에 따라 명암이 엇갈리며, 더 이상 직업 이름만으로 미래가 보장되지도 않는다. 지난해 초 서울 소재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졸업한 조주영(31·가명)씨는 같은 해 변호사시험(변시)에 합격해 많은 축하를 받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조씨는 그로부터 1년 가까이 지난 올 2월에야 국내 한 법무법인에 취업했다. 그 사이 조씨가 한 일은 여느 취업준비생들처럼 이렇다 할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구직 활동을 이어간 것이었다. 주변에선 “보는 눈이 너무 높아져서 그런 게 아니냐”고들 했지만 조씨 생각은 다르다. 그는 “요즘 법무법인이나 대기업 모두 신입 대신 경력 변호사 위주로 채용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서 경력이 없으면 취업문이 극도로 좁다”며 “변시에 합격하고도 나처럼 ‘백수 변호사’로 시간을 허비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말했다.
실제 채용 현장에서도 과거와는 확 달라진 분위기를 실감 중이다. 황명수(53·가명) 부장은 재계 톱5 대기업 중 한 곳에서 20년 넘게 일한 베테랑 인사담당자다. 그는 기자와 만나 다음과 같이 전했다. “옛날 같았으면 부장급 대우를 약속하고 비싼 값에 어렵게 ‘모셔왔을’ 변호사나 공인회계사(이하 회계사) 자격증 소지자를 이젠 대리급으로 채용합니다. 그래도 항상 지원자가 많아서 (채용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젊었을 때 본인도 전문직이 되길 꿈꿨다는 황씨는 이런 격세지감에 묘한 안도감마저 느낀다고 토로했다. “전문직에 종사하고 싶어 하는 대학생 아들에게 해외 유학 등 다른 길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그 편이 자녀의 미래를 위한, 훨씬 가치 있는 투자라는 생각이 들어서죠.” 이른바 ‘사’자 직업의 선두주자로 꼽히던 변호사의 이 같은 위기는 기본적으로 과잉 공급과 관련이 깊다는 분석이다. 지난 2009년 로스쿨 제도 도입 이래로 국내에 등록된 변호사가 매년 1500여 명씩 급증하면서 2015년 2만 명을 넘어선 것으로 추산돼서다. 대한변호사협회에 따르면 국내 변호사는 지난 1월 말 기준 약 2만5880명으로 이보다도 증가했다. 변협은 2022년 무렵 등록 변호사 수가 3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고 있다. 이에 반해 변호사를 필요로 하는 시장 규모는 과잉 공급 우려를 해소할 만큼 커지지 않았다. 서울지방변호사회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변호사 1인당 월평균 사건 수임 건수는 1.2건에 불과했다.
이러다 보니 부푼 꿈을 안고 시장에 나온 신입 변호사들 상당수는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변협 관계자는 “자체 집계한 결과 국내 인턴 변호사들의 평균 월급은 세전 150만원가량으로 최저임금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어렵사리 정직원이 돼도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처우 때문에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거꾸로 고용주의 입장인 법무법인이나 기업 법무팀으로선 인건비를 대폭 절감하고도 우수 인재를 선별해서 뽑을 수 있는 상황이다. 무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공공 부문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과거엔 변호사를 특정직 5급 공무원으로 채용했던 국가정보원은 변호사 임용 직급을 7급으로 낮춰 최근 적용 중이다.
