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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러와의‘전쟁’…흔들리는 무역전선

달러와의‘전쟁’…흔들리는 무역전선

한국경제의 생명선인 수출·수입선이 허물어지고 있다. 신규수입은 중단된 상태이고 수출선도 점차 흔들리고 있는 상황이다. 금융위기가 지속되면서 마침내 지표상으로 괜찮다는 실물경제쪽이 곳곳에서 와해되는 조짐이 역력하다. 이를 테면 피가 안 돌고 부족하자 신체조직이 말라가는 양상이다. 피가 부족하고 막혀도 죽지만, 신체조직이 궤멸돼도 죽는다. 오히려 부족된 피야 긴급수혈하고 막힌 곳을 부랴부랴 뚫으면 다시 정상적으로 돌겠지만 한 번 망가진 실물의 세포는 일단 죽으면 힘들다. 회생되기 더 어렵다. 수출해 달러를 벌어들이고 그 돈으로 원자재를 사서 다시 수출하는 가공무역형태의 우리경제구조가 근본적으로 뒤틀어지는 모습이다. 뛰는 달러. 그나마 구경하기도 힘들 정도로 혹심한 달러가뭄. 달러 없이는 안 돌아가는 우리경제. 그 주체들은 하루 하루 난생 처음 겪는 ‘달러전쟁’을 치르며 조금씩 잘려 나가는 자기 몸을 대책없이 지켜보고 있다. 그 현장을 긴급 점검한다.

원유수입 신규 L/C개설 불가능 “원유를 더 이상 사올 수 없다.” 정유회사마다 비상이다. 국내 5대 정유사 중 한 회사인 A사의 관계자는 “현재 중동으로부터 원유를 사오기 위한 신규 L/C개설이 불가능한 상태다. 달러로도 사기 힘들다”고 말했다. 달러도 없지만 달러로 사겠다고 해도 중동 산유국들이 원유를 팔지 않겠다는 얘기다. 현금결제도 안 되고 선하증권(B/L)을 끊어도 한 달 후에나 돈을 받아야 하는데 이를 못믿겠다는 것이 중동 산유국들의 냉정한 태도이다. 이 바람에 이 회사는 이미 원유를 선적했거나 운반도중인 원유 이외엔 현재 상태로는 더 이상 신규물량을 살 수 없는 상황이다. 회사측 관계자는 “이대로라면 연말까지 원유가 들어오더라도 내년엔 새로 원유가 들어올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이같은 상황은 정유회사마다 엇비슷하다. 일부 은행결제가 안 되는 통에 임시변통으로 정유사가 T/T(전신환)로 중동 산유국들에 직접 달러를 송금하고 있지만 언제까지 현찰송금이 가능할지 알 수 없는 긴박한 상황이다.

지점개설 L/C도 본점서 결제거부 중견무역회사인 B사의 자금담당 임원 P이사는 기가 막혀 말이 안 나온다. “수입결제대금으로 뉴욕에서 개설된 신용장을 한국의 본점이 거부하고 있어요. 같은 은행의 본·지점이 서로 못 믿는 상태지요. 대신 너희 회사가 직접 돈을 보내든지 알아서 처리하라는 얘기를 듣고 할 수 없이 전신환으로 송금했습니다. 달러 구하느라 피를 말렸지요. 요즘 해외지점이 개설한 신용장을 본점에서 거절하느라 선적서류에 한 자라도 오류가 나면 무조건 반납사태가 벌어집니다. 이건 신용공황 그 이상입니다. 차라리 손드는 것이 낫다고 봅니다.” 이같은 상황이 해외바이어들에게도 알려져서인지 얼굴을 돌리는 바이어들도 하나둘씩 늘고 있는 추세다. “아직 해외바이어로부터 주문은 있어요. 주문이 없어 수출을 못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의 달러 부족사태가 계속되고 금융위기가 해소되지 못하자 바이어들도 불안해 하면서 수입선을 바꾸려고 해요. 이제 이런 현상이 좀더 뚜렷해 질 것 같아 걱정입니다. 국내상황이 다소 안정돼도 바이어가 떠난 뒤면 어떻게 수출합니까. 한 번 떠난 바이어를 다시 잡기란 정말 어렵습니다.”(의류수출업체 A사장)

