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에 ‘명품 사교육’ 바람이 분다
강남에 ‘명품 사교육’ 바람이 분다
서울시 강남구 청담동에서 사는 주부 노연숙(39)씨는 초등학교 6학년인 큰 딸과 4학년인 아들을 두고 있다. 큰 딸은 예술중학교에 가고 싶어해 미술학원에 보내고 있지만 둘째인 아들은 학원에 보내지 않고 있다. 나이가 어린데다 다른 부모들처럼 벌써부터 입시학원에 보내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강남에서는 초등학교 3학년 즈음부터 각종 경시대회를 대비해 학원에 보낸다. 성격도 활발한 둘째 아이는 학교에서 질문을 너무 많이 해 교사에게 종종 주의를 받기도 한다. 그 때문에 노씨는 두번이나 학교에 불려갔다.
이제는 등교하는 아이에게 “오늘은 아무 말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어”라고 말한다. 30명이 넘는 교실에서 자꾸 질문을 해대면 수업을 망칠 수 있어 교사들은 질문이 많은 아이들을 싫어한다고 한다. 1980년대 초반에 고등학교를 다닌 노씨는 전형적인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다. 학급당 정원이 30명이 넘는 오늘의 학교 현실은 아이의 개성을 살려주는 교육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노씨는 “내 아이들에게만은 주입식 교육을 피하고 싶었다”며 “아이가 즐겁게 공부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결국 노씨는 사고력과 창의력을 키워준다는 한 사교육 기관의 문을 두드렸다.
입시 교육의 메카, 강남의 교육지도가 바뀌고 있다. 각종 입시학원이 난립해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곳이 강남이다. 요즘 이곳에는 탈입시 교육 바람이 불고 있다. 강남의 입시 교육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으나 사고력·창의력 교육도 신규 수요를 창출하면서 새로운 시장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다. 입시학원 등 사교육 기관의 입시 교육이 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면, 새로운 열풍은 유아에서 초등학교 6학년까지를 대상으로 한다.
미국·이스라엘 등 교육 선진국에서 검증된 프로그램들을 직수입한 학원이 등장했는가 하면, 독자적인 프로그램으로 이 시장에 진출한 곳도 여럿이다. 미취학 아동이나 초등생 자녀를 둔 이 지역 30∼40대 부모들은 새로운 교육을 선보이는 사교육 기관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강남은 입시 교육의 광풍을 이끄는 곳이면서 역설적으로 그런 교육 방식에서 가장 먼저 탈피하고 있다.
지난 2000년 교육인적자원부의 ‘사교육비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사교육 시장의 규모는 연간 7조1천2백억원으로 추산됐다. 이 시장은 매년 5%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올해 시장 규모는 8조1천7백억원 정도로 예상된다. 그중 초등생을 대상으로 한 시장 규모는 전체의 50%로 약 4조원 규모다. 그동안 초등생 대상의 사교육 시장은 대형 교육업체에 의한 저가의 학습지·방문과외 시장과 고가의 과외·학원 등으로 양분돼 있었다.
경기침체가 가속화하면서 학습지 시장과 방문과외 시장, 종합학원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반면 사고력·창의력 교육 시장은 성장세다. 한솔교육 사업팀의 송원재씨는 “현재 사고력·창의력 관련 학원 시장의 경우 약 5백억원 규모로 추산된다”며 “매년 30% 정도 성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이 시장의 대부분은 서울, 그중에서 강남 지역에 집중돼 있다. 강남이 사교육의 선도적(?) 역할을 해왔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이 시장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지도 모른다.
사고력과 창의력을 중시하는 교육 현장의 변화는 지난해부터 시행된 영재교육법의 영향 탓이 크다. 교육부가 영재의 조기 발굴·육성을 목표로 2001년 제정해 지난해 시행 첫해를 맞았다. 부산 과학고가 처음으로 영재학교로 전환했고, 서울을 비롯한 각 지역의 대학에 영재교육센터가 설립됐다. 2005년에는 국립 영재학교가 생길 예정이다. 이같은 영재 교육 활성화 방안은 영재 교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영재 교육을 표방한 각종 사설 학원의 난립을 가져오기도 했다.
