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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북방외교에 화답했던 고르바초프 전 소련 대통령 작고

무력 개입 브레즈네프 독트린 포기 선언
개혁·개방 정책으로 사회주의 변화 이끌어
소련, 한국과 경제협력 동반자로 탈바꿈

 
 
미하일 고르바초프(1931~2022년)가 1991년 8월 군사 쿠데타 이후 시골 집에서 처음 모습을 드러내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발언하던 모습. [AFP=연합뉴스]
‘미하일 세르게예비치 고르바초프’ 전 소비에트 연방(소련)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간) 작고했다.  
 
타스·스푸트니크 등 현지 통신에 따르면 러시아 중앙 임상병원이 이날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이 오랜 투병 끝에 저녁에 사망했다’고 밝혔다. 향년 91세다.  
 
옛 소련의 마지막 지도자인 고르바초프는 서방세계에선 냉전체제를 종식한 주역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는 1985년 3월 54세 나이로 서기장에 취임, 소련 공산당 권력의 정점에 섰다. 그는 이후 1987년 12월 로널드 레이건 당시 미국 대통령과 만나 중거리 핵 미사일의 개발·배치·보유를 금지하는 내용을 담은 중거리핵전력조약(INF)을 체결했다.  
 
고르바초프는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개혁)와 ‘글라스노스트’(Glasnost·개방) 정책을 강력하게 추진해 공산권 사회주의 체제를 무너뜨린 인물로도 평가 받고 있다.  
 
그는 1988년 12월 국제연합(UN)에서 “동유럽 공산국가들이 자신들의 내부 문제를 스스로 자유롭게 결정할 수 있으며 소련은 그에 대해 개입하거나 무력사용을 하지 않겠다”는 내용의 연설을 했다. 즉, ‘브레즈네프 독트린’(Brezhnev Doctrine)을 포기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브레즈네프 독트린은 소련의 체코 침공 사건을 계기로 공식화됐다. 바르샤바 조약기구 동맹국(독일·루마니아·불가리아·소비에트연방·알바니아·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헝가리) 중 5개국이 1968년 8월 20여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체코를 침략, 두브체크(당시 체코 공산당 제1서기)를 중심으로 한 체코 개혁세력을 숙청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해 11월 레오니드 브레즈네프(Leonid Brezhnev)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폴란드 공산당 5차대회에서 ‘사회주의 국가가 위협을 받을 경우 사회주의 진영 전체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해 다른 사회주의 국가가 개입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다’는 내용을 담은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발표했다.  
 
1987년 12월 8일 미국 백악관에서 로널드 레이건(1911~2004년) 당시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미하일 고르바초프(1931~2022년) 당시 소련 대통령이 중거리핵전력(INF) 조약에 서명하던 모습. [로이터=연합뉴스]

미·소 냉전 종식, 독일 통일의 단초 제공

공산국가들 간의 사회주의 연맹을 결속시킨 이 선언을 소련 지도자인 고르바초프가 폐기한 것이다. 일각에선 당시 공산주의 체제 모순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높아진 분위기 속에서 유가 하락, 9년여(1979년 12월~1989년 2월)동안 이어진 아프가니스탄 전쟁, 제2차 세계대전 후 40여년간 이어진 미국과의 군비 경쟁 등으로 인해 소련 경제가 위기에 처하자 고르바초프가 개혁·개방 정책을 추진할 수 밖에 없었다고 평가하는 시각도 있다.  
 
고르바초프의 브레즈네프 독트린 포기 선언은 1989년 동유럽 공산국가들을 휩쓴 민주화 시위의 불씨가 되기도 했다. 1989년 6월 폴란드에서 자유 선거가 치러지면서 공산 정권이 후퇴하고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가 집권하게 됐다.    
 
고르바초프는 또한 1989년 11월 독일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0년 10월 동독·서독의 통일을 사실상 용인함으로써 냉전에 마침표를 찍었다. 당시 동독에는 소련군 30만명이 주둔하면서 서독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과 대치 중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이어 12월 조지 H.W. 부시 당시 미국 대통령과 만나 반세기 동안 계속된 냉전을 공식적으로 종식하는 선언에 합의했다. 지중해 몰타 해역의 배 위에서 이뤄진 이 몰타 회담에서 미국·소련 두 지도자는 동유럽 민주화, 미·소 군비 감축, 경제협력 체제 구축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몰타 회담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자유주의와 사회주의로 갈라졌던 냉전시대를 종식하는 마침표가 됐다. 회담 후 미·소 두 정상은 “세계가 냉전 시대에서 벗어났다”고 선언했으며, 미국 워싱턴DC에서 다시 만나 사정거리가 500~5500㎞ 달하는 중거리 핵 미사일과 화학 무기 등을 감축하는 데 전격 합의해 냉전 종식 선언을 이행했다. 
 
1990년 12월 14일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옛 소련 크레믈린궁에서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과 만나 정상회담에 앞서 악수하던 모습. [연합뉴스]

노태우 정권 북방정책에 호응, 한·소 수교·경제협력

고르바초프의 행보는 한국의 대외 정책에도 영향을 미쳤다. 고르바초프는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추진하던 북방정책에 호응해 1990년 5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두 대통령이 처음 만났다. 소련 지도자와 한국 지도자의 만남은 역대 처음이었다.  
 
한·소 두 정상의 만남은 북한과 중국의 반발을 고려해 극비리에 추진됐다. 비밀 해제로 일반에 공개된 외교문서에 따르면 암호명 ‘태백산’으로 불리운 이 한·소 정상회담은 “소련이 한국과의 관계를 정상화할 경우 소련 주재 대사관과 사절단을 철수하겠다”는 당시 김일성 북한 주석의 소련에 대한 경고를 의식해 비밀리에 이뤄졌다.  
 
한·소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소 수교, 한국의 대 러시아 투자 확대, 한국 기업들의 러시아 진출, 북한 문제 논의 협력 등으로 이뤄져 노태우 정권의 북방정책의 성과로 이어졌다.  
 
고르바초프는 이 같은 세계 평화 공헌을 인정받아 1990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다. 하지만 자국 소련 내부에선 비난을 받았다. 급진적 개혁·개방 정책을 강행해 동맹국들이 탈퇴하고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를 초래함으로써 사회주의 진영의 동구권을 서방세계에 넘겨줘 소련의 위상과 세력을 위축시켰다는 평가다.  
 
고르바초프는 1990년 3월 역사상 처음으로 소련 공산당 서기장에서 첫 소련 대통령으로 공식 선출됐다. 당시 초대 대통령 선거에서 고르바초프는 찬성 1329표, 반대 495표를 압도적인 지지로 선출됐다.  
 
하지만 국내 여론에서 소련 해체를 초래한 배신자라는 비난이 확산하면서 이듬해인 1991년 12월 보수파의 쿠데타 여파와 인지도 하락, 개혁 물결 여파 등으로 대통령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다시 대선에 출마했으나 득표수가 저조했다. 이후 모스크바 외곽 시골에서 여생을 보내던 중 노령과 합병으로 투병생활을 하게 됐다.  
 

박정식 기자 tango@edail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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