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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의 길’ 버린 영국 노동당

‘제3의 길’ 버린 영국 노동당

제러미 코빈은 긴축재정 반대를 슬로건으로 내걸어 영국 노동당 당수에 선출됐다.
지난 9월 12일 영국 노동당 당수 경선에서 강성 좌파인 제러미 코빈(66)이 60%의 득표율로 선출됐다. 이로써 노동당은 급좌회전을 한 셈이다. 그리스에서 급진 좌파 시리자가 집권했고 스페인에서 포데모스가 득세하고, 미국 민주당 대선 경선에서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이 돌풍을 일으키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보인다.

그러나 코빈이 ‘기성정치에 반대하는 파도’를 타고 노동당 당수로 선출됐다는 항간의 분석은 사실과 다르다. 그가 노동당 당수가 된 것은 노동당 행동파의 귀를 솔깃하게 하는 몇 가지 아이디어를 기꺼이 표출할 수 있었던 유일한 후보였기 때문이다. 사실 코빈은 기성정치의 산물이다. 그는 사회적 불평등을 줄이고 평화의 명분을 추구하는 노동당의 원칙을 이야기했다. 반면 상대 후보들은 기술관료적인 장황한 논쟁에 빠졌다.

노동당에서도 극좌파에 속하는 아웃사이더 평의원이던 코빈의 부상을 설명할 수 있는 진짜 이유를 살펴 보자. 코빈 지지파를 플래카드나 흔드는 어색한 집단에서 진지하게 권력을 추구하는 강한 세력으로 변모시킨 것은 신노동당 시절의 몇 가지 타협에 대한 당원 사이의 들끓는 분노였다.

영국 노동당은 1983년 마이클 푸트 당수가 좌클릭 노선으로 총선을 치렀다가 마거릿 대처 전 총리에게 대패한 이후 중도로 옮겨갔다. 대표적 인물이 토니 블레어였다. 고든 브라운을 거쳐 전임 당수인 에드 밀리밴드 때에야 비로소 다시 왼쪽으로 이동했다. 블레어와 브라운, 심지어 어느 정도는 밀리밴드 아래서 노동당은 미국 사회주의자 어빙 하우가 말한 “원칙내에서의 편의주의와 원칙을 손상하고 썩히는 편의주의를 구분 못하는 어리석음”으로 고통 받았다.

다시 말해 신노동당이 쓸데없이 보수당의 노선에 굴복함으로써 선거에서 승리한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어 금융부문의 규제를 완화와 민간투자개발사업(PFI) 구상을 통해 2400억 파운드의 ‘블랙홀’(재정적자)을 만든 것은 보수당이 아니라 신노동당이었다. 마찬가지로 이라크전 지지, 금융부문 규제 반대, 아동 혜택 삭감에 대한 지도부의 모호한 입장도 전부 노동당의 원칙을 ‘손상하고 썩힌’ 편의주의로 분류될 수 있다. 그 결과 당원의 눈에 노동당 주류 정치인은 형편없이 비쳤다.

이른바 노동당 ‘현대화 기수’들이 우익에 계속 양보하면서 노동당 당원은 중도의 길을 내건 신노동당 프로젝트를 갈수록 무시하게 됐다. 블레어 추종자들은 20년도 채 안 된 기간에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의 ‘제3의 길’을 지지하다가 평화시 영국의 가장 엄격한 적자 감축 계획의 지지로 돌아섰다.

재정적자 감축은 대차대조표 상의 숫자만 의미하지 않는다. 2020년까지 어린이 80만 명이 추가로 빈곤으로 내몰릴 전망이다. 영국 어린이의 약 4분의 1에 약간 못 미친다. 같은 기간에 노동인구의 150만 명도 추가로 빈곤선 아래로 떨어질 가능성이 크다.

지각 있는 사람이라면 권력을 잡고도 이념적으로 순수하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안다. 그러나 대량살상무기에 관해 거짓말하거나 졸부에 관해 ‘놀라울 정도로 느긋한 입장’을 취하지 않고도 선거에서 승리할 수 있다. 그런 상황을 별 생각 없이 받아들이는 것이 새로운 중도 노선이라면, 노동당 행동파가 그 노선을 지지하기보다 역겨워도 옛 좌익 노선을 견지하겠다고 생각하는 것도 당연하다.

영국 노동당 역사 대부분에서 코빈의 아이디어는 민주사회주의의 주류로 해석돼야 마땅했다. 물론 시대가 바뀌면 정치인의 사고도 진화해야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노동당 실용주의자들에겐 신노동당의 가장 진보적인 업적도 갑자기 지나친 좌익이고 ‘낭비벽’으로 간주된다.

