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내리는 北京…'韓流'가 곪고 있다
지난 10월27일 베이징(北京) 수도(首都)체육관에서 한국의 유명 여자가수팀 B의 공연이 있었다. 워낙 유명한 팀이라 한국학생들 사이에선 가보고 싶어도 표를 못 구할 것이란 얘기도 돌았다. 그러나 이 날 공연에 갔다온 몇몇 학생들로부터 믿을 수 없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소식이 한국인 사회에 퍼졌고, 단순한 흥행 실패가 아닌 ‘그 무엇’과 연관시켜 씁쓸한 귓속말이 오고갔다. 이른바 ‘한류(韓流)’ 바람이 끝난 것이 아니냐는 우려였다. 웃기는 것은 이날 중국의 날고 기는(?) 암표상들이 암표를 대량으로 매집했다가 안 팔리자 3백위엔(元)짜리 표를 10위엔까지 팔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사려는 사람이 없자 암표상들은 지나가는 행인들에게까지 표를 사라고 사정했다고 한다. 이날 1만8천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실내체육관은 4분의 1 정도만 찼다. 골수 ‘하한쭈(哈韓族·한류매니어를 일컫는 중국말)’ 만 왔을 뿐 일반인들에게는 철저히 외면당한 꼴이었다. 불과 1년 전 노동자(工人)체육관에서의 H.O.T. 공연이 젊은이들로 미어터졌던 것에 비하면 참담한 결과였다. 아니나 다를까. 중국 신문들은 다음날 이 사실을 놓치지 않고 요란하게 보도했다. 이 날 거의 같은 시각에 대만출신 가수 장신철(張信哲)이 노동자체육관에서 공연을 해 대성공을 거뒀다는 소식과 함께. 이 날은 하루종일 비가 내렸다. 이 때문에 베이징신보(北京晨報)는 장신철의 공연장소가 노천이었다는 걸 특히 강조하면서 ‘대만의 태풍(台風)이 한류풍을 잠재웠다’고까지 보도했다. 지금 중국에서는 그 이후 한류가 눈에 띄게 약해지고 있는게 아닌가 하는 우려가 일고 있다. B의 공연에 대해 중국 신문이 보도한 베이징 젊은이들의 불만을 들어보면 가관이다. 한마디로 포스터에 나온 B의 공연을 보러 갔더니 B는 잠시 얼굴만 비치고 이름도 들어본 적 없는 ‘저질’ 가수들만 잔뜩 나와 시간을 때우더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한 번 속지 두 번 속나요. 그러니까 이제는 관심 없어요”라는 것이었다. 이 말은 한류에 대한 중국인들의 최근 냉랭해진 심사를 여실히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한국 드라마가 처음 중국인들의 안방에 파고 들 때는 배우들의 옷 뿐아니라 집안 장식·거리풍경 등 모든 것이 신기했지만 지금은 다르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한류가 급속도로 식어가고 있는 징후의 가장 큰 이유는 한류가 ‘고급’의 이미지를 잃고 있기 때문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베이징 둥쓰(東四)에서 조그만 한국 악세사리점을 하고 있는 K 모 사장은 “아직은 한류의 덕을 본다. 그러나 한국 상품이 더 이상 중국 젊은이들에게 신기한 것이 아니다. 차츰차츰 새로운 것을 찾는데 공급이 미처 못따라가 매출이 생각만큼 늘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가게명이 밝혀지면 매출에 지장이 있다며 극구 익명을 부탁할 정도로 최근의 분위기에 걱정이 태산 같았다. 올 봄만 해도 하루 매출 1만위엔(약 1백60만원)은 수월했으나 요즘은 5천∼6천위엔이 고작이라는 것. 그 가장 큰 이유는 이곳에서 파는 상품이 더 이상 중국 학생들에 신기하지 않다는 것이다. 베이징에서 몇 년전 붐을 이루며 우후죽순처럼 생겼던 한국 상품 전문판매장이 지금 거의 전멸하거나 간신히 몇 군데만 명맥을 유지하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물론 아직도 중국인들에게 한국 드라마는 인기가 있다. 일반인들뿐 아니라 베이징의 젊은 학생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대단하다. 심지어 중국의 미래 외교인력을 양성하는 외교학원(外交學院) 기숙사에서 가장 인기 있는 프로그램은 ‘순풍산부인과’라고 한 한국 유학생이 전할 정도다. 중국에서 가장 인기있는 연예인은 안재욱·김희선이 꼽힌다. 한국의 김대중 대통령은 몰라도 김희선이란 이름은 누구나 알고 있다는 말이 빈말이 아니다. 중국의 CCTV와 수많은 지방방송에서 지금도 한국 드라마를 여럿 방영하고 있어 ‘한국풍’의 위력은 여전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한류가 과연 중국인의 소비행태를 바꿀 수 있는 근본적인 평가로 이어질 수 있느냐 하는 거다. 이것이 이곳에 나와 있는 한국기업들의 최대 관심사다. 한국에 대한 관심을 잘만 활용하면 마케팅은 거저먹기나 마찬가지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 기업들이 한류의 주무대인 TV를 중심으로 마케팅 작전을 펴고 있다. 예컨대 삼성전자가 지난 4월(그때는 한류가 한창 기세를 높일 때였다) 후원한 ‘2008년 베이징올림픽 유치기원 한·중슈퍼음악회’는 5만여명의 젊은이들이 참여한 대형 행사로 CCTV를 통해 13억 인구에 생방송돼 엄청난 광고 효과를 거뒀다. 