강남 학원가의 변화도 여기서 비롯됐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통합적 사고력을 표방하는 ‘지혜의 숲’ 차오름 원장은 “영재 교육 열풍이 시작되면서 사교육 시장에서는 통합적·창의적 사고가 중요한 교육 아이템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수능보다 학생의 개별적 특성에 주목한 대입 수시모집이 일상화되고, 과학고나 영재학교 심지어 외국 유학을 준비하는 초등생들은 일찌감치 사고력·창의력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영재는 소수의 특별한 아이들이다. 교육학자들은 영재는 지능이 높은 아이가 아니라 “창의적 문제 해결능력”을 갖춘 아이라고 말한다. 영재가 갖춰야 할 필수 요소인 ‘창의성’은 “문제 상황에 적절한 새롭고 독창적인 산출물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이런 능력을 모든 아동들이 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균 이상의 지능을 가진 아이라면 자신의 잠재된 영재성을 계발해 자기에 맞는 분야의 영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최근 학계의 연구 결과다. 그런 이론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현재 전세계 교육 현장을 풍미하고 있는 ‘다중지능이론’이다.
이 이론의 창시자인 하버드대 하워드 가드너 교수는 인간의 지능을 언어지능, 논리·수리지능, 공간지능, 음악지능, 신체·동작지능, 자연친화지능, 대인관계지능, 자기지각지능 등 여덟가지로 분류한다. 그는 이 모든 지능을 두루 갖춘 천재란 없고 어느 한두 지능이 특별히 발달된 사람이 그 분야의 영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영재 여부를 판별했던 기존의 IQ 검사가 영재와 그렇지 않은 아동 사이에 분명한 구분선을 그었다면, 다중지능이론은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계발한다면 누구나 영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공부를 잘하는 영재가 있는가 하면, 축구를 잘하는 영재가 나올 수도 있고, 인간적 친화력이 높은 영재가 나올 수도 있다는 얘기다.
1975년 최초로 제시된 가드너 교수의 다중지능이론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90년대 말. 그의 이론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전 교육부 장관 문용린 서울대 교수는 “다중지능이론이 제시되면서 교육 현장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 천재는 어느 한 영역의 천재일 따름이지 모든 영역의 천재는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교육이 교사에 의한 지식의 ‘전수’에 그쳤다면, 이제는 학생들의 잠재된 능력을 계발하는 교육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소수의 선택된 아이들만이 아니라 일정한 수준 이상의 아이라면 자신의 영재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남의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사고력·창의력 교육을 앞다투어 시작하는 것도 아이의 개성과 특질에 맞는 ‘맞춤 교육’이 필요하다는 자각 때문이다. 한양여대 유치원은 국내 최초로 다중지능이론을 적용시킨 곳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지난 8월 14일 오후 4시 강남 대치동의 와이즈만 영재교육원. 초등학교 5학년인 전호선군이 조원들과 함께 리트머스 종이를 이용한 산과 염기의 전기적 성질 실험을 하고 있다.
실험 내내 전군과 다른 아이들은 경쟁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실험 결과에 대해 토론을 주고 받는다. 교사의 안내에 따라 실험에 몰두했던 전군은 “학교에서 하는 공부보다 훨씬 재밌다. 학교에서는 이런 실험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군의 꿈은 플라스틱 신소재를 개발하는 화학자가 되는 것이다. 이 학원은 5∼6세부터 초등학교 6학년까지의 아동들을 대상으로 과학탐구 실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 교육에서 사고력이나 창의력을 강조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 강남 사교육의 변화도 어쩌면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다. 최근 등장한 사고력·창의력 학원들은 4∼5 명의 아동을 정원으로 직접 체험과 상호토론·통합교육을 중시한다. 칠판과 종이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보통 주 1회 2시간 가량 수업하고 한달 교습비로 10만∼15만원을 받는다. 고교생들의 고액 과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이다. 입시나 학교 수업과는 무관하게 학생들의 직접 참여로 수업이 이뤄지는 것이 특징이다. 초등생이 중학교 수준의 공부를 미리 하는 ‘선행학습’과 같은 입시형 공부는 없다.