국정원 내 공무원 대부분이 7급 공채로 입사하는 것을 고려하면 변호사들은 시간과 비용을 더 많이 들여 전문직이 되고도 별 이점 없이 직장생활 첫 발을 떼는 셈이다. 국내 로스쿨 등록금은 연평균 1500만원에 달할 만큼 고가인 데다 졸업까지도 최소 3년이 걸린다. 이 때문에 ‘로스쿨은 부유층의 전유물’이라는 비판론이 매년 제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로스쿨 재학·졸업생들은 변시 합격률이 해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데 따른 이중고(二重苦)마저 호소하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2012년 87.2%였던 변시 합격률은 2014년 67.6%, 2016년 55.2%, 지난해 49.4%로 하락세가 뚜렷하다. 이는 매년 응시자 수가 급증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깊다. 지난 2012년 1665명이었던 응시자가 지난해는 3240명으로 6년 만에 배로 늘었다. 변시 합격률은 국내 로스쿨 입학 정원 대비 75%선으로 법무부에 의해 결정되고 있어 로스쿨 입학자와 변시 응시자가 많을수록 합격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에 로스쿨과 변호사 단체 사이 입장도 엇갈리고 있다. 이형규 한양대 로스쿨 교수는 “사법시험 폐지로 사법연수원 배출 변호사 수가 줄어든 것과, 인재 양성을 통한 법조 서비스 향상이라는 로스쿨 도입 당시의 취지 등을 고려해 변시 합격률을 응시자 대비 최소 60%선까지 높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변협 측은 변호사의 과잉 공급 해소와 시장 정상화를 위해서라도 현재 1500여 명인 연간 변시 합격자 수를 약 1000명으로 줄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러는 사이 로스쿨에 이미 재학 중인, 혹은 졸업해서도 변시에 합격하지 못한 수험생들은 ‘불안한 미래’에 떨며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변호사 못잖은 고소득 전문직으로 인식되던 회계사 쪽도 최근 사정이 좋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과잉 공급 여파가 작용해서다. 금융감독원이 지난해 9월 펴낸 분석 자료에 따르면 국내 등록 회계사는 지난해 3월 말 기준 2만59명으로 사상 첫 2만 명을 넘어섰다. 전년 대비 3.9% 증가한 숫자로, 2006년 말 1만55명에선 11년여 만에 배로 늘었다. 금융위원회가 2000년대 들어 기업들의 회계 투명성 제고와 구조조정 업무 증가를 이유로 회계사시험 합격 인원을 대폭 늘리면서 이와 같은 결과로 이어졌다. 올해도 회계사 최소 선발 예정 인원이 13년 만에 최대 규모인 1000명으로 의결된 가운데, 회계사들은 반발하고 있다. 물론 과잉 공급에 따른 시장 위축 자체를 우려해서이기도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다. 회계법인 등이 과잉 공급을 믿고 소속 회계사들에게 과도한 업무와 책임을 떠넘기는 탓에 경력자는 이탈하고, 저(低)연차 인력만 남아 제대로 된 처우를 못 받고 일하면서 감사 품질은 낮아지는 악순환이 반복된다는 것이 회계사들의 지적이다. 실제로 국내 회계사 휴업률은 2005년 23.7%에서 2010년 30.0%, 지난해 36.2%(8월 기준)로 계속 높아지고 있다. 2만여 명 가운데 7000~8000명의 회계사가 자격증을 가지고도 회계법인이나 감사반에서 기업 회계감사를 하지 않고 일반 직장에 취직하는 등 ‘본업’과 괴리됐다는 의미다.
한편 지난해 청년공인회계사회와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조가 회계사 6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31.8%는 업무 성수기인 1~3월과 7~8월 5개월 간 일평균 ‘15시간씩 일한다’고, 23.1%는 ‘12시간 이상 일한다’고 응답했다. 격무에 지친 회계사들이 자진해서 휴업할 만큼 열악한 환경이라는 얘기다. 국내 한 회계법인에 소속된 장연우(35·가명)씨는 “회계사 증원보다 열악한 근로환경과 처우 개선 필요성이 더 크다는 게 나를 비롯한 주위 회계사들의 현재 생각”이라고 말했다. 장씨는 “연봉은 비슷한 연차의 대기업 직원들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데 잦은 야근 등으로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 유지가 힘들어 심각하게 휴업을 고민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총희 청년공인회계사회장은 “회계사가 저연차일수록 일은 많고 수입은 적은 ‘상후하박’ 구조로 운영되는 집단이라는 점도 휴업률 상승의 주된 요인일 것”으로 분석했다.
