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의 다음 목표는‘또 한번 도약’
삼성의 다음 목표는‘또 한번 도약’
위기를 겪으면서 강철처럼 단련됐지만 결코 긴장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한국의 거대기업 삼성전자가 또 다른 신화 창조에 골몰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사운드 디자이너 최원민(30)씨는 소형 스피커 두 개와 서라운드 사운드 시스템이 내장된 휴대전화 세트를 손에 들었다. 버튼을 누르자 오른쪽 스피커에서 기적 소리가 점차 크게 울리다 왼쪽 스피커로 옮겨가더니 멀리 사라져갔다. “끝내주는군.” 최원민 씨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퇴근 후에는 아마추어 록밴드에서 활동하는 최씨는 삼성전자가 노키아를 따라잡겠다는 일념 아래 설립한 여섯 개 연구소 가운데 하나인 서울의 디자인 연구소 소속이다.
10년 전만 해도 삼성전자는 휴대전화 시장에서 무명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당시 삼성전자의 휴대전화는 한국에서만 팔렸다. 그나마 미국 브랜드 모토롤라에 한참 뒤지는 2위 업체였다. 그러나 이제 휴대전화는, 과거 워크맨이 소니를 상징했듯 삼성전자의 간판상품으로 떠올랐다. 성장 엔진이면서 혁신의 상징이요, 세계 최고를 지향하는 브랜드가 된 것이다. 삼성전자는 세계 제2의 휴대전화 제조업체로 급부상했다. 오는 2010년까지 1위 노키아의 자리를 빼앗는 게 목표다. 과욕일 수도 있다. 현재 850억 달러 규모의 세계 휴대전화 시장 가운데 36%를 노키아가 장악하고 있다. 13%인 삼성전자와 엄청난 격차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말 그대로 날고 있다. 가전 등 이익이 적은 부문에서 환상적인 기능을 갖춘 고수익겙恣?휴대전화로 돌아선 덕이다.
미국에서 삼성전자는 2주에 한 번꼴로 휴대전화 신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이동통신업체 스프린트(Sprint)가 새로 선보인 동영상 메일 서비스 기능에 맞춘 휴대전화 등 다양한 기능의 제품들을 쏟아놓고 있다. 삼성전자는 PDA폰을 대중화하고 세계 최초로 휴대전화에 MP3 기능까지 추가한 업체다. 이제 삼성전자 휴대전화로 한 번 충전에 20시간 통화가 가능하고 노래 2,000곡과 8시간 분량의 동영상을 저장하며 3차원 비디오게임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가능케 만든 삼성전자의 반도체가 곧 출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수익성 세계 최고인 IT업체로 성장
10여년 전 삼성전자는 방만하고 굼뜨고 무기력한 모방 수준의 메모리칩 제조업체였다. 그러나 지금은 전자업계의 선두반열에 올라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상반기 중 매출 245억 달러에 순이익 52억 달러를 기록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 ·IBM ·(Intel)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정보기술(IT) 업체가 된 것이다. 삼성전자의 윤종용(60) 부회장은 5년뒤 인 오는 2009년엔 매출이 8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삼성전자 매출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휴대전화 사업 담당 이기태 사장은 “삼성은 가파른 언덕을 굴러 내려온 눈덩이처럼 성장했다”고 표현했다.
삼성전자가 엄청난 실적을 올릴 수 있는 것은 디지털 기기의 바탕인 세 부문 중 두 부문, 다시 말해 메모리칩과 스크린에 강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하나는 인텔이 장악하고 있는 마이크로프로세서 부문이다. 세계에서 이름난 IT 업체들이 삼성전자의 메모리칩과 스크린을 쓰고 있다. 휴대전화, 스크린,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냉장고 등 삼성전자의 다른 제품에도 사용되는 것은 물론이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부문에서 세계 제1의 업체다. D램(자료를 기억하는 동안 계속 전원을 넣어줘야 하는 기억장치) ·S램(한 번 전원을 넣으면 일정 기간 자료가 남는 기억장치)은 세계 전체 생산량 가운데 3분의 1, 플래시 메모리는 5분의 1이 삼성전자 제품이다.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가 소실되지 않고 남아서 무선기기에 필수 부품으로 꼽히는 플래시메모리 부문마저 인텔을 추월했다. 이밖에 박막 액정표시장치(LCD) 스크린과 평면 모니터 부문에서도 세계 최고의 생산량을 자랑한다.
