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세에 다시 마터호른으로
사회 ·정치 풍자작가 크리스토퍼 버클리(Christopher Buckley)가 40여년 전 어렸을 적에 가봤던 사연 많은 산 마터호른을 다시 찾았다.
'나이 50이 되면 뭔가를 해야 한다.' 한달 사이 세 친구를 저 세상으로 보내면서 해본 생각이다. 한 명은 에이즈로, 또 한 명은 암으로, 그리고 다른 한 친구는 루게릭병(근위축성측삭경화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들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친구가 50세였다. 슬프고 기이하게도, 이 글을 쓰는 동안에는 사촌 리가 51세로 타계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는 50세에 소형 범선을 타고 드넓은 대서양으로 나섰다. 내 친구 제프리 노먼은 50세 되던 해 그랜드티턴산으로 등반을 떠났다. 범선은 없고 바위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싶지도 않은 나는 50세 생일을 기념할 수 있는 좀더 부드럽고 우아한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상어에 물리거나 등산용 칼로 팔을 잘라내야 하는 무시무시한 극한 상황과 무관한 방법 말이다.
나는 뉴욕 타임스를 읽다 알프스의 몬테로사(Monte Rosa) 투어에 관한 기사와 맞닥뜨렸다. 마터호른(Matterhorn)산 주변의 타원형 등산로 80㎞를 여행하는 트레킹이었다. 약간의 사전 준비를 하고 이곳저곳을 경유하면 스타일 구기지 않고 편안하게 트레킹할 수 있었고, 냄새 나는 등반객 무리와 산장에서 함께 잘 필요도 없었다. 사실 50세에 접어들 즈음이면 다른 사람의 땀 냄새가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 여정은 7, 8일로 하루에 많이 걸어봐야 29㎞다. 그나마 많이 걷는 날은 하루뿐이다. 에베레스트 등반 대참사를 기록한 존 크라카우어(Jon Krakauer)의 <희박한 공기 속으로> (Into Thin Air) 같은 대단한 이야깃거리를 만들 순 없겠지만 어쨌든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는 있을 것이다.
함께 아이들의 축구 경기를 보러 가곤 하는 친구 엘런 블러팅어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그는 정말 좋은 친구다. 더욱이 “내 친구가 빙하 틈으로 떨어졌으니 구조 헬기 좀 보내주세요”라는 말을 5개 국어로 구사할 줄도 안다. 블러팅어는 “못 갈 것 없지”라며 흔쾌히 승낙했다.우리는 등산 장비 가게를 몇 차례 들렀다. 나는 빈틈없는 등산객이 꼭 휴대한다는 7달러짜리 비상 담요를 그에게 권했다.
그러자 그는 화생방복이라도 건네받은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 내가 말했다. 나는 헤드램프도 권했다. “어디 석탄 캐러 가나?” 블러팅어가 내게 타박을 줬다.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가 접이식 등산용 지팡이를 권하자 블러팅어는 ‘잘못 걸려들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음엔 뭐지?. 로프하고 아이젠. 그런 장비들은 여행 첫날 빙하를 가로지르는 짧은 코스에 필요했다. 나는 블러팅어가 목적지에 도착해 가이드로부터 직접 설명을 듣게 내버려 두기로 마음 먹었다. “칼도 필요할 걸세.” 내가 말했다. “그건 왜?” “자네 <서바이벌 게임> (Deliverance)이라는 영화도 못 봤나. 알프스는 더 위험하단 말야.”
이윽고 우리는 스위스의 체르마트(Zermatt)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가이드를 구하고 지도도 더 구입했다. 블러팅어가 갖고 있는 휴대전화에 스위스 ·이탈리아 산악구조대의 구조번호까지 모두 입력했다. 우리는 현지 정보 수집에 나서며 배낭을 싸고 또 쌌다. 휴대용 영양식과 여분의 위성항법장치(GPS)용 건전지도 샀다. 나는 이미 여름 내내 GPS 사용법을 익혀뒀다. 여행 이야기가 나온 지 1년 만에 마침내 모든 준비를 갖춘 것이다.
트레킹 전날 밤 블러팅어는 “엄지발가락에 아무 감각이 없다”며 허리 디스크가 도질 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그는 사내답게 원래 계획대로 밀고 나갈 것을 주장했다. 그때 나는 몬테로사 등반로 해발 3,000m 어느 지점에서 핫도그처럼 담요로 둘둘 말린 채 누워 있는 블러팅어 옆에 무릎 꿇고 앉아 이렇게 말하는 나를 상상해봤다. “무전기로 들으니 폭풍이 몰려오고 있어 헬기가 뜰 수 없다네. 통증은 어떤가.” 그리고 내가 고집해 원래 계획대로 밀어붙였고, 그 결과 블러팅어에게 평생 장애까지 생겼다며 그의 부인과 세 아이에게 사죄하는 모습도 상상해봤다.
어떤 문제든 와인 몇 병만 비우면 해결되게 마련이다. 우리의 두 번째 계획은 그런 식으로 탄생했다. 체르마트에 그냥 머물며 아침까지 마냥 잔 다음 하이킹하고 헬스클럽에서 수영과 사우나도 즐기고 나서 느긋하게 저녁이나 먹은 뒤 아르마냐크 브랜디에 쿠바산 코이바스 시가를 물고 당구도 치는 것이다. 다음날, 그 다음날도 똑같이 시간을 보내자. 그것도 열흘 내내…. 제2의 계획은 정말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체르마트를 다시 찾은 것은 40년 만이다. “40년 만에 여길 다시 찾게 되는군요”라고 말하는 것은 나이 50줄에 겪는 불이익 가운데 하나다. 나는 몬테로사 호텔의 젊고 아리따운 여직원들에게 “아가씨들은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 태어나지도 않았겠군요”라고 말했다. 그들은 프로답게 내가 아일랜드의 시인 오스카 와일드에 버금가는 재치 있는 말이라도 내던양 맞장구를 쳐줬다. 젊은 사람들이 비위를 맞춰주는 것은 나이 50에 누릴 수 있는 이점 가운데 하나다.
몬테로사 호텔은 1855년 알렉산더 자일러가 문을 열었다. 1865년 7월 13일 새벽 5시30분, 25세의 영국 청년 에드워드 휨퍼(Edward Whymper)와 동료 6명이 마터호른 등정에 나선 것도 바로 몬테로사 호텔에서였다(호텔 입구 동판에는 7월 14일로 잘못 새겨져 있다). 일행 모두 정상 정복에 성공했다. 마터호른을 최초로 정복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살아 돌아온 이는 세 명이었다.
휨퍼는 저서 <알프스 등반기> (Scrambles Amongst the Alps)에서 그때 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자일러가 문에서 나를 맞이했다. 그리고 조용히 내 방까지 따라왔다. 그는 ‘어떻게 된 건가’라고 물었다. 나는 ‘가이드 타우그발더 부자와 저만 돌아왔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쓸데없이 비탄에 잠겨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밖으로 뛰어나갔다.”
우리는 꽃으로 장식된 작은 발코니가 딸린 2층 방에 묵었다. 중앙 광장과 그랜드 호텔 체르마테르호프 맞은편에 자리 잡은 작은 분수가 물을 뿜어대는 모습이 창 밖으로 보였다. 카지노 건설이 한창이어서 교회 옆의 산악인 공동묘지는 보이지 않았다. 공동묘지에는 미셸 크로즈(Michel Croz)가 잠들어 있다. 크로즈는 7월 14일 마터호른 정상 정복 후 귀환하다 목숨을 잃은 대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나는 어렸을 적 그의 묘비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동지들로부터 사랑을, 등반객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한 용감한 사나이가 여기 잠들다.
그는 이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용감하고 충실한 가이드였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크로즈 무덤 옆에 슬롯머신과 주사위 게임판이 들어설 것이다. 어린 시절 동화의 나라를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 들어선 카지노가 보이는 것도 나이 50에 접어들면서 겪는 불이익 가운데 하나다.