이처럼 과중한 업무와 책임, 이에 비해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처우 문제 등으로 회계사의 인기도 예전만 못한 채 시들하다. 3월 11일 금감원에 따르면 올해 회계사 1차 시험 응시자는 8513명으로 최근의 감소세(2016년 9246명, 2017년 9073명, 지난해 8778명)를 이어갔다. 경쟁률도 올해가 4.3대 1로 지난해(5.2대 1)보다 크게 낮아졌다. 회계사들은 이외에도 높은 임금을 보장하는 일부 대형 회계법인에만 우수 인재들이 쏠리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 심화를 우려하고 있다. 중소 규모의 회계법인은 휴업률 상승에다 구직자 발걸음이 제한적으로 오는 악조건 속에 ‘풍요 속의 빈곤’처럼 인력난을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국세청에 따르면 회계사 외에도 세무사·관세사·법무사·변리사·건축사·감정평가사 같은 ‘사’자 전문직 개인 사업자 중 약 15%의 월평균 수입이 200만원을 밑돌 만큼 양극화 현상이 심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연계열 최우수 인재들로 구성돼 전통적으로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는 전문직’이라는 인상을 주는 의사는 어떨까. 의사의 경우 고령화 사회 진입과 사회 전반의 높은 신뢰도를 바탕으로 수요가 탄탄히 뒷받침돼 여전히 선호되는 전문직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선진국에 비해 이공계 홀대 현상이 두드러지는 국내 실정상 더 선호되는 측면도 있다. 소득 수준도 전문직 가운데 최상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보건의료기관에서 일하는 의사의 월평균 수입은 2011년 약 1007만원에서 2016년 약 1305만원으로 연평균 5.3% 정도 증가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연구팀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등록된 소득 자료를 이용, 집계한 결과다. 같은 기간 국내 전체 근로자의 월평균 수입이 281만원가량이었음을 고려하면 의사가 일반 월급쟁이 대비 4.6배 수준의 소득을 올렸다는 계산이 나온다. 연봉으로는 약 1억5656만원에 달했다. 변호사나 회계사 등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상황이 나은 편이라는 얘기다. 문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양극화와 워라밸 문제가 부각되고 있는 데 있다. 전자는 자기 병원이 있는 개업의(開業醫), 후자는 페이 닥터(월급쟁이 의사)가 각각 주로 겪는 문제다. 전자의 경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의원급 의료기관(동네병원)의 개업 대비 폐업률은 60.2%에 달했다. 1959곳이 문을 열었고 1179곳이 문을 닫았다. 서울시내 주요 상권에서 개인병원을 운영하던 성형외과 의사 김현우(46·가명)씨도 지난해 폐업한 경우 중 하나였다. “의료사고를 냈다” “병원장의 건강이 악화됐다”는 등의 흉흉한 소문이 기존 고객들 사이에 나돌았지만 김씨는 다름 아닌 임대료 문제로 남몰래 끙끙 앓고 있었다. “인근에 성형외과가 많아지면서 경쟁이 치열해졌는데 적자가 얼마간 지속되다 보니 못 버티겠더군요. 임대료는 오를 만큼 오른 상태인데 인건비와 운영비까지 고려하면 도저히 수지타산이 안 맞았습니다.” 일반 자영업자들이 겪는 ‘젠트리피케이션(둥지 내몰림, 즉 상가 임대료 상승 등으로 기존 상인들이 해당 상권을 떠나는 현상)’을 개업의들도 똑같이 겪는다는 얘기다. 시장조사업체 부동산114에 따르면 지난해 4분기 서울 전체 상가 임대료는 전년 동기 대비 평균 5.0% 감소했지만, 이전까지 전반적으로 급격히 올라 자영업자들의 애를 태운 바 있다. 같은 기간 관악구(22.5%)와 동대문구(19.0%), 성동구(18.0%) 등은 임대료가 큰 폭으로 올라 평균치와 대비되기도 했다.
경기도 광교에서 최근 개업한 정형외과 의사 최선욱(37·가명)씨도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 “개업하느라 (은행에) 진 빚만 거의 10억원입니다. 직업만 의사지 사회초년생이나 다름없는데 솔직히 ‘회수’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죠. 요즘은 의료장비 가격까지 올라서 금전적인 고민이 많습니다.” 최씨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일부 동기들이 집안에서 지원을 받아 빚 없이 개업하는 데 많은 부러움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최씨의 아내도 “의사 남편을 둬서 좋겠다”는 주위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빚 갚으려면 계속 맞벌이를 해야 한다”고 응수한다는 게 최씨의 전언이다.
