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준이 민주新黨과 합칠 수 없는 理由
| 지난 16일 열린 국회의원 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에서 한화갑 민주당 대표 | 박정희 서거에 이어 전두환 신군부가 들어서 서슬이 퍼렇던 1980년 말 신민당 부총재를 지낸 야당거물 이재형(李載瀅)은 사직동 자택으로 평소 아끼던 조선일보 기자 출신 박범진(朴範珍)을 불러 저녁을 하며 자신이 창당할 신당에 참여해 줄 것을 요청했다. 박범진은 야당 출신인 이재형이 야당을 하려는 건지, 신군부가 주도하는 여당을 하려는 건지 알 수 없어 “선생님은 여야 어느 쪽을 하시려는 겁니까”라고 물었다. 이에 이재형은 정색을 하며 “박군, 여가 어디 있고 야가 어디 있나. 모두가 국민을 속이는 일인데…”라면서 여야 생각 말고 동참할 것을 권고했다. 해직기자로서 지성과 야성이 강한 박범진은 아무래도 이재형이 신군부에 가담하는 것으로 파악하고 정중히 거절했다(박의원은 그러나 88년 민정당에 입당해 재선의원을 지냈다). 당시는 12·12쿠데타 후 80년 9월 대통령 자리를 차고 앉은 전두환이 계엄령을 해제하고 말을 잘 들을 만한 정치인에게만 정치활동 규제를 풀어준 채 형식상 3∼4개 정당을 허용하던 시기였다. 이재형은 군부로부터 여당 창당의 임무를 받고 막후 인선작업을 벌이던 중 박범진에게도 권유했던 것이다(이재형은 민정당 창당 공로로 후에 국회의장까지 지냈다). 총재 전두환·대표 이재형으로 짜여진 민정당이 81년 1월 창당된 데 이어 민한당·사회당·국민당 등이 며칠씩 간격을 두고 줄줄이 창당 행사를 가졌다. 이들 대부분은 야당을 자처했으나 사실상 군부의 스크린 아래 허용된 인사로 구성된 소위 ‘2중대, 3중대’의 위성정당에 불과했다. 따라서 이재형이 말한 “여야가 어디 있나. 모두가 국민을 속이는 일인데…”라고 한 말은 진실을 표현한 것으로 우리 정당사의 비극적인 단면을 극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렇듯 박정희의 공화당은 물론 전두환의 민정당은 유력 정치인들의 정치활동을 규제한 채 창당돼 군부통치를 강화하고 정통성을 보강하기 위해 마련된 개인적인 정치도구에 불과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YS와 DJ만은 계속되는 긴급조치·유신쿠데타·체육관 간접선거 등 온갖 반의회·반정당정치에 맞서 민주화투쟁을 계속했다. YS와 DJ는 그러나 87년 10월 대통령후보 단일화에 실패한 후 결별해 제 갈 길을 가면서 한국 정당정치는 또다시 파행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했다. 즉 YS는 내각제를 매체로 군부와 손을 잡고 3당합당을 했으며, DJ도 야당을 점차 사당화(私黨化)해 나갔다. DJ는 87년 이후 지금까지 평민당→신민당→민주당→국민회의→새천년민주당으로 창당·해산·합당 등을 거듭해 와 정당제조 마법사가 되고 말았다. 해방 이후 명멸한 총 5백여개 정당 중 대통령을 배출한 정당은 자유당(이승만), 민주당(윤보선), 공화당(박정희), 민정당(전두환·노태우), 민자당(김영삼), 국민회의(김대중)로 기록되고 있다. 이들 정당의 공통적인 특징은 최고 실권자가 정치적인 편의에 따라 창당했으며, 정당의 수명도 이들 대통령의 정치적 운명과 같이 한 것이다. 대통령을 번갈아 배출하고서도 1∼2백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미국의 공화·민주당이나 4백∼5백년이 넘는 영국의 보수당 및 1백년의 노동당과 대비할 바는 못되지만 너무 한심하다는 생각이 든다. 이들 정당 오너들은 어찌도 한국 재벌의 오너와 똑같은 일인지배 형태를 갖추었는지 놀랍다. 그동안 이재형이나 조순·박태준·이효상 등 당대표를 지낸 사람들은 모두가 ‘고용 사장’에 불과했다. 당대표나 국회의원 공천도 재벌오너가 사장 등 중역자리를 배분하는 것과 똑같이 하향식으로 이루어졌고, 반대로 이들 소속의원은 오너에 정치적 충성을 하는 것으로 보답했다. 그러나 이제는 군부통치도 아니요, 양김(兩金) 보스체제도 아닌, 민주적이고 다원적인 새로운 정당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좋은 시기를 맞고 있다. 양김씨가 모두 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재 정당운용 실태를 보면 아직도 정당이 정치개혁을 주도해 나갈 만한 개혁태세나 마인드가 돼있지 않다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다. 특히 국민경선으로 신선한 충격을 주었던 민주당은 두차례 선거에서 연패한 후 ‘광주의 위대한 선택’ ‘혁명적 개혁’이라고 자찬하던 정치실험을 헌신짝처럼 버리면서 갈 길을 못 찾고 있다. 