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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치마킹]‘청개구리’ ‘낭인’ 전략으로 부활

[벤치마킹]‘청개구리’ ‘낭인’ 전략으로 부활

지난 9월22일 서울 소공동 조선호텔에서 열린 캐논의 신제품 출시 이벤트. 이날 캐논은 다양한 디지털 카메라 신제품을 선보였다.
일본의 대기업은 지금 장기 불황으로 고전을 거듭하고 있다. 최근 경제가 좋아진다는 말이 나오고 있으나 아직 피부로 체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캐논은 상황이 좀 다르다. 캐논은 지난해 1천9백70억엔의 순이익을 낸 데 이어 올해도 2천5백억엔 이상의 순이익을 낼 것으로 보인다. 이는 1999년 이후 5년 연속 최고 기록을 경신한 것이다. 캐논은 시가총액 부문에서 올해 초 이미 소니를 제치고 전기기기 부문 1위에 올랐다. 불과 6년 전인 97년에는 캐논의 시가총액은 소니의 5분의 1 수준에 불과했다.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과연 전후 반세기 이상 일본의 간판기업으로 군림했던 소니를 제치고 일본 최고의 전자기업으로 발돋움한 캐논의 저력은 무엇일까? ‘캐논 성공신화’의 배경에는 미타라이 후지오(68, 御手洗 富士夫) 사장이 있다. 그는 입사 후 23년간 미국 현지법인에서 근무한 미국통으로 캐논 USA 사장 재직 시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의 경영기법을 일본 특성에 맞게 현지화해 캐논을 오늘날의 초우량기업으로 만든 주인공이다.

컨베이어 벨트를 없애다 ‘일본 제조업을 부활시키고 있다’는 평을 듣는 미타라이 사장은 역발상의 경영기법으로 유명하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95년 캐논의 대표이사로 취임한 미타라이 사장은 제일 먼저 그동안 미국식 생산방식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총 21만m에 달했던 컨베이어 벨트 생산라인을 자사 공장에서 완전히 철거했다. 컨베이어 벨트 방식은 일단 부품이 투입되면 전체 공정을 통제하는 것이 어렵고, 공정의 마지막 단계에 있는 작업자는 근무시작 초기단계에는 하는 일이 없어 놀 수밖에 없는 단점을 가지고 있었다. 종업원들 또한 수동적이었다. 컨베이어 벨트 위를 지나가는 반제품에 각자에게 맡겨진 작업만 하면 됐기 때문이다. 생산성이 높아질 리 없었다. 미타라이 사장은 이런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유능한 기술자들을 중심으로 팀을 편성, 제품의 생산을 끝까지 책임지게 하는 셀(Cell) 방식을 도입했다. 셀 방식은 커다란 효과를 가져왔다. 종업원들이 “내가 제품을 직접 만든다”는 적극적인 사고를 갖게 됐다. 생산성 또한 1.5배 이상 향상했다. 지금은 전 세계 캐논 공장 어디에서도 컨베이어 벨트를 찾아볼 수가 없다. 셀 방식과 함께 DDD(Direct Delivery to Demand)라 부르는 캐논의 도요타식 시장직결형 생산시스템도 생산원가 절감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캐논은 대개 2개월 전에 기초 생산계획을 수립한 뒤 1주 단위로 시장과 주문 상황을 반영해 생산계획을 최종적으로 확정한다. 공장 내 각 셀은 그 규모와 숙련도 등에 따라 생산물량을 배정받아 실제 생산에 들어가는데, 그때그때 주문받은 물량을 즉시 소화하다 보니 재고가 쌓이지 않고 자연스럽게 재고를 보관할 창고도 없어졌다. DDD 덕분에 캐논은 중간재고 보관의 역할을 담당했던 전국 7개의 자동창고를 없앨 수 있었다. 이러한 셀 방식과 시장직결형 생산시스템 덕분에 캐논은 고객의 다양한 요구와 수요변화에 적시에 대응할 수 있는 유연한 생산체계를 갖추게 된 것이다. 역발상 경영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일본의 대다수 기업들이 앞다투어 중국에 생산기지를 건설할 때, 캐논은 거꾸로 자국 내 생산시설에 대한 투자를 대폭 늘리는 청개구리 전략을 펼쳤다. 중국의 인건비가 일본보다 현저하게 낮지만 자동화 비중을 높인다면 중국보다 더 저렴한 비용으로 제품을 생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핵심기술의 유출도 막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특히 캐논은 과거 후발국에 시장을 잠식당했던 쓰라린 경험을 바탕으로 핵심기술 보호에 상당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복사기 부문만 보더라도 6백건이 넘는 전 세계 기술특허로 철저하게 기술장벽을 구축하고 있다. 토너·잉크탱크 등 핵심부품은 블랙박스로 만들어 경쟁기업들이 쉽게 모방할 수 없도록 하고 있으며, 이들 제품의 생산기지를 해외로 이전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캐논의 이러한 전략은 90년대 말부터 그 빛을 발하면서 ‘메이드 인 재팬’이라는 소비자들의 인식 확산과 함께 캐논의 브랜드 이미지를 고급화하는 데도 일조했다. 미타라이 사장은 일본식 생산체계를 확립함과 동시에 캐논의 미래를 이끌 차세대 수종사업을 찾는 데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취임 당시 일본 전자업체들은 하이테크 부문에서는 미국에, 가전 부문에서는 한국·중국과 같은 후발국들의 추격에 좇기는 ‘넛크래커’ 국면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는 ‘선택과 집중’의 원칙에 따라 사업구조를 재편했다. 이익을 못 내는 사업 또는 당장은 흑자지만 성장성이 떨어지는 사업은 즉각 정리하고, 여기서 생긴 여력을 주력사업에 투자키로 한 것이다. 그 일환으로 작게나마 이익을 내고 있던 컴퓨터 사업에서 철수하는 등 방만했던 12개 계열사를 프린터·복사기·카메라·광학기기 등 4개 핵심 계열로 재편했다. 특히 기존 광학 카메라의 앞선 기술력을 바탕으로 시장 태동기에 있었던 디지털 카메라 시장에 재빠르게 진입함으로써 이후 선두주자로 확고하게 자리매김할 수 있었다.