환율급등하자 ‘당분간 수입중단’ 산업기계류를 수입해 국내 유수의 제지·석유화학·정유회사에 공급하는 수입업체 현우무역의 정찬우 사장도 ‘환율 급락’만을 학수고대(鶴首苦待)하고 있다. 기대하기조차 힘든데도 하루 자고 나면 뛰는 환율이 언제 잡히나 하며 매일 뉴스를 빠짐없이 지켜 본다. 달러당 1천7백원에 달하는 높은 환율 때문에 수입사업 자체가 중단될 처지에 놓였기 때문이다. 그는 최근 환율이 갑자기 달러당 1천1백50원을 돌파하면서 외국의 공급업체들에 이미 ‘당분간 수입중단’을 선언했다. 지금 당장 수입하는 것보다 항구의 창고에 기계류나 기계부품을 쌓아 놓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현재 2백50만 달러어치에 달하는 기계류가 미국·일본의 항구 3곳에서 수입대기중이다. 이 때문에 하반기 들어 매출이 뚝 떨어졌다. 12월 들어선 한심할 정도다. 보통 월 30만 달러에서 많으면 1백50만 달러까지 유지했던 매출이지만 지금은 ‘매출 없는 날’도 허다하다. 업체에 공급하기 위해 갖고 있는 기계부품의 재고도 예전엔 20만~30만 달러에 달했지만 지금은 2만~3만 달러에 불과하다. 수입업무나 대금결제도 쉽지 않아 발만 동동 구른다. 주거래은행은 “달러가 없다”며 정사장에게 신용장 개설을 되도록 늦춰 달라고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또 대금결제를 위한 현금외환송금도 거절하고 있다.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은행 처지를 이해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설사 은행에서 수입업무나 대금결제를 현금으로 허용한다고 쳐도 그는 도무지 수입을 재개할 엄두가 나질 않는다. 엄청나게 높아진 환율에다 환율예측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3주 전만 해도 달러당 7백90원에서 8백10원을 오갔는데 예측할 틈도 없이 지금 1천7백원이나 됐다”고 한숨을 내쉰 그는 “당장의 수입업무 중단보다는 국가적인 산업활동중단이 더 염려스럽다”고 말했다. 일반기계는 한 번 서면 그 손해는 시간당 10만원에 불과하겠지만 중요 기간산업체에 들어간 산업기계가 한 번 서면 그 손해가 시간당 수억원에 달하기 때문이다. 달러부족·환율인상에 따른 고통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최근 달러당 1천1백원 할 때 들여온 2만 달러어치의 기계부품류를 바쁜 업무 때문에 바로 통관시키지 않아 1주일만에 1천만원을 앉아서 손해 보는 낭패를 겪었다. 달러 급등을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통관 당시의 환율은 1천6백원에 달했다. 이와 관련, 그는 “우리 경제의 체질은 달러당 1천1백50원에서 1천2백원이면 그런대로 버틸 수 있는 수준이다”며 “이 정도로 환율이 내려가면 그때 중지된 수입업무를 다시 재개할 생각”이라고 말했다. 컴퓨터·정보통신기기를 수입하는 중견 S사도 마찬가지다. 이 회사의 대표 이사인 이전무는 하루 온종일 달러 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수입된 기계 결제대금을 마련하기 위해서다. 아는 사람들에게 전화를 걸어 몇만 달러씩이라도 모아보려고 진땀을 뺐지만 “요즘 달러가 어디 있느냐”는 대답만 들었다. 에라 모르겠다며 가만히 있자니 환율 급등으로 환차손이 어마어마해 견디기 힘들 지경이다. 할 수 없이 거래은행에 가서 통사정해 원화로 결제했다. 회사로 돌아와 즉시 해외거래선에게 연락해 “달러당 1천7백원에 고정해서 수입하자”고 구두합의했지만 걱정이 태산같다. 이전무는 “5만 달러면 미국에서 차 한 대 값이었다. 어지간한 사업가나 돈 있는 친구들은 껌값 정도로 생각했다. 그런데 이 돈이 없어 쩔쩔맬 줄은 꿈도 꾸지 못했다”며 “ 이 상태로라면 회사문을 닫아야 할 처지”라고 말했다.

교포 펀드매니저, 본사 불려가 혼쭐 홍콩의 네덜란드계 은행인 ABN아모로은행의 교포 펀드매니저는 얼마전 네덜란드 본사로 불려갔다. 도대체 한국엔 왜 돈을 빌려 주었느냐며 호된 문책을 당했다. 할말이 없었다. “본사측에선 한국이 이해할 수 없다고 말한다. 왜 자기 능력보다 더 많은 돈을 빌리는지 알 수 없다고 말한다. 변명할 마땅한 답변이 없었다. 한국종금에 돈을 빌려준 이 은행이 다시 돈을 빌려줄 리도 없지만 일상 거래도 계속할지 의문이라는 그는 “요즘 같아선 정말 창피해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다”고 한숨만 내쉬었다.

