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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리,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

에스프리, 글로벌 브랜드로 도약

패션브랜드 에스프리는 이제 ‘무늬만’ 미국 브랜드다. 독일인 최고경영자 하인츠 크로그너는 다시 태어난 에스프리를 과연 글로벌 브랜드로 확고히 정착시킬 수 있을까.
1년 전 화창한 어느 토요일, 개장한 지 얼마 안 된 독일 뮌헨의 대형 에스프리(Esprit) 매장에 인파 수백 명이 몰려들었다. 사람들이 한결같이 목을 길게 빼고 시선은 위로 던졌다. 발랄한 스타일의 에스프리 의상을 입은 모델들이 가느다란 로프에 의지한 채 차례차례 매장 건물 전면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고 있었다. 모델들은 댄스음악에 맞춰 서서히 내려왔다. 패션쇼는 볼 만했다. 상황을 역전시킨 에스프리에 걸맞은 패션쇼였다. 에스프리의 뿌리는 미국이다.

더글러스와 수지 톰프킨스는 자유분방했던 1960년대 캘리포니아주 샌프란시스코에서 히치하이킹 중 서로 만나 편안하고 자유로운 캘리포니아풍 브랜드 에스프리를 만들었다. 에스프리 광고에는 참신한 얼굴의 10대들을 등장시켰다. 밝고 대담한 색상과 큰 대문자로 새겨진 로고가 눈길을 사로잡았다. 에스프리의 매출은 87년 4억 달러로 절정에 달했다. 한때 유행했던 브랜드들이 그랬듯 에스프리도 그 뒤 내리막길로 치달았다.

80년대 말에 이르러 갭 ·애버크럼비 앤 피치 같은 중저가 경쟁 브랜드가 시장을 잠식한데다 톰프킨스 부부마저 불화로 갈라섰다. 미국 업체 에스프리 드 코프(Esprit de Corp)는 결국 96년 채권단인 오크트리 캐피털 매니지먼트와 서버러스 파트너스에 넘어갔다. 지난해 에스프리의 미국 내 매출은 2억 달러로 그나마 재고정리 세일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미국 밖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야말로 에스프리를 없어서 못 팔 정도였던 것이다.

아시아와 유럽에서 에스프리 브랜드는 따로 운영되고 있었다. 지난해 아시아·유럽의 에스프리 매출은 모두 합해 10억 달러를 웃돌았다. 93년 에스프리 홍콩 자회사는 에스프리 파 이스트(Esprit Far East)라는 이름으로 증시에 상장했다. 96년 에스프리 파 이스트는 유럽 경영권을 인수한 뒤 에스프리 홀딩스(Esprit Holdings)로 개명했다. 그리고 지난해 6월 에스프리 홀딩스가 최후의 일격을 날렸다. 에스프리 파 이스트 설립자인 홍콩 기업인 마이클 잉(Michael Ying · 邢李源)의 에스프리 홀딩스가 1억5,000만 달러에 미국 내 에스프리 상표권을 매입한 것이다.

지난해 가을 잉은 회장으로 물러나면서 하인츠 크로그너(Heinz Krogner · 61)를 에스프리 홀딩스의 최고경영자(CEO)로 임명했다. 에스프리 유럽의 컨설턴트 출신인 크로그너가 새롭게 태어난 글로벌 기업 에스프리 홀딩스를 통합하게 된 것이다. 에스프리 홀딩스의 재무 본부는 홍콩에, 사업 본부는 독일 뒤셀도르프에 자리잡고 있다. 조만간 브랜드 이미지 본부를 뉴욕으로 옮길 예정이다. 미국에서 설립된 에스프리가 거꾸로 미국으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크로그너는 체코 태생 독일인으로 17세에 가족과 함께 동독을 탈출했다. 작지만 다부진 체격의 소유자인 크로그너는 에스프리 유럽 일부터 속히 처리했다. CEO로 부임한 뒤 6개월 사이 에스프리 유럽의 부서장 6명을 해고하고 100개 자리도 없앴다. 게다가 기업구조를 기능 단위가 아닌 사업 단위로 재편했다. 에스프리 유럽의 매출은 4배로 껑충 뛰었다. 심지어 오늘날 유럽 대륙 대부분이 경기침체의 늪에 빠져드는 가운데 에스프리 유럽은 올 상반기 매출신장률 40%를 기록할 정도로 눈부시게 선전했다. 현재 유럽 시장은 에스프리의 전체 사업 가운데 70%를 차지한다. 자신감에서 둘째 가라면 서러워할 크로그너가 에스프리의 차기 회장감을 자처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에스프리의 최고재무책임자(CFO)는 홍콩에 자리잡고 있으면서 아웃소싱도 담당하는 중국계 캐나다인이다. 세계 소매영업 담당자는 미국인, 이미지 총책임자는 싱가포르인, 도매영업 담당은 독일인이다. 그에 따라 크로그너도 일정을 쪼개 쓰고 있다. 뒤셀도르프에서 근무하는 시간은 연중 3분의 1 정도밖에 안 된다. 게다가 하루 두 시간 화상회의를 갖는다. 과거 에스프리는 지역별로 다른 디자인을 생산했다. 그러나 오늘날 거의 모든 제품이 세계 전역에서 동시 판매된다.

