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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atures AN AMERICAN TRAGEDY - 총기난사 사건, 도대체 왜 ...?

Features AN AMERICAN TRAGEDY - 총기난사 사건, 도대체 왜 ...?

경찰은 뉴타운 학살을 예견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고 발표했지만 조짐은 분명히 있었다
코네티컷 뉴타운에 안장된 희생자 제시카 레코스의 묘지 부근에 39왜?39라는 표지판이 걸려 있다.



2012년 12월 14일 금요일 오후였다. 전화로 아내와 싸웠다. 그 전날 밤 언쟁의 연장이었다. 딸아이가 초등학교 1학년 성탄절 연극에서 입을 드레스를 새로 사야 하는지를 두고 벌인 싸움이었다. 내 주장은 간단했다. 한번 입고 나면 계속 옷장 구석에 처박아 둘 것이기 때문에 돈 낭비라는 것이었다.

나는 잠복근무 중이었다. 롱아일랜드 깊숙한 곳의 어느 집 앞에 주차된 차 안이었다. 그 집 남자의 자동차가 그 며칠 전 맨해튼 미드타운에서 갱단 공격에 연루됐기 때문이었다. 잠복 근무의 성과는 없었지만 그 기사가 뉴욕의 언론에서 최고 인기였기 때문에 난 그곳에서 계속 죽쳤다.

그때 아이폰에 AP 통신 속보 알림이 떴다. 코네티컷 뉴타운의 샌디훅 초등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 어린이 20명이 숨졌다는 소식이었다. 교사들을 포함해 성인 여러 명도 목숨을 잃었다. 범인은 반자동 소총을 들고 샌디훅 초등학교에 들어가 닥치는대로 총을 발사했다.

그 순간 나의 반응은 어땠을까? 공포? 비탄? 당혹스러움? 아니었다. 보통사람들의 감정을 나는 전혀 느끼지 않았다. 대신 즉시 몸에서 아드레날린이 대량으로 분비되는 것을 느꼈다. 현장으로 달려가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다. 무엇보다 “도대체 왜?”라는 의문에 대답을 찾고 싶었다.

아내에게 총기 사건이 터져 딸아이의 연극에 가지 못하게 됐다고 말했다. 아내는 내가 언제 집에 올지 묻지도 않았다. 답이 없는 질문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아이폰으로 뉴타운으로 가는 길을 찾아본 뒤 잠복 근무를 중단하고 2시간의 운전을 시작했다. 이런 순간들이 내 삶의 새로운 표준이었다. 뉴욕 데일리뉴스 신문의 기자로서 지난 7년 동안 미국에서 일어난 거의 모든 주요 비극을 취재했다.

애리조나주 투손의 슈퍼마켓 주차장에서 제러드 러프너가 개브리엘 기퍼즈 연방 하원의원과 여러 명을 향해 총기를 난사했을 때 나는 현장에 달려가 히죽거리는 용의자의 역겨운 모습을 묘사하는 목격자의 말을 받아 적었다. 콜로라도주 오로라의 영화관에서 제임스 홈스가 총기를 난사한 뒤 희생자 추모식에서 젊은 여성이 ‘왜?’라는 의문에 대답을 찾으려고 고통으로 울부짖는 모습을 지켜봤다. 텍사스주 포트후드 기지에서 미 육군 소령이자 정신과 군의관인 니달 말리크 하산이 43명에게 총을 난사해 13명을 숨지게 한 날에도 나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뉴욕 빙햄턴의 아메리칸시민연합(ACA) 이민센터에서 지벌리 붕이 총기를 난사한 후 아내를 보호하려고 죽은 체하고 아내 위에 가만히 엎어져 있었다고 말하는 부상자의 고통스러운 이야기도 들었다. 그는 아내가 숨을 쉬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을 발작적으로 흐느끼며 돌이켰다. 총알이 자기 팔을 관통해 아내의 가슴에 박혔다. 그가 자녀에게 엄마가 저 세상으로 떠났다는 소식을 어떻게 전할까?

그런 비극을 취재하는 일은 심적 부담이 무척 큰 일이었다. 하지만 대다수 기자가 꿈꾸는 지적 자극을 얻을 수 있었다. 나는 거의 매일 생면부지의 사람들이 겪는 가장 격렬한 순간들을 함께 했다. 그런 원초적으로 순수한 비탄의 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이 신성한 명예라고 늘 생각했다.