삼성전자의 이같은 강세는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대기업 삼성전자는 아직도 이미지에 문제가 있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 소비자들이 소니나 델(Dell) ·노키아에서 느끼는 브랜드 이미지가 결여된 것이다. 자체 조사결과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삼성전자를 소니보다 ‘낯선’ 브랜드, 훨씬 경직되고 독창성이 부족한 브랜드로 인식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연간 8억 달러를 광고 ·판촉 ·마케팅(5년 사이 4배로 증가)에 쏟아부으면서 네티즌들에게 월간 10억 차례 브랜드명을 노출시킨 끝에 브랜드 컨설팅 업체 인터브랜드(Interbrand)가 선정하는 최고 브랜드 순위를 25위까지 끌어올리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노키아(6위) ·휼렛패커드(HP ·12위) ·소니(20위)에 한참 뒤져 있다.
삼성전자 미주법인의 오동진 부사장은 “삼성 브랜드가 미국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하지 못하고 있다”며 “미국에서 일류 기업으로 도약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자평했다.
삼성전자는 2년여 후에 주식을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삼성전자 주식은 한국 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증시에서 제값을 받지 못하는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 증시에서 삼성전자의 주가는 6년 사이 16배로 뛰었고, 신흥시장 주식 가운데 미국 ·유럽의 투자자들이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삼성전자 주식은 지난해 주가수익비율(PER)의 13배에서 거래되고 있다. 반면 뉴욕 증시에서 거래되고 있는 소니의 주식예탁증서(ADR)는 주가수익비율이 42배에 달한다.
경이로운 실적에도 불구하고 미국 일반회계기준(GAAP)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점은 투자자들의 경계심을 부추기는 대목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삼성전자가 시장에서 지금보다는 더 대접을 받고 싶어하며, 또 그럴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윤 부회장은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면에서 바로 서야 한다”며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려면 멋진 제품, 다시 말해 고품질 상품, 시장을 선도하거나 주도하는 제품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에 현실안주론자는 없다”
그가 이끄는 삼성전자는 위기로 단련된 기업이다. 1997년 아시아 금융대란이 닥쳤을 때 정리해고를 단행하고 경직된 중간 관리층을 무너뜨렸으며 모든 사업 속도를 높였다. 환란에 대한 발 빠른 대응은 삼성전자가 이어 불어 닥친 IT 거품 붕괴 속에서 살아 남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IT 기업들이 휘청거리던 2000~2003년 삼성전자는 순이익 증가율 5%를 기록했다.
삼성전자는 성장을 가속화하기 위해 광고를 개편하고 새로운 연구에 자금을 투입하며 디자인 혁신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삼성전자의 글로벌 마케팅 실장 겸 디지털 솔루션 센터장인 김병국 부사장은 연간 5억 달러에 이르는 광고대행 계약을 전면 재검토하고 있다. 현재 광고 대행사인 인터퍼블릭(Interpublic) 산하 푸트 콘 앤 벨딩(FCB)으로서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FCB의 CEO 브렌던 라이언(Brendan Ryan)은 “미국 내 입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삼성전자에 현실안주론자는 없다”고 말한다. 김 부사장은 “지난 5년 동안 브랜드 인지도 구축에 힘써 온 만큼 이제는 삼성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를 높여야 할 때”라면서 “우리는 소비자들에게서 ‘삼성제품으로 달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강조한다.
삼성전자는 현재 30억 달러인 연구예산을 향후 수년 안에 두 배로 늘릴 계획이다. 중국 ·일본 ·러시아 ·이스라엘 등지의 15개 연구소에 확보하고 있는 연구인력 2만 명을 수천 명 증원할 계획이다. 최근 삼성전자의 최고기술책임자(CTO)로 선임된 임형규 사장은 “삼성의 연구진들은 현재 다음해 제품에 지나치게 주력하고 있다”며 “ 3~10년을 내다보는 연구와 기술개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 사장은 하나의 모바일 단말기로 홈 ·오피스 네트워킹을 구현하기 위해 관련 부문 간의 경쟁을 독려하고 있다. 그는 “여러 제품이 통합되면서 더욱 원활한 조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는 69년 일본의 산요(三洋)와 합작투자 형태로 출범했다. 그러나 뿌리는 6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1938년 창업주 이병철 씨가 설립한 건어물 ·청과물 수출업체 삼성상회(三星商會)가 모체다. 한국 최대 재벌로 성장한 삼성그룹은 창업자 이병철 씨의 아들 이건희 회장에게 승계됐다. 한국 최고의 부자이기도 한 이건희 회장은 삼성전자 지분 3.3%(일부 보도에 따르면 15%에 이른다는 관측도 있다)를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다른 계열사 10개의 지분도 보유하고 있다. 삼성그룹은 63개 업체로 구성돼 있다. 삼성화재해상보험(보험), 삼성전기(전기부품), 삼성코닝(TV 진공관과 모니터용 유리), 삼성 에버랜드(놀이공원으로 삼성생명 지분 19%를,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7%를 보유) 등 다양한 사업영역을 갖추고 있다.
