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유럽엔 움찔, 한국엔 시큰둥…美 IRA 온도차 [IRA 국제전①]

유럽, 세계 최대 전기차 수입 시장…미국도 조심
수출 중심 韓, 강경대응 쉽지 않아

 
 
 
현대차 울산공장 아이오닉 5 생산라인 모습[사진 현대차그룹]
“인플레이션감축법(IRA) 협상이 힘의 논리에서 벗어나기 어려울 것 같다”
 
최근 재계의 한 관계자는 조 바이든 미국 정부가 시행하는 IRA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IRA는 북미지역에서 조립한 친환경차(전기차)에 최대 7500달러(약 1000만원)의 보조금을 제공하는 내용을 담은 법안이다. 당장 국내에서 전기차를 생산해 수출하는 현대자동차 등 우리 기업은 보조금 대상에서 제외될 가능성이 커 가격 경쟁력 약화 등 피해를 볼 수 있다는 우려가 큰 상황이다.  
 
우리 정부와 기업은 미국 기업과의 차별을 지적하면서 우려가 현실로 이어지면 안 된다고 반발하고 있지만, 뾰족한 대안이 없는 상황이다. 재계 관계자는 “(차별 등) 그런 일이 벌어지지 않길 바라지만, 미국 정부가 힘으로 밀어붙인다면 우리로선 피해를 감수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했다.  
 
글로벌 경제에서 ‘힘의 논리’가 앞세워지고 있다. 자국 기업을 육성하고 주요 산업의 경쟁력을 강화하겠다는 미국 측 논리가 IRA 등 보조금 정책으로 현실화하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로 꼽힌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기술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고 전 세계 공급망을 재편해 중국을 견제하겠다는 게 핵심이라며, 자국 산업 육성을 위해 아시아‧유럽 등 우호적인 국가나 기업이 피해를 볼 수 있는 상황도 개의치 않겠다는 속내가 있다고 평가한다. IRA가 강대국(미국)의 정책으로 나타난 사실상의 ‘경제 전쟁’이란 해석이다.
 
문제는 세계 최강국의 정책에 우리 정부와 기업이 대응할 적절한 대응이 없다는 것이다. 수출에 의존하는 우리나라의 경우 강경하게 대응하다 수출 길이 막히면 심각한 타격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경제력과 소비 시장 규모가 압도적으로 큰 유럽에서는 강경 대응 기조를 유지하면서 협상을 이어가고 있다. 이런 힘의 논리 탓에 미국도 한국과 유럽을 다르게 대하고 있다는 해석도 나온다. 한국보다 유럽을 신경 쓰며 차별 문제가 불거지지 않도록 고민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IRA와 관련해 미국·유럽연합(EU) 간 전담 태스크포스(TF)에서의 작업을 검토하고, 초기적 진전이 이뤄졌다는 점에 주목했다” 5일(현지 시각) 로이터 통신은 미국과 EU가 미국 메릴랜드대에서 진행한 3차 무역기술위원회(TTC) 회의 이후 공동 성명을 통해 이같이 밝혔다고 보도했다. TTC는 미국과 EU의 무역‧투자 촉진, 기술 협력 강화를 목적으로 지난해 9월 출범했다. 미·EU가 공급망 강화를 비롯해 무역 분쟁에 공동 대응하기 위해 만들었지만, 이번엔 IRA 시행으로 생긴 골을 메우기 위한 논의 창구가 된 셈이다.  
 
토니 블링컨 미국 국무장관은 TTC 이후 공동 기자회견을 통해 “유럽 우방으로부터 IRA의 특정 요소와 관련한 우려를 명확하게 들었다”며 “우리는 우려를 듣자마자 미·EU 사이에 가동 중인 TF를 확고히 하기로 합의했다”고 전했다. 최근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IRA의 ‘결함을’ 인정한 발언을 했던 것을 함께 고려하면 미국이 얼마나 유럽을 신경 쓰는지 짐작할 수 있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정상회담 공동 기자회견에서 “(IRA) 법이 의도치 않은 결과를 초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조정이 필요한 작은 결함(glitches)이 있다”고 했었다. 그는 “근본적으로 유럽국가들이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참여하거나 독자적인 활동에 나설 수 있도록 미세한 조정 사항(tweaks)을 만들 수 있다”고도 했다.  
 