그러나 그 때문에 매년 거의 6개월 정도는 집을 떠나 있어야 했다. 아내의 내조는 완벽했다. 내가 비극적인 재난을 취재하러 전국을 뛰어다니는 동안 아내는 세 딸과 함께 집에 있기 위해 자신의 작가 경력을 포기했다. 아홉 살, 여섯 살, 두 살인 우리 딸들은 그보다 훨씬 더 많이 희생했다. 가족 여행은 늘 마지막 순간에 취소됐고, 아버지로서 딸들의 중요한 행사에 가보지 못한 적이 너무도 많아 꼽을 수도 없다. 그 역시 우리 가족의 새로운 표준이 됐다.

한번은 딸들이 하루 종일 가족 캠핑을 준비했지만 다국적 석유회사 BP의 대형 원유 유출 사고가 터지면서 일정을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생일 파티를 정성 들여 계획하면 반드시 대형 뉴스가 터진다는 게 우리 집에서만 통하는 우스갯소리였다. 한번은 뉴욕 퀸스에서 소방차 두 대가 정면 충돌했고, 또 한번은 브루클린에 허리케인이 덮쳐 생일 파티에 가지 못했다.

내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너무도 자주 설명했기 때문에 아이들은 이제 거의 무감각해졌다. 언제나 나는 대신 선물을 사가겠다고 약속했다. 선물을 잔뜩 사준다며 달랬다. 하지만 난 내 일이 너무도 좋았다. 미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신문을 위해 세계에서 가장 큰 사건을 취재하는 것에 늘 보람을 느꼈다. 수입이 좋은 직업은 아니었지만 초과근무 수당으로 가족을 편안히 부양하기에 충분했다. 지금 같이 경제가 어려운 상황에선 그렇게 하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나는 매력적인 인생을 산다고 믿었다.

2012년 12월 14일 샌디훅 초등학교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나자 경찰이 어린이들을 대피시키고 있다.
뉴타운으로 차를 몰면서 최대한의 정보를 수집하고 계획을 세우려고 애썼다. 다른 기자들은 이미 현장에 도착해서 정보를 캐고 있었다. 나는 한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다른 손으론 인터넷을 뒤지며 정보를 찾았다. 총기난사 용의자의 이름은 이미 공개돼 있었다. 라이언 란자였다. 그의 페이스북 프로필도 올라와 있었다.

길에서 다른 기자들을 수없이 지나쳤다. ‘보도’라는 스티커를 붙인 차량들이 긴 행렬을 이루며 코네티컷주의 작은 도시로 향하고 있었다. 우리 모두는 같은 것을 원했다. 이 학살의 동기를 찾는 것이었다. 뉴타운에 도착하자 데일리뉴스 사진기자들이 이미 현장에 도착해 있었다. 경찰이 학교로 이어지는 작은 도로인 디킨슨 드라이브를 차단하고 관계자 외의 출입을 막았기 때문에 나는 멈추지 않고 바리케이드를 지나쳤다.

주요 비극 현장의 첫 날은 자물쇠가 채워진 우리 속에서 몇 시간이나 앉아 있는 것과 비슷하다. 경찰은 질서 유지를 위해 기자들을 위한 작은 우리를 만들어 놓는다. 그들이 가끔씩 와서 먹이를 주듯 조금씩 정보를 던진다. 그러나 진정한 정보는 주민들에게서 나온다. 나는 최대한 많은 주민을 만나 인터뷰를 해야 했다.

뉴욕의 편집자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의 업데이트를 요청했다. 그때쯤 총기난사 용의자가 라이언 란자가 아니라 그의 동생 애덤 란자라는 사실이 알려졌다. 우리 신문은 애덤 란자의 사진이 없었다. 내가 하나를 찾아야 했다. 인근에 던킨 도너츠 가게가 있었다. 그곳으로 가서 일을 시작했다.

던킨 도너츠 앞에 차를 댔을 때 오후 3시 정도였다. 그 가게는 작은 쇼핑몰 한가운데 있었다. 그 앞에는 청년과 청소년들이 호주머니에 손을 넣고 작은 원을 만들며 서 있었다. 아주 추운 날이었다. 대화가 거의 없었고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많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냥 함께 모여 있고 싶어했다. 리마의 성로즈 성당에도 한무리가 모여 있었고, 약 3㎞ 떨어진 콜로니 다이너 식당의 주차장에도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그처럼 큰 비극의 충격으로 아무도 혼자 있으려 하지 않았다.