6년 걸릴 일을 3년 만에 해내
삼성전자는 지난 83년 메모리칩, 다시 말해 D램으로 세계 시장에서 최초의 성공을 거뒀다. 당시 D램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인데다 일본 기업의 지배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미국 규제 당국은 일본의 칩메이커들에 반덤핑 관세를 매기기에 바빴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는 고집스럽게 시장에 뛰어들어 64KD램 제품을 생산해서 미국으로 수출했다. 다른 업체들보다 3년 늦은 셈이다. 그로부터 3년 뒤 세계 최초로 1메가비트(Mb) 칩을 개발했다. 업계 평균 속도로 볼 때 6년 걸릴 일을 3년 만에 해낸 것이다.
개발기간이 단축될 수 있었던 것은 삼성전자가 두 연구팀, 즉 실리콘밸리의 연구진과 국내 연구진에게 서로 경쟁을 붙였기 때문이다. 경쟁은 결국 한국 내 연구진의 승리로 끝났다. 제품개발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94년 256Mb 칩을 선보였다. 이로써 세계 최대 D램 생산업체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여기에는 한국 정부의 보조금도 한몫했다.
메모리칩과 달리 다른 부문들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미국 시장에서 대다수 사업 실적이 너무 부진한 나머지 완전 철수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전자레인지와 저가 TV 등 이익이 박한 제품에서 벗어나지 못한데다 판로는 K마트 같은 할인 매장에 국한돼 있었다. 그러던 중 97년 아시아에 금융위기가 몰아닥치고 칩 가격이 폭락했다. 삼성전자로서는 어느 때보다 미국 시장이 절실해졌다. 미국에서 제품이 팔려야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고, 달러가 있어야 엄청난 부채를 줄여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기태 사장은 “당시엔 휴대전화를 제외하면 브랜드 구축에 활용할 만한 제품이 그리 많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삼성전자 북미통신법인의 휴대전화 담당 상무보인 피터 스카르진스키(Peter Skarzynski)는 “위기가 성공을 향해 달려 나아가야 하는 큰 압박으로 작용했다”고 들려줬다. 삼성전자가 휴대전화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려면 전광석화와 같은 기동성에 군살이 없는 모습으로 탈바꿈해야 했다. 게다가 고가제품으로 달러를 더 많이 벌려면 기존 기술보다 훨씬 앞서 나아가야만 했다. 따라서 메모리 ·LCD 사업부문에서 벌어들인 수익을 기술혁신과 대대적인 마케팅에 투입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방안은 서울 본사의 대대적인 구조조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96년말 삼성전자 총괄대표이사 발령을 받은 윤종용 부회장은 대표 취임 1년 만에 가공할 금융위기와 맞닥뜨리게 됐다. 그는 삼성전자가 철저히 변하지 않으면 자멸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위기가 곧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위기 덕에 구조조정을 단행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생겼다”고 회상했다. 윤 부회장은 정부의 구조조정 노력에 발맞춰 8만4,000명에 이르던 인력 가운데 30%를 정리해고했다. 강성 노조로 유명한 한국에서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120억달러에 달하던 부채를 줄이는 것도 당면 과제였다.
윤 부회장은 52개 제품라인을 폐쇄했다. 공장 신설 계획을 유보하고, 회사 차량 유지 같은 비핵심 부문은 아웃소싱했다. 골프 회원권을 비롯한 임직원의 특전도 없앴다. (현재 삼성전자의 부채는 80억 달러이며, 7년 전 300%에 이르던 부채비율은 30%대까지 떨어졌다.) 이사진에는 외국인들이 영입됐다. 마침내 삼성전자는 새로운 기업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윤 부회장은 새로운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위계질서가 엄격한 한국에서 효율과 속도를 중시하는 윤 부회장은 독불장군이나 다름없다. 그는 서울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66년 졸업과 함께 삼성그룹에 입사했다. 77년에는 삼성전자 도쿄(東京) 지점장으로 발령받았다. 그는 일본어 구사가 가능하며 영어를 듣고 이해하는 수준이다. 80년대부터 8개 사업부문을 두루 거친 그는 경영능력으로 이 회장에게 깊은 인상도 심어줬다. 윤 부회장의 성공담 가운데 하나는 일본 업체들이 기술 이전을 기피하는 상황에서 VCR 개발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후 조립라인 단축으로 VCR 생산속도를 높였다. 통상 석달이 걸리는 일을 5일 만에 해냈다.
