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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논리·지역이기주의의 야합

정치논리·지역이기주의의 야합

일본 중부 내륙지방에 자리잡고 있는 도카이도(東海道) 신칸센(新幹線) 기후하시마역. 도쿄와 新오사카를 잇는 이 고속철도의 16개 역 중 기후하시마의 이용률은 1964년 개통 이래 하위권을 면치 못하고 있다. 기후현 출신으로 전후 일본 정계를 쥐락펴락한 오노 반보쿠가 이렇다 할 산업시설도 없고 인구 밀집지역도 아닌 이곳에 역을 만들도록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한 결과이다. 당시 지역주민들은 이런 노선 조정을 크게 반겼지만 이 역은 대표적인 ‘정치역’이라는 오명을 얻었고, 도카이도 신칸센은 지금도 그의 이름을 따 ‘오노선(線)’이라 불리고 있다. 충청권의 ‘맹주’인 김종필 자민련 총재는 지난달 충남·북간의 호남고속철도 분기점 유치 경쟁을 겨냥해 “정부가 추진 중인 호남고속철도 논의는 이 정부의 충남·충북 이간책”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호남고속철 자체가 호남 정권이 호남을 푸대접한다는 소리를 입막음하기 위한 방편이라고 꼬집었다. 호남선이 아니라 ‘민주선’이란 지적이다. 호남고속철 기점역 유치 경쟁엔 이 지역 시민단체들도 가세하고 있다. 87년 한나라당의 모태인 민정당 노태우 대통령 후보의 대선 공약에서 비롯된 경부고속철도는 개통을 2년여 앞두고 있지만 계획의 상당 부분이 미결 상태다. 천안역은 이 역이 위치한 아산시와 지명도가 높은 천안시의 줄다리기로 역 이름조차 정하지 못하고 있다. 내년에 치러질 지방선거와 대통령선거 역시 지역에 영합하는 선심성 공약의 전시장이 될 공산이 크다. 그럴수록 경계해야 할 것이 국책사업을 둘러싸고 나타나는 ‘핌피(Please In My Front Yard)’ 현상이다. 혐오시설을 짓더라도 ‘내 뒷마당엔 안 된다’는 ‘님비(Not In My Back Yard)’와 마찬가지로 선호시설을 ‘제발 내 앞마당에’ 지으라는 핌피도 지역이기주의의 발로이다. 자원 배분을 왜곡하는 정치논리와 지역이기주의가 만나면 필연적으로 비효율과 낭비가 빚어질 수밖에 없다. 정치논리에 휩쓸려 국제공항을 목표로 지어진 청주공항은 계획 축소와 변형이 거듭된 끝에 국내선들도 외면하는 ‘동네 공항’으로 전락했다. 83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지시로 입지가 정해진 청주공항은 개항한 지 2년 만인 지난 99년 삼성경제연구소가 실시한 ‘가장 성공적이지 못한 국책사업’ 설문조사에서 2위를 차지했다. 아웅산 테러 사건 후 북한의 도발 가능성에 신경 쓰던 전대통령은 청주가 북한의 장거리포 사정권에서 벗어나 있다는 말에 솔깃했고, 이 지역 국회의원이 청주공항 건설을 건의하자 이를 받아들였다고 전해진다. 그 후 흐지부지됐던 이 계획은 87년 대선 때 대선 공약으로 부활했다. 충청권의 ‘표심’을 노린 선심성 공약이었음은 물론이다. 2003년 완공을 목표로 추진되고 있는 전주신공항은 96년 총선과 97년 대선 때 각 후보들의 공약으로 떠올랐다. 전라북도와 더불어 전주신공항 사업을 추진 중인 건설교통부는 지난 7월 함께하는 시민운동이 주는 ‘7월의 밑 빠진 독상’ 수상자로 뽑혔다. 달마다 최악의 정부 예산낭비사례를 골라 발표하는 시민행동측은 1천2백19억원을 들여 지을 예정인 이 전주신공항은 27㎞ 떨어진 곳에 군산공항이 자리잡고 있고 호남고속철이 완공되면 수요가 급감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미군기지가 자리잡고 있는 군산공항은 당초 2010년까지 민간과 공동으로 사용하기로 돼 있었다. 시민행동측은 또 “전주신공항 사업은 중장기적인 국토개발이란 관점에서라기보다 정치논리로 사업이 결정됐다는 의혹이 있다”고 주장했다. 신공항이 들어서기로 돼 있는 김제 지역 시민단체들로 구성된 전주신공항건설반대투쟁위원회도 2003년 말 호남선 전철이 완공되면 이 지역이 서울에서 2시간 거리가 된다며 전주신공항은 중복투자라고 밝혔다. 지역의 80%가 농업진흥지역이라 유일하게 지역개발 사업을 할 수 있는 곳이 공항 건설 예정지라는 점도 주민들이 반대하는 이유. 반대투쟁위측은 “도가 주민들을 상대로 제대로 된 사업설명회나 공청회도 열지 않고 무리하게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며 절차상의 문제도 제기하고 있다. 다시 선거철이다. 건설 경기부양과 고용 창출의 공감대도 있다. 정치논리와 지역이기주의의 야합이 나라와 국토를 더 망가뜨리지 못하도록 지혜를 모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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