나는 몇 시간 동안 사람들에게 같은 질문을 반복했다. “애덤 란자를 아세요?” 다음 몇 시간 동안 던킨 도너츠를 드나든 손님 수백 명으로부터 가끔씩 작은 정보를 얻었다. 그 정보를 즉시 뉴욕의 편집자들에게 이메일로 보냈다. 현장에 있는 우리 신문의 다른 기자들과도 그 정보를 공유했다.

“그는 조용한 천재였다.” “그는 고통을 느끼지 못했다.” “그는 늘 겁에 질린 듯했다. 누군가가 그를 때리려 하듯이 말이다.” “그는 얼간이였다.” “아이들이 툭하면 그를 괴롭혔다.” “그는 기이한 인물이었다.” “그는 총을 들고 고등학교를 먼저 찾아갔다. 문을 두드렸지만 들어갈 수 없었다.”

두 시간이 지나 편집자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다. 아무도 사진을 구하지 못했다는 전언이었다. 애덤 란자의 사진을 찾는 게 나의 최우선 임무였다. 그때쯤 현지인 여러 명이 나를 도와주려 했다. 그들도 ‘왜?”라는 의문을 풀고 싶어했다. 그들 중 몇 명이 친구와 급우들에게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샌디훅 초등학교 입구. 애덤 란자가 그 학교에 들어가 총기를 난사해 수많은 희생자를 낸 뒤 자살했다. 경찰은 총기난사 용의자 애덤 란자가 어머니 낸시와 함께 살았던 집 안에서 자동소총을 발견했다.



던킨 도너츠에서 내가 차지한 테이블에 졸업 앨범을 가져 오기도 했다. 우리는 함께 앨범을 넘기며 애덤의 흔적을 찾았다. 그러나 운이 없었다. 중학교 졸업 앨범에 들어 있는 애덤 란자의 이름 아래 “사진을 싫어한다”라고 나와 있었다. 그에 관한 정보를 찾으려고 소셜미디어 사이트들을 샅샅이 뒤졌다. 저널리즘의 신세계에선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정보를 얻는데, 특히 사진을 구하는데 필수적인 도구다. 그러나 온라인에는 애덤 란자의 흔적이 보이지 않았다. 페이스북 계정조차 없었다.

뉴타운 주민 대다수도 애덤 란자에 관해 나보다 더 아는 게 없었다. 내가 재수가 아주 없거나 그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살아온 사람이었다. 지금 같은 디지털 시대에 20세 남자로선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가 어려운 일 아닌가?

내 몸을 흠뻑 적신 아드레날린이 새벽 2시가 넘자 거의 고갈됐다. 어쩔 수 없이 던킨 도너츠를 나섰다. 숙소를 미리 생각해 두지 않았다. 근처의 모든 호텔은 이미 만원이었다. 결국 32㎞ 떨어진 햄턴 인에 방을 얻었다. 토요일과 일요일은 단서를 쫓느라 어떻게 시간이 흘렀는지도 몰랐다. 대부분은 소득이 없었다. 우리 신문사 데일리뉴스는 기자 6명을 현지에 파견했다. 우리는 일을 분담하기로 했다. 대다수는 무고한 희생자에 관한 정보를 좇았다. 내 임무는 란자 형제에 관한 정보를 얻는 것이었다.

월요일이 되자 몇 가지 추가적인 단서를 엮어 맞출 수 있었다. 용의자의 어머니 낸시 란자와 가까운 취재원을 발견했다. 낸시 란자는 침대에서 잠들어 있다가 애덤의 총격을 당한 첫 희생자였다. 그녀도 피해자였지만 이번 사건에 사용된 부시매스터 소총 같은 무기를 집안에 둔 일에 관해 조사 대상이 됐다.

낸시의 친구는 언론이 그녀를 묘사한 내용을 보고 격분해서 진실을 알리고 싶어했다. 그는 익명보장 조건으로 내 인터뷰에 응했다. 그는 애덤이 정신병을 앓고 있었으며 낸시가 아들을 도와주려고 했다고 말했다. 또 애덤은 집을 떠나기를 두려워했고 낸시가 이사를 하려 했지만 애덤이 완강하게 반대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이메일과 문자 메시지를 그 증거로 제시했다. 총기난사 사건 이전 며칠 동안 위기에 처한 가족에 관한 이야기가 서서히 윤곽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당연히 그런 특종은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편집자들은 신이 나서 흥분했지만 나는 내게 뭔가 문제가 있다고 느꼈다.

