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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민 없는 세계에 연민을 호소하다

연민 없는 세계에 연민을 호소하다

봉준호 감독과 함께 영화 ‘옥자’ 대본 집필한 존 론슨, “육식 아닌 공장식 축산업에 반대하는 메시지 담아”
론슨은 ‘옥자’의 각본 작업을 시작하기 몇 년 전에 채식주의자가 됐다.
영화 ‘옥자’(국내 개봉 7월 5일)는 TED 강연과 로봇 허밍버드에서 영감을 받아 제작됐다. 2012년 2월 영국 웨일즈 출신 작가 존 론슨(50)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 롱비치에서 열리는 TED 연례 회의에 참석했다. 거기서 론슨은 사이코패스에 관한 강연을 했다[론슨은 저서 ‘사이코패스 테스트(The Psychopath Test)’를 2011년 출간했다]. 그 회의에서 그는 뜻밖에도 당시 미국 방위고등연구계획청(DARPA)의 국장이었던 레지나 두건의 프레젠테이션에 매료됐다.

“두건은 스티브 잡스처럼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연단에 나와 무기에 관해 이야기했다”고 론슨은 돌이켰다. 그녀는 비행물체의 기적적인 발전에 관해 강연하면서 무대 위로 초소형 드론 ‘허밍버드’를 불러냈다. 새처럼 생긴 비행물체가 머리 위를 날아다니자 청중들이 놀라 술렁이기 시작했다.

“나도 놀랐다”고 론슨은 말했다. 신기한 허밍버드의 출연에 잠시 정신이 팔렸던 그는 DARPA가 군 관련 기관이라는 점으로 미뤄 그 로봇 새 때문에 ‘나쁜 일’이 일어날 수도 있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허밍버드가 어느 집 창문으로 들어가 사람들을 죽일 수도 있다”고 그는 말했다. “그게 DARPA가 하는 일 아닌가? 두건의 재미있는 프레젠테이션과 그 안에 담긴 메시지 사이엔 흥미로운 모순이 존재했다.”

론슨은 이 특별한 순간을 마음 속에 담아뒀다. 이때의 기억은 그가 봉준호 감독의 매혹적인 영화 ‘옥자’의 대본을 쓸 때 큰 영향을 줬다. 한국과 미국을 오가며 펼쳐지는 현기증 나는 영화 ‘옥자’는 액션-어드벤처와 분노에 찬 풍자의 경계를 넘나드는 작품이다. 개량한복을 입은 금발의 틸다 스윈튼이 다국적 육류회사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CEO 루시 미란도로 나온다. 영화에서 TED 강연을 연상시키는 대중연설을 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카리스마가 느껴진다.

미란도는 자신의 회사가 유전자를 변형한 거대한 ‘수퍼 돼지’의 새끼를 세계 각지의 농부들에게 보냈다고 발표한다. 한국의 농촌 소녀 미자(안서현)는 그중 하나인 옥자를 돌보면서 친구가 된다. 미란도 코퍼레이션이 옥자를 식용으로 연구하려고 미국으로 데려가자 미자는 이 하마처럼 생긴 친구를 구하려고 갖은 노력을 다 한다.

론슨은 ‘염소를 노려보는 사람들(The Men Who Stare at Goats)’(2004)로 가장 잘 알려진 작가이자 각본가다. 초자연적 현상에 관심을 기울이는 미군의 이야기를 다룬 이 책은 2009년 이완 맥그리거 주연으로 영화화됐다[국내 개봉 당시 제목은 ‘초(민망한)능력자들’이었다]. 그 후 론슨은 ‘사이코패스 테스트’와 영화 ‘프랭크’(2014)의 각본을 썼다. 최근 뉴욕 맨해튼에 있는 론슨의 아파트에서 그를 만났다. 둥근 테 안경을 쓴 그의 투박한 웨일즈 억양이 매력적이었다.웨일즈 태생의 저널리스트가 어떻게 한국 액션 영화의 대본을 공동 집필하게 됐을까? 이 일은 전화 한 통화로 시작됐다. 2014년 10월 봉 감독이 론슨에게 전화해 만나고 싶다고 말했다. 봉 감독이 ‘설국열차’(2013)로 성공을 거둔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기상이변으로 모든 것이 꽁꽁 얼어붙은 새로운 빙하시대에 살아남은 사람들을 싣고 달리는 기차 안에서 일어나는 일을 다룬 액션 영화다. 이 작품은 봉 감독의 첫 번째 영어 영화로 세계 무대에서 극찬을 받았다. 당시 론슨은 소셜 미디어를 통한 망신주기 현상을 조명한 논픽션 ‘당신은 공개적으로 모욕당했다(So You’ve Been Publicly Shamed)’의 출판을 준비하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 공통점은 별로 없어 보였다.