마터호른은 변하지 않았다. 기차를 타고 체르마트에 오르면서 창 밖을 내다보면 움찔 놀라게 된다. 마터호른이 여전히 그곳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마터호른이라는 이름은 1789년 제네바 태생의 자연과학자이자 등산가인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Horace Benedict de Saussure)가 붙인 것이다. 당시 소쉬르는 생테오뒤르(St. Theodule) 등반로를 거쳐 체르마트에 당도했다. 그는 당시 광경을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위대하고 빼어난 몽세르뱅(Mont-Cervin) 피라미드가 바위로 만든 삼각 오벨리스크처럼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조각칼로 깎아낸 듯하다.”
마터호른이 앗아간 목숨만 얼추 500명에 이른다. 에베레스트의 세 배 정도 되는 수치다. 닷새 만에 500명을 앗아가는 미국의 자동차 사고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마터호른은 그야말로 난코스다. I-95 등반에 성공한 것보다 마터호른 북벽에서 목숨을 잃는 게 더 명예롭게 여겨질 정도다.
나는 어렸을 적 마터호른과 휨퍼 일행이 겪은 비극을 묘사한 화가이자 조각가인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e)의 판화에 매료됐다.
담요까지 뒤집어 쓰고 손전등으로 제임스 램지 울먼(James Ramsey Ullman)의 <백색 탑> (The White Tower)을 읽던 일, 영화 <제3의 산 사나이> (The Third Man on the Mountain)를 본 기억이 난다. 언제나 활력이 넘쳤으며 하루 담배 네 갑씩 피워대던 골초 리드 삼촌도 마터호른을 등반했다. 삼촌과 함께 등반한 대원 가운데 한 사람은 정상에서 내려가기를 거부하고 그곳에 남았다. 자살한 것이다.
어느날 블러팅어와 나는 산 아래 바위 위에 누워 마터호른 북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젠장, 저긴 때려 죽여도 못가.” 망원경으로 보니 8부 능선에 파리처럼 달라붙은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천천히 정상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크로즈의 유해가 안장돼 있는 산악인 공동묘지 묘비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 뉴욕에서 온 17세 소년의 무덤을 우연히 발견했다. 소년은 1975년 브라이트호른(Breithorn) 근처에서 목숨을 잃었다. 묘비에는 소년이 사용한 등산용 피켈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피켈 바로 위에 ‘난 오르고 싶었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같은 날 늦은 오후, 블러팅어와 나는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체르마트 시내를 걷고 있었다. 그때 헬기 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들이 목까지 길게 빼고 도시 위로 우뚝 솟은 산을 올려다 봤다. 한 남자가 460m 상공의 헬기에서 줄에 매달려 하강하다 절벽으로 뛰어내렸다. 망원경으로 보니 바위에 세 명이 더 매달려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선명한 점으로 보였다. 내 묘비에는 등산용 피켈이 아니라 TV 리모컨이나 걸어놓을 생각이다. 그리고 이런 문구를 새겨넣을 것이다. ‘난 오르고 싶지 않았다.’
블러팅어와 나는 하이킹에 나섰다. 우리는 열흘 동안 모두 55㎞를 걷고 6.7㎞를 오르내렸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정도로도 우리는 땀에 흠뻑 젖어 돌아오곤 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18개를 포개놓은 높이라고 한 번 생각해보라. 정말 엄청나지 않은가.
체르마트 주변 등산로를 따라 걷다보면 세계에서 내로라 하는 아름다운 경관들과 만나게 된다.
우리는 작은 마을인 츠무트(Zmutt), 슈바르츠제 호수(Schwartzsee ·흑해라는 뜻으로 마터호른 아래에 있는 연못 이름치고는 좀 건방진 듯싶다), 마터호른봉(Mettelhorn), 고르너그라트산(Gornergrat)으로 향했다. 접이식 등산 지팡이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숨소리처럼 자연스럽게 들렸다.
하루는 체르마트에서 366m 위 사면에 위치한 에델바이스(Edelweiss ·인구2명)로 올라갔다. 에델바이스는 둥근 언덕 형태를 띠고 있다.
며칠 뒤 우리는 에델바이스를 다시 찾았다. 블러팅어는 이번엔 도중하차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보다 더 힘이 넘쳤다.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레스토랑에 도착할 때까지 난 줄곧 그의 뒤를 힘겹게 쫓아가야 했다. “자네, 참 빨리 걷더군.” 내가 말해야만 했다.
그때가 지난해 9월 11일이었다. 블러팅어가 에델바이스까지 쉬지 않고 한달음에 올라간 것은 9?1테러 당시 희생된 소방대원들에게 소박하나마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레스토랑 테라스 너머로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며 우리는 세계무역센터 위층에 갇혀 있다 뛰어내린 사람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했다. 세계무역센터 고층에서 지상까지 떨어지는 데 무려 10초가 걸렸다.
하켄부터(원기를 회복시켜주는 뜨거운 홍차)를 다 마신 후 우리는 300여m 더 올라가 트리프트(Trift ·인구3명)에 도달했다. 안개가 끼고 바람이 부는데다 춥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감자와 리크를 한 데 넣어 뜨거운 수프까지 끓여준 여인숙 주인 후고가 더 없이 고마웠다. 여인숙은 마터호른 가이드 출신인 후고와 그의 아내가 운영하고 있으며 그들에겐 여섯 살짜리 아들 세바스티안이 있다.
“90번이나 올랐죠. 올라가는 데 4시간, 내려오는 데 4시간 걸립니다”. 후고가 스위스인 특유의 자부심 넘치는 말투로 말했다.
수프와 얼음을 띄운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있는 우리에게 담황색 머리 세바스티안이 함께 놀자고 졸라댔다. 안개가 걷히자 후고는 마터호른 다음으로 유명한 스위스의 명물인 긴 나팔처럼 생긴 알펜호른을 꺼냈다. 그리곤 약 600m 위의 등산객 10여 명을 향해 불었다. 이렇게 부는 소리를 ‘루체르너’라고 한다. 스위스에서 들은 소리 가운데 가장 심금을 울리는 것이었다. 알펜호른 소리가 계곡 전체로 울려퍼졌다.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등산객들이 멈춰 서서 손을 흔들었다.
점심 식사 후 300여m를 더 올라가 바이스호른(Weisshorn) 밑에 도달했다. 바이스호른은 체르마트에서 900m 위에 자리 잡은 곳이다. 바이스호른에는 야구장 외야석처럼 생긴 거대한 강철 문들이 설치돼 있다. 아래 마을을 눈사태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들이다. 나는 치즈를 가는 강판처럼 울퉁불퉁하게 생긴 마터호른에서 1,200m 아래로 떨어져 죽는 것 다음으로 싫은 일이 산사태로 깔려 죽는 것이다.
블러팅어는 빠른 속도로 산을 내려갔다. 장엄한 무지개 아래서 사진 좀 찍자고 붙들어 놓을 사이도 없을 정도였다. 난 ‘또 9 ·11사태 희생자 추도인가’ 하고 생각했다. 산 아래에 도착하자 블러팅어는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라고 털어놓았다. 감정의 변화를 일으킨 것은 산에서 부는 따뜻한 바람인 푄(Foehn)이었는지도 모른다.
등산용 지팡이를 짚고 포장도로 따라 가든 레스토랑으로 향할 즈음 늦은 오후의 태양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레스토랑에서 차가운 맥주로 땀을 식혔다.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사우나도 했다. 그날 밤 우리는 샬레 다 귀세페(Le Chalet da Guiseppe)에서 파스타에 적포도주를 즐겼다.
샬레 다 귀세페는 현지 주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귀세페는 30년째 이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손님이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면 웃으며 “부오나 세라(굿 이브닝)”라고 외치고는 손님을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스위스 사람들은 남이 보는 앞에서 입맞춤이나 포옹을 잘 하지 않는다. 웃을 때면 귀세페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팬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30년 동안 루터교회 신자인 현지 주민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피곤함으로 가득하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조지 바이런(George Byron)은 이복 누이와 가진 근친상간 추문 이후 런던을 떠나 스위스로 도피했다.