미국이 이런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는 요인으로는 유럽의 강경한 대응이 꼽힌다. 이달 초 베른트랑게 유럽의회 국제통상위원장은 “EU가 IRA를 WTO에 제소하면 해당 법안이 EU 규칙과 양립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을 것”이라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여기에 EU가 보조금 제도를 개편해 유럽 시장의 진입장벽을 높일 수 있다고 언급하면서 사실상 보조금 정책에 맞대응하겠다는 뜻을 비치자 미국이 몸을 사렸다는 것이다.  
 
반면 우리나라의 경우 WTO 제소와 유럽‧일본과의 공조, 미국에 의견서를 전달하는 방법 등 ‘읍소’ 전략 이외에는 특별한 대응을 하지 못하는 상황이다. 현대차 그룹 등 우리 기업이 미국에 수십조원 규모의 투자를 약속한 상황에서도 미국의 대응은 형식적인 수준에 머무르고 있다. 
 
지난달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캄보디아 프놈펜에서 윤석열 대통령과 가진 정상회담에서 “한국 기업들이 자동차, 전기 배터리 등의 분야에서 미국 경제에 기여하는 바가 크다”며 “이런 점을 고려해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이행 방안이 논의돼야 한다”고 발언한 것이 전부인 수준이다.  
 
지난 8월 조 바이든 미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인플레이션 감축법’에 서명한 뒤 조 맨친 상원의원에게 펜을 건네고 있다. [사진 AP=연합뉴스]

유럽, 전기차 수입시장 ‘큰 손’…미국 차별에 강경대응 가능

한국과 유럽을 대하는 미국의 태도는 ‘경제력’의 차이에서 나온다. 지난 9월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이 내놓은 ‘코로나 이후 주요국의 전기차 시장 동향’ 보고서를 보면 유럽의 전기차 시장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지난해 기준 전 세계 전기차 시장에서 수입량이 가장 많은 국가 10위 중 상당수는 유럽 국가였다. 1위는 독일로 177억 달러, 3위는 영국(89억 달러), 프랑스(73억 달러)‧노르웨이(70억 달러)‧스웨덴(46억 달러)이 4~6위를 기록했다. 10위 안 국가 중 유럽에 포함되지 않은 나라는 2위인 미국(91억 달러), 9위인 캐나다(31억 달러), 10위 중국(29억 달러) 뿐이었다. 유럽이 글로벌 전기차 시장의 큰 손으로 떠오른 셈이다.  
 
만약 이들 유럽이 보조금 등의 정책을 재편하고 미국 자동차에 실질적 관세를 부과하는 등 무역장벽을 높이면 GM 등 미국 자동차 업체들의 타격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반면 한국은 전기차 수입액이 21억 달러에 달했지만, 수출이 70억 달러에 이르는 것과 비교하면 수출이 막힐 경우 감당해야 할 피해가 막대할 수밖에 없다.  
 
안덕근 산업통상자원부 통상교섭본부장도 최근 워싱턴에서 진행한 특파원 간담회에서 유럽과 같은 IRA 강경 대응 방식과 관련해 “보복하면 후련할지 모르지만, 우리와 같은 통상 국가는 가급적 통상 환경을 안정시키는 게 급선무”라고 말했다.  

이병희 기자 leoybh@edaily.co.kr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1147회 로또 1등 ‘7, 11, 24, 26, 27, 37’…보너스 ‘32’

2러 루블, 달러 대비 가치 2년여 만에 최저…은행 제재 여파

3“또 올랐다고?”…주유소 기름값 6주 연속 상승

4 정부, 사도광산 추도식 불참키로…日대표 야스쿠니 참배이력 문제

5알렉스 웡 美안보부좌관 지명자, 알고 보니 ‘쿠팡 임원’이었다

61조4000억원짜리 에메랄드, ‘저주받은’ 꼬리표 떼고 23년 만에 고향으로

7“초저가 온라인 쇼핑 관리 태만”…中 정부에 쓴소리 뱉은 생수업체 회장

8美공화당 첫 성소수자 장관 탄생?…트럼프 2기 재무 베센트는 누구

9자본시장연구원 신임 원장에 김세완 이화여대 교수 내정

실시간 뉴스

11147회 로또 1등 ‘7, 11, 24, 26, 27, 37’…보너스 ‘32’

2러 루블, 달러 대비 가치 2년여 만에 최저…은행 제재 여파

3“또 올랐다고?”…주유소 기름값 6주 연속 상승

4 정부, 사도광산 추도식 불참키로…日대표 야스쿠니 참배이력 문제

5알렉스 웡 美안보부좌관 지명자, 알고 보니 ‘쿠팡 임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