개업하지 않고 페이닥터로 남더라도 고민은 많다. 고질적인 워라밸 문제 때문이다. 대한의사협회에 따르면 2016년 기준 국내 의사들의 연평균 근로시간은 2408시간으로 일반 근로자(2069시간)보다 16%가량 길었다. 대부분이 주 5일 근무는 사실상 엄두도 못 낸다. 의사들 중 66.5%는 주 6일, 15.3%는 주 7일 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18.2%만이 주말 이틀을 온전히 쉬었다. 의협 관계자는 “국내에서의 외래 진료일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치의 2배 수준인 만큼 의사들이 격무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며 “이에 비해 의료 수가(酬價)는 턱없이 낮아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고 지적했다. 의협은 올 들어 진찰료 30% 인상을 요구했지만 복지부가 이를 거부해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다.
이런 고민은 한의사나 약사들도 비슷하게 갖고 있다. 약사인 양진아(30·가명)씨는 외국계 제약사 마케팅 부서에서 3년간 일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느껴 지난해 자진 퇴사했다. 이후 반 년째 동네약국에서 ‘알바(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면서 재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자신을 전형적인 ‘흙수저(집안의 경제적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 만큼 넉넉지 못한 형편에서 자라난 경우를 가리키는 신조어)’로 지칭한 양씨는 “취업 밖에 답이 없는 상황이지만, 그마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제약 산업이 성장하면서 일자리는 늘어났지만 베테랑 경력의 의사·약사들이 워낙 많이 몰리니까요.” 양씨처럼 일자리를 찾지 못한 약사들은 동네약국 알바 채용에도 일부 적극 지원하면서 구직활동의 어려움을 실감 중이다. 그간 약사는 안정적인 근로환경에 워라밸이 좋기로 유명한 전문직이었지만 그것도 옛날 얘기다. 양씨가 일하는 약국 영업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로 하루 13시간씩이다. 불경기에 매출과 임대료 사이 수지를 맞추기 위해 편의점처럼 24시간 영업하는 약국도 급증했다. 폐업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결국 같은 ‘사’자 전문직이어도 ▶치열한 경쟁을 뚫고 판사·검사 같은 공직자가 되거나 ▶집안에 돈이 넉넉히 있어 대출금과 임대료의 고충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업이 가능하거나 ▶처우 걱정이 없는 대규모 집단에 속한 극소수의 경우만 과거와 비슷한 위상을 유지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는 분석이다. 대다수는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수입으로 인한 생계유지, 워라밸 문제로 고통을 겪기가 쉬워졌다. 전문직이 되기 위해 들였던 시간과 비용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전문가들은 이를 단순히 ‘일부 전문직, 그들만의 위기’ 정도로 치부해선 안 될 중요한 문제라고 지적한다. 익명을 원한 모 대학교수는 “의사·변호사 등 ‘사’자 직업은 건국 이래로 대부분의 일반 가정에서 대표적인 부러움의 대상이자 자랑거리였다. 바꿔 말해서 사업 성공 등 아주 특수한 경우가 아니라면 빈곤층이나 중산층이 상류사회로 진입하기 위한 ‘승산 있는 사다리’였던 셈”이라며 “굳건했던 그 사다리가 무너지면서 이들이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 하고 노력해도 기존 부유층의 지위엔 도전할 수 없는, 고착화한 계급사회가 후세로 대물림되고 있는 것”으로 해석했다. 과거엔 ‘사’자 직업들을 통해 빈곤층도 중산층으로, 다시 상류층으로 거듭날 수 있다는 희망이 범사회적으로 존재했지만 그런 희망이 계속해서 소실되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최근의 한국경제학회 주최 세미나에서 “자체 분석 결과 국내 하위가구 출신이 상위 20% 내 소득 획득에 실패할 확률이 2000년대 초 15~20%에서 2013년 기준 35%까지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근로시장의 기회 불평등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전문직의 위기와도 무관치 않은 현상으로 풀이된다. 