바이런은 스위스를 ‘이기적이고 더러운 야만족의 저주받은 나라’라고 표현했다. 스위스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나는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스위스인들 가운데는 좋은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내 선조들이 둔감한 성격을 지녔던 것은 사실이다. 검색엔진에 ‘joie de vivre(삶의 기쁨)’와 ‘Swiss(스위스)’라는 단어를 함께 입력하면 검색결과가 5만 건도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체르마트에서 오랫동안 살아 온 한 이탈리아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블러팅어에게 스위스인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탈리아어로 말했다. “그들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고 있어요.”
차가운 달빛 아래 시가를 피우며 몬테로사 호텔로 돌아오던 중 스위스 전통 농가풍 가옥 샬레가 늘어선 좁은 거리 힌터도르프슈트라세(Hinterdorfstrasse)에 이르렀다. 그날 밤 나는 <전쟁과 평화> 를 읽고 있었다. TV에서는 스페인어로 더빙한 영화 <시계태엽장치 오렌지> (A Clockwork Orange)가 방영되고 있었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든 나는 새벽 3시30분에 깨고 말았다. 그람피스 바 앤 피제리아(Grampi’s Bar and Pizzeria)에서 나는 취객들 소리에 잠을 깬 것이다. 이는 밤마다 겪는 하나의 행사였다. 어느날 블러팅어와 나는 발코니에서 미리 준비해둔 물풍선을 떠들어대는 취객들에게 던졌다. 하지만 하나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몬테로사 호텔 2층에는 목재 판벽널로 장식한 조용한 방이 하나 있다. 방에는 마터호른을 유명하게 만들거나 마터호른에서 사망한 사람들 모습이 담긴 사진과 에칭판화가 걸려 있다. 휨퍼, 찰스 허드슨(Charles Hudson), 프랜시스 더글러스 경(Lord Francis Douglas겳음봬?와일드의 운명적인 동성애 ‘연인’ 알프레드 더글러스 경과 관련 있음), 더글러스 해도(Douglas Hadow), 크로즈, 페테르 타우그발더(Peter Taugwalder)와 그의 아들 모습이 방에 전시돼 있다.
아널드 런 경(Sir Arnold Lunn)의 사진도 있다. 스키를 등에 맨 사진 속 얼굴은 늙었지만 여전히 활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스키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런에게 감사해야 한다. 스키를 스포츠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런은 훌륭한 영국인이었다. 그는 20대 초반 웨일스에서 등반 중 27m 아래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부상이 너무 심한 나머지 여생을 7.6㎝나 짧아진 한 다리와 함께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알프스에 있는 모든 산을 등반했다.
스키를 타고 하산하는 경우도 있었다. 스키 회전 활강을 창안한 인물이 바로 런이다. 게다가 그는 등산, 스위스인과 가톨릭의 관계에 대한 수십 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런은 내 아버지의 친구였다. 우리 가족은 해마다 뮈렌(Murren)에 있는 그를 방문했다. 런과 그의 부인은 품위 있고 우아한 아파트에 살았다. 스위스 정부가 자국 경제에 미친 그의 공헌을 인정해 제공한 아파트였다. 당시 8세이던 나는 그에게 엘리베이터 사용법을 가르쳐줬다. 런이 8세이던 1908년 그는 위대한 휨퍼를 만났다. 따라서 나는 휨퍼와 악수했던 손과 악수할 수 있었다.
체르마트로 가는 길에 나는 런의 저서 <마터호른 100년사> (Matterhorm Centenary)를 갖고 갔다. 흥미진진하고 거침 없는 문체로 쓰여진 글이다. 나는 <마터호른 100년사> 에서 마터호른과 체르마트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공헌한 휨퍼가 정작 체르마트 현지 주민들로부터 경멸까지 받았다는 놀라운 사실도 알게 됐다. 7월 14일의 비극 때문이었다. 비극적인 사고에 대한 휨퍼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당시 크로즈는 영국인 해도가 안전하게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그때였다.
“크로즈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크로즈와 해도가 아래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곧이어 허드슨과 더글러스도 끌려 내려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크로즈의 비명이 들리자마자 타우그발더와 나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바위에 바짝 몸을 붙였다. 우리 두 사람을 연결하고 있던 로프가 팽팽해졌다. 그리고는 우리 둘 모두 한 몸인 듯 아래로 강하게 당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버텼다. 하지만 타우그발더와 더글러스를 연결하고 있던 로프가 끊어져버렸다.
몇 초 사이 불행한 동료들이 아래로 미끄러지면서 살기 위해 두 손을 뻗치며 바둥대는 모습까지 두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아무 상처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하나 둘 우리 시야로부터 사라지며 절벽에서 절벽으로 추락했다. 1,200m 아래 마터호른글레처(Matterhorngletscher)로 떨어진 것이다.그렇게 우리의 동지들은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30분 동안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붙박인 듯 남아 있었다.”
사건은 신문 머릿기사를 장식하며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런던에서 발행되는 타임스에 독자편지가 쇄도했다. 사건 여파가 어찌나 컸던지 빅토리아 여왕은 의전(儀典) 장관에게 등산을 법으로 금해야 하는 게 아닌지 물어볼 정도였다. 타우그발더에게 로프를 잘라버렸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휨퍼는 타우그발더를 변호했다. 하지만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그를 비난했다. 휨퍼는 타우그발더가 등반 전문가도 아닌 더글러스의 몸을 일부러 약한 로프로 묶었다고 증언했다. 더욱이 타우그발더 부자가 가이드 비용조차 받지 않았다는 점을 공개해달라고 자신에게 부탁했다고 밝혔다.
세인의 동정심을 불러일으켜 장차 자신들 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휨퍼의 진술 가운데 가장 소름끼치는 것은 세 생존자들이 비참한 심정으로 하산하던 기나긴 그날 밤 타우그발더 부자가 휨퍼에게 너무 무섭게 대해 휨퍼는 바위를 등지고 언제라도 도끼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휨퍼는 타우그발더 부자가 마터호른 최초의 정복자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로 명성을 드높이고 그에 따라 가이드 사업에서 성공하겠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시사한 것이다.
끔찍한 일이었다. 타우그발더 부자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로부터 80여 년 뒤 런은 <알파인 저널> 에 타우그발더 부자가 결백하다는 내용의 글을 기고했다. 그는 휨퍼를 좋아하는 현지인은 아무도 없었다는 한 스위스인의 고백을 전했다. 이렇게 해서 ‘위대한 사나이’ 휨퍼의 더러운 비밀이 드러나게 됐다. 현지인들 모두 그를 싫어했다는 것이다.
런은 <마터호른 100년사> 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휨퍼는 친구 한 사람 없이 여러 면에서 가련한 인물이었다. 등반말고는 존경할 만한 점이 별로 없었다. 그에게는 여러 결점이 있었다. 그러나 위대한 점도 있었다. 많은 산악인이 새로운 등반로 개척으로 마터호른의 역사에 공헌했다. 그렇지만 마터호른은 여전히 휨퍼의 산이다. 그것은 휨퍼 자신이 마터호른과 같은 불굴의 기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놀라운 강인함을 보여줬다. 62세에 그는 에든버러에서 런던까지 날마다 평균 88㎞를 걸었을 정도다.”
나는 몬테로사 호텔 2층 작은 방에서 런의 책을 읽으며 즐겁게 보냈다. 아침 식사 후 블러팅어와 나는 도서관에서 차 한 잔 앞에 두고 느긋한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계획하곤 했다. 그곳에 열흘 동안 머물며 계획 없이 보낸 날이 하루도 없었던 것 같다. 날마다 개인 휴대용단말기(PDA)를 들고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그곳은 그야말로 천국이다. 블러팅어는 우리 여행을 ‘피콜라 파우사(piccola pausa)’라고 불렀다. 피콜라 파우사란 이탈리아어로 저녁 정찬 코스와 코스 사이의 막간을 뜻한다.