휴대전화 급성장엔 디자인 개선도 한몫
윤 부회장은 휘하 간부들에게 많은 재량권을 부여했다. 연공서열을 바탕으로 한 보수 ·승진 제도도 철폐했다. 대신 직원들은 각 부서의 실적에 따라 성과급을 받는다. 성과급에는 임원 900명에게 회사 지분 4%를 분배한 스톡옵션도 포함된다. 윤 부회장의 옵션 가치는 4,000만 달러(약 450억원)다. 윤 부회장은 각 사업부문을 독립적인 사업단위로 만들었다.
반도체와 LCD 부문은 삼성 계열사든 외부 기업이든 동일한 가격을 제시한다. 특혜는 없다. 주우식 삼성전자 전무(경영지원총괄 IR팀장)는 “삼성이 계열사를 우대하는 다른 재벌들, 심지어 일본 ·미국 대기업과 다른 점은 바로 그것”이라고 지적했다. 애플 ·HP를 비롯한 고객기업들이 차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더욱이 계열사 특혜가 사라지면서 고객기업들의 구매패턴을 제대로 파악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정보도 얻을 수 있게 됐다.
김병국 부사장은 “휴대전화가 실용품에서 패션제품으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며 “전에는 ‘카메라폰을 누가 원하겠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전했다. 현재 삼성전자의 카메라폰 시장 점유율은 12%다. NEC에는 훨씬 처져 있지만 노키아에는 불과 1%포인트 뒤지고 있다. 공상과학영화 <매트릭스> 2 ·3편에 삼성전자의 환상적인 휴대폰이 등장하면서 멋진 디자인을 크게 부각시키는 데 한몫했다. 미국에서 스프린트와 일찌감치 맺은 계약도 많은 도움이 됐다. 스프린트의 무선 네트워크는 삼성전자가 채택한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표준을 사용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매출은 지난 5년 사이 4배 이상으로 증가해 180억 달러를 기록했다. 단말기 가격도 경쟁업체보다 44% 비싸다.
디자인 개선도 한몫을 톡톡히 했다. 삼성전자는 디자인 연구소를 6개 거느리고 있다. 그 가운데 5곳이 해외에 자리 잡고 있다. 5년 전만 해도 엔지니어가 디자이너에게 제품을 이렇게, 저렇게 디자인 해달라고 요구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정국현 전무(디자인 전략팀장)에 따르면 요즘은 거꾸로 디자이너가 엔지니어에게 자신이 원하는 기능을 요구한다. 삼성전자 디자인센터장을 겸하고 있는 정 전무는 지난 2년 사이 디자인 인력을 50% 더 확충해서 450명으로 늘렸다.
영국 런던 소재 삼성전자 디자인센터의 클라이브 굿윈(Clive Goodwin)과 디자이너 18명은 유럽 시장에 맞는 색다른 디자인을 만들고 있다. 투명 플라스틱 스피커가 달린 플라스마 TV, 키패드가 아래 ·위로 오르내리는 휴대전화가 좋은 예다. 굿윈은 “배우와 관객의 교감이 중요한 연극처럼 제품과 소비자의 교감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뒤져있는 가전부문서 ‘영광 재현’ 안간힘
디자인에 대한 삼성전자의 집념은 다양한 방식으로 열매를 맺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미국 산업디자이너협회(IDSA)가 주최하는 국제디자인 공모전 ‘IDEA 2004’에서 다른 기업보다 많은 5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최근 미국인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삼성전자의 휴대전화가 어떤 자동차 브랜드에 비유될 수 있겠느냐고 물은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중 대다수는 일본 도요타의 최고급 승용차 렉서스(Lexus)를 꼽았다. 삼성전자의 새로운 디자인 개발 노력이 결실을 맺은 전형적인 예가 매끈한 ‘SGH-E700’ 모델이다. 조가비처럼 생긴 SGH-E700은 안팎의 두 LCD 패널, 디지털 줌 기능을 갖춘 내장 카메라가 특징이다. 디자이너들은 기술진에 거추장스럽게 외부로 돌출된 안테나 대신 내장 안테나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SGH-E700은 출시한 지 1년도 안 돼 세계 전역에서 1,000만 대나 팔려나갔다.