이는 눈앞의 경제성장률 저하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라는 지적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사회적 계층 이동의 역동성이 사라지면 개인이 인적 자본 투자에 집중할 수 없게 되고, 이는 국가 경제성장 동력이 상실될 개연성이 커지게 됨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로스쿨과 의료 수가 등의 제도적 개선, 부동산 시장의 장기적인 정상화, 더 근본적으로는 교육 기회의 불평등 문제 해소와 근로문화의 상향평준화에 힘쓰면서 빈곤·중산층에 속한 다수 인재들이 흔들림 없이 노력할 수 있도록 국가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한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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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호사·의사·공인회계사·약사 등의 이른바 ‘사’자 전문직은 높은 연봉과 사회적 지위가 보장된 직업이었다. 한국 사회에서 ‘선망의 직업’이나 ‘이상적인 배우자감’을 꼽을 때 빠짐없이 거론된 직종이다. 새삼스러운 이야기는 아니지만 이들 전문직에 대한 평가도 예전과 확 달라졌다. 평생이 보장된 직업은 옛말이 된 지 오래다. ‘사’자 전문직이 되기 위한 시간과 비용 투자까지 고려하면 과거 대비 메리트가 크게 떨어졌다는 분석이다. 같은 전문직이더라도 집안의 재산 등 이른바 ‘백그라운드’에 따라 명암이 엇갈리며, 더 이상 직업 이름만으로 미래가 보장되지도 않는다. 지난해 초 서울 소재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을 졸업한 조주영(31·가명)씨는 같은 해 변호사시험(변시)에 합격해 많은 축하를 받았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조씨는 그로부터 1년 가까이 지난 올 2월에야 국내 한 법무법인에 취업했다. 그 사이 조씨가 한 일은 여느 취업준비생들처럼 이렇다 할 일자리를 얻지 못한 채 구직 활동을 이어간 것이었다. 주변에선 “보는 눈이 너무 높아져서 그런 게 아니냐”고들 했지만 조씨 생각은 다르다. 그는 “요즘 법무법인이나 대기업 모두 신입 대신 경력 변호사 위주로 채용하려는 경향이 뚜렷해서 경력이 없으면 취업문이 극도로 좁다”며 “변시에 합격하고도 나처럼 ‘백수 변호사’로 시간을 허비하는 친구들이 많다”고 말했다.
실제 채용 현장에서도 과거와는 확 달라진 분위기를 실감 중이다. 황명수(53·가명) 부장은 재계 톱5 대기업 중 한 곳에서 20년 넘게 일한 베테랑 인사담당자다. 그는 기자와 만나 다음과 같이 전했다. “옛날 같았으면 부장급 대우를 약속하고 비싼 값에 어렵게 ‘모셔왔을’ 변호사나 공인회계사(이하 회계사) 자격증 소지자를 이젠 대리급으로 채용합니다. 그래도 항상 지원자가 많아서 (채용에) 어려움이 없습니다.” 젊었을 때 본인도 전문직이 되길 꿈꿨다는 황씨는 이런 격세지감에 묘한 안도감마저 느낀다고 토로했다. “전문직에 종사하고 싶어 하는 대학생 아들에게 해외 유학 등 다른 길을 권유하고 있습니다. 차라리 그 편이 자녀의 미래를 위한, 훨씬 가치 있는 투자라는 생각이 들어서죠.”
“인턴 변호사 평균 월급 세전 150만원선”
이러다 보니 부푼 꿈을 안고 시장에 나온 신입 변호사들 상당수는 좌절감을 느끼고 있다. 변협 관계자는 “자체 집계한 결과 국내 인턴 변호사들의 평균 월급은 세전 150만원가량으로 최저임금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고 말했다. 어렵사리 정직원이 돼도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처우 때문에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거꾸로 고용주의 입장인 법무법인이나 기업 법무팀으로선 인건비를 대폭 절감하고도 우수 인재를 선별해서 뽑을 수 있는 상황이다. 무리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공공 부문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과거엔 변호사를 특정직 5급 공무원으로 채용했던 국가정보원은 변호사 임용 직급을 7급으로 낮춰 최근 적용 중이다.