느긋하다 보니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법한 것들도 눈에 들어왔다. 예를 들자면 호텔의 화분 같은 것이다. 화분은 옛날 요강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휨퍼가 쓰던 것은 아닐까.’ 고지대에 머물면 사람이 이상해지는 모양이다.어느날 오후 우리는 작은 폭포 옆에 있는 숲 속의 빈터까지 올라갔다. 그곳에 널려 있는 보라색 애스터 위에 앉아 딱딱한 빵, 코트뒤론 포도주, 통감자, 신선한 그뤼예르산 치즈, 트로켄플라이슈(얇게 썰어놓은 육포), 토블레론 초콜릿으로 소풍을 즐겼다. 마을로 돌아온 우리는 산악박물관을 찾았다.
내가 산악박물관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62년의 일이다. 당시 박물관에서 크로즈 ·해도 ·더글러스 ·허드슨이 추락할 때 끊어진 그 유명한 로프를 내 두 눈으로 직접 봤다. 로프는 지금도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내가 순진한 10세 소년이었을 때 그랬듯 로프를 보는 순간 뭔가에 사로잡히는 느낌이었다. 박물관에서 휨퍼를 둘러싼 논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휨퍼가 현지인들로부터 배척당했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강한 흡인력이 있다. 박물관에는 휨퍼가 이발할 때 앉았다는 의자도 전시돼 있다.
산악인들이 신었던 가죽장화를 말려 전시해놓은 일종의 작은 납골당도 있다. 가죽장화의 주인은 한결같이 산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다. 마터호른 등반 중 끔찍한 폭풍으로 죽은 매혹적인 어느 영국인 여성 사진도 박물관 한 켠에 전시돼 있다. 입구 근처에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1881년 22세에 마터호른을 등반했다는 문건이 게시돼 있다. 윈스턴 처칠도 마터호른을 오른 적이 있다. 세상 사람 모두 한 번쯤은 마터호른을 등반한 듯했다.
청년 루스벨트는 누이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는 ‘마터호른을 오르기로 결심한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는 몇몇 영국인에게 양키도 그들만큼이나 멋지게 등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적고 있다. 그로부터 17년 뒤 루스벨트는 쿠바 산후안 힐의 한 봉우리를 한달음에 정복했다. 글을 읽고 있자니 내 안에서 뭔가 분명해지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나도 마터호른에 올라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이튿날 오후 2시, 블러팅어와 나는 마터호른 기지에 당도했다. 여기서부터 정상으로 이어지는 1,524m의 등반로가 시작된다. 나는 물통을 점검했다. GPS 장비에 현 위치를 입력한 다음 자외선 차단제도 다시 발랐다. 휨퍼 등 많은 산악인이 바로 이 자리에서 마터호른 등반을 시작했다. 블러팅어는 뒤에 남기로 했다. USA 인터랙티브(USA Interactive)의 최고경영자(CEO) 배리 딜러(Barry Diller)와 현재 진행 중인 협상안에 대해 통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삶은 짧지만 계속 되는 것 아닌가.
나는 홀로 북사면을 오르기 시작했다. 10분 뒤 60m 지점에 올라섰다. 나는 크로즈, <백색 탑> , <제3의 산 사나이> , 그리고 마터호른에 오르고 싶었다는 17세 소년을 생각했다. 회른리(Hornli) 산장으로 보급품을 실어나르는 헬기가 지나갔다. 회른리는 정상 정복을 준비 중인 산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다. 눈이 부실 정도로 맑고 서늘한 날씨였다. 살아 있다는 게 기분 좋게 느껴졌다. 49세 이후 하루도 늙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하산하기 시작했다. 블러팅어는 딜러와 통화 중이었다. 후고는 마터호른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데 8시간 걸렸다.
하지만 나는 15분밖에 안 걸렸다. 이제 여생 동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터호른을 등반했지(정상까지 오르진 않았지만).” 우리는 다시 내려왔다. 그날 밤 나는 취객들의 소란에도 아랑곳없이 동틀녘까지 푹 잘 수 있었다. 굳이 일어날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마터호른 정복과 함께 50세가 되면서 달성한 삶의 또 다른 작은 성과였다.
[관광정보]
몬테로사 호텔 주소: 스위스 체르마트 3920. 전화: 41-27-966-03-33. 팩스: 41-27-966-03-30. 우리가 묵은 방은 수수하지만 안성맞춤이었다. 숙박료는 하루 120유로. 화려한 최신 숙박 시설로는 몬테로사 호텔의 자매 호텔 몽세르뱅이 있다. 몽세르뱅 호텔 주소: 스위스 체르마트 3920. 전화: 41-27-966-88-88. 팩스: 41-27-966-88-89.
저녁에는 대개 체르마트 중심가에 있는 발리세르카네(Walliserkanne) 레스토랑 아래층 II 리스토란테(27-966-46-19)에서 맛있는 피자와 파스타를 먹었다. 샬레 다 쥐세페(27-967-13-80)도 들러볼 만하다. 몬테로사 호텔에서 오른쪽 모퉁이만 돌면 보이는 무드스 레스토랑 앤 바(27-967-84-84)도 가볼 만하다.
몬테로사 투어. 엄지발가락이 마비돼 80㎞에 이르는 하이킹을 편하게 마치고 싶은가. 그렇다면 99년 6월 20일자 뉴욕 타임스에 실린 사진작가 마샤 리버먼(Marcia Lieberman)의 글 <편안한 등반> (A Comfy Way Around the Mountain)을 한 번 읽어볼 것(www.nytimes.com). 코스는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접경을 넘나들도록 돼 있다.
호텔에서 오리털 이불을 덮고 편안하게 잔 뒤 다음날 콩으로 만든 파스타도 맛볼 수 있다. 가이드는 첫날 클라인 마터호른(Klein Matterhorn) 빙하를 건너 이탈리아 쪽으로 넘어가는 코스에서 몇 시간 동안만 필요하다. 가이드가 필요할 경우 체르마트 관광사무소(전화: 41-27-966-81-00, 팩스: 41-27-966-81-01)에 연락하면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편안한> 제3의> 백색> 마터호른> 알파인> 마터호른> 마터호른> 시계태엽장치> 전쟁과> 제3의> 백색> 알프스> 서바이벌>희박한>
'나이 50이 되면 뭔가를 해야 한다.' 한달 사이 세 친구를 저 세상으로 보내면서 해본 생각이다. 한 명은 에이즈로, 또 한 명은 암으로, 그리고 다른 한 친구는 루게릭병(근위축성측삭경화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들 가운데 가장 나이 많은 친구가 50세였다. 슬프고 기이하게도, 이 글을 쓰는 동안에는 사촌 리가 51세로 타계했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버지는 50세에 소형 범선을 타고 드넓은 대서양으로 나섰다. 내 친구 제프리 노먼은 50세 되던 해 그랜드티턴산으로 등반을 떠났다. 범선은 없고 바위에 대롱대롱 매달리고 싶지도 않은 나는 50세 생일을 기념할 수 있는 좀더 부드럽고 우아한 방법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봤다. 상어에 물리거나 등산용 칼로 팔을 잘라내야 하는 무시무시한 극한 상황과 무관한 방법 말이다.
나는 뉴욕 타임스를 읽다 알프스의 몬테로사(Monte Rosa) 투어에 관한 기사와 맞닥뜨렸다. 마터호른(Matterhorn)산 주변의 타원형 등산로 80㎞를 여행하는 트레킹이었다. 약간의 사전 준비를 하고 이곳저곳을 경유하면 스타일 구기지 않고 편안하게 트레킹할 수 있었고, 냄새 나는 등반객 무리와 산장에서 함께 잘 필요도 없었다. 사실 50세에 접어들 즈음이면 다른 사람의 땀 냄새가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 여정은 7, 8일로 하루에 많이 걸어봐야 29㎞다. 그나마 많이 걷는 날은 하루뿐이다. 에베레스트 등반 대참사를 기록한 존 크라카우어(Jon Krakauer)의 <희박한 공기 속으로> (Into Thin Air) 같은 대단한 이야깃거리를 만들 순 없겠지만 어쨌든 무사히 살아 돌아올 수는 있을 것이다.
