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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우물 파 성공한 아랍상인의 후예

여러 우물 파 성공한 아랍상인의 후예

유통·제과·금융업체 잇단 인수로 부 일궈 … 앨빈 토플러 조언 듣고 텔레콤 투자해 대박



박근혜 대통령이 10월 5~7일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열린 아시아·태평양 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에서 전방위 자유무역협정(FTA) 외교를 벌이면서 새삼 멕시코에 관심이 쏠렸다.

박 대통령은 10월 7일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과의 양자회담에서 양국 무역 관계를 FTA로 발전시켜 나가자고 제안했다.

니에토 대통령도 동감을 표시했다. 박 대통령은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 등 아·태지역에서 부분적으로 진행되는 지역 통합 논의와는 별도로 ‘일대일 FTA’로 자유무역 상대국을 확보해 나가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여기에 멕시코가 포함되면서 관심을 모은 것이다.

사실 멕시코는 한국의 일반 국민에겐 비교적 먼 나라다. 하지만 멕시코는 국제통화기금(IMF)이 발표한 지난해 국내총생산(GDP) 추정액이 1조1773억 달러로 세계 14위 국가다.

한국은 1조1295억 달러로 멕시코 바로 아래인 15위를 차지하고 있다. 1인당 GDP는 명목 기준 1만 달러 정도, 구매력 기준(PPP)으로는 1만5000달러 정도다.

하지만 멕시코는 인구가 1억1840만 명으로 세계 11위 수준이다. 풍부한 시장과 노동력이 있다는 이야기다. 미국과 국경을 맞댄데다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으로 미국 시장 진출이 쉬워 투자 가치도 상당하다. 이미 NAFTA 이후 상당수 한국 기업이 진출해 있기도 하다.



포브스 부자 순위 3년 연속 1위이런 멕시코의 경제를 이야기할 때 빠질 수 없는 파워 인물이 바로 카를로스 슬림(73)이다. 멕시코에서 비즈니스를 하려면 슬림가문을 모르고는 사업 파트너는 물론 고객과도 대화가 통하지 않는다고 한다. 한국이 멕시코와 FTA를 체결해 경제적으로 더욱 가까워지게 되면 슬림에 대한 기본 정보는 알고 있는 게 필수적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앞으로 슬림에 대한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해질 것이다. 멕시코 경제의 5%를 쥐고 있는 슬림이 일거수일투족은 곧 멕시코의 경제활동이 동태나 다름없다.

슬림은 730억 달러(78조2195억원)의 재산으로 3월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 억만장자 순위 1위에 올랐다. 2010년 이래 3차례 연속이다. 그는 2010년 미국인이 아닌 사람으로는 16년 만에 처음으로 세계 1위 부자 자리를 차지했다. 멕시코인으로 그 자리에 오른 첫 인물이기도 하다. 지난해 12월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 순위에는 11위에 올랐다.

처음 1위에 올랐을 때 그의 재산은 535억 달러로 530억 달러의 빌 게이츠(57)를 아슬아슬하게 제쳤다. 그 해 3위인 워런 버핏(83)의 재산은 470억 달러였다. 1년이 지난 2011년 그의 재산은 205억 달러가 늘어난 740억 달러였다. 560억 달러의 게이츠와 500억 달러의 워런 버핏을 한참 앞섰다. 올해는 재산이 10억 달러 정도가 줄었으나 670억 달러로 2위인 게이츠, 570억 달러로 3위인 스페인의 자라 창업주 아만시오 오르테가(77), 535억 달러로 4위인 버핏을 상당한 차이로 눌렀다.

세계적인 부자들이 대개 한 우물을 파서 엄청난 성공을 거둔 것과 대조적으로 슬림은 여러 우물을 팠다. 비즈니스 스타일이 다르다. 한 사업을 해서 어느 정도 성공 궤도에 오르면 이를 바탕으로 다른 사업으로 확장하는 것을 능사로 했다. 문어발식 사업 확장이다. 그런 점에서 한국의 재벌 그룹들과 유사점이 보인다. 특히 인수·합병으로 기업의 몸집을 불리는 일을 예사로 했다. 슬림은 초기에 건설과 부동산, 그리고 광산업으로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지금은 멕시코와 라틴 아메리카에서 영업하는 휴대전화 사업자인 텔멕스와 아메리카 모빌, 그리고 건설부터 유통, 금융까지 온갖 업종의 기업을 다양하게 포함한 카르소 그룹(스페인어로 그루포 카르소)이 슬림의 비즈니스 주력이다. 주목되는 것은 그가 미국 최고 언론사인 뉴욕타임스의 주주라는 점이다. 2008년 몇몇 기업을 팔아 현찰 여유가 생기자 미국 최고 언론사인 뉴욕타임스 지분 6.4%를 취득했다. 지난해까지 이를 8%로 늘렸다.