삼성전자는 멋진 디자인을 숨가쁠 정도로 속속 선보이고 있다. 과거에는 제품 하나를 출시하는 데 14개월이 걸렸다. 하지만 지금은 5개월에 불과하다. 제품주기가 짧아지고 가격이 낮아졌으며 직원들의 사기는 높다. 삼성전자 미주법인의 메모리 세일즈 ·마케팅 담당 부사장인 11년차 베테랑 토머스 퀸(Thomas Quinn)은 “합의도 중요하지만 실천 속도와 임직원에 대한 권한 부여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는 휴대전화의 후광이 가전 제품군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사실 가전은 삼성의 사업부분 가운데 실적이 가장 부진하다. 가전제품이 전체 순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5%에 불과하다. 5년 전 10%에서 뚝 떨어진 것이다. 입사 후 상당 기간을 가전과 TV 부문에서 일한 윤 부회장이 직접 독려에 나서면서 실적은 조금 개선되고 있다. 올해 1분기 가전 매출은 16% 증가해서 20억 달러에 이르렀다. 삼성전자는 MP3 플레이어 부문에서 애플 ·i리버(iRiver) ·RCA에 이어 세계 4위, DVD 플레이어 부문에서 소니 ·도시바에 이어 세계 3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미국에서 스테레오나 랩톱 컴퓨터를 판매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소비자들의 브랜드 인지도 면에서 소니보다 불리할 수밖에 없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삼성전자 미주법인의 전략 마케팅 담당 수석 부사장 피터 위드팰드(Peter Weedfald)는 할리우드 ·음반업계와 제휴하는 독창적인 마케팅 기법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브랜드 이미지의 각인이 중요하다”며 스타벅스 ·나이키를 예로 들었다. 그는 지난 6월 영화사 뉴 라인 시네마(New Line Cinema)와 계약을 맺었다. 삼성전자 제품을 영화제작에 활용하기 위해서다. 삼성전자는 온라인 광고에서 뉴 라인 시네마의 새 개봉작 <노트북> (The Notebook)을 선전했다. 네티즌은 <노트북> 예고편을 내려받은 다음 삼성전자의 캠코더와 할리우드 시사회 여행권 경품에 응모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는 현재 ‘디지털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Digitall: Everyone’s Invited)’라는 다소 썰렁한 문구를 슬로건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조만간 인텔의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처럼 단순 명료한 문구로 새로운 판촉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위드팰드는 위험부담을 인정하면서도 ‘파워 위딘(The Power Within)’이 삼성전자의 새로운 슬로건으로 등장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렇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소비자가 삼성전자 제품에 삼성전자 자체 부품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눈여겨볼까. 경쟁업체들이 삼성의 부품을 사서 쓰는 고객기업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관심이나 가질까.”
“전성기가 가장 위험한 시기, 위기의식 잃지 말아야”
삼성전자는 소형 스크린과 강력한 플래시메모리 분야의 우위가 유행에 민감한 휴대전화 시장에서 뜰 수 있었던 주요인이었다고 밝혔다. 이는 가전에서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스카르진스키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반도체 사업의 원동력은 PC였다. 그러나 지금 무선 제품이 PC를 대신하고 있다. 플래시메모리와 스크린 기술에서 삼성전자는 독보적인 존재다. ”
D램 생산에서 성장해 떨어져 나와 연간 22억 달러 규모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플래시메모리다. 삼성전자의 플래시메모리 시장 점유율 20%는 업계 최고 수준이다. 플래시메모리는 데이터 저장형(NAND ·낸드)과 코드 저장형(NOR ·노어)으로 나뉜다. 상대적으로 일찍 선보인 노어는 인텔이 장악하고 있다. 노어보다 늦게 등장한 낸드는 저장매체인 메모리 스틱 등에 사용된다. 삼성전자는 낸드에서 우월한 입지를 확보했다. 세계 시장 점유율이 65%에 이를 정도다. 노어겞슉?모두 무선기기에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많은 애널리스트는 앞으로 낸드가 우세승을 거둘 것으로 보고 있다. 