비록 극소수가 투표에 참가했지만 ‘국민’참여라는 명분 아래 연일 TV중계 속에 한판 잔치를 벌였던 경선제를 완전히 한편의 코미디로 만들고 정치를 희화화(戱畵化)시킨 것은 정당발전에 죄악을 저지른 것이다. 그리고 DJ가 만든 당명에도 ‘국민’이라든가 ‘새천년’이라는 현실과 동떨어진 이름을 붙여온 것을 보면 이재형이 말한 ‘모두가 국민을 속이는 일인데…’라는 말이 정말로 명언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DJ로부터 정당제조 기술을 습득해 온 민주당 지도부는 현재 또다른 정당만들기 작업에 들어갔다. 그러나 신당창당 모습을 보면 당의 정체성이나 원칙 또는 명분을 놓고 고민하거나 논의한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오직 대선에 누구를 내세우느냐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또다른 오너만을 찾고 있는 것이다. 원래 정당이란 권력을 추구하는 집단이기는 하지만 당원이 있고 정강정책이나 이념과 노선이 있기 때문에 한 조직으로서의 원칙과 규범을 지켜나가는 것이 정도이다. 따라서 정체성을 무시한 채 대선만을 의식해 후보 모셔오기에 혈안이 된다면 해방 후 지금까지 명멸한 5백여개 정당에 또 하나의 당명만 추가시키는 꼴밖에 되지 않는다. 미·영에서는 당원들이 ‘나는 확실한 공화당원(I’m a strong Republican)’이라든가 ‘나는 평생 민주당원(I’ve been a Democrat all my life)’이라는 등 소속정당에 무한한 자부심과 애당심을 갖는다. 이를 위해서는 선거철만 되면 오너와 당명을 바꾸고 노선까지 뭉개버려서는 안 되며, 비록 선거에서 한두번 패배한다 해도 노선과 정체성을 지키면서 꾸준히 개혁해 나가야 한다. 예를 들어 영국의 노동당은 지지세력인 노조의 횡포와 좌파정책으로 78년부터 20년 동안 4차례 총선에서 보수당에 참패를 당했다. 당시 노동당의 4연패는 현재 한국의 민주당보다 더 비참하고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94년 노동당 당수가 된 토니 블레어는 참패에서 얻은 여론에 따라 당을 좀더 우경화시켜 중도노선을 택하고 노조의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등 대대적인 당개혁 작업을 벌였다. 결국 영국 국민들은 97년 총선에서 노동당에 절대다수의 지지를 보내주었다. 이와 비슷한 당개혁 사례는 미국 정당사에서도 숱하게 찾을 수 있다. 민주당은 선거에서 국민들이 던져준 메시지와 경고가 무엇인지 들으려 하기보다는 정체성이나 원칙에서 벗어나 오직 권력유지 수단에만 매달리고 있다. 민주당이 현재 노무현 후보의 대안으로 거론하고 있는 정몽준·이한동 의원만 보아도 과연 민주당의 기본노선이나 이념 및 정책과 조화가 되는지 의문스럽다. 여론조사 결과 정의원이 한때 노무현과 똑같이 붕붕 뜨고 있으니 민주당으로서는 탐낼 만도 하다. 그러나 노동자가 주인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 재벌개혁을 하겠다고 천명한 노후보를 내세웠던 민주당이 최대 재벌 출신의 엘리트인 정의원과 이념이나 정책 측면에서 괴리는 없는지 반문해 보아야 한다. 오히려 정의원이 신당추진 측과 일정한 거리를 두면서 “민주당이 국민경선제를 통해 선출한 후보를 놓고 재경선을 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가 하면 “남북문제·경제부패 척결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하는 등 퍽 정치적이고 성숙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비교적 참신한 인상을 주는 정의원과 달리 이의원은 어쩐지 구시대적이고 권력지향적이다. 이의원은 자신을 총리로 만들어준 자민련을 버리고 DJ 밑에서 계속 총리를 즐기다가 나오자마자 민주당 의원들과 음모라도 하듯 접촉하는가 하면 사무실도 민주당사 근처로 잡는 등 혹시 뭐가 굴러떨어지지 않나 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마치 제2의 JP를 보는 듯해 ‘리틀 JP’ 또는 ‘JP Lite’ 정도의 별명을 붙일 수 있을지. 그래서 조순형 고문도 “신당이 이념과 노선에 관계없이 과거지향적 정치세력이 합세하는 개편에 불과하다면 국민의 지지를 받을 수 없다”고 정면 비판했다. 지난 2000년 미 대선에서 패배했던 고어와 부통령 러닝메이트였던 리버맨 상원의원은 며칠 전 뉴욕타임스를 통해 대선패배 원인을 놓고 국민과 특권층을 대립시켜 선거운동을 벌였던 사실이 과연 잘한 일이냐는 논쟁을 벌인 일이 있다. 민주당을 새롭게 하고 재집권을 하기 위한 노선개혁 노력을 펴고 있는 것이다. 선거에서 패배했던 두 나라 정당의 모습이 너무나 대조적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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