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int

[Law] 조건 붙은 증여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Law] 조건 붙은 증여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박모(여)씨는 충남 논산에 있는 임야 26만4000㎡(약 8만 평)를 A학원에 기증하기로 했다. A학원은 증여에 따른 조세공과금을 모두 부담하고 박씨의 남편을 이사장으로 추대하며, 두 아들을 교직원으로 채용하기로 했다. A학원이 약속을 지키지 않을 때는 기증 받은 토지를 반환하기로 약정했다. A학원은 임야의 소유권 이전등기 후 약속을 지키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런 약속이 있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했다. 박씨는 A학원의 의무 불이행을 이유로 증여계약을 해제하고 소유권 이전등기 말소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박씨의 손을 들어주었다.



증여 자체는 조건 없는 이타행위슬하에 딸만 한 명 둔 김모씨는 자신의 노후와 선조의 제사 봉행 문제로 고민해 왔다. 결국 조카에게 두 가지 문제를 성실히 이행할 것을 조건으로 전답 1만6500㎡(약 5000평)를 증여하기로 하고 소유권 이전등기를 마쳤다. 세월이 지나 김씨 부부는 거동이 불편하게 됐는데, 조카는 김씨 부부를 전혀 돌보지 않고 선조의 제사도 봉행하지 않았다. 김씨는 조카를 찾아가 약속을 지키지 않을 거면 전답을 돌려 달라고 요구했지만 조카는 막무가내였다. 김씨는 증여계약을 해제하고 전답의 소유권 이전등기 말소를 구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법원은 김씨의 증여행위는 상대의 부담이 있는 증여로 부담부 증여에 해당하고, 상대방이 부담 내용인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경우 부담부 증여를 해제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김씨의 조카는 증여 계약 해제에 따른 원상회복 의무로 김씨에게 전답의 소유권 이전등기를 말소할 의무가 있다는 것이다.

증여란 무상으로 재산을 상대방에게 넘겨주는 계약이다. 증여 동기로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지만 증여 계약 자체는 반대급부를 수반하지 않는 희생이고, 전형적인 이타행위다. 그런 만큼 경솔한 증여의 약속과 이에 따르는 분쟁이 발생할 위험도 크게 마련이다. 우리 민법은 증여에 엄격한 방식을 요구해 증여의 성립을 신중하게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철회의 원인을 인정해 구속력을 완화하고 있다. 현대사회는 합리적 교환경제가 지배하고 있다. 이에 반해 비합리적 요소가 많은 증여라는 행위는 자선, 종교, 학술 등의 목적을 위해 우리 생활관계에서 의외로 커다란 작용을 하고 있는 면도 있다. 증여의 기능적 측면에서 볼 때 증여라는 제도가 생전에 재산의 편법적 상속 방법으로 사용되는 등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기도 하다.

증여의 특수한 형태로 부담부 증여가 있다. ‘상대 부담 있는 증여’라고도 한다. 수증자가 증여를 받는 동시에 증여자 또는 제3자에 대해 일정한 의무를 부담하는 증여를 말한다. 예컨대 김씨가 이씨에게 부동산 소유권을 무상으로 이전해주면서 자신의 부모를 돌봐 달라고 하는 것과 같이 한편으로는 무상으로 재산을 출연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수증자에게 일정한 부담을 지우는 것이다. 위에서 든 두 사례 모두 부담부 증여의 형태다. 선진사회일수록 기부문화가 활성화돼 기부 형태가 다양해지고, 부담부 증여를 통해 증여자와 수증자의 상호이익이 증진되는 효과도 있다. 이런 추세에 따라 우리 사회에서도 앞으로 이런 부담부 증여가 더욱 활성화되리라 본다.

부담은 증여 계약에 부가돼 있는 종속적인 것에 불과하기 때문에 증여가 무효로 되면 수증자의 부담도 무효가 된다. 그러나 수증자의 부담이 무효가 될 때 증여 계약 전체가 곧바로 무효가 된다고 할 수는 없다. 이 경우 무효 여부는 ‘그런 부담이 없었더라면 증여자가 증여했을 것인가’라는 당사자의 의사를 판단 기준으로 삼아 결정해야 한다. 부담부 증여에서 부담 의무를 지는 상대방이 자신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때는 이를 이유로 증여자가 자신의 증여를 해제할 수 있다. 위 두 사례에서 본 바와 같이 상대 부담 있는 증여에 대해 부담 의무가 있는 상대방이 의무를 이행하지 않을 때 비록 증여 계약이 이미 이행됐다 하더라도 증여자는 계약을 해제할 수 있다는 게 법원의 입장이다.