미자(안서현)는 미국으로 끌려간 ‘수퍼 돼지’ 옥자를 구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 한다.
론슨은 봉 감독과 ‘옥자’의 주연배우 스윈튼, 그리고 그녀의 파트너 산드로 콥을 만났다. 그는 이들이 ‘프랭크’의 팬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했다. 봉 감독은 시나리오에 대한 아이디어를 설명하며 론슨에게 도움을 청했다. 시나리오 작업 과정의 이런 다문화적 협업은 이 영화의 세계적인 스케일을 말해준다. 아시아의 농촌과 맨해튼의 기업계를 넘나들며 탄탄하게 짜인 구조 시퀀스가 속도감 있게 진행되면서 속 시원하게 기업을 풍자한다.

봉 감독은 극적인 반전 포인트들을 미리 구상해뒀다. 론슨의 임무는 영어를 사용하는 등장인물들의 캐릭터 개발을 돕는 것이었다. 비도덕적이지만 때때로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는 악역 미란도와 미자를 도와 옥자를 구하려는 동물해방전선(폴 다노가 리더로 나온다) 단원들, 미란도 코퍼레이션의 마스코트 역할을 하는 정신 나간 동물학자 조니 박사(제이크 질렌할) 등등.

론슨은 ‘옥자’의 각본 작업을 시작하기 몇 년 전 채식주의자가 됐다. 운 좋은 우연의 일치라고 그는 말했다. “이 각본을 쓰는 동안 내가 고기를 먹지 않는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됐는지 모른다.” 이 영화는 산업화 이후 육류제품 생산 과정의 잔인성을 독특한 방식으로 조명한다. 소시지가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대목이 절정이다. (동물에 대한) 연민과 자본주의가 과연 공존 가능한가라는 질문을 떠올린다.

‘옥자’를 보고 나오면서 채식주의를 실천해 볼까 하는 마음이 드는 관객이 있을 수도 있다. 론슨은 동물애호가지만(그는 인터뷰하는 동안 옆방에 있는 개 2마리에 관해 몇 번이나 이야기했다) ‘옥자’가 채식을 옹호하는 영화라고 보진 않는다. 론슨은 영화에 한국 사람들이 생선이나 고깃국을 먹는 장면이 나온다면서 “채식주의가 이 영화의 메시지는 아니다”고 말했다. “봉 감독은 의도적으로 그런 장면을 집어넣은 것 같다. 그는 이 작품이 육식을 반대하고 비난하는 영화가 아니라고 밝혔다.” 론슨은 ‘옥자’가 ‘공장식 축산업에 반대하는 영화’라고 생각한다.

론슨은 옥자를 구하겠다고 나선 동물권리 운동가들을 미화하지 않는다. 이들은 영웅적으로 행동하지만 거기엔 모순적 요소가 있다. “난 그들이 빛나는 갑옷을 입은 기사처럼 보이기를 원치 않았다. 영웅적인 사람들을 너무 영웅적으로 그리면 재미없다.”

‘옥자’는 표면적으론 ‘당신은 공개적으로 모욕당했다’와 별로 관련 없어 보인다. 하지만 론슨은 둘 사이에 연관이 있다고 생각한다. 악덕 기업에서 만드는 제품에 거금을 쓰는 소비자의 인지부조화와 관련 있다. 어쩌면 그 로봇 허밍버드와도 연관이 있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고기를 먹으면서도 도살장에 대해서는 생각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래서 머릿속에서 그 생각을 차단할 방법을 찾는다. 소셜 미디어에서 다른 사람들을 공격해 상처를 주고 그 일에 관해 죄책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심리적 속임수를 쓰는 것과 마찬가지다.”

‘옥자’와 ‘당신은 공개적으로 모욕당했다’는 연민이 없는 세계에 연민을 호소하는 작품이다. 이 두 작품에서 론슨은 인간이 지닌 능력을 잔인하게 쓰는 데 도움을 주는 테크놀로지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무거운 메시지다. 하지만 ‘옥자’는 그 메시지에 따뜻한 마음을 담았다. 또한 베이브 이후 가장 사랑스런 돼지 옥자 역시 그 메시지를 부드럽게 받아들이도록 도와준다.

- 잭 숀펠드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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