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이 곧 힘이다” 목재창호 명장, 교육자의 길을 걷기까지 [대한민국명장]①
권혁율 목재창호 명장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자랑스런 태극 마크 소년에서 명장으로
기술의 힘·교육의 중요성 알기에 후배 양성에 적극 나서
그들은 남들이 알아주든 알아주지 않든 묵묵히 한 자리에서 15년 이상 일했다. 분야도 다양하다. 한복생산부터 제빵·금형·석공예·용접 등 한국 사회가 움직이는 데 꼭 필요한 것들이지만 흔히 말하는 3D 업종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들은 일이 어려워도 편법 대신 원칙에 충실하면서 자신의 맡은 바를 끝까지 해낸 장인들이다. 그들에게 한국 사회는 '대한민국 명장'이라는 명예로운 타이틀을 기꺼이 부여했다. '이코노미스트'는 창간 40주년을 맞이해 꽃보다 아름다운 명장의 인생사를 담은 '대한민국 명장' 시리즈를 시작한다. 대한민국 명장은 고용노동부가 고시한 38개 분야 92개 직종에서 최고 수준의 숙련기술을 보유한 이들 중에서 중에서 대통령 명의로 선정된 기능인을 말한다. 지금까지 699명이 대한민국 명장으로 선정됐다. <편집자주>
[이코노미스트 이승훈 기자] “지덕체(智德體) 그리고 기술(技術)도 고루 갖춰야 완성된 인격체, 명장으로 성장합니다.”
권혁율 목재창호 명장(케이투아이디(K2ID) 대표)은 후배 전문기술인 양성에 대한 애정이 깊다. 그는 국가 산업을 지탱하는 중추적인 역할을 할 개인의 성장에 ‘기술’은 어떤 무기보다 큰 원동력이 되리라 믿는다.
권 명장은 “지금은 기술 패권주의시대다. 군사력보다도 기술이 없으면 이제 죽는 거다”라며 “그래도 우리는 반도체라는 훌륭한 기술이 있고 산업이 발전해서 경제 대국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다른 선진국에서도 얕보지 못하는 것은 우리가 중심을 잡고 원천 기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라며 “처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 출전했을 당시만 해도 대한민국을 모르는 심사위원도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어 “우리가 그 당시에는 약소국이었지만 지금은 글로벌화가 되고 우리나라가 모든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다 보니 대한민국을 모르는 곳이 없다”며 자랑스러워했다.
소년, 자랑스런 태극마크를 달다
권 명장은 진로를 고민하던 청소년 시절인 1976년 정수직업훈련원 목공예과에서 목공예에 입문했다. 그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가정형편이 어려워서 구로공단 제조업체에서 근무할 당시 정수직업훈련원 모집공고를 우연히 보게 됐다. 정수직업훈련원은 고(故) 육영수 여사가 비진학 청소년들에게 기술을 가르쳐야 되겠다는 사명감으로 미국 정부의 원조를 받아 설립한 학교다.
권 명장은 초등학교 때 목재로 썰매·팽이·도장 등을 곧잘 만들어 ‘나무하고 관련된 과를 선택하면 맞지 않을까’라는 생각에 목공예과를 지원하게 됐다. 그의 선택은 적중했다. 1977년에 전국기능경기대회에서 은메달을 따면서 국가대표 평가전에 나갈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됐다. 평가전을 통해 1978년 19세 나이에 국가대표로 최종 선발됐고, 최초로 우리나라(부산)에서 주최한 제24회 국제기능올림픽대회에서 목재창호(실내장식)부문 은메달을 수상했다.
권 명장은 “국제기능올림픽대회는 1950년대 스페인에서 만들어졌다. 2차 세계대전 후에 유럽도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상당히 상황이 안 좋았다. 그래서 스페인에서 젊은이들의 기술 교육을 시키기 위해서 학교를 만들었다”며 “처음에는 인접국인 포르투갈 등 몇 나라를 시작으로 확산했는데, 올해 9월 47회 대회가 프랑스에서 열린다”고 설명했다.