중국TV에 가장 자주 나오는 한국회사는 삼성전자와 SK다. 삼성전자는 작년 6월부터 전국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한 ‘산싱지리콰이처(三星智力快車)를 CCTV에서 방영 중이다. SK는 장웬방(壯元榜)을 베이징TV에서 방영 중이다. 이 두 프로그램은 마치 우리나라의 장학퀴즈 같은 것인데 중국 학생들의 인기를 독차지, 시청률은 중국 교양프로그램에서 1, 2위다. 여기에 LG는 오래 전부터 낙후된 시골학교를 지원해 오면서 방방곡곡까지 지명도를 다지고 에어컨이나 일반가전품에서의 월등한 보급률을 활용해 일명 ’풀뿌리 마케팅‘을 해오고 있다. 최근에는 ’월드컵 마케팅‘까지 등장해 월드컵 티켓과 항공권을 내건 가전품 판촉활동도 인기를 끌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사실은 ’한류=한국산=고품질‘이란 이미지를 원동력으로 한 것이다. 80년대 한때 중국에선 ’인도풍(印度風)‘이 유행했다. 그러나 지금은 어느 누구도 그때를 돌아보지 않는다. ’인도=후진국‘이란 인식 때문이다. 결국 든든한 경제적 배경과 지속적인 교류로 뿌리를 내리는 문화만이 중국에서 살아남게 되는 것이다. 이곳에서 미국과 일본문화는 한류처럼 요란하진 않다. 그러나 여전히 최고급으로 통한다. 신영수(愼榮樹) 재중국한인회 회장은 “한류는 곧 힘이다. 본국의 경제력이 뒷받침돼야 중국을 움직일 수 있다”고 강조한다. 한류가 앞으로도 폭발적인 위력을 발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에 대해 한창호(韓昌浩) 삼성전자중국법인 부장은 “문화적 가치를 국제시장에서 비즈니스와 결합시키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즉 훌륭한 노래나 드라마를 만들었으면 이를 해외시장에서 가전·소비재 등 인접상품으로 확대 재생산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류의 한가운데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우전소프트의 김윤호 사장은 “중국은 다른 민족의 문화에 대해 퍽 개방적이지만 유입속도가 지나치게 빠르면 반드시 제동을 건다”고 말한다. 한마디로 너무 갑자기 뜨면 반드시 규제를 한다는 것이다. 지금 대만과 홍콩가수의 공연이 중국에서 뜸한 이유도 한때 너무 뜨니까 ’한 가수 1년에 1회 공연‘으로 규제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이 점에서 베이징에 있는 한국의 문화계 인사들은 지난 8월말 김한길 당시 문화관광부 장관이 ’한류체험관‘을 베이징 등에 세우겠다고 말한 것은 ’어리석은 인기주의‘라고 지적하고 있다. 정부까지 나서서 한류를 홍보한다고 설치면 자칫 중국측에 한류를 규제할 빌미만 줄 가능성이 크다는 설명이다. 최근 중국의 일부 언론이 심상찮은 논조를 보이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작년만 해도 중국 신문들의 보도는 상당히 긍정적이었다. 베이징신보는 “한파(寒波)로 얼어붙은 베이징에 훈훈한 한파(韓波)가 몰려오고 있다”고 호의적인 제목을 달았다. 그러나 이 신문은 11월 중 대여섯차례에 걸쳐 한류에 대한 시리즈 기사를 내면서 ’한류도 별 것 아니다‘는 속셈을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오래동안 사업을 하고 있는 박정오(朴正五) 마이다스 사장은 “처음엔 일과성 유행쯤으로 대수롭잖게 생각했다가 중국 젊은애들이 지나치게 빠지는 것 같으니까 언론이 제동을 걸기로 작심하고 나서기 시작한 것 같다”고 분석했다. 박사장에 따르면 지난 80년대 한국산 컬러TV가 중국 시장에서 욱일승천할 때 어느 날 갑자기 중국 언론들이 일제히 한국제품의 A/S 부실 등을 집중적으로 거론하는 바람에 시장을 송두리째 잃었다는 것이다. 한류는 지금 곪고 있다. 또 한편으로 한류는 지금 중국에서 살아남느냐 아니면 한때의 유행으로 끝나느냐의 기로에 서 있다. 중국의 WTO가입으로 문화시장 환경은 근본적으로 바뀌게 된다. 지금처럼 따오판(盜版) 음반 한 장에 10위엔이던 시장은 차츰 사라지고 정당한 가격으로 평가받는 시장이 다가온다. 이 말은 곧 품질이 모든 것을 말해 주는 시대가 온다는 뜻이다. 지난 10월13∼17일 베이징에서 김민기씨의 뮤지컬 ’지하철 1호선‘ 공연이 있었다. 별로 요란하지 않게 치러졌는데도 매스컴의 반향은 호의적이었다. 특히 CCTV에 나온 한 중년여인은 “한류, 한류 하기에 젊은 애들이나 보는 흥미거리로 알았는데, 오늘 지하철 1호선을 보니 너무 마음에 와 닿았다”며 “한류란 이런 것이구나 하는 것을 알았다”고 밝혔다. 이 말은 한류가 앞으로 중국에서 어떻게 뿌리내릴 수 있을지를 시사해 주는 중대한 힌트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중국인들이 공감하면서 ’동경할 수 있는‘ 고품질의 문화상품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싸구려로는 더 이상 안 통한다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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