슬림은 독특하게도 아랍계 멕시코인이다. 1940년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에서 태어났지만 부모 모두 레바논에서 이민 왔다. 슬림은 상인 집안에서 성장한 아랍 상인의 후손이다. 그의 아버지 할리드 슬림은 14세 때인 1902년 당시 오스만튀르크 영토였던 레바논에서 남미 대륙으로 이민 오면서 이름을 스페인식인 훌리안으로 바꿨다.

슬림의 어머니는 처음부터 린다라는 스페인식 이름을 가졌다. 19세기 후반 남미로 이주한 레바논계 출판업자의 딸로 태어났기 때문이다. 슬림의 외할아버지는 멕시코에서 아랍어 잡지를 펴냈다. 슬림이 NYT 지분을 소유한 것도 이러한 집안 내력과 무관해 보이지 않는다.

슬림의 부친 훌리안은 1911년 ‘오리엔트의 별’이라는 이름의 포목점을 개업했다. 여기서 벌어들인 것보다 1921년 사들인 멕시코시티 번화가의 부동산이 더 큰 이득을 안겨줬다. 카를로스 슬림은 형 훌리안 주니어, 호세와 함께 레바논 상인의 후손인 아버지로부터 장사의 기본인 흥정부터 자금 운용과 투자 요령까지 도제식으로 배웠다.

레바논 상인은 일반적으로 성실과 신용, 그리고 합리적인 투자를 교육의 핵심으로 삼는다고 한다. 그런 덕목이 아랍지역에서 이민 온 슬림 집안을 멕시코 이민 110년 만에 세계 최고 갑부 가문으로 부상하게 하는 데 한 몫 했을 것이다. 멕시코 국립 자치대에서 공학을 공부한 슬림은 1965년 투자회사인 인베르소라 부르사틸을 창업했고 이듬해 인모빌리아리아 카르소라는 부동산 회사를 설립했다.

카르소라는 그룹 이름은 자신의 이름인 카를로스에 약혼녀 이름인 소우마야 도미트의 앞 글자를 붙인 것이다. 두 사람은 이듬해 결혼했다. 부부는 1999년 소우마야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순탄한 결혼생활을 했다.





뉴욕타임스 지분 8% 보유이즈음 슬림은 건설과 부동산, 그리고 광산업에 주력했으며 1972년 건설장비 임대업체를 비롯한 7개 회사를 설립하거나 인수·합병했다. 1980년에는 갈라스 그룹을 세워 제조업·건설·광업·소매업·식품업과 담배산업 등 다양한 분야의 회사를 하나의 그룹 아래 통합 관리하기 시작했다.

1982년 원유 수출에 상당 부분을 의존해오던 멕시코 경제가 국제적인 유가 하락으로 타격을 입자 슬림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불황기를 이용해 우량 기업을 다량 매입한 것이다.

당시 멕시코 화폐인 페소화 가치는 폭락했으며 은행과 주요 산업이 국유화되거나 휘청거렸다. 슬림은 풍부한 자금을 바탕으로 매물로 나온 기업을 헐값에 다량 사들였다.

알루미늄 회사인 레이놀즈 알루미니오, 타이어 업체인 헤네랄 포포(제네럴 타이어의 멕시코 투자업체), 체인호텔인 바이멕스와 유통업체인 산보른스를 비롯한 알짜배기 기업을 손에 넣었다. 다국적 담배제조업체인 브리티시 아메리칸 타바코의 멕시코 현지 투자 업체의 지분 40%와 다국적 제과사인 허쉬 멕시코의 지분 50%도 손에 넣었다.

그러면서 금융업체에도 투자해 1개 금융사를 인수하고 3개 금융사를 새로 세웠다. 그 뒤 구리와 알루미늄, 그리고 화학제품 판매업체를 매수했다. 이 모든 기업의 인수와 창업 자금은 이미 매입해둔 거대담배업체 시가탐의 신용을 바탕으로 확보했다. 잘 나는 하나의 기업의 신용을 최대한 활용해 다른 기업을 새롭게 손에 넣었다. 1990년엔 카르소 그룹을 공개해 멕시코 국내에선 물론 해외에서도 대거 투자를 받았다. 슬림은 이러한 인수·합병을 통해 멕시코 굴지의 기업인으로 자리 잡았다.