코빈 당수는 ‘새로운 정치’를 하기 어려울 듯하다. 그의 사회주의는 더 나은 사회를 위한 청사진이라기보다 신앙 고백이나 계급투쟁에서 한쪽을 지지하는 것일 뿐이다. 빈부격차를 줄이려면 농촌에 가서 확성기로 ‘부자 증세’를 외치는 것만으론 부족하다. 코빈 당수가 하마스(팔레스타인)와 헤즈볼라(레바논) 같은 무장단체를 지지한다는 사실로 태동하려던 사회주의적 국제주의는 이미 손상됐다. 코빈 지지자들은 그가 영국인을 위해 긴축재정에 강력히 반대하는 한 그런 이념은 문제없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이란의 위성 영어방송 프레스TV과 러시아 투데이에 출연하거나 홀로코스트(유대인 대학살)를 부정하는 인사들과 뜻을 같이하는 국제주의자는 없다.

코빈 지지자들은 그의 불쾌한 언급이나 행보를 기꺼이 무시하려 하겠지만 노동당 내 그의 비판자들은 너무도 자주 현대 영국에서 잘못된 것이 없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그들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일 뿐 아니라 빈곤선 아래로 떨어질 수많은 어린이를 걱정하기보다 최근의 정체성 정치 논란을 두고 열광할 가능성이 크다.

코빈 당수는 터무니없는 현상황에 분개할 수 있다는 사실로 인해 그토록 많은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빈곤층을 쥐어짜 은행의 실수를 보상하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생각을 거부하는 사람이 그만은 아니다.

코빈의 부상은 블레어주의자들 탓이다. 그들이 실용주의를 그토록 추악하게 만든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 JAMES BLOODWORTH IBTIMES 기자 / 번역 이원기
 [박스기사] ‘코빈 때리기’에 나선 보수당


그가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친구’로,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을 ‘비극’으로 불렀다고 지적해영국 보수당은 제러미 코빈이 노동당 당수 경선에서 압승하자마자 맹렬한 기세로 코빈 때리기에 나섰다.

보수당의 공식 페이스북·트위터 계정은 구식 좌파 정치인 코빈 당수를 테러리스트 동조자로 그리는 밈(meme, SNS에서 재미난 말을 적어 넣어서 다시 포스팅하는 그림이나 사진)으로 도배됐다. 그가 하마스를 친구로 생각하고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을 슬퍼하며 영국의 국가안보에 중대한 위협을 제기한다는 내용이다.

보수당의 페이스북에는 “지금이 영국에 아주 중대한 순간이다. 보수당만이 안정과 안보, 기회를 계속 제공할 수 있다”는 글이 올랐다.

보수당 지지자에게도 이메일로 전달된 그 밈은 코빈 당수가 하마스와 헤즈볼라를 ‘친구’로 불렀고, 오사마 빈 라덴의 죽음을 ‘비극’이라고 평했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코빈 당수가 이란 프레스TV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 말(“2011년 미군이 그를 재판에 회부하지 않고 사살하기로 결정한 것은 비극이다”)을 맥락 없이 잘라 인용했다.

코빈은 소득 불균형 해소, 국방예산 삭감을 주제로 한 열정적인 공약으로 도전자 3명을 압도적인 표차로 물리치고 노동당 당수로 선출됐다. 경선 후보 중 이베트 쿠퍼와 앤디 번햄은 트위터를 통해 패배를 인정하며 이제 미래에 집중해 보수당을 격파하자고 말했다.

그러나 노동당원 전부가 코빈의 승리에 환호한 건 아니다. 노동당 예비 내각의 보건 장관 제이미 리드는 당 간부직을 사퇴한다고 발표했다. 리드는 사퇴의 변에서 자신의 핵에너지 친화정책에 대한 코빈의 반대 의견을 인용했다. 코빈은 리드의 정책을 두고 “어설픈 정보를 근거로 했으며 잘못됐다”고 말했다. 리드는 ‘분명히 말하지만 나의 지역구가 차세대 핵에너지 허브가 되려는 야망에 어느 당 누구의 반대도 허용하지 않겠다’고 썼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를 포함한 보수당 지도부는 선거 전부터 코빈이 낙승할 경우 끔찍한 희생을 치뤄야 한다고 경고했다. 마이클 팰런 영국 국방장관은 성명서를 통해 “우리 국방력을 약화시키든 일자리와 수익에 세금을 올리든 부채와 복지 지출을 늘이든 돈을 찍어내 생활비를 올리든 간에 코빈의 노동당은 영국 근로계층에게 타격을 줄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스코틀랜드 자치정부 수반 겸 스코틀랜드독립당(SNP) 당수인 니컬라 스터전은 영국 보수파에 맞서는 ‘진보연합세력’의 일부로 코빈 당수와 협력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 CHRISTOPHER ZAR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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