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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과 북이 버린 ‘경계인’ 송두율

남과 북이 버린 ‘경계인’ 송두율

"경계의 이쪽에도, 경계의 저쪽에도 속하지 못하고 경계선 위에 서 있는 탓에 경계인은 매우 불안정한 상태에 있다. 마치 좁은 수평대 위에 서 있는 체조선수처럼 말이다.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넓은 수평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나는 아직도 그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재독 사회학자 송두율(59)씨는 ‘경계인’으로서 자신의 처지를 이렇게 설명한 바 있다.

그는 경계인이라는 단어는 원래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국경 지방에 출몰하던 마적을 의미한다고 소개했다. 하지만 그 뒤 호주에서 원주민과 백인 이주민 사이를 넘나들며 두 세계를 소통시키던 사람을 지칭하는 ‘보더 라이더’(Border Rider)라는 뜻을 갖게 됐다고 한다. 그는 국정원 조사가 끝난 뒤인 10월 2일 기자회견에서 “남과 북의 ‘경계인’으로서 최선을 다하려 했으나 개인이 할 수 있는 일은 쉽지 않았다”고 털어놨다. 조선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인 그는 더 이상 경계인이 아니었던 것이다.

송씨는 지난 9월 22일 37년만에 고국땅을 밟기 직전까지만 해도 그동안의 혐의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공안당국에 의해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며, 오길남씨를 비롯한 재독 유학생의 입북을 권유했다는 지적을 받아 왔다. 하지만 그는 나흘간의 국정원 조사에서 그동안의 의혹이 모두 사실임을 털어놨다. 송씨 표현대로 “양심적 학자에서 거물 간첩으로 추락”했던 이 ‘송두율 쇼크’로 한국 사회는 크게 술렁였다.

송씨는 자신의 사건이 불러올 파장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혐의를 부인해왔던 것에 대해 “뭘 사과해야 할지 (모르겠다)”라며 “37년만에 귀국했는데 추방은 상상하기 힘들다”고 털어놨던 것이다. 국정원은 이미 그의 친북활동을 증명할 2천35쪽, 5권 분량의 수사기록을 검찰에 넘겼다. 여기에는 30여년 동안 송씨를 추적해온 국정원의 핵심 자료들이 포함돼 있다. 이제 송씨는 국외 추방이냐 아니냐의 기로에 놓이게 됐다.

송씨는 1944년 일본에서 태어났다. 그는 “서류상의 고향은 제주도지만 진짜 고향은 광주”라고 말한 바 있다. 물리학자인 그의 아버지는 경성제국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후에 기업을 운영하기도 했다. 비교적 넉넉한 가정환경 탓에 그는 빈곤했던 60년대에도 독일 유학을 떠날 수 있었다고 한다. 송씨에 대해 북한을 탈출한 오길남씨는 자신의 수기 ‘김일성 주석 내 아내와 딸을 돌려주오’(1993)에서 “그는 인생역정을 굴절없이 살아와서 늘 침착하고 학처럼 단아하다”고 회고했다. 송씨는 하이델베르크대와 프랑크푸르트대에서 철학과 사회학·경제사를 전공했고, 1974년 20대 후반의 젊은 나이에 세계적인 학자 위르겐 하버마스 교수의 지도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34세 때인 1982년에는 뮌스터대에서 사회학 교수 자격을 취득했다.

송씨는 독문학과 도서관학을 전공한 정정희(61)씨와 결혼해 현재 독일의 유명 연구소인 막스플랑크연구소 연구원인 준(28)과 소아과의사인 린(27) 두 아들을 두고 있다. 그의 아내는 베를린예술대에서 사서로 근무했다. 1972년부터 대학에서 철학과 사회학을 강의했지만 경제사정은 그리 넉넉지 못했다. 1989년 방북했다 베를린에서 망명생활을 했던 황석영씨는 한 신문기고에서 “그는 대학도서관의 사서로 일한 부인의 박봉으로 겨우 생계를 이어왔다. 그가 독일에서 차 한잔, 술 한잔 값 때문에 호주머니에 넣은 손을 오랫동안 빼지 못하고 망설이던 모습을 보아온 것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고 썼다.

송씨가 남한 정보당국의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70년대 초 독일 유학생들이 해외 민주화운동 단체인 ‘민주사회건설협의회’(민건)를 결성하고 그가 회장을 맡으면서부터다. 당시는 박정희 유신체제가 출범한 상황이었고 민청학련 사건, 김지하 사형선고 등 잇따른 공안사건이 터지던 군사독재 시절이었다. 그는 남한의 반체제 운동을 지원하고 국제 사회에 한국의 상황을 알리면서 주목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가 1973년 방북해 노동당에 입당한 사실은 그의 지인들도 알지 못했다.

송씨는 국정원 조사를 마치고 난 뒤 “1973년의 방북은 학문적 관심에서 이뤄졌다”며 “노동당 입당은 사실이지만 노동당원으로 인식한 적도, 활동한 적도 없다”며 모호하게 답변했다. 국정원은 송씨가 첫 방북 이후 열여덟차례나 방북했다고 발표했다. 송씨는 그 시절 친북 음악가인 윤이상이 만든 독일의 한국학술원(KOPO)의 실질적인 책임자로서 북한으로부터 자금을 받고 있었다. 송씨가 받은 자금의 규모는 적게는 7만달러에서 많게는 15만달러로 추산되고 있다.