슬림이 세계 1위 부자가 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성장산업을 귀신같이 남보다 먼저 찾아내는 그의 안목이다. 1990년대 들어 막 고속성장을 시작한 통신업에 선제 투자를 했다. 1990년 프랑스의 프랑스텔레콤과 미국의 사우스웨스턴 벨과 손잡고 멕시코의 국영 전화업체인 텔멕스를 멕시코 정부로부터 공동 인수했다. 국영 전화회사의 민영화라는 엄청난 기회를 잡은 것이다.

성장산업인 통신업에 뛰어든 것은 슬림이 세계적인 갑부가 되는 도약대가 됐다. 그는 친하게 지냈던 미국 미래학자 엘빈 토플러의 충고를 받아들여 통신이 미래 성장산업이 될 것으로 확신하고 대규모 투자를 했다. 토플러의 충고도 충고지만 이를 듣고 잽싸게 돈 냄새를 맡고 투자를 감행한 슬림의 결단도 높이 평가할 만하다.

슬림은 타고난 사업 감각으로 될 만한 사업을 떡잎부터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재주를 보였다. 아이맥이 나오기도 전인 1997년 애플 주식의 3%를 매입한 것도 한 사례다. 신규 성장 산업에서 먼저 보고 먼저 뛰어든 사람이 가장 큰 몫을 얻는 법이다.

토플러의 예견과 슬림의 투자 감각은 틀리지 않았다. 2006년까지 이 회사는 멕시코 유선전화의 90%를 장악했다. 슬림에게 날개를 달아준 또 다른 성장 기회가 무선통신사업이다. 그는 라디오모빌 딥사라는 통신업체를 인수해 이를 텔셀이라는 거대 무선전화회사로 길러냈다.

이 회사는 멕시코 전체 이동통신의 80%를 장악하고 있다. 그의 인수 합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1991년에 칼린다 호텔그룹을, 1993년 헤네랄 타이어와 그루포알루미니오의 지분을 늘렸다. 회사가 갈수록 늘어나면서 슬림은 1996년 그루포카르소를 통신, 금융, 일반의 세 개로 나눴다.

슬림의 투자는 내수에만 그치지 않았다. 그는 1999년부터 해외 진출에 나서 그 해 미국에 텔멕스USA를 설립했으며 현지 휴대전화 업체인 트라크폰을 인수했다. 2000년에는 아메리카 모빌의 지주회사인 아메리카 텔레콤을 설립하고 남미를 향해 공격적으로 진출했다.

이 회사는 브라질·아르헨티나·에콰도르 등 해외에서 무선통신사업을 벌였다. 이듬해에는 콜롬비아·니카라과·페루·칠레·온두라스·엘살바도르의 무선통신업체에 투자했다. 같은 해 마이크로소프트와 손잡고 스페인어 포털서비스 업체를 설립해 현재도 ProdigyMSN이라는 이름으로 가동하고 있다.



재단 세워 일찌감치 사회공헌 나서미래를 내다보는 슬림의 안목은 누구보다 이른 시기에 기부활동을 시작했다는 데서도 알 수 있다. 이미 1986년 자신의 이름을 딴 카를로스 슬림 재단을 세워 기업 이익의 사회환원을 시작했다. 부자 나라가 아닌 멕시코에서 사업을 하려면 투자와 자선을 병행해야 한다는 사실을 일찌감치 파악했다. 이 재단은 2008년 2억5000만 달러를 멕시코 스포츠 진흥에 내놨다.

‘라틴 아메리카의 개발과 고용 촉진’을 의미하는 스페인어 머리글자를 딴 IDEAL이라는 비영리기구를 설립해 사회 인프라를 개발하고 청년들에게 직업교육을 한다. 1995년엔 텔멕스 재단을 세우고 보건·스포츠·교육 분야에 전략적인 기부를 하고 있다. 2007년엔 40억 달러를 들여 카르소 보건스포츠교육 연구소를 설립, 라틴 아메리카 주민이 원하는 형태의 기부 사업을 벌이고 있다. 이런 노력 끝에 슬림은 2011년 포브스 선정 세계 최고 부자 및 기부자로 동시에 이름올렸다.

그 해 그는 40억 달러를 자신의 재단에 추가 기부했다. 투자 감각과 ‘개념’ 모두를 인정받은 것이다. 실제로 빈부 차이가 극심한 멕시코 일각에서는 슬림의 대기업이 소상공인을 압박한다는 주장도 만만하지 않다. 그의 기부활동이 이런 여론의 확산을 막는 데 기여한다는 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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