이같은 사교육의 전환은 강남의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력 탓도 있지만, 입시 교육과는 다른 방식의 교육을 원하는 부모들의 열성도 한몫했다. 와이즈만 영재교육원의 수업 중 도르래의 원리와 이점을 찾아보기 위한 활동을 보자. 조선 후기 수원성 축조 당시 정약용이 만들었던 거중기의 설계도를 직접 그려보고, 자신의 설계도대로 직접 거중기를 만든다. 그것을 가지고 무거운 물건들을 들어올리는 실험을 해보며 도르래와 축바퀴가 주는 힘을 재현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체득된 원리를 바탕으로 자동으로 열리는 쓰레기통과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골드버그 장치’를 만드는 과제를 수행한다. 학교 수업이나 입시학원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풍경들이다.
와이즈만 영재교육원을 운영하는 ‘창의와 탐구’ 임국진 대표이사는 “학교에서 실시했던 특기적성교육은 그것을 수행할 만한 교사도, 시설도 없어 결국 실패했다. 아이들은 열가지를 암기하는 것보다 한가지를 스스로 실험해보고 생각하면서 성장한다”고 말한다. 임대표는 이같은 프로그램이 우리나라 교육의 트렌드를 바꿀 것이라고 장담한다.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창의력 중심 교육으로 변화시키는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다. 일단 우수한 아이부터 이런 식의 교육을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한솔교육이 개발한 ‘브레인스쿨’은 유아 사고력 관련 프로그램으로는 국내 첫 시도다. 만 2세부터 5세까지의 유아를 대상으로 창의력과 사고력 향상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전국에 40여개의 지점을 갖추고 있다. 브레인스쿨 서초센터 김양숙 원장은 “지금 자리가 없어서 인원을 더 이상 못 받을 정도다. 유치원이 한 교실에 보통 20∼30명인데 비해 3∼4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실제 체험 위주로 수업을 진행하니 아이들도 재밌어 하고 부모들의 반응도 좋다. 공부만하는 것은 싫다는 게 아이들과 엄마들의 공통된 반응”이라고 말한다.
김원장은 “과거에는 교구를 중심으로 암기 위주의 훈련을 했지만 이제는 놀이와 학습을 결합시킨 형태로 진행된다”고 덧붙였다. 5살난 딸을 2년째 이 센터에 보내고 있다는 주부 김신영씨는 이렇게 말한다.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생각을 이끌어낸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자기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몇년 전만 해도 이런 식의 교육기관이 없었는데, 2∼3년 전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입시 위주의 공교육은 교육적 효과가 없다고 본다. 엄마들은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선진국형 교육을 원한다. 한 교실에 30명이 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과연 질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부모들의 말 속에서 공교육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강남의 사교육 시장은 경기침체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경제력을 갖추고 있다는 얘기다. 브레인스쿨 1호점인 송파센터는 IMF 구제금융 당시에도 신청자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었다. 아이들에게 기존 교육과는 다른 방식의 교육 혜택을 주기를 원하는 강남 부모들의 욕구는 끝이 없다. 젊은 부부일수록 그 정도는 더 심하다. 그들은 전세대 부모들과 달리 대부분 한명의 자녀만을 둔 경우가 많다. 초등생 자녀를 둔 30대 후반의 주부 김영희씨는 “40대 중반 이상의 부모들이 입시 위주의 교육에 더 집착하는 반면 30대 엄마들은 창의력 교육과 같은 대안 교육을 더 선호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20대가 아이를 갖게 되면 이같은 경향은 아마도 더 두드러질 것이다. 가령 13개월에서 30개월 정도의 영아를 둔 젊은 부모들은 강남 신사동에 있는 영아 사회성 교육 기관인 ‘마나모로’ 같은 곳을 다니기도 한다. 이곳은 엄마와의 ‘애착’이 아동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엄마와 아이가 함께 참여하는 ‘사회성 강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곳의 신혜원 원장은 “한 자녀를 둔 부모들은 아이가 사회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같은 교육 프로그램을 선호한다”고 분석했다.