국정원 내 공무원 대부분이 7급 공채로 입사하는 것을 고려하면 변호사들은 시간과 비용을 더 많이 들여 전문직이 되고도 별 이점 없이 직장생활 첫 발을 떼는 셈이다. 국내 로스쿨 등록금은 연평균 1500만원에 달할 만큼 고가인 데다 졸업까지도 최소 3년이 걸린다. 이 때문에 ‘로스쿨은 부유층의 전유물’이라는 비판론이 매년 제기되고 있다. 이런 가운데 로스쿨 재학·졸업생들은 변시 합격률이 해가 갈수록 떨어지고 있는 데 따른 이중고(二重苦)마저 호소하고 있다. 교육부에 따르면 2012년 87.2%였던 변시 합격률은 2014년 67.6%, 2016년 55.2%, 지난해 49.4%로 하락세가 뚜렷하다. 이는 매년 응시자 수가 급증하고 있는 것과 관련이 깊다. 지난 2012년 1665명이었던 응시자가 지난해는 3240명으로 6년 만에 배로 늘었다. 변시 합격률은 국내 로스쿨 입학 정원 대비 75%선으로 법무부에 의해 결정되고 있어 로스쿨 입학자와 변시 응시자가 많을수록 합격률은 떨어질 수밖에 없다.
이에 로스쿨과 변호사 단체 사이 입장도 엇갈리고 있다. 이형규 한양대 로스쿨 교수는 “사법시험 폐지로 사법연수원 배출 변호사 수가 줄어든 것과, 인재 양성을 통한 법조 서비스 향상이라는 로스쿨 도입 당시의 취지 등을 고려해 변시 합격률을 응시자 대비 최소 60%선까지 높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반면 변협 측은 변호사의 과잉 공급 해소와 시장 정상화를 위해서라도 현재 1500여 명인 연간 변시 합격자 수를 약 1000명으로 줄여야 한다는 입장이다. 이러는 사이 로스쿨에 이미 재학 중인, 혹은 졸업해서도 변시에 합격하지 못한 수험생들은 ‘불안한 미래’에 떨며 혼란스러워 하고 있다.
변호사 못잖은 고소득 전문직으로 인식되던 회계사 쪽도 최근 사정이 좋지 못하다. 마찬가지로 과잉 공급 여파가 작용해서다. 금융감독원이 지난해 9월 펴낸 분석 자료에 따르면 국내 등록 회계사는 지난해 3월 말 기준 2만59명으로 사상 첫 2만 명을 넘어섰다. 전년 대비 3.9% 증가한 숫자로, 2006년 말 1만55명에선 11년여 만에 배로 늘었다. 금융위원회가 2000년대 들어 기업들의 회계 투명성 제고와 구조조정 업무 증가를 이유로 회계사시험 합격 인원을 대폭 늘리면서 이와 같은 결과로 이어졌다. 올해도 회계사 최소 선발 예정 인원이 13년 만에 최대 규모인 1000명으로 의결된 가운데, 회계사들은 반발하고 있다.
회계사 시장에도 과잉 공급 찬바람
한편 지난해 청년공인회계사회와 전국사무금융서비스노조가 회계사 600명을 상대로 설문조사한 결과 31.8%는 업무 성수기인 1~3월과 7~8월 5개월 간 일평균 ‘15시간씩 일한다’고, 23.1%는 ‘12시간 이상 일한다’고 응답했다. 격무에 지친 회계사들이 자진해서 휴업할 만큼 열악한 환경이라는 얘기다. 국내 한 회계법인에 소속된 장연우(35·가명)씨는 “회계사 증원보다 열악한 근로환경과 처우 개선 필요성이 더 크다는 게 나를 비롯한 주위 회계사들의 현재 생각”이라고 말했다. 장씨는 “연봉은 비슷한 연차의 대기업 직원들과 별 차이가 나지 않는데 잦은 야근 등으로 ‘워라밸(일과 생활의 균형)’ 유지가 힘들어 심각하게 휴업을 고민 중”이라고 덧붙였다. 이총희 청년공인회계사회장은 “회계사가 저연차일수록 일은 많고 수입은 적은 ‘상후하박’ 구조로 운영되는 집단이라는 점도 휴업률 상승의 주된 요인일 것”으로 분석했다.
