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년째 ‘공사중’…기발한 ‘ 稅테크’
서울 잠실은 롯데 타운이다. 성업 중인 롯데월드가 있고, 롯데월드 동쪽으로 길 건너 송파구청 옆에 제2 롯데월드 부지가 있다. 그 북쪽, 롯데월드와 대각선으로 맞은 편에 롯데 엘그린 신축 현장이 있다. 지하철 2·8호선 잠실역이 자리잡고 있는 잠실 네거리의 네 모퉁이 중 세 곳을 롯데가 차지하고 있다. 15층 골조 공사가 진행 중인 엘그린 부지는 송파구 최고의 노른자위로, 공시지가로 쳐도 평당 2천만원이 훨씬 넘는다. 롯데건설이 짓고 있는 이 빌딩이 눈길을 끄는 것은 착공한 지 11년이 지나도록 골조 공사의 절반도 마치지 못했기 때문이다. 땅 주인이자 시행자가 관계사인 롯데쇼핑이고 그룹 차원의 역사(役事)인 점을 감안할 때 이만저만한 늑장공사가 아니다. 그 바람에 이 건물은 이 일대 주민들과 관할 송파구청으로부터 원성을 사고 있다. 흉한 몰골이 도시 미관을 해칠 뿐더러 안전 문제를 야기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미 국내 최장 공사의 기록을 작성한 이 건물의 신축이 이토록 느림보 걸음인 까닭이 뭘까? 건물의 내력부터 보자. 이 빌딩은 1991년 3월 건축 허가를 받은 이래 여섯 차례 설계를 바꿨다. 당초 지상 14층(지하 3층)에 연면적 4만8천여㎡이던 설계 내용은 지상 16층(95년 세번째 설계 변경)·지상 32층(98년 다섯번째 설계 변경)으로 바뀌었다가 지난해 봄 건축 허가를 받은 지 만 10년 만에 지상 37층(지하 7층), 연면적 24만4천여㎡ 규모로 다시 설계 변경 허가를 받았다. 그 새 연면적은 다섯 배로 늘어났고, 설계 변경 허가권이 서울시에서 송파구로 넘어갔다. 96년 네번째 설계 변경 때는, 연면적을 1만4천여㎡ 늘리고 지상층수를 16층에서 14층으로 줄였었다. 지난해 설계 변경의 주요 내용은 지상 층수를 32층에서 37층으로 늘리고, 판매·업무 시설이었던 용도를 주상복합으로 바꾼 것. 그 결과 연면적이 4천여㎡ 줄고 용적률(6백49%)도 33% 낮아졌다. 층수는 늘어났지만 주거 층의 층고(層高)가 사무실보다 낮아 건축물의 높이는 6차 설계 변경 전과 같다. 지난 6월19일 오후, 1년여 전 건물 용도와 층수가 변경됐건만 공사 개요를 적은 공사 현장 입구의 현판엔 여전히 32층에 판매·업무 시설이라고 돼 있었다. 업무시설층이 주거 공간으로 바뀌면서 이 건물에 부과된 과밀부담금도 74억여원으로 줄었다. 롯데측은 건물 준공 전에 이 돈을 내야 한다. 롯데는 주상복합 건물로 용도를 바꾸면서 내부적으로 롯데의 아파트 브랜드인 캐슬을 넣어 건물 이름도 캐슬 골드로 바꿨다. 롯데건설의 한 관계자는 내부를 고급으로 꾸미는 것은 물론 외벽을 금빛으로 단장키로 했다고 말했다. 공사는 그러나 여전히 지지부진이다. 송파구청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설계 변경 후 10월까지는 골조 공사가 활발했었다고 말했다. 11년여 전 롯데가 엘그린의 건축 허가를 받은 시점은 토지공개념제도가 막 도입됐을 때였다. 당시 기업들은 사 놓고 이런저런 사정으로 놀리던 땅에 대해 거액의 세금을 맞았다. 국민의 정부가 들어서며 없어진 토지초과이득세였다. 당국은 값이 전국의 평균치를 웃도는 수준으로 오른 빈 땅에 대해 땅값 상승분의 50%를 세금으로 매겼다. 이무렵 롯데쇼핑이 82년 서울시로부터 사들인 엘그린 부지의 공시지가가 90년 평당 1천2백87만원에서 91년 2천3백10만원으로 1년 새 거의 두 배로 뛰었다. 테니스장으로 쓰고 있던 이 땅이 나대지로 간주돼 토초세가 부과되자 롯데측은 서둘러 건축 허가를 받았다. 당시 부과된 90년도분 토초세는 2백10억원이었다. 롯데측은 국세심판소에 이의를 제기했고, 그 결과 전체 부지 중 건축 허가를 받은 면적이 토초세 부과 대상에서 제외됐다. 나머지 땅에 대해 부과된 세금은 65억원. 세액이 3분의 1 수준으로 줄어든 것이다. 92년까지 롯데쇼핑은 이 땅에 대해 87억원의 토초세를 냈다. 