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일성 110주년·김정일 80주년’ 북한, 생일정치 문 열까 [채인택의 글로벌 인사이트]
코로나 시국 속 대규모 인파 동원해 신년행사 개최
백신 접종 ‘0건’ 기록하다 인도주의 물자 받기 시작
기념 주년 0으로 끝나는 ‘꺾인 해’ 맞아 변화 기대감
전 세계는 오미크론 변이의 확산으로 코로나19 시대가 연장된 가운데 2022년을 맞았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은 국제사회에서 보기에 여러모로 독특한 모습을 연출하고 있다.
북한이 1월 5일 동해상으로 미사일을 발사하면서 한해를 시작한 것도 이색적이다. 전 세계가 코로나19의 확산으로 방역에 비상이 걸린 상황에서 코로나가 아닌 뉴스로는 북한 미사일 발사가 가장 눈길을 끌 수밖에 없다. 홍보에 능한 모습이다.
북한의 조선중앙통신은 다음날인 6일 “전날 극초음속 미사일 시험 발사를 성공적으로 진행했다”고 보도했다. 김정은의 생일인 1월 8일을 사흘 남겨두고 북한은 축포를 발사한 것인가. 어쨌든 한국과 일본은 물론 전 세계미디어에서 북한의 신년 벽두 미사일 발사는 흥미로운 뉴스를 제공했다.
‘거리두기는 없다’ 화려했던 북한의 신년맞이
행사는 광장에 설치된 무대에서 ‘2022 신년 경축공연’으로 시작해 자정이 지나 새해가 되자 국기게양대에서 인공기 게양식으로 이어졌으며, 축포 발사로 평양 하늘을 불꽃으로 장식하면서 마무리됐다. 전체 과정은 조선중앙TV를 통해 생중계됐다.
경축 공연이 벌어진 무대 위에는 여성 6중창 ‘친근한 우리 원수님’과 남성 4중창 ‘벼 가을 하러 갈 때’ 등이 이어졌다. 공연하는 가수들 뒤로 ‘사회주의 승리를 위하여’ ‘주체’ 등의 구호를 적은 화면이 펼쳐졌다.
조선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은 “우리 당의 위민 헌신의 여정 위에 꽃 펴난 인민의 행복과 기쁨을 노래한 남성 독창과 여성 방창 ‘행복의 내일’, 남성 4중창 ‘벼 가을하러 갈 때’, 여성 독창과 남성 방창 ‘바다 만풍가’, 혼성 중창 ‘정말 좋은 세상이야’ 등은 자력으로 전면적 부흥의 새 시대를 열어나가는 내 조국의 자랑 찬 모습을 감명 깊게 보여줬다”라고 자평했다.
평양 김일성광장은 평양 한복판, 대동강 서쪽에 자리 잡고 있으며 강 건너 주체사상탑을 마주 보고 있는 북한의 심장부다. 열병식이나 주요 행사가 열리는 곳이다. 주목할 점은 광장의 규모와 수용 인원이다.
1954년 조성된 이 광장은 7만5000㎥의 면적으로 최대 1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다. 1일 조선중앙통신에 보낸 사진이나 조선중앙TV가 방영한 내용을 보면 광장에 주민들이 빼곡하게 서서 행사를 지켜봤다. 의자는 없었다. 주민들은 두꺼운 방한복 차림에 모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다만 광장에 많은 인파가 몰리면서 거리두기는 지켜지지 않았다.
특히 무대 위의 공연자들은 누구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어린이 중창단도 나와서 노래하고 춤을 췄지만, 마스크는 쓰지 않았다.
그뿐만 아니라 북한은 1월 5일에는 연말에 나온 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4차 전원회의 결정을 철저히 관철하기 위한 평양시 궐기대회를 김일성광장에서 진행했다고 노동당 기관지 노동신문이 6일 보도했다.
조선중앙통신이 송신한 사진과 조선중앙TV의 영상을 보면 이날 행사에도 인파가 광장을 가득 메웠다. 역시 방한복과 마스크 차림이었으며 거리두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한마디로 빽빽하게 광장을 채웠다.
궐기대회 참석자들 사이사이에 ‘당 중앙위원회 제8기 제4차 전원회의 결정을 철저히 관철하자’ ‘당중앙 따라 천만리’ ‘과감한 투쟁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전면 재발전을 위한 토대를 강력히 다지자’ ‘위대한 우리 국가의 부강발전과 우리 인민의 복리를 위하여 더욱 힘차게 싸워나가자’ 등의 구호가 적힌 고정 펼침막이 보였다. 참석자들은 사이사이에서 북한 국기와 붉은 깃발을 들고 흔들었다.