서울 양재동의 CBS 영재교육원은 독자적인 영재 판별 기준으로 선발된 아이들을 교육하는 곳이다. 강남 사교육 시장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기 전까지는 사고력·창의력 교육기관으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곳이다. 하지만 영재교육 패러다임의 변화와 함께 사설 교육기관들이 속속 이 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와이즈만 영재교육원·지혜의 숲·브레인스쿨·아이큰숲 등이 대표적인 브랜드들이다. 한국교육개발원 영재교육연구실장 조석희 박사는 “최근 강남 사교육기관들에서 실시하는 사고력·창의력 프로그램은 대부분 영재 교육 차원에서 시작된 것들이다. 모든 아이들에게 창의성 교육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균 이상의 아이라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남 사교육의 최근 변화는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사고력·창의력 교육은 기존 교육의 맹점들을 극복하는 대안적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입시 교육에 이어 아이들에게 또다른 부담을 안겨줄 가능성도 있다. 전교조 김홍기 초등분과장은 “강남 사교육의 새로운 흐름은 기존 입시 교육에 더해 과도한 학습노동을 부추길 공산이 크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같은 교육이 공교육에 대한 불신 속에서 진행된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했다. 전교조는 현재 자율성과 수준별 교육을 표방하고 있는 7차 교육과정이 교육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실시된 실패작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강남 사교육에서 부는 사고력·창의력 교육은 7차 교육과정의 실패로 인한 결과라는 것이다.
한국 교육의 변화를 선도하는 것은 교육당국이 아니라 ‘시장’이다. 공교육에서 제공하는 교육 서비스보다 양질의 교육을 받기를 원하는 부모들의 바람을 막을 길은 없어 보인다. 입시학원을 거부한 노연숙씨는 “중·고교 동창들을 만나보면 공부를 잘했던 동창들보다 자기가 좋아했던 일을 했던 친구들이 더 행복하게 사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아이에게 입시학원이 아닌 책읽고 토론하며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더 필요하다고 본다. 그게 바로 내가 아이에게 다른 방식의 교육을 선택한 이유”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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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등교하는 아이에게 “오늘은 아무 말 하지 말고 가만히 앉아 있어”라고 말한다. 30명이 넘는 교실에서 자꾸 질문을 해대면 수업을 망칠 수 있어 교사들은 질문이 많은 아이들을 싫어한다고 한다. 1980년대 초반에 고등학교를 다닌 노씨는 전형적인 주입식 교육을 받고 자란 세대다. 학급당 정원이 30명이 넘는 오늘의 학교 현실은 아이의 개성을 살려주는 교육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게 그녀의 생각이다. 노씨는 “내 아이들에게만은 주입식 교육을 피하고 싶었다”며 “아이가 즐겁게 공부하고 스스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는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결국 노씨는 사고력과 창의력을 키워준다는 한 사교육 기관의 문을 두드렸다.
입시 교육의 메카, 강남의 교육지도가 바뀌고 있다. 각종 입시학원이 난립해 아파트값이 천정부지로 치솟는 기현상이 벌어지는 곳이 강남이다. 요즘 이곳에는 탈입시 교육 바람이 불고 있다. 강남의 입시 교육은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으나 사고력·창의력 교육도 신규 수요를 창출하면서 새로운 시장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것이다. 입시학원 등 사교육 기관의 입시 교육이 고교생을 대상으로 한 것이라면, 새로운 열풍은 유아에서 초등학교 6학년까지를 대상으로 한다.
미국·이스라엘 등 교육 선진국에서 검증된 프로그램들을 직수입한 학원이 등장했는가 하면, 독자적인 프로그램으로 이 시장에 진출한 곳도 여럿이다. 미취학 아동이나 초등생 자녀를 둔 이 지역 30∼40대 부모들은 새로운 교육을 선보이는 사교육 기관으로 발길을 돌리고 있다. 강남은 입시 교육의 광풍을 이끄는 곳이면서 역설적으로 그런 교육 방식에서 가장 먼저 탈피하고 있다.
지난 2000년 교육인적자원부의 ‘사교육비 실태조사 결과’에 따르면 당시 사교육 시장의 규모는 연간 7조1천2백억원으로 추산됐다. 이 시장은 매년 5% 성장하고 있기 때문에 올해 시장 규모는 8조1천7백억원 정도로 예상된다. 그중 초등생을 대상으로 한 시장 규모는 전체의 50%로 약 4조원 규모다. 그동안 초등생 대상의 사교육 시장은 대형 교육업체에 의한 저가의 학습지·방문과외 시장과 고가의 과외·학원 등으로 양분돼 있었다.
