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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좋은 세상 만들기 위해 노래하다

더 좋은 세상 만들기 위해 노래하다

2004년 ‘밥 말리의 루츠 록 레게 투어’에서 노래하는 말리의 아들들. (왼쪽부터) 지기, 스티븐, 키-마니, 데미안, 줄리안 말리.
레게의 전설로 불리는 밥 말리(본명 로버트 네스타 말리)는 1945년 2월 6일 자메이카 동부의 시골 마을 나인 마일스에서 태어났다. 그가 1981년 암으로 세상을 떠난 지 거의 35년이 흘렀지만 그의 음악과 문화적 이데올로기는 아직도 우리들에게 영감을 준다. 그의 아들 지기와 스티븐 말리가 뉴스위크와의 독점 인터뷰를 통해 아버지의 음악과 인생, 업적을 이야기했다.



아버지가 얼마나 유명한 사람인지, 이 세상에서 얼마나 중요한 인물인지를 언제 깨달았나?




지기: 아버지에게서는 늘 특별한 기운이 느껴졌다.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도 남달랐다. 그래서 난 세상을 알기도 전에 아버지가 어떤 사람인지, 또 사람들이 아버지를 어떻게 보는지 알게 됐다. 난 아버지가 대단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유명해진 뒤에도 한결 같았다. 시간이 흐르면서 내가 아버지에 관해 알고 있던 것들을 세상이 인정했다. 아버지는 세상이 자신을 인정하고 사랑하게 된 뒤에도 전혀 달라진 게 없었다.



스티븐: 난 1976년 한 공연을 앞두고 아버지가 괴한의 총격을 받았을 때 그런 기분이 들었다. 아버지가 총에 맞아 부상당했을 때 ‘와, 아버지가 이렇게 중요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버지가 세상을 떠났을 때 세상이 아버지를 인정하는 걸 보고 아버지가 특별한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아버지에 대한 인식이 어린 시절과는 달라졌나?




지기: 내가 아버지가 되고 나서 좀 달라진 듯하다. 내게 아버지를 닮은 구석이 있다고 느끼지만 아버지가 옆에 안 계시니 그게 맞는 생각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 “아버지도 이런 적이 있었나요?”라고 물을 수가 없으니 말이다. 하지만 어떤 면에선 지금 아버지를 더 잘 알게 된 듯하다. 내 생각이 맞는지 아버지가 말해줄 수는 없지만 내가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건 인식이 아니라 그냥 아는 것이다. 하지만 그는 무엇보다 먼저 우리의 아버지였고 배려심 많은 한 인간이었다. 그리고 영적인 면에서 끝까지 자신이 믿는 바를 추구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생각에는 변함이 없다.



스티븐: 내 경우엔 전혀 바뀌지 않았다. 아버지는 늘 사람들을 위해 살았다. 그리고 더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희생했다. 아버지는 그런 사람이었다. 아버지에 대한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다. 난 아버지를 이해했다.



뮤지션으로서의 아버지에 대해 가장 인상 깊은 기억은?




스티븐: 짐바브웨가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을 기념하는 콘서트에 아버지를 초청했을 때였다. 지기와 내가 같이 갔었다. 아버지 음악의 목적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그의 음악은 한 나라를 해방시켰다. 군인들이 우리를 왜 그 자리에 초대했는지 말해줬다. “우리 국민이 즐겨 듣는 노래들을 너희 아버지가 만들었단다.” 매우 중요한 순간이었다. 우린 아버지와 함께 그 자리에 있었고 그의 음악이 사람들에게 어떤 영향을 줬는지 목격했다.



특히 좋아하는 아버지의 앨범이나 노래가 있나?




지기: 모두 다 좋다.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말리가 이끌었던 밴드)가 만들고 부른 모든 노래를 좋아한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Survivor’라는 앨범을 거의 매일 들었다. 아프리카와 운동, 해방 같은 것들에 관심 있는 10대 청소년에게 큰 영향을 준 음악이다.



스티븐: 아버지의 음악은 계절에 따라 특히 더 좋게 느껴지는 곡들이 있다.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의 음악은 정말 다양해서 어떤 때는 이런 분위기, 어떤 때는 저런 분위기의 곡들에 빠져들게 된다. 따라서 질문에 대한 대답은 ‘노’다. 어떤 한 앨범만 특히 자주 듣진 않는다. 10월에는 ‘Survivor’, 12월에는 ‘Natty Dread’를 더 자주 듣게 되는 식이다.