희생된 어린 아이들의 사진이 공개됐을때 나는 그 사진을 쳐다볼 수 없었다. 처음엔 무의식적인 반응이었다. 나는 애덤에 관한 정보를 더 많이 얻어야 하는 내 임무에 초점을 맞추다보니까 그렇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희생된 아이들의 사진을 보지 않으려고 내가 발버둥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TV를 쳐다보지 않았고 신문도 그 페이지를 휙 넘겼다. 추모 행사도 못 본 체 지나쳤다.

화요일 이른 아침 호텔 로비에서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있을 때 우연히 TV 화면을 올려다 보게 됐다. 희생된 여자아이 여러 명의 사진이 나왔다. 한결같이 미소 짓는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내 딸들처럼 말이다. 주차한 곳으로 걸어가 차문을 열고 운전대 뒤에 앉아 흐느꼈다. 희생자와 유가족을 생각하며, 그리고 나 자신과 우리 딸들을 생각하며 울었다. 마침내 다른 미국인들이 느끼는 감정을 나도 느끼기 시작했다. 실제로 몸까지 아팠다.

한참 동안 마음을 진정시킨 뒤 호텔 로비로 다시 가서 동료를 만났다. 난 그녀에게 몸이 좋지 않아 한두 시간 호텔방에서 쉬고 싶다고 말했다. 편집자들에겐 내가 애덤에 관한 단서를 계속 추적하고 있다고 보고했다. 하루를 다시 시작하려고 또 샤워를 했다. 곧 마음은 가라앉았지만 속의 메스꺼움은 5일 뒤 뉴타운을 떠날 때까지 계속됐다.

몇 주 뒤 뉴타운에 다시 가서 그 사건으로 아들 대니얼을 잃은 마크 바든을 인터뷰했다. 그때쯤 희생된 학생들의 부모들은 한데 뭉쳐 새로운 총기규제법을 촉구하며 기자들을 만나고 있었다. 나는 바든의 홍보 담당자를 만났다. 뉴타운 시청의 홍보실에서 고용한 사람이었다.

그는 바든이 앉아 있는 넓은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바든은 자신의 아들과 현행 총기법의 문제점에 관해 나에게 이야기하려고 기다라고 있었다. 아들 이야기를 할 때 그의 얼굴에 고통이 역력했다. 미래의 순간들을 잔인하게 빼앗긴 그의 고통은 영원히 내 머리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아들과 함께한 순간들을 계속 되돌리게 된다”고 그가 말했다.

“시간을 되돌리고 싶다. 더 많은 순간들을 함께 하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모두가 하는 상투적인 말을 했다. “유감입니다.” 그날 늦게 총기난사 사건으로 아들 딜런을 잃은 니콜 호클리를 인터뷰했다. “내 아들을 다시는 못 본다는 사실을 나도 안다”고 그녀는 말했다. “매일 매 순간 떨칠 수 없는 사실이다.”

바든과 호클리는 모두 잃어버린 순간들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나도 갑자기 나의 잃어버린 순간들이 떠올랐다. 그 순간 나는 데일리뉴스를 그만두겠다고 결심했다. 하지만 먼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뉴타운 사건의 전말을 최대한 완벽하게 파헤치고 싶었다. 사명감 있는 기자라면 주변 세계를 이해하려는 욕구가 강하다. 나도 그곳에서 왜 그런 끔찍한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내고야 말겠다고 다짐했다.

신문 지면에 허용되는 800단어로는 그 이야기를 다할 수 없었다. 지면이 작으면 맥락이 사라지게 된다. 4월 말 나는 휴직을 하고 책을 쓰기로 결심했다. 뉴타운으로 다시 가서 인터뷰와 조사를 하면서 책을 썼다. 가족에겐 오래 떨어져 있는 건 이게 마지막이라고 약속했다.

12월 9일 샌디훅 초등학교 총기난사 사건의 희생자 26명 중 14명의 유가족들이 기자회견을 가졌다.



‘샌디훅 방문을 환영합니다’라고 적힌 표지판. 겨울이 되면서 뉴타운 주민들은 1년 전의 악몽을 떠올린다. 제러미 리치먼이 총기난사 사건으로 딸 애비엘이 희생된 뒤의 삶에 관해 기자들의 질문에 답하고 있다.
지난 12월 14일 뉴타운 사건 1주기에 맞춰 내 책이 나왔다. ‘뉴타운: 미국의 비극(Newtown: An American Tragedy)’은 총기 난사보다 훨씬 큰 그림을 그린다. 애덤 란자가 어린 시절에 사람들을 두려워하고 그들의 손길을 두려워하던 일부터 시작해 그를 계속 괴롭힌 정신병과 싸운 내력에 관한 이메일을 수천 통 받았다.