함께 아이들의 축구 경기를 보러 가곤 하는 친구 엘런 블러팅어에게 같이 가자고 제안했다. 그는 정말 좋은 친구다. 더욱이 “내 친구가 빙하 틈으로 떨어졌으니 구조 헬기 좀 보내주세요”라는 말을 5개 국어로 구사할 줄도 안다. 블러팅어는 “못 갈 것 없지”라며 흔쾌히 승낙했다.우리는 등산 장비 가게를 몇 차례 들렀다. 나는 빈틈없는 등산객이 꼭 휴대한다는 7달러짜리 비상 담요를 그에게 권했다.
그러자 그는 화생방복이라도 건네받은 듯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날 바라봤다.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 내가 말했다. 나는 헤드램프도 권했다. “어디 석탄 캐러 가나?” 블러팅어가 내게 타박을 줬다. “어떻게 될지 누가 알아.”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내가 접이식 등산용 지팡이를 권하자 블러팅어는 ‘잘못 걸려들었구나’ 하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다음엔 뭐지?. 로프하고 아이젠. 그런 장비들은 여행 첫날 빙하를 가로지르는 짧은 코스에 필요했다. 나는 블러팅어가 목적지에 도착해 가이드로부터 직접 설명을 듣게 내버려 두기로 마음 먹었다. “칼도 필요할 걸세.” 내가 말했다. “그건 왜?” “자네 <서바이벌 게임> (Deliverance)이라는 영화도 못 봤나. 알프스는 더 위험하단 말야.”
이윽고 우리는 스위스의 체르마트(Zermatt)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가이드를 구하고 지도도 더 구입했다. 블러팅어가 갖고 있는 휴대전화에 스위스 ·이탈리아 산악구조대의 구조번호까지 모두 입력했다. 우리는 현지 정보 수집에 나서며 배낭을 싸고 또 쌌다. 휴대용 영양식과 여분의 위성항법장치(GPS)용 건전지도 샀다. 나는 이미 여름 내내 GPS 사용법을 익혀뒀다. 여행 이야기가 나온 지 1년 만에 마침내 모든 준비를 갖춘 것이다.
트레킹 전날 밤 블러팅어는 “엄지발가락에 아무 감각이 없다”며 허리 디스크가 도질 때 나타나는 증상이라고 말했다.
그래도 그는 사내답게 원래 계획대로 밀고 나갈 것을 주장했다. 그때 나는 몬테로사 등반로 해발 3,000m 어느 지점에서 핫도그처럼 담요로 둘둘 말린 채 누워 있는 블러팅어 옆에 무릎 꿇고 앉아 이렇게 말하는 나를 상상해봤다. “무전기로 들으니 폭풍이 몰려오고 있어 헬기가 뜰 수 없다네. 통증은 어떤가.” 그리고 내가 고집해 원래 계획대로 밀어붙였고, 그 결과 블러팅어에게 평생 장애까지 생겼다며 그의 부인과 세 아이에게 사죄하는 모습도 상상해봤다.
어떤 문제든 와인 몇 병만 비우면 해결되게 마련이다. 우리의 두 번째 계획은 그런 식으로 탄생했다. 체르마트에 그냥 머물며 아침까지 마냥 잔 다음 하이킹하고 헬스클럽에서 수영과 사우나도 즐기고 나서 느긋하게 저녁이나 먹은 뒤 아르마냐크 브랜디에 쿠바산 코이바스 시가를 물고 당구도 치는 것이다. 다음날, 그 다음날도 똑같이 시간을 보내자. 그것도 열흘 내내…. 제2의 계획은 정말 괜찮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체르마트를 다시 찾은 것은 40년 만이다. “40년 만에 여길 다시 찾게 되는군요”라고 말하는 것은 나이 50줄에 겪는 불이익 가운데 하나다. 나는 몬테로사 호텔의 젊고 아리따운 여직원들에게 “아가씨들은 내가 여기 처음 왔을 때 태어나지도 않았겠군요”라고 말했다. 그들은 프로답게 내가 아일랜드의 시인 오스카 와일드에 버금가는 재치 있는 말이라도 내던양 맞장구를 쳐줬다. 젊은 사람들이 비위를 맞춰주는 것은 나이 50에 누릴 수 있는 이점 가운데 하나다.
몬테로사 호텔은 1855년 알렉산더 자일러가 문을 열었다. 1865년 7월 13일 새벽 5시30분, 25세의 영국 청년 에드워드 휨퍼(Edward Whymper)와 동료 6명이 마터호른 등정에 나선 것도 바로 몬테로사 호텔에서였다(호텔 입구 동판에는 7월 14일로 잘못 새겨져 있다). 일행 모두 정상 정복에 성공했다. 마터호른을 최초로 정복한 것이다. 하지만 그들 가운데 살아 돌아온 이는 세 명이었다.
휨퍼는 저서 <알프스 등반기> (Scrambles Amongst the Alps)에서 그때 일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자일러가 문에서 나를 맞이했다. 그리고 조용히 내 방까지 따라왔다. 그는 ‘어떻게 된 건가’라고 물었다. 나는 ‘가이드 타우그발더 부자와 저만 돌아왔습니다’라고 답했다.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왈칵 울음을 터뜨렸다. 하지만 쓸데없이 비탄에 잠겨 있지만은 않았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불러모으기 위해 밖으로 뛰어나갔다.”
우리는 꽃으로 장식된 작은 발코니가 딸린 2층 방에 묵었다. 중앙 광장과 그랜드 호텔 체르마테르호프 맞은편에 자리 잡은 작은 분수가 물을 뿜어대는 모습이 창 밖으로 보였다. 카지노 건설이 한창이어서 교회 옆의 산악인 공동묘지는 보이지 않았다. 공동묘지에는 미셸 크로즈(Michel Croz)가 잠들어 있다. 크로즈는 7월 14일 마터호른 정상 정복 후 귀환하다 목숨을 잃은 대원들 가운데 한 사람이다. 나는 어렸을 적 그의 묘비명을 읽었던 기억이 난다.
동지들로부터 사랑을, 등반객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던
한 용감한 사나이가 여기 잠들다.
그는 이곳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용감하고 충실한 가이드였다.
이제 얼마 안 있으면 크로즈 무덤 옆에 슬롯머신과 주사위 게임판이 들어설 것이다. 어린 시절 동화의 나라를 다시 찾았을 때 그곳에 들어선 카지노가 보이는 것도 나이 50에 접어들면서 겪는 불이익 가운데 하나다.
마터호른은 변하지 않았다. 기차를 타고 체르마트에 오르면서 창 밖을 내다보면 움찔 놀라게 된다. 마터호른이 여전히 그곳에 우뚝 서 있는 것이다. 마터호른이라는 이름은 1789년 제네바 태생의 자연과학자이자 등산가인 오라스 베네딕트 드 소쉬르(Horace Benedict de Saussure)가 붙인 것이다. 당시 소쉬르는 생테오뒤르(St. Theodule) 등반로를 거쳐 체르마트에 당도했다. 그는 당시 광경을 자신의 저서에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위대하고 빼어난 몽세르뱅(Mont-Cervin) 피라미드가 바위로 만든 삼각 오벨리스크처럼 하늘 높이 솟아 있다. 조각칼로 깎아낸 듯하다.”
마터호른이 앗아간 목숨만 얼추 500명에 이른다. 에베레스트의 세 배 정도 되는 수치다. 닷새 만에 500명을 앗아가는 미국의 자동차 사고와 비교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마터호른은 그야말로 난코스다. I-95 등반에 성공한 것보다 마터호른 북벽에서 목숨을 잃는 게 더 명예롭게 여겨질 정도다.