경기침체가 가속화하면서 학습지 시장과 방문과외 시장, 종합학원은 사양길에 접어들었다. 반면 사고력·창의력 교육 시장은 성장세다. 한솔교육 사업팀의 송원재씨는 “현재 사고력·창의력 관련 학원 시장의 경우 약 5백억원 규모로 추산된다”며 “매년 30% 정도 성장하고 있다”고 밝혔다. 현재 이 시장의 대부분은 서울, 그중에서 강남 지역에 집중돼 있다. 강남이 사교육의 선도적(?) 역할을 해왔다는 점을 상기해 보면 이 시장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지도 모른다.
사고력과 창의력을 중시하는 교육 현장의 변화는 지난해부터 시행된 영재교육법의 영향 탓이 크다. 교육부가 영재의 조기 발굴·육성을 목표로 2001년 제정해 지난해 시행 첫해를 맞았다. 부산 과학고가 처음으로 영재학교로 전환했고, 서울을 비롯한 각 지역의 대학에 영재교육센터가 설립됐다. 2005년에는 국립 영재학교가 생길 예정이다. 이같은 영재 교육 활성화 방안은 영재 교육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불러 일으켰고, 영재 교육을 표방한 각종 사설 학원의 난립을 가져오기도 했다.
강남 학원가의 변화도 여기서 비롯됐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통합적 사고력을 표방하는 ‘지혜의 숲’ 차오름 원장은 “영재 교육 열풍이 시작되면서 사교육 시장에서는 통합적·창의적 사고가 중요한 교육 아이템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말했다. 수능보다 학생의 개별적 특성에 주목한 대입 수시모집이 일상화되고, 과학고나 영재학교 심지어 외국 유학을 준비하는 초등생들은 일찌감치 사고력·창의력 교육을 받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영재는 소수의 특별한 아이들이다. 교육학자들은 영재는 지능이 높은 아이가 아니라 “창의적 문제 해결능력”을 갖춘 아이라고 말한다. 영재가 갖춰야 할 필수 요소인 ‘창의성’은 “문제 상황에 적절한 새롭고 독창적인 산출물을 만들어내는 능력”이다. 이런 능력을 모든 아동들이 가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균 이상의 지능을 가진 아이라면 자신의 잠재된 영재성을 계발해 자기에 맞는 분야의 영재가 될 수 있다는 것이 최근 학계의 연구 결과다. 그런 이론의 대표적 사례가 바로 현재 전세계 교육 현장을 풍미하고 있는 ‘다중지능이론’이다.
이 이론의 창시자인 하버드대 하워드 가드너 교수는 인간의 지능을 언어지능, 논리·수리지능, 공간지능, 음악지능, 신체·동작지능, 자연친화지능, 대인관계지능, 자기지각지능 등 여덟가지로 분류한다. 그는 이 모든 지능을 두루 갖춘 천재란 없고 어느 한두 지능이 특별히 발달된 사람이 그 분야의 영재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영재 여부를 판별했던 기존의 IQ 검사가 영재와 그렇지 않은 아동 사이에 분명한 구분선을 그었다면, 다중지능이론은 자신이 가진 잠재력을 계발한다면 누구나 영재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했다. 공부를 잘하는 영재가 있는가 하면, 축구를 잘하는 영재가 나올 수도 있고, 인간적 친화력이 높은 영재가 나올 수도 있다는 얘기다.
1975년 최초로 제시된 가드너 교수의 다중지능이론이 한국에 소개된 것은 90년대 말. 그의 이론을 국내에 처음 소개한 전 교육부 장관 문용린 서울대 교수는 “다중지능이론이 제시되면서 교육 현장의 패러다임이 변화하고 있다. 천재는 어느 한 영역의 천재일 따름이지 모든 영역의 천재는 없다는 것이다. 그동안의 교육이 교사에 의한 지식의 ‘전수’에 그쳤다면, 이제는 학생들의 잠재된 능력을 계발하는 교육으로 바뀌고 있다”고 말했다. 소수의 선택된 아이들만이 아니라 일정한 수준 이상의 아이라면 자신의 영재성을 발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강남의 부모들이 아이들에게 사고력·창의력 교육을 앞다투어 시작하는 것도 아이의 개성과 특질에 맞는 ‘맞춤 교육’이 필요하다는 자각 때문이다. 한양여대 유치원은 국내 최초로 다중지능이론을 적용시킨 곳으로 주목받기도 했다. 지난 8월 14일 오후 4시 강남 대치동의 와이즈만 영재교육원. 초등학교 5학년인 전호선군이 조원들과 함께 리트머스 종이를 이용한 산과 염기의 전기적 성질 실험을 하고 있다.