두려움에 떨던 어린이가 고독한 청소년으로 성장했고 그 과정에서 온통 폭력적인 이미지에 휩싸이며 폭력에 집착했다. 최근 경찰은 그 사건에 대한 보고서를 발표했다. 그 끔찍한 비극을 아무도 예견할 수 없었다는 결론이었다. 그러나 내 책은 그와 다른 결론에 도달했다. 내가 애써 조사한 결과 경고의 조짐은 숱했고 그 비극은 분명히 사전에 막을 수 있었다.

애덤 란자가 왜 현실과 전쟁을 치러야 한다고 느꼈는지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에겐 하루하루의 삶이 고문이었다. 밝은 빛, 시끄러운 소리, 심지어 사람들의 손길이 닿는 것조차 두려워 했기 때문에 말문을 닫았다. 그는 탈감각화한 요즘 사회에서도 비정상적일 정도의 폭력에 사로잡혔다. 그림과 글, 시도 폭력적이었다. 폭력적인 비디오게임에 중독됐고 인터넷에서 무기와 연쇄살인범을 숱하게 검색했다. 애덤 란자는 죽음에 둘러싸인 세계를 스스로 만들어갔다.

그의 어머니는 전문가의 도움을 구했다. 상담도 받았다. 낸시 란자는 주위에서 즐거워할 줄 모르는 여자로 알려졌다. 아들 애덤에 관해선 더욱 그랬다. 아들에게 필요한 도움을 아무도 주지 못한다고 느꼈다. 결국 모두가 자기 아들을 포기했다고 생각했다. 물론 그녀가 집에 소유한 총기 문제가 있다. 폭력에 집착하는 문제 있는 아들을 평생 돌본 어머니가 어떻게 집에 반자동 소총들을 여러 정 둘 수 있었는가? 내 책은 그 문제에 답을 할 수 없다. 누가 그 상황을 이해할 수 있을까?

리처드 노비아도 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노비아는 애덤이 고등학교 1~2학년 때 상담교사였다. 낸시 란자는 아들이 따돌림과 괴롭힘을 당하니 특별한 보살핌이 필요하다고 그에게 이야기했다. 노비아는 애덤에게 신경을 많이 쓰면서 서서히 좋아진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애덤이 고교 3학년에 올라가기 전 노비아는 직장을 옮겼다. 낸시는 그런 사실을 알고는 애덤을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노비아는 낸시에게 애덤을 학교에 보내야 한다고 설득하려 했다. 뉴타운 고교가 제공하는 안전망이 없으면 애덤이 자신의 세계에 빠져들어 지금까지의 발전이 아무런 소용이 없어진다고 말했다.

낸시도 건강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여행을 다니기 시작했다. 애덤은 혼자 집에 남아 범행을 계획했다. 지금 노비아는 밤잠을 못 이룬다. 자신이 뉴타운 고교에 남아 있었더라면 일이 이 지경이 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

지난 6월 책의 원고를 끝낸 뒤 아내와 나는 뉴욕을 떠나기로 결심했다. 펜실베이니아주의 작은 마을에 자그마한 집을 구입했다.

아내는 교사 일을 계속했고 나는 전업주부가 됐다. 아기 기저귀를 갈아주고, 큰 딸들이 합창단에 갈 때 데려다 주고, 학부모 모임에 참석하고, 유기농 시장에서 채식주의자들과 함께 수프를 끓이느라 하루가 어떻게 가는 줄 모른다.

물론 기자 시절이 그립기도 하다. 특히 내 몸을 흥건히 적시던 아드레날린이 많이 생각난다. 좋은 친구들과 동료도 그립다. 하지만 그 대신 얻은 것이 너무나 많다. 올 가을 두 딸의 생일 파티가 열렸다. 이번에는 내가 빠지지 않았다.

- 필자 매튜 리시애크는 뉴욕 데일리뉴스 기자로 총기난사 사건들의 특종 보도로 이름을 떨쳤다. 그가 쓴 책 ‘뉴타운: 미국의 비극(Newtown: An American Tragedy)’이 최근 발간됐다. 현재 그는 기자를 그만두고 아내, 세 딸과 펜실베이니아주에서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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