나는 어렸을 적 마터호른과 휨퍼 일행이 겪은 비극을 묘사한 화가이자 조각가인 귀스타브 도레(Gustave Dore)의 판화에 매료됐다.
담요까지 뒤집어 쓰고 손전등으로 제임스 램지 울먼(James Ramsey Ullman)의 <백색 탑> (The White Tower)을 읽던 일, 영화 <제3의 산 사나이> (The Third Man on the Mountain)를 본 기억이 난다. 언제나 활력이 넘쳤으며 하루 담배 네 갑씩 피워대던 골초 리드 삼촌도 마터호른을 등반했다. 삼촌과 함께 등반한 대원 가운데 한 사람은 정상에서 내려가기를 거부하고 그곳에 남았다. 자살한 것이다.
어느날 블러팅어와 나는 산 아래 바위 위에 누워 마터호른 북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우리는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젠장, 저긴 때려 죽여도 못가.” 망원경으로 보니 8부 능선에 파리처럼 달라붙은 두 사람이 있었다. 그들은 천천히, 천천히 정상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크로즈의 유해가 안장돼 있는 산악인 공동묘지 묘비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그러다 뉴욕에서 온 17세 소년의 무덤을 우연히 발견했다. 소년은 1975년 브라이트호른(Breithorn) 근처에서 목숨을 잃었다. 묘비에는 소년이 사용한 등산용 피켈이 걸려 있었다.
그리고 피켈 바로 위에 ‘난 오르고 싶었다’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같은 날 늦은 오후, 블러팅어와 나는 관광객들로 북적이는 체르마트 시내를 걷고 있었다. 그때 헬기 소리가 들려 왔다. 사람들이 목까지 길게 빼고 도시 위로 우뚝 솟은 산을 올려다 봤다. 한 남자가 460m 상공의 헬기에서 줄에 매달려 하강하다 절벽으로 뛰어내렸다. 망원경으로 보니 바위에 세 명이 더 매달려 있었다. 세 사람 모두 선명한 점으로 보였다. 내 묘비에는 등산용 피켈이 아니라 TV 리모컨이나 걸어놓을 생각이다. 그리고 이런 문구를 새겨넣을 것이다. ‘난 오르고 싶지 않았다.’
블러팅어와 나는 하이킹에 나섰다. 우리는 열흘 동안 모두 55㎞를 걷고 6.7㎞를 오르내렸다. 별 것 아니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정도로도 우리는 땀에 흠뻑 젖어 돌아오곤 했다.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 18개를 포개놓은 높이라고 한 번 생각해보라. 정말 엄청나지 않은가.
체르마트 주변 등산로를 따라 걷다보면 세계에서 내로라 하는 아름다운 경관들과 만나게 된다.
우리는 작은 마을인 츠무트(Zmutt), 슈바르츠제 호수(Schwartzsee ·흑해라는 뜻으로 마터호른 아래에 있는 연못 이름치고는 좀 건방진 듯싶다), 마터호른봉(Mettelhorn), 고르너그라트산(Gornergrat)으로 향했다. 접이식 등산 지팡이의 삐걱거리는 소리가 숨소리처럼 자연스럽게 들렸다.
하루는 체르마트에서 366m 위 사면에 위치한 에델바이스(Edelweiss ·인구2명)로 올라갔다. 에델바이스는 둥근 언덕 형태를 띠고 있다.
며칠 뒤 우리는 에델바이스를 다시 찾았다. 블러팅어는 이번엔 도중하차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보다 더 힘이 넘쳤다. 계곡이 내려다 보이는 레스토랑에 도착할 때까지 난 줄곧 그의 뒤를 힘겹게 쫓아가야 했다. “자네, 참 빨리 걷더군.” 내가 말해야만 했다.
그때가 지난해 9월 11일이었다. 블러팅어가 에델바이스까지 쉬지 않고 한달음에 올라간 것은 9?1테러 당시 희생된 소방대원들에게 소박하나마 경의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레스토랑 테라스 너머로 절벽 아래를 내려다 보며 우리는 세계무역센터 위층에 갇혀 있다 뛰어내린 사람들의 심정이 어땠을까 생각했다. 세계무역센터 고층에서 지상까지 떨어지는 데 무려 10초가 걸렸다.
하켄부터(원기를 회복시켜주는 뜨거운 홍차)를 다 마신 후 우리는 300여m 더 올라가 트리프트(Trift ·인구3명)에 도달했다. 안개가 끼고 바람이 부는데다 춥기까지 했다. 그래서인지 감자와 리크를 한 데 넣어 뜨거운 수프까지 끓여준 여인숙 주인 후고가 더 없이 고마웠다. 여인숙은 마터호른 가이드 출신인 후고와 그의 아내가 운영하고 있으며 그들에겐 여섯 살짜리 아들 세바스티안이 있다.
“90번이나 올랐죠. 올라가는 데 4시간, 내려오는 데 4시간 걸립니다”. 후고가 스위스인 특유의 자부심 넘치는 말투로 말했다.
수프와 얼음을 띄운 레모네이드를 마시고 있는 우리에게 담황색 머리 세바스티안이 함께 놀자고 졸라댔다. 안개가 걷히자 후고는 마터호른 다음으로 유명한 스위스의 명물인 긴 나팔처럼 생긴 알펜호른을 꺼냈다. 그리곤 약 600m 위의 등산객 10여 명을 향해 불었다. 이렇게 부는 소리를 ‘루체르너’라고 한다. 스위스에서 들은 소리 가운데 가장 심금을 울리는 것이었다. 알펜호른 소리가 계곡 전체로 울려퍼졌다. 눈에 보일 듯 말 듯한 등산객들이 멈춰 서서 손을 흔들었다.
점심 식사 후 300여m를 더 올라가 바이스호른(Weisshorn) 밑에 도달했다. 바이스호른은 체르마트에서 900m 위에 자리 잡은 곳이다. 바이스호른에는 야구장 외야석처럼 생긴 거대한 강철 문들이 설치돼 있다. 아래 마을을 눈사태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들이다. 나는 치즈를 가는 강판처럼 울퉁불퉁하게 생긴 마터호른에서 1,200m 아래로 떨어져 죽는 것 다음으로 싫은 일이 산사태로 깔려 죽는 것이다.
블러팅어는 빠른 속도로 산을 내려갔다. 장엄한 무지개 아래서 사진 좀 찍자고 붙들어 놓을 사이도 없을 정도였다. 난 ‘또 9 ·11사태 희생자 추도인가’ 하고 생각했다. 산 아래에 도착하자 블러팅어는 왠지 모르게 불안한 느낌이라고 털어놓았다. 감정의 변화를 일으킨 것은 산에서 부는 따뜻한 바람인 푄(Foehn)이었는지도 모른다.
등산용 지팡이를 짚고 포장도로 따라 가든 레스토랑으로 향할 즈음 늦은 오후의 태양이 붉게 타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레스토랑에서 차가운 맥주로 땀을 식혔다. 수영장에서 수영을 하고 사우나도 했다. 그날 밤 우리는 샬레 다 귀세페(Le Chalet da Guiseppe)에서 파스타에 적포도주를 즐겼다.
샬레 다 귀세페는 현지 주민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귀세페는 30년째 이 레스토랑을 운영하고 있다. 그는 손님이 레스토랑 안으로 들어서면 웃으며 “부오나 세라(굿 이브닝)”라고 외치고는 손님을 끌어안고 입을 맞춘다. 스위스 사람들은 남이 보는 앞에서 입맞춤이나 포옹을 잘 하지 않는다. 웃을 때면 귀세페의 얼굴에 깊은 주름이 팬다. 하지만 그의 두 눈은 30년 동안 루터교회 신자인 현지 주민들의 비위를 맞추느라 피곤함으로 가득하다. 영국의 낭만파 시인 조지 바이런(George Byron)은 이복 누이와 가진 근친상간 추문 이후 런던을 떠나 스위스로 도피했다.