실험 내내 전군과 다른 아이들은 경쟁적으로 질문을 던지고, 실험 결과에 대해 토론을 주고 받는다. 교사의 안내에 따라 실험에 몰두했던 전군은 “학교에서 하는 공부보다 훨씬 재밌다. 학교에서는 이런 실험을 제대로 할 수 없다”고 말했다. 전군의 꿈은 플라스틱 신소재를 개발하는 화학자가 되는 것이다. 이 학원은 5∼6세부터 초등학교 6학년까지의 아동들을 대상으로 과학탐구 실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한국 교육에서 사고력이나 창의력을 강조한 것은 이미 오래 전이다. 강남 사교육의 변화도 어쩌면 새로울 것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속내는 그렇지 않다. 최근 등장한 사고력·창의력 학원들은 4∼5 명의 아동을 정원으로 직접 체험과 상호토론·통합교육을 중시한다. 칠판과 종이는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다. 보통 주 1회 2시간 가량 수업하고 한달 교습비로 10만∼15만원을 받는다. 고교생들의 고액 과외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저렴한 가격이다. 입시나 학교 수업과는 무관하게 학생들의 직접 참여로 수업이 이뤄지는 것이 특징이다. 초등생이 중학교 수준의 공부를 미리 하는 ‘선행학습’과 같은 입시형 공부는 없다.
이같은 사교육의 전환은 강남의 상대적으로 높은 경제력 탓도 있지만, 입시 교육과는 다른 방식의 교육을 원하는 부모들의 열성도 한몫했다. 와이즈만 영재교육원의 수업 중 도르래의 원리와 이점을 찾아보기 위한 활동을 보자. 조선 후기 수원성 축조 당시 정약용이 만들었던 거중기의 설계도를 직접 그려보고, 자신의 설계도대로 직접 거중기를 만든다. 그것을 가지고 무거운 물건들을 들어올리는 실험을 해보며 도르래와 축바퀴가 주는 힘을 재현해보는 것이다. 이렇게 체득된 원리를 바탕으로 자동으로 열리는 쓰레기통과 최소의 노력으로 최대의 효과를 얻는 ‘골드버그 장치’를 만드는 과제를 수행한다. 학교 수업이나 입시학원에서는 좀처럼 찾아볼 수 없는 풍경들이다.
와이즈만 영재교육원을 운영하는 ‘창의와 탐구’ 임국진 대표이사는 “학교에서 실시했던 특기적성교육은 그것을 수행할 만한 교사도, 시설도 없어 결국 실패했다. 아이들은 열가지를 암기하는 것보다 한가지를 스스로 실험해보고 생각하면서 성장한다”고 말한다. 임대표는 이같은 프로그램이 우리나라 교육의 트렌드를 바꿀 것이라고 장담한다. 입시 위주의 교육에서 창의력 중심 교육으로 변화시키는 지렛대 역할을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다. 일단 우수한 아이부터 이런 식의 교육을 시작하면 자연스럽게 전체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것이다.
한솔교육이 개발한 ‘브레인스쿨’은 유아 사고력 관련 프로그램으로는 국내 첫 시도다. 만 2세부터 5세까지의 유아를 대상으로 창의력과 사고력 향상 교육을 진행하고 있다. 현재 전국에 40여개의 지점을 갖추고 있다. 브레인스쿨 서초센터 김양숙 원장은 “지금 자리가 없어서 인원을 더 이상 못 받을 정도다. 유치원이 한 교실에 보통 20∼30명인데 비해 3∼4명의 아이들을 데리고 실제 체험 위주로 수업을 진행하니 아이들도 재밌어 하고 부모들의 반응도 좋다. 공부만하는 것은 싫다는 게 아이들과 엄마들의 공통된 반응”이라고 말한다.