그 결과 아시아 · 유럽 · 미국 구분 없이 어느 한 지역에서 잘 나가는 디자인은 다른 곳에서도 잘 팔리는 현상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크로그너의 말을 들어보자. “5년 전만 해도 홍콩의 에스프리는 일본풍이었고 유럽에서는 정장 스타일, 미국에서는 스포티한 디자인이 호응을 얻었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은 좀더 국제화됐다.”크로그너는 패션의 국제화 경향에 맞춰 세계 디자인 개발 업무를 독일로 집중시켰다. 독일에서는 다달이 1,200가지의 디자인이 쏟아져 나온다.

그러나 디자인에서 여전히 캘리포니아풍을 엿볼 수 있다. 크로그너는 유럽에서 먹힌 경영전략 가운데 일부를 다른 지역에도 적용하고 있다. 아시아 매장의 경우 과거 최소 상품만 진열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에 대해 크로그너는 “아시아 매장들이 에스프리가 명품 브랜드 프라다처럼 인식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아시아 매장에 상품을 가득 쌓아놓는 전략으로 전환했다.

크로그너는 치밀하게 계산된 가격정책을 통해 몸집 불리기에 나서고 있다. 에스프리 제품 중 가격대가 하위 30%에 속하는 제품군은 스웨덴의 저가 브랜드 헤네스 앤 모리츠와 경합한다. 가격대 상위 20% 제품군은 고급 브랜드인 DKNY와 리즈 클레이번을 경쟁 대상으로 삼는다. 나머지는 그에 맞는 경쟁사별로 대처한다. 새로운 글로벌 경영구조 아래 디자인된 에스프리 신상품들이 지난 4월 세계 매장에서 선보이기 시작했다.

크로그너는 미국에 에스프리 소유 20개 대형 매장을 열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현재 미국에 에스프리 소유 대형 매장은 한 곳도 없다. 백화점에 의존하는 것이다. 지난 1월 에스프리는 한정 판매 형식으로 페더레이티드의 메이시스 웨스트 백화점에서 제품 판매를 시작했다. 현재 에스프리는 페더레이티드뿐 아니라 딜라즈 백화점 · 마셜 필즈 백화점의 가을 상품 주문에 맞추느라 한창 바쁘다.


“소매상이 돈 벌게 만들어야 돈 번다”

크로그너는 5년 안에 미국 내 매출이 5억 달러 규모로 성장할 것으로 전망한다. 크로그너는 대대적인 광고 없이 미국에서 이 목표를 달성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광고에 돈을 쏟아붓느니 매장 디스플레이에 투자하겠다는 것이다. 이는 일종의 도박이다. 캘리포니아주 멘로파크 소재 컨설팅업체 스트래티직 마인드셰어의 신시아 코언 사장은 “흥미를 자아낼 만한 창의적 마케팅 없이 브랜드가 살아남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지적했다.

크로그너는 요지부동이다. 그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돈을 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매상이 돈을 벌게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러면 소매상이 더 많은 제품을 사가게 되고 그 결과 에스프리는 광고에 투자할 필요가 없게 된다.”치밀한 계획에도 운은 개입되게 마련이다. 사스에 대한 공포로 홍콩 · 대만 내 매출이 30% 뚝 떨어졌다. 그나마 홍콩의 신설 매장이 희망을 던져주고 있다. 크로그너는 1년 안에 모든 지역에서 흑자를 달성하고 연간 매출을 20억 달러로 끌어올리겠다고 공언했다.

에스프리의 실적을 보면 허언은 아닌 듯싶다. 에스프리 홀딩스는 지난해 12월 31일 마감한 회계연도에서 수익은 44%, 매출은 31% 성장한 것으로 나타났다. 홍콩 증권거래소에서 주당 1.90달러에 거래되고 있는 에스프리의 주가수익비율은 18배다. 크로그너 자신이 지적했듯 그가 지난해 가을 CEO로 부임한 이래 주가는 14% 상승했다. 매출 규모에서 차이가 나지만 에스프리는 헤네스 앤 모리츠 · 인디텍스 · 갭과 동류라는 게 크로그너의 생각이다. 그는 “에스프리의 컨설턴트로 일할 당시 심각한 문제를 180개나 해결했다”고 자랑한다. 그렇다면 181번째 문제가 지금 전개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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