코로나19 격랑 속에서도 독자노선 걸어온 북한
중간에는 김일성 탄생지인 평양 만경대와 김정일이 태어났다고 주장하는 백두상 밀영 사적의 사진과 함께 볏단을 든 여성 농부, 훈장을 목에 걸고 설계도를 들고 있는 신사복 차림의 남성, 작업복을 입고 안전모를 쓴 채 왼손에는 붉은기를 오른손에는 호루라기를 든 남성의 사진이 실렸다. 배경으로 도시와 고층건물, 공장의 모습이 보였다.
이 두 행사는 코로나19가 확산을 시작한 직후인 2020년 1월 국경을 폐쇄하고 나라의 문을 걸어 잠근 북한에 대한 몇 가지 정보를 알려준다. 우선, 지난해 12월 31일과 올해 1월 5일 평양 김일성 광장에서 거의 10만 명이 모여 대형 행사를 벌였다는 사실은 북한의 코로나19 상황을 간접적으로 짐작할 수 있게 해준다.
사실 북한은 코로나19의 방역과 관련해 전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나라로 꼽힌다. 2019년 12월 첫 보고가 나온 이래 2년 이상 전 세계를 휩쓸고 있는 코로나19의 확진자를 발표하거나 세계보건기구(WHO)에 보고한 적이 없는 유일한 국가다.
공식적으로는 코로나19 확진자가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았다. 물론 그동안 북한이 내놓은 다양한 분야의 데이터가 신빙성이 떨어졌기 때문에 서방이나 국제기구는 북한 당국의 ‘제로 코로나’ 발표를 믿지 않는다.
NK뉴스에 따르면 WHO는 1월 3일 발표한 상황보고서에서 북한이 지난해 12월 9~23일 1492건의 코로나19 추가 검사를 했으나 양성은 한 건도 없었다는 보고를 전했다. WHO는 북한에서 지금까지 이뤄진 누적 검사가 4만9941건이라고 명시했다.
평양의 김일성 광장에서 닷새 간격으로 10만 명이 모여서 대형 축하‧정치 행사를 벌였지만, 이들 중 코로나19 검사를 받은 사람은 거의 없음을 다시 한 번 확인하는 순간이다. 자신감인지 만용인지는 알 수 없지만, 북한은 ‘우리식’으로 코로나 시대를 사는 셈이다.
더욱 놀라운 점은 2020년 12월부터 전 세계에서 이뤄지고 있는 코로나 백신 접종도 북한에선 공식적으론 한 건도 없다는 사실이다. 북한은 아프리카 에리트레아와 함께 전 세계에서 두 나라밖에 없는 코로나19 백신 미접종국이다.
국제사회는 그동안 코로나19와 관련해 북한에 의료 키트를 제공하거나 백신을 배정하려는 시도를 꾸준히 해왔다. 2021년 3월 국제 백신 공동구매 프로그램인 코백스(COVAX)는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199만 2000회분을 북한에 배정하고 이 가운데 170만4000회분을 5월까지 전달하겠다고 밝혔다.
하지만 협의 과정에서 북한이 공급 백신 종류를 둘러싼 이견으로 이를 거부한 것으로 알려졌다. 자세한 협의 내용이나 북한의 요구는 즉각 공개되지 않았다. 러시아는 자체 개발한 아데노바이러스 전달체 백신인 스푸트니크 V 백신을 북한에 유상 지원하기를 원했지만, 북한이 무상 지원을 요구하면서 공급이 이뤄지지 않았다.
WHO 의료물자 받으며 누그러진 북한의 태도
이를 종합하면 북한은 아데노바이러스 전달체 백신인 아스트라제네카나 러시아산 스푸트니크 V 백신보다 m-RNA 백신인 화이자나 모더나 제품을 원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도 있다. 화이자 백신은 영하 60~80도의 초저온에서, 모더나는 영하 20도에서 냉동 보관해야 한다.
이에 비해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영상 2~8도에서 보관해 비교적 콜드체인 유지가 용이하다. 북한의 현재 전력 사정이 전국적으로 콜드체인을 유지하면서 코로나 백신을 접종할 수 있는 상황인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다.
이런 상황에서 코백스는 2021년 11월 30일 북한에 아스트라제네카 백신 473만4000회분을 제공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북한 측의 반응은 즉각 알려지지 않았다. 전 세계적으로 백신 사정이 좋아지면서 코백스를 통해 북한에 배정되는 백신의 물량이 갈수록 넉넉해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발표다.
