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은 세상의 축소판”
“달력은 세상의 축소판”
예쁜 여배우에서 동양화로 홍일은 지난 1967년 고 장세근 사장이 마스터 기계 한 대로 시작해 한때는 국내 달력의 절반 정도를 만들었다는 말을 들을 정도로 전성기를 누렸던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달력 제작 전문업체. 장사장이 지난 87년 작고한 이후 부인인 이대표가 맡아 이끌어오고 있다. 홍일이 처음 달력을 만들기 시작한 60년대는 말 그대로 경제적으로 척박한 시대였다. 달력 또한 그런 신세를 면할 길 없었다. 제아무리 끗발 좋은 국회의원도 한 장짜리 달력으로 만족해야 했고, 또 그런 한 장짜리 달력에 자신의 이름을 인쇄해 선거구에 돌렸다(당시에는 배부가 가능했다고 한다). 각 가정에서는 그런 한 장짜리 달력을 벽에 붙여놓는 게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그림이나 사진이 들어간 달력도 이 무렵부터 나오기 시작했는데 가장 인기가 좋았던 사진 모델은 거의 영화배우들이었다. 이런 ‘고급 달력’을 배포한 이들은 당시 최고의 직장으로 각광받던 은행이었다. 이들 은행 달력은 누구나 알아주던 ‘연말 선물’이었다. 70년대는 달력업체들에게 호황기였다. 경제개발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기업체들이 판촉용으로 너도나도 달력 제작을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7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은행 달력보다는 기업체 달력을 구하려는 이들이 많아졌다. 이 70년을 전후해 홍일은 당시로서는 드문 ‘달력 대박’을 터트리는 행운을 맛봤다. 시골 초가나 바닷가를 배경으로 유명세를 날렸던 남정임·윤정희 같은 여배우를 등장시킨 ‘규수 시리즈’가 그것이었다. 없어서 못 팔 정도였다니 초히트상품이었던 셈이다. 규수 시리즈 이후에는 경직된 사회 상황을 반영하듯 70년대 내내 동양화가 주요 소재였다. 70년대가 전반적으로 동양화 강세의 시기였다면 80년대는 서양화가 풍미했던 시절이었다. 80년대 초 광주민주화운동 등 정치적 격변기도 있었지만, 달력은 호전되는 경제상황을 반영하듯 서양화로 꾸며지기 시작했다. 중소기업들의 주문량이 눈에 띄게 늘어난 것도 이 시절이었다. 이 시기에 달력은 비약적인 발전을 이뤘다. 그리고 이 발전의 기저에는 컬러TV가 있었다. 80년대 초 등장한 컬러TV로 소비자들의 ‘보는 눈’이 엄청나게 높아졌던 것. 달력들은 높아진 색상 요구에 부응해 투박하기만 하던 그림과 사진들을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으로 바꿨다. 원색이 등장한 것도 이 무렵이다. 이 같은 경향은 88년 서울올림픽을 치르면서 다시 한번 업그레이드하는데, 바톤을 이어받은 주자는 추상화였다. 90년대 초반 사회적으로도 논란이 됐던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을 받았던 것. 달력의 크기도 작아지기 시작했고, 벽에 걸려 있던 달력이 책상 위에 성큼 올라앉는 일이 많아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90년대 초 단군 이래 최대 호황 어쨌든 올림픽이 끝난 후 2∼3년간 달력업계는 단군 이래 최대의 호황을 누렸다. 사회적으로도 거품 논란이 많았던 시절이었다. 홍일문화인쇄만 해도 당시 연간 1천만부가 넘는 달력을 인쇄해 ‘국내 최고’ 소리를 들었고, 좀 과하게 말하자면 돈이 넘쳐나던 시절이었다. 이때가 정점이었다. 이 시기를 지나면서 달력업계는 지금까지 영역이 위축되는 아픔을 겪어오고 있다. 홍일에 입사한 지 30년이 다 되어간다는 최창혁(58) 전무는 “연말이면 걸려오는 신문기자들의 질문이 그해 달력 경기 예측지표였다”고 말했다. 거의 모든 기자들의 질문이 약속이나 한 듯 “올해는 작년보다 달력 주문이 몇 %나 줄었느냐”는 질문으로 취재를 하더라는 것이다. 이런 추세에 외환위기는 결정타였다. 몇 백부씩 주문하는 소위 ‘기성품 달력’(달력회사에서 다 만들어놓고 가장 아랫쪽에 회사 이름을 넣는 달력)은 감소추세가 완만하지만, 기업체들의 대량 주문은 외환위기 때 절반으로 준 이후 다시 고개를 들지 않고 있다. 홍일 또한 이런 흐름을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홍일은 지난해 5백50만부의 달력을 발행했지만 올해에도 그 선을 넘을 것 같지는 않다. 4년 전부터 경영에 참여하고 있는 2세 경영인 장원혁(32) 실장은 “추세에 맞춰 팬시상품 개발과 유명작가의 작품을 담은 기업용 고급달력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시간관리가 중요해지고 달력을 사용하는 이들은 늘었지만, 휴대폰이나 PDA에 ‘들어 있는’ 달력이 벽에 ‘달려 있는’ 달력을 대신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대표는 “1백70개가 넘는 종류의 달력을 만들어도 소비자들의 욕구를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말할 정도다. 2000년대가 시작되면서 달력의 모습은 이전과 또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인기품목이 따로 없는 다양화가 그것이다. 소비자들의 선호도가 10인 10색으로 변한 것. 다만 그전에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동물과 야생화 같은 소재들이 새롭게 등장한 게 특징이라면 특징이다. 시대가 변하고 달력도 변했지만 세상의 마음을 담는 것은 여전하다. ‘삼성 달력’ VS ‘현대 달력’ 삼성은 고 이병철 회장이 예술을 좋아했던 까닭에 주문하는 달력의 소재들은 거의 모두 호암미술관에 소장된 그림이었다. 이 같은 경향은 70년대부터 시작됐다고 한다. 현대그룹은 그림보다 기능적인 달력에 맞춰 주문을 했다고 한다. 그림은 없어도 되지만 숫자는 큼지막하게 들어가야 했던 게 현대그룹이 주문한 달력의 특징이었다. 삼성과 현대는 주문방식에서도 달랐다. 삼성은 깐깐하리만치 주도면밀하게 주문을 하는 반면 현대는 “한 달 후에 납품하라”는 ‘명령’ 같은 주문을 했다고 한다. LG그룹의 전신인 럭키나 금성사는 무난한 편이었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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