그는 “우리나라는 1967년 16회 대회 때 처음으로 출전했다. 9명이 출전해서 금메달 2개를 땄다. 그 이후로 쭉 참여하면서 19번 종합 우승을 했다”며 “32번 참여해 19번의 종합 우승 기록을 깰 나라는 없으리라고 본다”고 말했다. 이어 “종합우승은 전 세계 1등이다. 그때 당시에는 종합운동장, 김포공항에서도 카퍼레이드를 하고 방송국에 가서 인터뷰도 하고 난리가 났었다”며 “그때는 스포츠 올림픽에서 우리가 금메달 하나를 못 따던 시절이다”라고 부연했다.
현재까지 56년 동안 배출한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선수 출신이 30만명이라고 한다. 우수한 기능인들이 각 분야에서 반세기 동안 우리나라의 압축 성장에 공헌 했다는 얘기다.
대한민국을 일으킨 기술인 “기술은 평생의 무기”
권 명장은 “그때 당시 기능올림픽 출신들을 삼성이나 현대 등에서 많이 뽑아갔다. 대기업의 전담부서에서 이들을 육성하는 이유는 아무리 기술이 발전한다고 해도 최고의 첨단장비들을 운영·유지보수 할 수 있는 최고의 기술자가 있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권 명장은 현재 우리나라에선 전문기술에 대한 인식이 예전과 같지 않다며 안타까움을 드러냈다. 그는 “일반인들은 기능올림픽대회에 대해 잘 모른다. 우선 각 17개 시도에서 지방기능경기대회를 한다. 지방대회에 출전하는 선수가 2010년도에 약 1만 명 정도로 정점을 찍고 계속 하락해 지금은 4000명대로 반토막이 났다”고 토로했다.
그러면서 “어떻게 하면 이 분야가 활성화될지 정부에서도 고민하고 있고, 우리 숙련 기술자들도 같이 머리를 맞대서 전문기술 배움의 중요성을 많이 알리려고 노력하는 중”이라고 말했다.
권 명장이 이렇게 후배 기술인 양성에 힘쓰는 이유는 기술의 힘을 믿기에, 그리고 이 직업의 장점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부모들만 해도 자녀가 작업현장에서 전문기술을 배우는 일에 회의적”이라며 “하지만 유럽 선진국 사회에서는 직업에 대한 편견이 없고 오히려 육체적인 근로를 하는 분들이 임금도 더 많이 받는다”고 말했다.
또 그는 “전문기술자인 우리는 은퇴라는 게 없다. 관리직, 공무원 등 좋은 직장에 들어가도 일정 나이가 되면 나와야 한다”며 “주변에 은퇴한 이들이 평생 할 수 있는 일을 가진 나를 상당히 부러워한다”며 미소 지었다.
목공 한 분야의 전문가로 묵묵히 실력을 닦은 그는 2008년 건축목재시공기능장 타이틀을 얻었고, 2009년에는 대통령 표창을 수상했다. 이후 2010년 대한민국 목재창호 명장으로 선정되며 기술인으로서 최고의 명예를 안았다. 이밖에 철탑산업훈장, 고용노동부장관상, 월드스킬스(Worldskills) 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글로벌 기술 전도사·교육자로 ‘종횡무진’
그가 명장이 되기까지 한 번의 시도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권 명장은 “명장은 2008년도에 처음 도전했다”며 “처음에 떨어지고 두 번째도 떨어지고 세 번째 만인 2010년도에 명장으로 선정됐다”고 말했다.
또 다른 일화에서도 그가 자신의 분야에서 성공하기까지 어떤 노력들을 해왔는지 엿볼 수 있다. 그는 디자이너이기도 하다. 권 명장은 “나는 디자인포장진흥원에 등록된 제품 디자이너로, 삼익가구 설계실에서 가구 개발을 13년간 했다”며 “1980년도에 삼익가구 공채 1기로 들어갔는데 그때 당시에는 학력이 중졸이었다”고 회상했다.
이후 실무에서 쌓은 경험으로 인정받은 그는 막 대학을 졸업한 신입사원들의 도면 교육 등 오리엔테이션을 도맡아 했다.