고금리 주고도 급전 못구해 동동 은행도 달러를 못구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다. 얼마전 인수합병설로 홍역을 치른 A은행 국제금융부 직원들은 요즘 입이 더 바싹바싹 말랐다. 그 동안 하루짜리 콜자금은 유럽계 은행에서 3억 달러, 일본계 은행에서 1억 달러까지는 너끈히 빌릴 수 있었다. 그런데 한 달 전부터 사정이 달라졌다. 이들 은행에 구걸하다시피 손을 내밀어도 꿈쩍도 안 한다는 것. 만기가 돌아오는 차입금을 갚기 위해 하루에 5천만~1억 달러는 필요한데 끌어쓸 자금줄이 끊긴 것이다. 요즘은 동전 모으기 캠페인에도 기대야 할 정도다. 그래서 S과장은 속이 까맣게 타고 있다. 세계 금융기관 네트워크인 로이터 딜링 머신으로 하루 15~30군데의 은행에 손을 벌려도 반응이 있을까 말까다. 두세 달 전만 해도 10군데 정도만 돌면 아쉬우나마 달러를 구했었다. 지난 12월10일에는 하루 종일 단말기를 두드린 끝에 홍콩계 은행에서 한 달짜리로 1천만 달러를 겨우 빌려 급한 불을 껐다. 비교적 튼튼한 B은행은 다행히(?) 12월2일 영국 바클레이즈 은행에서 1억 달러를 빌리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 은행에도 평소보다 2%나 높은 이자를 물어야 한다. 그나마 국제통화기금(IMF) 구제금융 이후 국내 금융기관으로는 처음 빌린 케이스다. 한국은행 관계자는 “은행마다 해외차입 길이 꽉 막혀 애를 태우고 있다”며 “우량은행 두 곳 정도를 빼곤 11월부터 한국은행으로부터단기자금의 70~80%를 긴급수혈받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특히 12월에는 차입금 만기도래분이 많아 최악의 상황이 일어날지도 모른다”고 우려를 나타냈다. 14개 종금사가 무더기로 영업정지를 당해 만신창이가 된 종금업계는 형편이 더 어렵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12월9일까지 선발 6개 종금사를 빼고는 모두 부족한 달러를 메워 주고 있다는 것. 영업정지 명령을 받은 C종금사는 그 동안 국내은행 해외지점과 홍콩계 은행에서 외화를 빌려왔으나 시중은행 해외지점이 10월부터 돈줄을 끊었고 11월에 들어선 만기연장도 불가능해졌다. 게다가 은행이 거래를 중단해 원-달러 시장에서도 달러를 구하지 못하게 됐다. 궁여지책으로 거래기업을 통해 프리미엄을 얹어 달러를 구해야 했다. 요즘 들어 달러강세가 이어져 원화조달도 힘에 부쳐 결국 영업정지를 받는 수모를 겪게 됐다. 은행보다 튼튼하다고 주장하는 D종금사의 경우 아직 한국은행에서 달러를 빌릴 정도로 상황이 나쁘진 않지만 1천만~1억 달러에 달하는 차입금을 상환하기가 벅찬 상황이다. 금융 관계자들은 “외화가 부족한 줄 뻔히 알면서 빨리 대책을 못세워 사태가 더욱 악화됐다”며 “일단 대외 신인도를 높이는 노력이 급하다”고 입을 모았다.

하늘에서 달러비 쏟아졌으면… “하늘에서 달러비라도 왕창 쏟아졌으면 좋겠어요.” 한국은행 가운데 가장 신용도가 높다는 산업은행의 외환자금부의 L차장은 가끔 천장만 바라보며 이같은 말을 되풀이한다. “요즘 해외시장거래처에 달러 좀 빌리자고 전화를 하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코리아의 코자만 나와도 이런 이유 저런 이유만 잔뜩 늘어놓는다. 한국물은 아예 쳐다보지도 않는 분위기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산업은행이 채권발행한다고 로드쇼하면 벌떼처럼 달려들던 사람들이 이젠 싹 등을 돌렸다. 해외차입은 지난 9월부터 끊긴 상태다.” 산업은행 채권은 이미 그 기간이 문제가 아니다. 4년이든 7년이든 10년이든 아예 인기가 없다. 값(채권유통수익률)자체가 관심밖이란 얘기다. “아마 모르긴 해도 러시아 채권보다도 가치가 없어진 것 같습니다.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러시아 채권에 투자했던 한국금융권 중 가장 신용도가 좋다는 코리아 디벨럽먼트 뱅크(KDB)가 이 정도니….”(국제금융펀드매니저 S씨)