바이런은 스위스를 ‘이기적이고 더러운 야만족의 저주받은 나라’라고 표현했다. 스위스인의 피가 흐르고 있는 나는 이런 생각에 동의하지 않는다. 내가 알고 있는 스위스인들 가운데는 좋은 사람이 많다. 그러나 내 선조들이 둔감한 성격을 지녔던 것은 사실이다. 검색엔진에 ‘joie de vivre(삶의 기쁨)’와 ‘Swiss(스위스)’라는 단어를 함께 입력하면 검색결과가 5만 건도 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체르마트에서 오랫동안 살아 온 한 이탈리아 여성을 만났다. 그녀는 블러팅어에게 스위스인들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이탈리아어로 말했다. “그들은 사는 것이 아니라 살아내고 있어요.”
차가운 달빛 아래 시가를 피우며 몬테로사 호텔로 돌아오던 중 스위스 전통 농가풍 가옥 샬레가 늘어선 좁은 거리 힌터도르프슈트라세(Hinterdorfstrasse)에 이르렀다. 그날 밤 나는 <전쟁과 평화> 를 읽고 있었다. TV에서는 스페인어로 더빙한 영화 <시계태엽장치 오렌지> (A Clockwork Orange)가 방영되고 있었다. 그러다 깜빡 잠이 든 나는 새벽 3시30분에 깨고 말았다. 그람피스 바 앤 피제리아(Grampi’s Bar and Pizzeria)에서 나는 취객들 소리에 잠을 깬 것이다. 이는 밤마다 겪는 하나의 행사였다. 어느날 블러팅어와 나는 발코니에서 미리 준비해둔 물풍선을 떠들어대는 취객들에게 던졌다. 하지만 하나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몬테로사 호텔 2층에는 목재 판벽널로 장식한 조용한 방이 하나 있다. 방에는 마터호른을 유명하게 만들거나 마터호른에서 사망한 사람들 모습이 담긴 사진과 에칭판화가 걸려 있다. 휨퍼, 찰스 허드슨(Charles Hudson), 프랜시스 더글러스 경(Lord Francis Douglas겳음봬?와일드의 운명적인 동성애 ‘연인’ 알프레드 더글러스 경과 관련 있음), 더글러스 해도(Douglas Hadow), 크로즈, 페테르 타우그발더(Peter Taugwalder)와 그의 아들 모습이 방에 전시돼 있다.
아널드 런 경(Sir Arnold Lunn)의 사진도 있다. 스키를 등에 맨 사진 속 얼굴은 늙었지만 여전히 활기 넘치는 모습이었다. 스키를 즐기는 사람이라면 런에게 감사해야 한다. 스키를 스포츠로 발전시키는 데 크게 이바지한 인물이기 때문이다.런은 훌륭한 영국인이었다. 그는 20대 초반 웨일스에서 등반 중 27m 아래로 떨어져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부상이 너무 심한 나머지 여생을 7.6㎝나 짧아진 한 다리와 함께 살아야 했다. 하지만 그는 알프스에 있는 모든 산을 등반했다.
스키를 타고 하산하는 경우도 있었다. 스키 회전 활강을 창안한 인물이 바로 런이다. 게다가 그는 등산, 스위스인과 가톨릭의 관계에 대한 수십 권의 책을 저술하기도 했다.
런은 내 아버지의 친구였다. 우리 가족은 해마다 뮈렌(Murren)에 있는 그를 방문했다. 런과 그의 부인은 품위 있고 우아한 아파트에 살았다. 스위스 정부가 자국 경제에 미친 그의 공헌을 인정해 제공한 아파트였다. 당시 8세이던 나는 그에게 엘리베이터 사용법을 가르쳐줬다. 런이 8세이던 1908년 그는 위대한 휨퍼를 만났다. 따라서 나는 휨퍼와 악수했던 손과 악수할 수 있었다.
체르마트로 가는 길에 나는 런의 저서 <마터호른 100년사> (Matterhorm Centenary)를 갖고 갔다. 흥미진진하고 거침 없는 문체로 쓰여진 글이다. 나는 <마터호른 100년사> 에서 마터호른과 체르마트를 세상에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공헌한 휨퍼가 정작 체르마트 현지 주민들로부터 경멸까지 받았다는 놀라운 사실도 알게 됐다. 7월 14일의 비극 때문이었다. 비극적인 사고에 대한 휨퍼의 진술은 다음과 같다. 당시 크로즈는 영국인 해도가 안전하게 발을 디딜 수 있도록 돕고 있었다. 그때였다.
“크로즈의 외마디 비명소리가 들렸다. 크로즈와 해도가 아래로 떨어지는 게 보였다. 곧이어 허드슨과 더글러스도 끌려 내려갔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크로즈의 비명이 들리자마자 타우그발더와 나는 젖먹던 힘까지 다해 바위에 바짝 몸을 붙였다. 우리 두 사람을 연결하고 있던 로프가 팽팽해졌다. 그리고는 우리 둘 모두 한 몸인 듯 아래로 강하게 당겨지는 느낌을 받았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버텼다. 하지만 타우그발더와 더글러스를 연결하고 있던 로프가 끊어져버렸다.
몇 초 사이 불행한 동료들이 아래로 미끄러지면서 살기 위해 두 손을 뻗치며 바둥대는 모습까지 두 눈에 선명히 들어왔다. 그들은 우리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아무 상처도 입지 않은 상태였다. 하지만 하나 둘 우리 시야로부터 사라지며 절벽에서 절벽으로 추락했다. 1,200m 아래 마터호른글레처(Matterhorngletscher)로 떨어진 것이다.그렇게 우리의 동지들은 사라지고 말았다. 우리는 30분 동안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한 채 그 자리에 붙박인 듯 남아 있었다.”
사건은 신문 머릿기사를 장식하며 논란거리로 떠올랐다. 런던에서 발행되는 타임스에 독자편지가 쇄도했다. 사건 여파가 어찌나 컸던지 빅토리아 여왕은 의전(儀典) 장관에게 등산을 법으로 금해야 하는 게 아닌지 물어볼 정도였다. 타우그발더에게 로프를 잘라버렸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휨퍼는 타우그발더를 변호했다. 하지만 다른 부분에 대해서는 그를 비난했다. 휨퍼는 타우그발더가 등반 전문가도 아닌 더글러스의 몸을 일부러 약한 로프로 묶었다고 증언했다. 더욱이 타우그발더 부자가 가이드 비용조차 받지 않았다는 점을 공개해달라고 자신에게 부탁했다고 밝혔다.
세인의 동정심을 불러일으켜 장차 자신들 사업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였다는 것이다. 휨퍼의 진술 가운데 가장 소름끼치는 것은 세 생존자들이 비참한 심정으로 하산하던 기나긴 그날 밤 타우그발더 부자가 휨퍼에게 너무 무섭게 대해 휨퍼는 바위를 등지고 언제라도 도끼까지 사용할 수 있도록 단단히 준비하고 있었다는 부분이다. 휨퍼는 타우그발더 부자가 마터호른 최초의 정복자들 가운데 유일한 생존자로 명성을 드높이고 그에 따라 가이드 사업에서 성공하겠다는 생각이 아니었을까 시사한 것이다.
끔찍한 일이었다. 타우그발더 부자는 비난에 시달려야 했다. 그로부터 80여 년 뒤 런은 <알파인 저널> 에 타우그발더 부자가 결백하다는 내용의 글을 기고했다. 그는 휨퍼를 좋아하는 현지인은 아무도 없었다는 한 스위스인의 고백을 전했다. 이렇게 해서 ‘위대한 사나이’ 휨퍼의 더러운 비밀이 드러나게 됐다. 현지인들 모두 그를 싫어했다는 것이다.