그의 노력은 계속됐다. 그는 “직업능력개발훈련교사 자격증도 땄다. 내가 가르치는 일을 하다 보니 자격이 있는 것과 없는 것은 차이가 있다고 생각했다”며 “아이들을 가르치는 것은 지식 전달만이 아니고 인격 형성까지 포함해서 관리를 해야 한다. 교사 자격증도 따니까 도움이 많이 된다”고 말했다. 이어 “교수 기법 등을 알게 되니까 훨씬 더 부드럽게 아이들하고 가까워지는 계기도 됐다”고 뿌듯해했다.
“더 많은 기술인 나왔으면 좋겠다”
한 분야에서 최고의 위치까지 올랐지만 그는 기술을 자신만의 무기로 만들지 않았다. 후학 양성에 관심을 두고 기술의 중요성을 알리는 일에 진심으로 매진했다.
전문기술 분야에 뜻이 있는 후배들에게 그는 “지금은 진로탐색 프로그램이 많다. 이를 통해 자기가 무엇을 잘하고 흥미가 있는지 직접 체험해보고 상담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라며 “그 다음에는 이를 좀 더 구체화해서 한눈팔지 말고 한 분야에 정진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그러면서 “머릿속에 주입된 지식만 가지고는 절대로 잘 성장했다고 볼 수 없다”며 “체력을 키우기 위한 체육과 정서적인 부분에서 음악·미술, 숙련 기술도 골고루 배우고 익혀야 완성된 인격체로 성장하는 것”이라고 부연했다.
그가 이토록 교육에 열정적인 이유는 그가 받은 교육에 대한 고마움을 늘 간직하고 있어서다.
권 명장은 “국제기능올림픽대회 은메달을 수상하기까지 도움을 주신 선생님이 한 분이 계시는데 지금도 살아계신다. 선생님께서 14명의 국가대표를 배출하셨다”며 “그런 훌륭한 지도자를 만났기 때문에 이 자리까지 설 수 있지 않았나라고 생각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뒤바꿀 수 있는 것이 바로 교육의 힘이다. 그런 마음으로 지금도 교육 활동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말했다.
혼자서 지금의 자리에까지 올라왔다고 생각하지 않기에, 후배들에게도 좋은 선배로서 힘이 되고 싶은 바람이다.
그는 국제기능전국대회 분과장, 기술부위원장 등을 역임했고, 2005년부터 2017년까지 국제심사위원을 지냈다. 또 2018년에는 (사)국제기능올림픽선수협회 5대 협회장이 되면서 이전에 했던 활동 일부를 후배들에게 물려줬다.
소통하는 ‘공유 목공방’ 새로운 꿈을 꾸다
올해 초 그는 협회장을 비롯해 모든 자리를 내려놓았다. 권 명장은 “2024년 2월까지 6년 동안 협회장을 하면서 체험이나 전수 등의 프로그램을 계속했다”며 “산업현장 교수라는 프로그램이 있는데, 산업현장에서 최고의 기술을 보유한 사람들을 고용노동부에서 서류 심사를 거쳐 산업현장 교수로 선정한다. 중소기업의 기술도 지원해주고, 특성화고 학생들에게 기술지도도 하는 것인데 2014년부터 2023년까지 10여 년을 해왔다”고 설명했다.마지막으로 그는 “올해 그동안 맡았던 일들을 좀 내려놓고 자유인이 됐다. 건강하기만 하면 공방에서 일하다 죽는 게 소원이다”라며 “여기서 작품 활동도 하고 나중에는 은퇴한 분들과 시간 맞춰 같이 배우며 자유롭게 사용하는 ‘공유 목공방’ 같은 것을 꿈꾸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또 하나의 꿈은 개인 박물관을 조그맣게 여는 것이다. 국제 활동을 하다 보니 관련 기념품들이 많다”며 “명장 되고 나서부터 쭉 모아놓은 기념품들과 목공 입문할 때 썼던 공구들을 전시해서 지금까지의 발자취를 후대에 남기고 싶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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