이처럼 과중한 업무와 책임, 이에 비해 기대에 크게 못 미치는 처우 문제 등으로 회계사의 인기도 예전만 못한 채 시들하다. 3월 11일 금감원에 따르면 올해 회계사 1차 시험 응시자는 8513명으로 최근의 감소세(2016년 9246명, 2017년 9073명, 지난해 8778명)를 이어갔다. 경쟁률도 올해가 4.3대 1로 지난해(5.2대 1)보다 크게 낮아졌다. 회계사들은 이외에도 높은 임금을 보장하는 일부 대형 회계법인에만 우수 인재들이 쏠리는 ‘부익부 빈익빈’ 현상 심화를 우려하고 있다. 중소 규모의 회계법인은 휴업률 상승에다 구직자 발걸음이 제한적으로 오는 악조건 속에 ‘풍요 속의 빈곤’처럼 인력난을 겪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 국세청에 따르면 회계사 외에도 세무사·관세사·법무사·변리사·건축사·감정평가사 같은 ‘사’자 전문직 개인 사업자 중 약 15%의 월평균 수입이 200만원을 밑돌 만큼 양극화 현상이 심화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연계열 최우수 인재들로 구성돼 전통적으로 ‘부와 명예를 동시에 거머쥐는 전문직’이라는 인상을 주는 의사는 어떨까. 의사의 경우 고령화 사회 진입과 사회 전반의 높은 신뢰도를 바탕으로 수요가 탄탄히 뒷받침돼 여전히 선호되는 전문직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선진국에 비해 이공계 홀대 현상이 두드러지는 국내 실정상 더 선호되는 측면도 있다. 소득 수준도 전문직 가운데 최상위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지난해 보건복지부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전국 보건의료기관에서 일하는 의사의 월평균 수입은 2011년 약 1007만원에서 2016년 약 1305만원으로 연평균 5.3% 정도 증가했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 연구팀이 국민건강보험공단에 등록된 소득 자료를 이용, 집계한 결과다. 같은 기간 국내 전체 근로자의 월평균 수입이 281만원가량이었음을 고려하면 의사가 일반 월급쟁이 대비 4.6배 수준의 소득을 올렸다는 계산이 나온다. 연봉으로는 약 1억5656만원에 달했다. 변호사나 회계사 등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상황이 나은 편이라는 얘기다. 문제는 해를 거듭할수록 양극화와 워라밸 문제가 부각되고 있는 데 있다. 전자는 자기 병원이 있는 개업의(開業醫), 후자는 페이 닥터(월급쟁이 의사)가 각각 주로 겪는 문제다. 전자의 경우,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지난해 국내 의원급 의료기관(동네병원)의 개업 대비 폐업률은 60.2%에 달했다. 1959곳이 문을 열었고 1179곳이 문을 닫았다.
지난해 동네병원 폐업률 60.2%
경기도 광교에서 최근 개업한 정형외과 의사 최선욱(37·가명)씨도 비슷한 고민을 안고 있다. “개업하느라 (은행에) 진 빚만 거의 10억원입니다. 직업만 의사지 사회초년생이나 다름없는데 솔직히 ‘회수’나 제대로 할 수 있을지 걱정이죠. 요즘은 의료장비 가격까지 올라서 금전적인 고민이 많습니다.” 최씨는 부유한 환경에서 자란 일부 동기들이 집안에서 지원을 받아 빚 없이 개업하는 데 많은 부러움을 느낀다고 토로했다. 대기업에 다니는 최씨의 아내도 “의사 남편을 둬서 좋겠다”는 주위 말에 쓴웃음을 지으며 “빚 갚으려면 계속 맞벌이를 해야 한다”고 응수한다는 게 최씨의 전언이다.