송씨의 존재가 학계에 본격적으로 알려지게 된 것은 1988년 진보적 잡지였던 월간 ‘사회와 사상’에 ‘북한 사회를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논문이 게재되면서부터다. 1967년 서울대 철학과를 졸업하고 독일로 유학을 떠난 그는 학계 일각에만 알려져 있을 뿐이었다. 이 논문에서 그는 북한 사회를 자본주의라는 잣대가 아니라 북한 사회주의 고유의 이념과 형성논리에 비춰봐야 한다는 ‘내재적 접근법’을 제시했다. “주체사상이라는 북한 사회주의 이념을 전제하고, 이 이념이 정치·문화·경제·사회 전 분야에서 어떠한 구체적 결과를 가져왔는가 하는 내재적 비판 속에서 북한 사회주의 연구가 진행되어야 한다”는 게 그 요지였다.

냉전적 시각에 바탕을 둔 북한 연구가 대종을 이뤘던 당시 현실에서 북한 사회를 그들의 언어로 이해해야 한다는 시각은 북한 연구의 패러다임을 바꿀 만큼 큰 변화를 가져왔다. 대학가를 중심으로 ‘북한 바로 알기 운동’이 급속도로 퍼져 나갔고, 그의 시각에 영향을 받은 소장 북한 학자들도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국가안전보장회의(NSC)의 이종석 사무차장이 대표적인 경우다.

하지만 이같은 시각은 북한 사회의 객관적 ‘이해’에 치중한 나머지 그 사회에 대한 ‘비판’은 별로 보여주지 못했다. 서강대 강정인 교수는 “내재적 접근법은 북한 사회의 긍정적 측면을 보여주는 데 치우쳐 북한 체제의 부정적 측면을 제대로 비판하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송씨가 최근에 펴낸 ‘경계인의 사색’에서도 내재적 접근법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중앙대 신광영 교수는 송씨의 이론이 “(북한에 대해) 경제적 평등만 다루고 있기 때문에 정치권력의 평등, 즉 민주주의 문제는 완전히 배제됐다”고 지적한다.

학자로서 송씨가 관심을 기울인 것은 통일문제였다. 그는 자신의 스승인 하버마스 교수의 ‘의사소통행위이론’에 근거해 남북한의 상호이해를 위한 ‘의사소통’을 꾸준히 강조했다. 1995년 ‘창작과 비평’ 봄호에 실린 한 논문에서 그는 “남북의 대화에서 전략적인 목적에서가 아니라 이성적으로 설득하고 설득당하는 상호이해지향적인 의사소통적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대화문화’가 우리의 통일에서 관건적인 문제”라고 지적한 바 있다.

‘경계인’을 자처한 그의 논리로는 그럴 듯했다. 하지만 그는 이미 4년 전인 1991년 김일성 주석을 면담했고, 1994년 7월 8일 김주석 사망 당시 김철수라는 이름으로 북한 서열 23위의 정치국 후보위원으로서 장의위원에 선임돼 있었다. 유인태 청와대 정무수석의 말처럼 북한에 대한 ‘이해’와 남북간의 ‘대화’를 촉구하기에는 이미 한쪽에 발을 너무 깊게 담그고 있었던 것이다.

국내 여론은 송씨를 처벌해야 한다는 의견이 압도적이다. 각종 인터넷 여론조사에서 70% 이상의 네티즌들이 처벌해야 한다고 응답하고 있다. 북한도 송씨를 탐탁히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송씨를 면담하고 돌아온 황석영씨에 의하면, 송씨는 국정원 자료를 통해 북한이 자신을 ‘회색분자’, ‘믿을 수 없는 사람’이라 평가한 것을 보고 씁쓸해 했다고 한다. 정치국 후보위원으로 선임됐음에도 결국 송씨는 북한 지도부의 신임을 받지 못했다. 송씨는 남한 여론이나 북한 당국으로부터도 외면받고 있는 것이다.

유대인 드레퓌스 대위가 독일군 첩자라는 누명을 쓰고 감옥에 갇혔을 때 귀족 출신에다 가톨릭 신자였던 피캬르는 드레퓌스 사건이 반유대인 정서에 기초한 음모라고 주장해 그 역시 감옥에 갇혔다. 드레퓌스는 후일 무죄로 밝혀졌다. 송씨는 자신과 황장엽씨의 소송사건을 드레퓌스 사건에 빗대어 말한 바 있다.

그는 피캬르의 경우를 들어 자신을 ‘북한 공작원’이라 보도했던 보수언론을 겨냥해 “기득권층에 속하지만 불이익을 감수하고, 그래서 진실을 위해 자신을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진 보수주의자는 정말 가능할까”라는 질문을 던졌다. 하지만 그 질문은 결국 틀렸다. 그는 억울한 드레퓌스가 아닐 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밝혀진 북한 공작원 중 최고위급인 노동당 정치국 후보위원이라는 게 사실로 드러났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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