투신운용사 프랭클린 템플턴 인베스트먼츠(Franklin Templeton Investments)에서 하드웨어 부문을 담당하고 있는 피터 노리(Peter Nori)는 “현재 노어가 더 빠르지만 저장용량은 낸드가 더 크다”며 “5년 뒤 판도는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프랭클린 템플턴은 10억 달러 상당의 삼성전자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황창규 사장(반도체 총괄 겸 메모리 사업부장)은 “낸드 혁신을 가속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주문제작으로 칩의 가격변동에 따른 타격을 비켜가고 있다. 삼성전자의 칩 가격은 시장 평균보다 17% 비싸다. 노키아 ·델 ·MS 등의 특별 주문 덕이다. 인텔과 삼성전자는 메모리 ·프로세서를 한 데 묶은 멀티칩 패키지 부문에서 선두로 나서기 위해 경쟁 중이다. 멀티칩 패키지는 휴대전화에 점차 많이 탑재되고 있다. 황 사장은 이 분야에서 현재 2위인 삼성전자가 올해 안에 1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가 성장 지속에 매진하고 있는 반면 경쟁업체 소니의 입지는 불안하다. 소니는 현재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 중이다. 지난 3월 31일 만료된 회계연도에 소니의 순이익은 전년 대비 23% 하락한 8억5,000만 달러로 주저앉았다. 삼성전자의 순이익에 비하면 6분의 1에 불과한 수준이다. 그러나 윤 부회장은 삼성전자가 걱정이다. 그는 삼성전자가 97년의 깊은 수렁에서 빠져 나오는 데 도움이 된 전략을 흐트러짐 없이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전성기는 가장 위험한 시기이기도 하다. 삼성전자가 현재 벼랑 끝에 서 있으며, 내일 당장 파산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윤 부회장이 울리는 경종이다. 노트북> 노트북>매트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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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성전자의 사운드 디자이너 최원민(30)씨는 소형 스피커 두 개와 서라운드 사운드 시스템이 내장된 휴대전화 세트를 손에 들었다. 버튼을 누르자 오른쪽 스피커에서 기적 소리가 점차 크게 울리다 왼쪽 스피커로 옮겨가더니 멀리 사라져갔다. “끝내주는군.” 최원민 씨가 씨익 웃으며 말했다. 퇴근 후에는 아마추어 록밴드에서 활동하는 최씨는 삼성전자가 노키아를 따라잡겠다는 일념 아래 설립한 여섯 개 연구소 가운데 하나인 서울의 디자인 연구소 소속이다.
10년 전만 해도 삼성전자는 휴대전화 시장에서 무명이나 다름없는 존재였다.
당시 삼성전자의 휴대전화는 한국에서만 팔렸다. 그나마 미국 브랜드 모토롤라에 한참 뒤지는 2위 업체였다. 그러나 이제 휴대전화는, 과거 워크맨이 소니를 상징했듯 삼성전자의 간판상품으로 떠올랐다. 성장 엔진이면서 혁신의 상징이요, 세계 최고를 지향하는 브랜드가 된 것이다. 삼성전자는 세계 제2의 휴대전화 제조업체로 급부상했다. 오는 2010년까지 1위 노키아의 자리를 빼앗는 게 목표다. 과욕일 수도 있다. 현재 850억 달러 규모의 세계 휴대전화 시장 가운데 36%를 노키아가 장악하고 있다. 13%인 삼성전자와 엄청난 격차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말 그대로 날고 있다. 가전 등 이익이 적은 부문에서 환상적인 기능을 갖춘 고수익겙恣?휴대전화로 돌아선 덕이다.
미국에서 삼성전자는 2주에 한 번꼴로 휴대전화 신제품을 출시하고 있다. 이동통신업체 스프린트(Sprint)가 새로 선보인 동영상 메일 서비스 기능에 맞춘 휴대전화 등 다양한 기능의 제품들을 쏟아놓고 있다. 삼성전자는 PDA폰을 대중화하고 세계 최초로 휴대전화에 MP3 기능까지 추가한 업체다. 이제 삼성전자 휴대전화로 한 번 충전에 20시간 통화가 가능하고 노래 2,000곡과 8시간 분량의 동영상을 저장하며 3차원 비디오게임도 즐길 수 있을 것이다. 이를 가능케 만든 삼성전자의 반도체가 곧 출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수익성 세계 최고인 IT업체로 성장
10여년 전 삼성전자는 방만하고 굼뜨고 무기력한 모방 수준의 메모리칩 제조업체였다. 그러나 지금은 전자업계의 선두반열에 올라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상반기 중 매출 245억 달러에 순이익 52억 달러를 기록했다. 마이크로소프트(MS) ·IBM ·(Intel)을 제치고 세계에서 가장 수익성 높은 정보기술(IT) 업체가 된 것이다. 삼성전자의 윤종용(60) 부회장은 5년뒤 인 오는 2009년엔 매출이 800억 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삼성전자 매출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휴대전화 사업 담당 이기태 사장은 “삼성은 가파른 언덕을 굴러 내려온 눈덩이처럼 성장했다”고 표현했다.
