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아웃 감수한 명분싸움 … 한국 콘텐트 위한 길 맞나
“한국 콘텐트 질 위한 싸움” … 한정된 가입자 점유율 뺏는 구조
콘텐트 가치 둘러싼 인식 개선 없인 미디어 업계 개혁 기대 어려워
콘텐트 가치를 둘러싼 업계의 갈등이 확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당장 LG유플러스의 OTT 서비스 ‘U+모바일tv’의 고객은 CJ ENM의 채널을 볼 수 없게 됐다. 콘텐트 비용을 둘러싼 협상이 결렬됐기 때문이다.
이 같은 블랙아웃(송출 중단)은 미디어 업계 전반으로 번질 공산이 크다. KT의 OTT 서비스 ‘시즌’ 역시 CJ ENM 측과 줄다리기 협상을 하고 있다. 전체 방송시장의 점유율 과반을 돌파한 IPTV 사업자와의 회담은 더 첩첩산중이다. 양측은 서로를 비방하는 입장문을 번갈아 배포하면서 수위 높은 설전을 벌였다.
갈등 구도는 간단하다. CJ ENM은 자사 콘텐트의 가치가 높으니 사용 비용을 올려달라는 거고, 콘텐트를 고객에 전달하고 유통하는 OTT·IPTV 같은 플랫폼 사업자들은 값을 마냥 올릴 순 없다는 거다.
갈등에 따른 불편함은 순전히 시청자의 몫이다. 협상이 틀어지면 CJ ENM은 해당 플랫폼에 콘텐트를 공급하지 않는다. 블랙아웃이다. 협상을 원만히 매조짓는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콘텐트 값이 올라가면 플랫폼 역시 언제든 고객에게 비용 부담을 떠넘길 수 있다.
“콘텐트 비용을 올려달라”며 갈등에 불을 붙인 건 CJ ENM이다. 이 회사가 소비자 불편이란 위험부담을 감수하면서까지 대립 상황을 끌고 가는 데는 이유가 있다. CJ ENM이 밝힌 대의명분을 보자. “저가의 프로그램 사용료는 방송사의 콘텐트 투자 위축을 불러오고, 이로 인해 콘텐트의 질이 떨어지게 되면 플랫폼사 유료가입자 이탈로 인해 결국 유료방송 산업의 경쟁력 또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과연 이 명분은 타당한 걸까. 미디어 유통 플랫폼이 콘텐트에 제값을 매기지 않으면, 한국 콘텐트의 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CJ 측의 주장은 맞다. 최근 전 세계적으로 콘텐트 시장에서 ‘쩐의 전쟁’이 벌어졌다. 국내에선 넷플릭스가 자본의 규모가 콘텐트의 질을 결정한다는 걸 증명했다. 독점 콘텐트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한국 OTT 시장을 잠식했기 때문이다.
이후 웨이브, 시즌 등이 앞다퉈 수천억원대의 오리지널 콘텐트 투자 금액 목표를 경쟁적으로 제시했다. CJ ENM 역시 올해 8000억원 규모의 콘텐트 투자를 공언한 상황이다.
콘텐트가 미디어 채널의 경쟁력이 된 시대다. 인기 채널을 다수 보유한 CJ ENM이 자사 콘텐트에 높은 몸값을 요구하는 데는 일리가 있다.
문제는 CJ ENM의 요구를 플랫폼사가 수용한다고 해서 이 회사가 밝힌 명분을 채울 수 있느냐다. CJ ENM은 콘텐트에 제값이 매겨지지 않는 지금과 같은 구조에선 한국 콘텐트의 질 저하가 불가피하다고 설명했다. 바꿔 말하면 CJ ENM의 요구가 현실화하면, ‘한국 콘텐트 전반의 질 향상’으로 이어져야 한다.
하지만 이런 선순환이 가능할지 미지수다. 한 중견 드라마 제작사 관계자의 설명을 들어보자. “언뜻 보기엔 CJ ENM의 콘텐트 비용 인상 요구가 콘텐트의 가치를 둘러싼 미디어 업계의 전반 의식 변화로 이어질 것 같다. 하지만 이는 천진난만한 생각이다. IPTV 사업자들 역시 유료 시청자란 한정된 파이를 가지고 여러 제작사에 콘텐트 비용을 나눠주는 구조다. CJ ENM이 비용을 높여 받으면, 그만큼 다른 제작사의 콘텐트 비용 감소로 이어질 공산이 크다. 이번 갈등은 한국 콘텐트의 미래를 우려해서 벌어진 게 아니다. 사업자마다 손익 계산에 열중한 결과다. 그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의 몫이 됐다.”
이는 국내 콘텐트 비용 책정 구조에서 벌어지는 문제다. 기본적으로 플랫폼과 제작사간 개별 협상 방식으로 진행된다. 대부분 합리적인 기준 없이 주먹구구식으로 결정되고 있다. 협상장에서 누가 더 큰 권력을 갖고 있느냐가 관건인데, CJ ENM의 경우 국내에서 독보적인 프로그램 제작 역량을 갖춘 회사로 꼽힌다. 협상 테이블에서 목소리를 높일 만한 힘이 있다는 얘기다.
IPTV 업계가 볼썽사나운 여론전을 펼치면서까지 이번 갈등을 수면 위로 드러낸 것도 결국 CJ ENM의 블랙아웃을 막기 위함이다.
CJ ENM이 콘텐트 제작 업계의 의견을 전달하고 조율할 단일 창구가 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 회사는 콘텐트를 제작할 뿐만 아니라 동시에 직접 유통에도 나서고 있어서다. CJ ENM의 OTT 서비스 티빙은 최근 가파른 유료가입자 성장률을 자랑하고 있다. 다른 제작사의 콘텐트 비용을 책정하는 입장이기도 하다.
방송통신 업계 관계자는 “콘텐트 시장이 커졌다지만 이는 일부 대형 사업자만의 잔치”라면서 “이번 갈등이 마무리된다고 해서 한국 콘텐트의 질과 다양성이 확 넓어지길 기대하는 관계자는 없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김다린 기자 kim.dar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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