아버지의 전통을 지키면서 자기만의 음악을 만드는 게 가능한가?




지기: 그런 데 신경 쓰지 않고 그냥 마음에서 우러나는 음악을 만들면 된다. 그러다 보면 어떤 곡은 아버지의 음악 같은 느낌이 나고 어떤 곡은 그렇지 않다. 양쪽 다 자연스런 일 아닌가? 그저 흐르는 대로 놔두면 된다. 거창한 전략은 없다. 그저 마음에서 우러나는 곡을 만들 뿐이다.



스티븐: 난 밥 말리가 남긴 유산의 일부다. 따라서 나 자신에 충실하면 된다. 내 근본을 존중하고 내가 이 세상에 나온 이유를 생각하면서. 내가 있을 자리는 바로 여기다. 난 선택된 사람이다. 이 초원의 양이다.

- NEWSWEEK SPECIAL EDITION / 번역 정경희
 죽음을 앞두고 불태운 열정
1980년 7월 마지막 앨범 ‘Uprising’ 홍보 순회공연의 일부로 아일랜드 댈리마운트 파크에서 공연하는 밥 말리.


1980년 발표된 마지막 정규 앨범 ‘Uprising’에 말리의 종교적 신념과 음악적 전통 고스란히 담겨1970년대 말 음악적 성장을 향한 밥 말리의 욕구는 절정에 달했다. 1978~79년 세계 순회공연은 멀리 일본에서까지 성황을 이뤘고 콘서트장을 가득 메운 청중은 말리의 히트곡들을 따라 불렀다. 1979년 그는 멜로디 메이커스라는 프로젝트 그룹과 함께 작업하기 시작했다.

‘Children Playing in the Streets’라는 앨범에는 밥과 리타의 자녀 샤론(당시 14세)과 세델라(당시 12세), 지기(당시 11세), 그리고 다섯 살밖에 안 됐던 스티븐이 참여했다. 이 싱글 앨범의 수익은 전액 유엔 아동기금에 기부됐다. 그 후 말리는 영국의 식민지에서 탈피하려고 독립 투쟁을 벌이는 짐바브웨에 관심을 집중했다.

말리는 1980년 4월 드디어 독립국이 된 짐바브웨를 방문한 후 곧바로 다음 진로에 착수했다. 뉴욕에서 아일랜드 레코즈의 창업자 크리스 블랙웰과 여러 홍보 전문가들을 만나 자신의 최신 앨범을 어떤 식으로 발표할지 의논했다.

당시 말리는 하루에 3시간만 자면서 자신의 음악 인생에서 가장 탁월한 작품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 작업이 진행되는 동안 그의 몸 상태는 점점 안 좋아졌다. 티머시 화이트가 쓴 말리의 전기 ‘캐치 어 파이어(Catch a Fire)’에서 그의 친구와 동료들은 당시 말리의 건강이 몹시 안 좋았으며 그는 매 순간이 소중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었다고 말했다.

말리의 마지막 정규 앨범 ‘Uprising’이 악보에서 소리로 녹음되던 순간 이 앨범이 그가 발표한 어떤 작품보다 더 강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사실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말리는 이 앨범을 매우 빠르게 완성했지만 ‘Pimper’s Paradise’ ‘Redemption Song’ 등의 히트곡들이 증명하듯이 작품의 질이나 완성도에는 전혀 손색없었다. 거의 모든 곡이 조금씩이나마 라스타파리안의 신념과 연결 돼 있다. 종교적 메시지를 포함한 말리 음악의 전통이 고스란히 이어진다.

말리는 1980년 5월 30일 스위스 취리히를 시작으로 유럽과 미국 각지를 돌며 ‘Uprising’의 대대적인 홍보 순회공연에 나섰다. 당시 말리는 생애 최고의 인기를 누렸다. 레게가 유럽과 미국 시장에서 발판을 굳혔고 고향인 자메이카의 문화를 바꿔놓았다. 피츠버그 공연 이후 말리의 건강 악화로 순회공연이 중단됐지만 그 이전의 공연들은 대단한 성공을 거뒀다.