삼성전자가 엄청난 실적을 올릴 수 있는 것은 디지털 기기의 바탕인 세 부문 중 두 부문, 다시 말해 메모리칩과 스크린에 강하기 때문이다. 나머지 하나는 인텔이 장악하고 있는 마이크로프로세서 부문이다. 세계에서 이름난 IT 업체들이 삼성전자의 메모리칩과 스크린을 쓰고 있다. 휴대전화, 스크린,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냉장고 등 삼성전자의 다른 제품에도 사용되는 것은 물론이다.
삼성전자는 메모리 부문에서 세계 제1의 업체다. D램(자료를 기억하는 동안 계속 전원을 넣어줘야 하는 기억장치) ·S램(한 번 전원을 넣으면 일정 기간 자료가 남는 기억장치)은 세계 전체 생산량 가운데 3분의 1, 플래시 메모리는 5분의 1이 삼성전자 제품이다. 전원이 꺼져도 데이터가 소실되지 않고 남아서 무선기기에 필수 부품으로 꼽히는 플래시메모리 부문마저 인텔을 추월했다. 이밖에 박막 액정표시장치(LCD) 스크린과 평면 모니터 부문에서도 세계 최고의 생산량을 자랑한다.
삼성전자의 이같은 강세는 얼마나 지속될 수 있을까. 대기업 삼성전자는 아직도 이미지에 문제가 있다. 특히 미국 시장에서 소비자들이 소니나 델(Dell) ·노키아에서 느끼는 브랜드 이미지가 결여된 것이다. 자체 조사결과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삼성전자를 소니보다 ‘낯선’ 브랜드, 훨씬 경직되고 독창성이 부족한 브랜드로 인식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연간 8억 달러를 광고 ·판촉 ·마케팅(5년 사이 4배로 증가)에 쏟아부으면서 네티즌들에게 월간 10억 차례 브랜드명을 노출시킨 끝에 브랜드 컨설팅 업체 인터브랜드(Interbrand)가 선정하는 최고 브랜드 순위를 25위까지 끌어올리긴 했다. 그러나 여전히 노키아(6위) ·휼렛패커드(HP ·12위) ·소니(20위)에 한참 뒤져 있다.
삼성전자 미주법인의 오동진 부사장은 “삼성 브랜드가 미국 소비자들의 감성을 자극하지 못하고 있다”며 “미국에서 일류 기업으로 도약하려면 아직 갈 길이 멀다”고 자평했다.
삼성전자는 2년여 후에 주식을 뉴욕증권거래소(NYSE)에 상장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하지만 삼성전자 주식은 한국 기업이라는 이유만으로 증시에서 제값을 받지 못하는 이른바 ‘코리아 디스카운트(Korea discount)’에 시달리고 있다. 한국 증시에서 삼성전자의 주가는 6년 사이 16배로 뛰었고, 신흥시장 주식 가운데 미국 ·유럽의 투자자들이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삼성전자 주식은 지난해 주가수익비율(PER)의 13배에서 거래되고 있다. 반면 뉴욕 증시에서 거래되고 있는 소니의 주식예탁증서(ADR)는 주가수익비율이 42배에 달한다.
경이로운 실적에도 불구하고 미국 일반회계기준(GAAP)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점은 투자자들의 경계심을 부추기는 대목이다. 그러나 한가지 분명한 것은 삼성전자가 시장에서 지금보다는 더 대접을 받고 싶어하며, 또 그럴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윤 부회장은 “세계 최고가 되기 위해서는 ‘모든’ 면에서 바로 서야 한다”며 “브랜드 이미지를 높이려면 멋진 제품, 다시 말해 고품질 상품, 시장을 선도하거나 주도하는 제품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에 현실안주론자는 없다”
그가 이끄는 삼성전자는 위기로 단련된 기업이다. 1997년 아시아 금융대란이 닥쳤을 때 정리해고를 단행하고 경직된 중간 관리층을 무너뜨렸으며 모든 사업 속도를 높였다. 환란에 대한 발 빠른 대응은 삼성전자가 이어 불어 닥친 IT 거품 붕괴 속에서 살아 남는 데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 IT 기업들이 휘청거리던 2000~2003년 삼성전자는 순이익 증가율 5%를 기록했다.