런은 <마터호른 100년사> 에서 이렇게 적고 있다. “휨퍼는 친구 한 사람 없이 여러 면에서 가련한 인물이었다. 등반말고는 존경할 만한 점이 별로 없었다. 그에게는 여러 결점이 있었다. 그러나 위대한 점도 있었다. 많은 산악인이 새로운 등반로 개척으로 마터호른의 역사에 공헌했다. 그렇지만 마터호른은 여전히 휨퍼의 산이다. 그것은 휨퍼 자신이 마터호른과 같은 불굴의 기질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놀라운 강인함을 보여줬다. 62세에 그는 에든버러에서 런던까지 날마다 평균 88㎞를 걸었을 정도다.”
나는 몬테로사 호텔 2층 작은 방에서 런의 책을 읽으며 즐겁게 보냈다. 아침 식사 후 블러팅어와 나는 도서관에서 차 한 잔 앞에 두고 느긋한 하루를 어떻게 보낼지 계획하곤 했다. 그곳에 열흘 동안 머물며 계획 없이 보낸 날이 하루도 없었던 것 같다. 날마다 개인 휴대용단말기(PDA)를 들고 바쁘게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 그곳은 그야말로 천국이다. 블러팅어는 우리 여행을 ‘피콜라 파우사(piccola pausa)’라고 불렀다. 피콜라 파우사란 이탈리아어로 저녁 정찬 코스와 코스 사이의 막간을 뜻한다.
느긋하다 보니 평소 같으면 그냥 지나쳤을 법한 것들도 눈에 들어왔다. 예를 들자면 호텔의 화분 같은 것이다. 화분은 옛날 요강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휨퍼가 쓰던 것은 아닐까.’ 고지대에 머물면 사람이 이상해지는 모양이다.어느날 오후 우리는 작은 폭포 옆에 있는 숲 속의 빈터까지 올라갔다. 그곳에 널려 있는 보라색 애스터 위에 앉아 딱딱한 빵, 코트뒤론 포도주, 통감자, 신선한 그뤼예르산 치즈, 트로켄플라이슈(얇게 썰어놓은 육포), 토블레론 초콜릿으로 소풍을 즐겼다. 마을로 돌아온 우리는 산악박물관을 찾았다.
내가 산악박물관을 처음 방문한 것은 1962년의 일이다. 당시 박물관에서 크로즈 ·해도 ·더글러스 ·허드슨이 추락할 때 끊어진 그 유명한 로프를 내 두 눈으로 직접 봤다. 로프는 지금도 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내가 순진한 10세 소년이었을 때 그랬듯 로프를 보는 순간 뭔가에 사로잡히는 느낌이었다. 박물관에서 휨퍼를 둘러싼 논란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휨퍼가 현지인들로부터 배척당했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그에게는 여전히 강한 흡인력이 있다. 박물관에는 휨퍼가 이발할 때 앉았다는 의자도 전시돼 있다.
산악인들이 신었던 가죽장화를 말려 전시해놓은 일종의 작은 납골당도 있다. 가죽장화의 주인은 한결같이 산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다. 마터호른 등반 중 끔찍한 폭풍으로 죽은 매혹적인 어느 영국인 여성 사진도 박물관 한 켠에 전시돼 있다. 입구 근처에 시어도어 루스벨트가 1881년 22세에 마터호른을 등반했다는 문건이 게시돼 있다. 윈스턴 처칠도 마터호른을 오른 적이 있다. 세상 사람 모두 한 번쯤은 마터호른을 등반한 듯했다.
청년 루스벨트는 누이에게 편지를 띄웠다. 그는 ‘마터호른을 오르기로 결심한 주된 이유 가운데 하나가 같은 호텔에 머물고 있는 몇몇 영국인에게 양키도 그들만큼이나 멋지게 등반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서’라고 적고 있다. 그로부터 17년 뒤 루스벨트는 쿠바 산후안 힐의 한 봉우리를 한달음에 정복했다. 글을 읽고 있자니 내 안에서 뭔가 분명해지는 게 한 가지 있었다. 나도 마터호른에 올라야겠다는 생각이었다.
이튿날 오후 2시, 블러팅어와 나는 마터호른 기지에 당도했다. 여기서부터 정상으로 이어지는 1,524m의 등반로가 시작된다. 나는 물통을 점검했다. GPS 장비에 현 위치를 입력한 다음 자외선 차단제도 다시 발랐다. 휨퍼 등 많은 산악인이 바로 이 자리에서 마터호른 등반을 시작했다. 블러팅어는 뒤에 남기로 했다. USA 인터랙티브(USA Interactive)의 최고경영자(CEO) 배리 딜러(Barry Diller)와 현재 진행 중인 협상안에 대해 통화해야 했기 때문이다. 삶은 짧지만 계속 되는 것 아닌가.
나는 홀로 북사면을 오르기 시작했다. 10분 뒤 60m 지점에 올라섰다. 나는 크로즈, <백색 탑> , <제3의 산 사나이> , 그리고 마터호른에 오르고 싶었다는 17세 소년을 생각했다. 회른리(Hornli) 산장으로 보급품을 실어나르는 헬기가 지나갔다. 회른리는 정상 정복을 준비 중인 산사람들이 머무는 곳이다. 눈이 부실 정도로 맑고 서늘한 날씨였다. 살아 있다는 게 기분 좋게 느껴졌다. 49세 이후 하루도 늙지 않은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하산하기 시작했다. 블러팅어는 딜러와 통화 중이었다. 후고는 마터호른에 올라갔다 내려오는 데 8시간 걸렸다.
하지만 나는 15분밖에 안 걸렸다. 이제 여생 동안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마터호른을 등반했지(정상까지 오르진 않았지만).” 우리는 다시 내려왔다. 그날 밤 나는 취객들의 소란에도 아랑곳없이 동틀녘까지 푹 잘 수 있었다. 굳이 일어날 필요도 없었다. 그것은 마터호른 정복과 함께 50세가 되면서 달성한 삶의 또 다른 작은 성과였다.
[관광정보]
몬테로사 호텔 주소: 스위스 체르마트 3920. 전화: 41-27-966-03-33. 팩스: 41-27-966-03-30. 우리가 묵은 방은 수수하지만 안성맞춤이었다. 숙박료는 하루 120유로. 화려한 최신 숙박 시설로는 몬테로사 호텔의 자매 호텔 몽세르뱅이 있다. 몽세르뱅 호텔 주소: 스위스 체르마트 3920. 전화: 41-27-966-88-88. 팩스: 41-27-966-88-89.
저녁에는 대개 체르마트 중심가에 있는 발리세르카네(Walliserkanne) 레스토랑 아래층 II 리스토란테(27-966-46-19)에서 맛있는 피자와 파스타를 먹었다. 샬레 다 쥐세페(27-967-13-80)도 들러볼 만하다. 몬테로사 호텔에서 오른쪽 모퉁이만 돌면 보이는 무드스 레스토랑 앤 바(27-967-84-84)도 가볼 만하다.
몬테로사 투어. 엄지발가락이 마비돼 80㎞에 이르는 하이킹을 편하게 마치고 싶은가. 그렇다면 99년 6월 20일자 뉴욕 타임스에 실린 사진작가 마샤 리버먼(Marcia Lieberman)의 글 <편안한 등반> (A Comfy Way Around the Mountain)을 한 번 읽어볼 것(www.nytimes.com). 코스는 스위스와 이탈리아의 접경을 넘나들도록 돼 있다.
호텔에서 오리털 이불을 덮고 편안하게 잔 뒤 다음날 콩으로 만든 파스타도 맛볼 수 있다. 가이드는 첫날 클라인 마터호른(Klein Matterhorn) 빙하를 건너 이탈리아 쪽으로 넘어가는 코스에서 몇 시간 동안만 필요하다. 가이드가 필요할 경우 체르마트 관광사무소(전화: 41-27-966-81-00, 팩스: 41-27-966-81-01)에 연락하면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편안한> 제3의> 백색> 마터호른> 알파인> 마터호른> 마터호른> 시계태엽장치> 전쟁과> 제3의> 백색> 알프스> 서바이벌>희박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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