곧 밥 말리의 얼굴이 자메이카 우표에 새겨지고 그의 이름이 자메이카 공로훈장 후보로 대학 총장과 시인, 정치적 영웅들과 나란히 거론됐다. 하지만 말리의 가장 중요한 업적은 그가 세상을 떠난 뒤에도 멜로디 메이커스가 그와 공동 작업하던 음악들을 계속 녹음했고 1982년에는 ‘What a Plot’이라는 히트 앨범까지 내놓았다는 점이다. 밥의 음악은 팬들뿐 아니라 혈연 여부를 떠나 그가 이 세상에 남기고 간 모든 음악 가족의 마음 속에 살아 숨쉰다.

- NEWSWEEK SPECIAL EDITION / 번역 정경희
 라스타교를 세상에 알리다


밥 말리는 라스타파리안의 신념을 음악을 통해 전파1892년 7월 23일 에티오피아에서 한 왕자가 태어났다. 당시엔 장차 그의 인생과 업적이 많은 이들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미치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다. 라스 타파리 마코넨은 키가 162㎝밖에 안 됐고 신체적으로 빈약했지만 성서의 왕 솔로몬의 자손으로 태어난 그가 황제(하일레 셀라시에 1세)로 즉위할 때쯤엔 가까운 측근들조차 눈을 마주치지 못할 정도로 카리스마가 대단했다고 전해진다.

가톨릭과 감리교, 성공회, 칼뱅파, 여호와의 증인 등 기독교의 온갖 종파가 공존했던 에티오피아에서 성서 학자들은 라스 타파리에게 주목하기 시작했다. ‘다윗의 땅에서 이새의 후손이 왕중왕으로 즉위할 것’이라는 예언과 관련해서다. 이 왕중왕은 예수의 재림으로 일컬어졌고 라스 타파리를 구세주로 여겼던 학자들이 최초의 라스타파리안(하일레 셀라시에 1세를 구세주 혹은 흑인의 옹호자로 숭배하는 사람들)이었다. 그 후 라스 타파리에 관한 신기한 이야기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한 신부가 라스 타파리의 손바닥에서 성흔과 영원을 상징하는 생명선을 봤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1966년 4월 라스 타파리가 자메이카를 방문했을 때는 킹스턴 근처의 공항에 10만 명이 운집했을 정도로 라스타파리안의 수가 증가했다. 하일레 셀라시에 1세의 자메이카 방문은 밥 말리의 인생을 바꿔놓았다. 말리의 부인 리타는 1966년 4월 21일 가장 좋은 옷을 차려 입고 친구들과 함께 팔리사도에스 공항으로 향했다. 하지만 셀라시에의 자동차 행렬을 보려는 인파 때문에 길이 막혔다. 셀라시에가 탄 자동차가 지나갈 때 리타는 그와 눈이 마주쳤으며 그의 손바닥에 있는 성흔을 봤다고 주장했다.

말리와 가장 가까운 사람이 라스타교로 개종한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말리도 라스타교의 지도자 모르티머 플라노를 만났다. 그는 하일레 셀라시에 1세가 팔리사도에스 공항에 도착했을 때 흥분한 군중을 진정시켰을 정도로 권위 있는 인물이었다. 플라노는 말리를 자메이카 내륙의 라스타교 공동체로 데리고 다니며 그에게 라스타식 생활방식을 소개했다. 여러 가닥으로 꼰 머리부터 엄격한 식사 제한, ‘약초’ 흡연, 하일레 셀라시에 1세의 자메이카 방문을 기념하는 의식까지.

라스타교가 자메이카로부터 서아프리카와 서구로 전파되기까지 이 운동의 이상을 알리는 데 다른 무엇보다 더 큰 역할을 한 것이 밥 말리 앤 더 웨일러스의 음악이었다. 자메이카 경찰은 라스타파리안을 2등 시민으로 취급했지만 세계는 음악을 통해 그들의 신념을 받아들였다. 1976년 이 밴드가 음악 전문지 ‘롤링 스톤’에서 올해의 밴드로 선정됐을 때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이미 세상을 떠났지만 말리는 라스타파리안의 신념을 이렇게 노래했다. ‘야훼는 살아 있다, 셀라시에 1세는 살아 있다.’

— NEWSWEEK SPECIAL EDI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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