합법적인 절세였다. 졸속으로나마 착공을 하지 않았다면 훨씬 더 많은 세금을 내야 했을 것이다. 롯데측은 토초세와 함께 시행된 종합토지세도 절약했다. 개인이나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모든 땅을 합산해 누진율을 적용하는 종토세는 건축 중인 부지를 합산 과세 대상에서 제외해 따로 과세하도록 돼 있다. 엘그린 부지는 금싸라기땅이라 롯데쇼핑이 보유하고 있는 토지 전체에 부과되는 누진세율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 후로 롯데측은 1년 반에 한 번 꼴로 설계 변경을 해 공기를 엿가락처럼 늘였다. 그 덕에 롯데측은 엘그린 부지에 부과되는 종토세를 91년 한 해에만 4억원 줄일 수 있었다. 이 건물을 완공했다면 롯데측은 보유 중인 토지 전체에 대한 합산 과세를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공기 연장 덕에 다른 땅들에 미칠 중과세도 막은 셈이다. 토초세는 폐기됐고, 합법적인 절세는 보호받아야 한다. 이런 절세 아이디어가 다른 기업들이라고 눈에 들어오지 않을리 없다. 건설업계의 사정에 밝은 한 인사는 “다른 재벌들은 절세보다는 여론의 화살을 피하는 쪽을 택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제조업이 근간인 다른 재벌들은 절세를 통한 비용 절감보다 기업 이미지를 관리하는 길을 선택한 거죠. 유통업 등 현금 장사로 큰 롯데는 돈벌이에 관한 한 마인드가 다른 것 같습니다.” 송파구청 관계자는 “1년여 전 주상복합으로 설계 변경을 하고도 아파트 분양을 안해 설계변경 허가권자인 구청으로서도 답답하다”고 말했다. “법으로는 강제할 방법이 없습니다. 행정 지도를 하겠다고 했지만 권유 이상의 수단이 없어요. 극단적으로 허가를 취소할 수도 있지만, 그런다고 구청이 나서 철거를 하겠습니까?” 지난해 말 이후 공사가 부진한 것은 다른 속사정이 있어서다. 롯데건설 관계자는 “아파트 평면의 구조가 미흡해 경미한 변경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사업성을 높이기 위한 미조정이라는 것이다. “설계사무소에서 작업 중인데 거의 다 돼 가고 있는 것으로 압니다. 삼성물산이 한화건설과 공동 시공하는 인근의 잠실 갤러리아팰리스가 지난해 큰 인기를 끌어 평면을 더 검토하기로 했어요.” 그는 애초에 주상복합으로 설계된 갤러리아팰리스와 달리 엘그린은 오피스로 설계돼 평면의 품질을 끌어올리는 데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그룹의 본거지’인 잠실에서 삼성에 밀릴 수 없다는 분위기도 작용했다고 덧붙였다. 롯데건설로서는 그룹 차원의 프로젝트인데다 시행자가 따로 있어 공기를 단축하고 싶어도 서두를 수도 없다. 평당 분양가가 1천만원 이상이 될 것으로 보이는 이 주상복합건물엔 10∼37층에 50∼1백평형 아파트 4백 가구가 들어서고, 9층에 입주자 전용 피트니스센터도 생긴다. 엘그린 신축현장에서 송파구청쪽으로, 외부와 차단하기 위해 공사장에 둘러친 담장엔 행인들을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롯데측이 내건 현판이 붙어 있다. 거기 ‘명심보감 권학편’에 나오는 글이 적혀 있다. ‘一寸光陰(일촌광음) 不可輕(불가경)’ 인생은 쉬이 늙고 학문은 이루기 어려우니 촌음(寸陰)이라도 가벼이 여기지 말라는, 학문의 길에 들어선 소년들을 위한 경구이다. 12년째 골조 공사도 마치지 못한 현장에 나붙은 문구로는 아무래도 어색하다. IMF 체제의 교훈이지만, 대마(大馬)도 제명이 있고 ‘좋은 기업’의 길을 가기란 쉽지 않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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