북한이 지난해 코백스로부터 배정받은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673만 회분이 넘는다. 세계은행(WB)에 따르면 2020년 북한 인구는 2578만 명으로 추산된다. 통계청 북한통계 포털에 따르면 북한의 0~20세 인구가 600만 명이나 이 정도 분량이면 20세 이상 인구의 약 30%에게 1회 접종할 수 있는 분량이다. 아스트라제네카 백신은 2회를 접종해야 하므로(부스터샷 제외) 이 정도 분량이면 15%에게 접종을 마칠 수 있는 수준이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일단 백신 지원을 받기로 하면 코백스는 물론 유니세프와 같은 국제기구과 국제적십자위원회 같은 인도주의 기관, 한국 정부 등이 나설 수밖에 없다. 북한의 코로나 백신 접종은 어느 나라보다 빨리 진행될 수도 있다. 콜드체인 마련이 어려우면 냉장차를 대거 보낼 수도 있다. 북한이 접종을 시작만 한다면 의외로 짧은 시간에 빠른 속도로 접종률을 끌어올릴 수 있다.
실제로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완고하게 나라의 문을 걸어 잠갔던 북한의 태도도 조금씩 누그러지고 있다. 2021년 10월 7일 AP통신 보도에 따르면 북한은 WHO와 다른 유엔기구가 지원한 긴급의료세트를 받기로 하고 관련 화물을 싣고 중국 랴오닝(遼寧) 성다롄(大連) 항에 머물고 있던 선박의 남포항 입항을 허가했다.
국제기구의 인도주의 물자가 평양 당국이 봉쇄한 국경을 넘어 북한으로 들어간 것은 처음이다. 이는 두 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하나는 북한이 국경 통제를 조금씩 풀고 국제사회와 교류와 교역을 하고 싶어 하는 신호로 볼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북한의 실제 보건의료 사정이 심각함을 보여주는 징후로도 볼 수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 탄생의 상징성’ 변화 필요한 북한의 2022년
생일이야 매년 오지만 주목할 점은 올해가 이른바 ‘꺾인 해’라는 사실이다. 북한은 5나 0으로 끝나는 주년을 특히 중시해왔다. 같은 기념일이라도 그해에 유난히 성대하게 축하 행사를 치러왔다.
주민들도 뭔가를 기대할 수밖에 없다. 김정은 국방위원장으로선 호주머니를 털어서라도 뭔가를 마련할 수밖에 없다. 미사일과 핵으로 외부를 위협할 수는 있지만, 경제 사정이 어려운 국민을 다독거릴 수는 없다.
통계청 북한 통계 포털에 따르면 북한의 2020년 국내총생산(GDP)은 34조7000억원(약 315억 달러), 1인당 GDP는 137만9000원(약 1253달러)이다. (1달러 1100원으로 계산) 코로나로 국경을 완전히 닿는 극약처방으로 코로나바이러스의 침입은 어느 정도 피했을지 모르지만, 경제난은 피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다.
이 때문이라도 2022년 북한은 변해야 한다. 코로나 이후 2020년 1월부터 나라의 문을 꽁꽁 닫고 은거에 들어갔던 북한이 코백스 백신 등을 외부로부터 공급받고 주민들에게 대대적으로 접종할 수 있다. 그다음 단계는 국경을 열어 중국 등에서 축하 행사에 쓸 식량과 선물용 물품 등을 대대적으로 들여와 푸는 일이다. 가장 긍정적인 전망이다.
문제는 북한 정권이 가장 중시하는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과 관련한 꺾인 해는 활용하기에 따라 독도 될 수 있고 약도 될 수 있다. 경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경우 북한은 가용 자산을 총동원해 한국과 국제사회에 도전장을 내밀 수도 있다.
미국도 미‧중 경쟁과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위협, 이란과의 이란핵합의(JCPOA) 재개를 위한 협상 등으로 북한에 눈을 돌릴 여유가 적다. 게다가 올해 11월에는 미국 조 바이든 행정부의 하반기 국정운영의 동력을 좌우할 중간선거가 열린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이 백신 접종을 받아들이고 국경을 개방하도록 국제사회가 외교력을 집중할 필요가 있다. 2022년 남북한은 상호 협력하고, 국제사회는 북한 주민의 생존을 위한 다각적인 협력을 할 수 있는 해가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구호나 퍼포먼스가 아닌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생존기회를 북한 주민들에게 제공할 수 있어야 한다. 기회는 머리를 맞대고 만드는 것이지, 거저 주어지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필자는 현재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다. 논설위원·국제부장 등을 역임했다.
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na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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