개업하지 않고 페이닥터로 남더라도 고민은 많다. 고질적인 워라밸 문제 때문이다. 대한의사협회에 따르면 2016년 기준 국내 의사들의 연평균 근로시간은 2408시간으로 일반 근로자(2069시간)보다 16%가량 길었다. 대부분이 주 5일 근무는 사실상 엄두도 못 낸다. 의사들 중 66.5%는 주 6일, 15.3%는 주 7일 일하는 것으로 조사됐다. 18.2%만이 주말 이틀을 온전히 쉬었다. 의협 관계자는 “국내에서의 외래 진료일 수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평균치의 2배 수준인 만큼 의사들이 격무에 시달릴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며 “이에 비해 의료 수가(酬價)는 턱없이 낮아 질 좋은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데 애를 먹고 있다”고 지적했다. 의협은 올 들어 진찰료 30% 인상을 요구했지만 복지부가 이를 거부해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되고 있다.
이런 고민은 한의사나 약사들도 비슷하게 갖고 있다. 약사인 양진아(30·가명)씨는 외국계 제약사 마케팅 부서에서 3년간 일하다가 적성에 맞지 않는다고 느껴 지난해 자진 퇴사했다. 이후 반 년째 동네약국에서 ‘알바(아르바이트)생’으로 일하면서 재취업을 준비하고 있다. 자신을 전형적인 ‘흙수저(집안의 경제적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 만큼 넉넉지 못한 형편에서 자라난 경우를 가리키는 신조어)’로 지칭한 양씨는 “취업 밖에 답이 없는 상황이지만, 그마저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제약 산업이 성장하면서 일자리는 늘어났지만 베테랑 경력의 의사·약사들이 워낙 많이 몰리니까요.” 양씨처럼 일자리를 찾지 못한 약사들은 동네약국 알바 채용에도 일부 적극 지원하면서 구직활동의 어려움을 실감 중이다. 그간 약사는 안정적인 근로환경에 워라밸이 좋기로 유명한 전문직이었지만 그것도 옛날 얘기다. 양씨가 일하는 약국 영업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10시까지로 하루 13시간씩이다. 불경기에 매출과 임대료 사이 수지를 맞추기 위해 편의점처럼 24시간 영업하는 약국도 급증했다. 폐업 사례도 속출하고 있다.
결국 같은 ‘사’자 전문직이어도 ▶치열한 경쟁을 뚫고 판사·검사 같은 공직자가 되거나 ▶집안에 돈이 넉넉히 있어 대출금과 임대료의 고충으로부터 자유로운 개업이 가능하거나 ▶처우 걱정이 없는 대규모 집단에 속한 극소수의 경우만 과거와 비슷한 위상을 유지할 수 있는 시대가 됐다는 분석이다. 대다수는 기대에 훨씬 못 미치는 수입으로 인한 생계유지, 워라밸 문제로 고통을 겪기가 쉬워졌다. 전문직이 되기 위해 들였던 시간과 비용을 고려하면 더 그렇다.
계층 이동 역동성 보장해야
실제로 주병기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최근의 한국경제학회 주최 세미나에서 “자체 분석 결과 국내 하위가구 출신이 상위 20% 내 소득 획득에 실패할 확률이 2000년대 초 15~20%에서 2013년 기준 35%까지 상승한 것으로 나타났다”며 “근로시장의 기회 불평등 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분석했다. 전문직의 위기와도 무관치 않은 현상으로 풀이된다. 이는 눈앞의 경제성장률 저하만큼이나 심각한 문제라는 지적이다. 성태윤 연세대 경제학부 교수는 “사회적 계층 이동의 역동성이 사라지면 개인이 인적 자본 투자에 집중할 수 없게 되고, 이는 국가 경제성장 동력이 상실될 개연성이 커지게 됨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로스쿨과 의료 수가 등의 제도적 개선, 부동산 시장의 장기적인 정상화, 더 근본적으로는 교육 기회의 불평등 문제 해소와 근로문화의 상향평준화에 힘쓰면서 빈곤·중산층에 속한 다수 인재들이 흔들림 없이 노력할 수 있도록 국가적으로 뒷받침해줘야 한다는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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