김원장은 “과거에는 교구를 중심으로 암기 위주의 훈련을 했지만 이제는 놀이와 학습을 결합시킨 형태로 진행된다”고 덧붙였다. 5살난 딸을 2년째 이 센터에 보내고 있다는 주부 김신영씨는 이렇게 말한다. “주입식 교육이 아니라 생각을 이끌어낸다는 점이 마음에 든다. 자기 의견을 제대로 전달하고 의견을 나눌 수 있다는 게 장점이다. 몇년 전만 해도 이런 식의 교육기관이 없었는데, 2∼3년 전부터 생기기 시작했다. 입시 위주의 공교육은 교육적 효과가 없다고 본다. 엄마들은 아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선진국형 교육을 원한다. 한 교실에 30명이 넘는 초등학교에 들어가서 과연 질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을지 의문이다.” 부모들의 말 속에서 공교육에 대한 기대와 희망은 찾아보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강남의 사교육 시장은 경기침체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만큼 경제력을 갖추고 있다는 얘기다. 브레인스쿨 1호점인 송파센터는 IMF 구제금융 당시에도 신청자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늘었다. 아이들에게 기존 교육과는 다른 방식의 교육 혜택을 주기를 원하는 강남 부모들의 욕구는 끝이 없다. 젊은 부부일수록 그 정도는 더 심하다. 그들은 전세대 부모들과 달리 대부분 한명의 자녀만을 둔 경우가 많다. 초등생 자녀를 둔 30대 후반의 주부 김영희씨는 “40대 중반 이상의 부모들이 입시 위주의 교육에 더 집착하는 반면 30대 엄마들은 창의력 교육과 같은 대안 교육을 더 선호한다”고 말한다.
현재의 20대가 아이를 갖게 되면 이같은 경향은 아마도 더 두드러질 것이다. 가령 13개월에서 30개월 정도의 영아를 둔 젊은 부모들은 강남 신사동에 있는 영아 사회성 교육 기관인 ‘마나모로’ 같은 곳을 다니기도 한다. 이곳은 엄마와의 ‘애착’이 아동발달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이론을 바탕으로 엄마와 아이가 함께 참여하는 ‘사회성 강화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이곳의 신혜원 원장은 “한 자녀를 둔 부모들은 아이가 사회성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기 때문에 이같은 교육 프로그램을 선호한다”고 분석했다.
서울 양재동의 CBS 영재교육원은 독자적인 영재 판별 기준으로 선발된 아이들을 교육하는 곳이다. 강남 사교육 시장에 새로운 변화의 바람이 불기 전까지는 사고력·창의력 교육기관으로는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했던 곳이다. 하지만 영재교육 패러다임의 변화와 함께 사설 교육기관들이 속속 이 분야에 진출하고 있다. 앞서 소개한 와이즈만 영재교육원·지혜의 숲·브레인스쿨·아이큰숲 등이 대표적인 브랜드들이다. 한국교육개발원 영재교육연구실장 조석희 박사는 “최근 강남 사교육기관들에서 실시하는 사고력·창의력 프로그램은 대부분 영재 교육 차원에서 시작된 것들이다. 모든 아이들에게 창의성 교육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평균 이상의 아이라면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런 점에서 강남 사교육의 최근 변화는 긍정적”이라고 말했다.
사고력·창의력 교육은 기존 교육의 맹점들을 극복하는 대안적 측면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입시 교육에 이어 아이들에게 또다른 부담을 안겨줄 가능성도 있다. 전교조 김홍기 초등분과장은 “강남 사교육의 새로운 흐름은 기존 입시 교육에 더해 과도한 학습노동을 부추길 공산이 크다”고 지적한다. 그는 이같은 교육이 공교육에 대한 불신 속에서 진행된다는 점도 문제로 지적했다. 전교조는 현재 자율성과 수준별 교육을 표방하고 있는 7차 교육과정이 교육 인프라가 갖춰지지 않은 상태에서 실시된 실패작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강남 사교육에서 부는 사고력·창의력 교육은 7차 교육과정의 실패로 인한 결과라는 것이다.
한국 교육의 변화를 선도하는 것은 교육당국이 아니라 ‘시장’이다. 공교육에서 제공하는 교육 서비스보다 양질의 교육을 받기를 원하는 부모들의 바람을 막을 길은 없어 보인다. 입시학원을 거부한 노연숙씨는 “중·고교 동창들을 만나보면 공부를 잘했던 동창들보다 자기가 좋아했던 일을 했던 친구들이 더 행복하게 사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아이에게 입시학원이 아닌 책읽고 토론하며 즐겁게 공부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더 필요하다고 본다. 그게 바로 내가 아이에게 다른 방식의 교육을 선택한 이유”라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선택에 대해 후회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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