“장학금 못받으면 돌아와라”딸에게 전화 달러와의 전쟁은 기업·은행뿐만 아니다. 딸·아들을 각각 영국과 미국에 유학보낸 S대 김모 교수. 김교수는 요즘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천정부지로 치솟는 환율 때문에 추가 부담이 두 배 가까이 늘었기 때문이다. 김교수가 딸을 유학 보낸 것은 2년 전. 1파운드가 1천2백원대이던 때였다. 환율이 점차 상승세를 보이기 시작, 한 달 전 1천6백원 할 때까지만 해도 그리 불안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최근 한 달 사이 파운드화가 3천원대로 뛰는 바람에 몇 달 사이 송금액수가 거의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지난 학기에 5백만원을 보냈으나 내년 1월 새학기에는 1천만원을 준비해야 할 판이다. 미국 학교를 다니고 있는 아들은 일단 한 숨을 돌리게 됐다. 한국이 외환위기에 처하자 유학생들이 등록금을 분할 납부케 해달라고 요청, 학교측이 이를 받아 주기로 한 것이다. 미국 볼티모어 피바디 음대 대학원에 딸을 유학보낸 장경숙씨(사업). 장씨와 딸은 박사과정 진학문제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날로 치솟는 환율 때문에 장씨는 눈물을 머금고 “장학금을 받으면 박사과정에 진학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포기하고 그냥 돌아오라”고 말했다고 한다. 그래도 장씨는 행운아인 셈이다. 환율이 폭등하기 바로 전 지난 10월 중순 미리 학비와 생활비 1만4천 달러를 보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때부터 달러 움직임이 수상했다. 달러당 9백60원 할 때 6천 달러를 보내고 다음날 8천달러를 추가로 보내려는데 하루 사이 무려 20원이나 뛴 것이다. 하루만에 16만원의 추가 부담을 한 것이다. 12일 딸과의 전화통화에서 “재학중인 2백여 명의 한인유학생들 가운데 무려 90% 가량이 등록을 못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고 장씨는 전했다. 등록이 늦으면 벌금을 내야 하지만 폭등하는 달러시세 때문에 대책없이 등록을 최대한 미루고 있다는 것. 장씨는 환율이 내려가기만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해외주재원들도 비상이다 뉴욕 주재 한국계 은행직원인 남편을 따라 2년 넘게 미국서 살고 있는 가정주부 박지원씨(40·뉴욕주 스카스데일 거주)는 요즘 안면이 사색이 돼 안절부절 못하고 있다. 달러값 폭등이 직격탄으로 박씨의 가정에 내리꽂혀 파산 일보직전의 상태로 몰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남편 회사는 월급과 주택임대료 외에는 별도의 체재비를 주지 않기 때문에 매 달 월급에 해당하는 달러를 송금받아 살고 있는데 그 월급이 반동가리가 되다니….” 그녀 가족이 처음 미국땅을 밟았던 2년 전만 해도 對달러 환율은 8백40원대. 남편 월급은 2백50만원선이므로 처음에는 매 달 3천 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 1천7백원대인 지금은 월송금액이 1천5백 달러에도 못 미친다. 정확히 말하면 1천4백70 달러이다. 1백 달러짜리 한 장도 벌벌 떠는 곳이 미국인데 무려 1천5백 달러가 깎인 것이다. 내년에 귀국하면 고1·중2년생이 되는 두 딸애가 이에 대비해 받고 있는 한국식 과외 공부비에만 매 달 1천 달러 가까이 들어가는 박씨네 가계가 빈사상태에 빠진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남편 월급만으로는 도저히 수입·지출을 맞추기가 어려워 친정 언니한테 맡기고 온 통장에서 매 달 1천5백 달러 정도를 추가로 송금받던 것마저 7백50 달러로 줄어들었다. 그것조차 원화를 달러로 바꾸기가 너무 아까워 중단시켜야 할 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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