종신고용이지만 실적평가는 철저 특히 캐논은 혁신적인 제품을 창출하기 위해 ‘낭인’(浪人)이라는 독특한 연구개발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낭인제도는 연구원이 10년 후 회사의 미래를 이끌 새로운 제품 컨셉트를 찾아내기 위해 마치 일본의 떠돌이 무사처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고객과의 다양한 경험을 통해 남들이 보지 못한 사업 기회를 찾도록 장려하는 제도를 말한다. 일단 최장 2년의 연구 테마 탐색 기간을 거쳐 연구 프로젝트로 선정되면 회사는 기술개발을 위해 보유하고 있는 연구·개발(R&D) 자원을 최대한 투자한다. 캐논은 이러한 낭인제도를 운영하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것을 알면서도 잉크젯과 같이 종전에 없던 신시장을 발굴하기 위해서는 그만한 인내와 투자가 뒤따라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 존중이라는 점에서도 캐논은 남다른 정책을 펴고 있다. 한 예로 캐논은 종신고용을 보장한다. 유능한 사원 한 명을 키우는 데 많은 시간과 비용이 들어가는데 이런 사원을 내보내는 건 손해라는 것이 경영진의 지배적인 생각이다. 고용 불안이 없으면 종업원은 안심하고 맡은 바 직무에 최선을 다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로 캐논은 과감한 구조조정을 실시했지만 본인의 뜻에 반해 회사를 그만둔 종업원은 단 한 명도 없었다. 하지만 승진과 급여는 철저하게 실적에 따라 평가한다. 종신고용에 만족한 채 제대로 일하지 않는 종업원은 용납지 않겠다는 서구식 합리주의를 가족적 분위기를 중시하는 일본식 경영방식에 접목한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캐논은 미국식 경영방식을 일본 환경에 맞게 토착화한 사례로 평가받고 있다. 미타라이 사장은 “캐논의 힘은 종업원의 애사심과 단결력에서 비롯한다”며 “인간존중의 경영이야말로 기업의 경쟁력을 결정짓는 핵심 요소”라고 자신 있게 말하고 있다. 혁신(革新)과 인화(人和)를 경쟁력으로 승화한 기업, 캐논. 최근 생산기지의 해외이전으로 인한 제조업 공동화 현상과 노사대립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는 우리나라 산업계의 현실을 돌아볼 때 캐논의 성공 방정식은 우리 경영자들에게 많은 점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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