부담부 증여와 비슷하지만 조금 다른 것으로 목적 증여라는 게 있다. 수증자에게 일정한 급부를 이행해야 할 채무를 부담시키는 것이다. 단순히 증여 목적물의 사용처를 지정한 경우나 증여의 목적인 재산의 사용 방법 등에 대해 일정한 약속을 하는 경우다. 예컨대 증여재산 중 일부를 장학금으로 반드시 사용해야 한다는 사용 목적이 정해져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부담부 증여와 구별된다.



증여 목적에 관한 다툼 잦아이와 관련된 사례를 하나 들자. 부산에 거주하는 기업가 박모 회장은 6년 전 부산대에 305억원을 기부하기로 계약했다. 당시 국내 개인 기부 사상 최대 금액이었다. 박 회장은 약속한 305억원 가운데 195억원을 낸 상태에서 기부 약속을 해지하고 나머지 110억원은 줄 수 없다는 소송을 냈다. 증여자의 고향인 김해에 소재한 부산대 분교인 김해캠퍼스 부지 구입에 사용하도록 목적을 지정하고 기부 계약을 했는데 부산대 측에서 김해 캠퍼스에 투자하지 않고 부산 본교의 건물을 짓거나 교수들의 연구비로 지출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에 대해 부산대 측은 박 회장과 부산대 간의 기부 약정서에 기부금 지출 용도가 김해 캠퍼스 부지 대금이 아니라 ‘캠퍼스 건설 및 연구지원 자금’으로 명시돼 있다고 주장했다. 따라서 부산대가 195억원 중 김해 캠퍼스 부지 대금이 아닌 학술연구조성비로 38억3000만원을, BK21 대응 투자연구비로 8억5000만원 등을 사용했어도 정당하다는 것이다.

얼마 전 선고된 항소심인 부산고등법원은 박 회장 측에 패소 판결을 했다. 박 회장과 부산대 측이 증여 목적에 관해 다투고 있지만 여러 증거와 사정에 비춰볼 때 기부금이 학교 측이 주장하는 캠퍼스 건설 및 연구지원 자금의 목적으로 출연된 것이라고 보고, 나아가 위 돈의 대부분이 박 회장이 주장하는 김해 캠퍼스의 부지대금으로 사용된 점이 인정된다는 이유였다. 법원은 위 판결이 “기부 목적대로 사용하지 않아도 기부자는 돈을 내야 한다”는 취지로 해석돼서는 안 된다고 설명했다. “사실관계의 판단에서 기부 목적이 박 회장 측 주장처럼 김해 캠퍼스 부지대금으로 한정돼 있는 게 아니라고 판단했을 뿐이지 기부금을 목적대로 안 써도 된다는 것은 아니다”고도 덧붙였다. 대법원의 판결이 남아 있지만 평행선은 좁혀지지 않고 있고 평행선 사이엔 불신이 놓여 있다. 박 회장은 17세에 홀로 부산으로 내려와 막노동을 하면서 자수성가한 인물로 한때 부산 지역에서 소득세 납부 랭킹 1위를 차지한 기업인이었다.



ⓒ이코노미스트(https://economist.co.kr) '내일을 위한 경제뉴스 이코노미스트'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많이 본 뉴스

1한국축구 40년만에 올림픽 좌절…홍준표, 한국축협회에 또 ‘쓴 소리’

2민희진 ‘노예 계약’ 주장에 하이브 반박 “논의 촉발, 보상 규모다”

3‘빅5’ 병원 ‘주 1회 셧다운’ 예고…환자들 “사직의사 명단 공개하라”

4尹대통령-이재명 29일 첫 회담…“국정 현안 푸는 계기되길”

5이부진 표 K-미소…인천공항 온 외국 관광객에게 ‘활짝’

6목동14단지, 60층 초고층으로...5007가구 공급

7시프트업, ‘니케’ 역주행 이어 ‘스텔라 블레이드' 출시

8데브시스터즈 ‘쿠키런: 모험의 탑’, 6월 26일 출시 확정

9‘보안칩 팹리스’ ICTK, 코스닥 상장 도전…“전 세계 통신기기 안전 이끌 것”

실시간 뉴스

1한국축구 40년만에 올림픽 좌절…홍준표, 한국축협회에 또 ‘쓴 소리’

2민희진 ‘노예 계약’ 주장에 하이브 반박 “논의 촉발, 보상 규모다”

3‘빅5’ 병원 ‘주 1회 셧다운’ 예고…환자들 “사직의사 명단 공개하라”

4尹대통령-이재명 29일 첫 회담…“국정 현안 푸는 계기되길”

5이부진 표 K-미소…인천공항 온 외국 관광객에게 ‘활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