삼성전자는 성장을 가속화하기 위해 광고를 개편하고 새로운 연구에 자금을 투입하며 디자인 혁신에 더욱 초점을 맞추고 있다. 삼성전자의 글로벌 마케팅 실장 겸 디지털 솔루션 센터장인 김병국 부사장은 연간 5억 달러에 이르는 광고대행 계약을 전면 재검토하고 있다. 현재 광고 대행사인 인터퍼블릭(Interpublic) 산하 푸트 콘 앤 벨딩(FCB)으로서는 불안하지 않을 수 없다. FCB의 CEO 브렌던 라이언(Brendan Ryan)은 “미국 내 입지에 만족하지 못하고 있는 삼성전자에 현실안주론자는 없다”고 말한다. 김 부사장은 “지난 5년 동안 브랜드 인지도 구축에 힘써 온 만큼 이제는 삼성 브랜드에 대한 충성도를 높여야 할 때”라면서 “우리는 소비자들에게서 ‘삼성제품으로 달라’는 말을 듣고 싶다”고 강조한다.
삼성전자는 현재 30억 달러인 연구예산을 향후 수년 안에 두 배로 늘릴 계획이다. 중국 ·일본 ·러시아 ·이스라엘 등지의 15개 연구소에 확보하고 있는 연구인력 2만 명을 수천 명 증원할 계획이다. 최근 삼성전자의 최고기술책임자(CTO)로 선임된 임형규 사장은 “삼성의 연구진들은 현재 다음해 제품에 지나치게 주력하고 있다”며 “ 3~10년을 내다보는 연구와 기술개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임 사장은 하나의 모바일 단말기로 홈 ·오피스 네트워킹을 구현하기 위해 관련 부문 간의 경쟁을 독려하고 있다. 그는 “여러 제품이 통합되면서 더욱 원활한 조화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삼성전자는 69년 일본의 산요(三洋)와 합작투자 형태로 출범했다. 그러나 뿌리는 60여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였던 1938년 창업주 이병철 씨가 설립한 건어물 ·청과물 수출업체 삼성상회(三星商會)가 모체다. 한국 최대 재벌로 성장한 삼성그룹은 창업자 이병철 씨의 아들 이건희 회장에게 승계됐다. 한국 최고의 부자이기도 한 이건희 회장은 삼성전자 지분 3.3%(일부 보도에 따르면 15%에 이른다는 관측도 있다)를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는 다른 계열사 10개의 지분도 보유하고 있다. 삼성그룹은 63개 업체로 구성돼 있다. 삼성화재해상보험(보험), 삼성전기(전기부품), 삼성코닝(TV 진공관과 모니터용 유리), 삼성 에버랜드(놀이공원으로 삼성생명 지분 19%를, 삼성생명은 삼성전자 지분 7%를 보유) 등 다양한 사업영역을 갖추고 있다.
6년 걸릴 일을 3년 만에 해내
삼성전자는 지난 83년 메모리칩, 다시 말해 D램으로 세계 시장에서 최초의 성공을 거뒀다. 당시 D램 시장은 이미 포화상태인데다 일본 기업의 지배에서 영원히 벗어나지 못할 것으로 보였다. 미국 규제 당국은 일본의 칩메이커들에 반덤핑 관세를 매기기에 바빴다. 이런 상황에서 삼성전자는 고집스럽게 시장에 뛰어들어 64KD램 제품을 생산해서 미국으로 수출했다. 다른 업체들보다 3년 늦은 셈이다. 그로부터 3년 뒤 세계 최초로 1메가비트(Mb) 칩을 개발했다. 업계 평균 속도로 볼 때 6년 걸릴 일을 3년 만에 해낸 것이다.
개발기간이 단축될 수 있었던 것은 삼성전자가 두 연구팀, 즉 실리콘밸리의 연구진과 국내 연구진에게 서로 경쟁을 붙였기 때문이다. 경쟁은 결국 한국 내 연구진의 승리로 끝났다. 제품개발 속도가 점점 빨라지면서 94년 256Mb 칩을 선보였다. 이로써 세계 최대 D램 생산업체로 우뚝 설 수 있었다. 여기에는 한국 정부의 보조금도 한몫했다.
메모리칩과 달리 다른 부문들은 별다른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당시 삼성전자는 미국 시장에서 대다수 사업 실적이 너무 부진한 나머지 완전 철수까지 고려하고 있었다. 전자레인지와 저가 TV 등 이익이 박한 제품에서 벗어나지 못한데다 판로는 K마트 같은 할인 매장에 국한돼 있었다. 그러던 중 97년 아시아에 금융위기가 몰아닥치고 칩 가격이 폭락했다. 삼성전자로서는 어느 때보다 미국 시장이 절실해졌다. 미국에서 제품이 팔려야 달러를 벌어들일 수 있고, 달러가 있어야 엄청난 부채를 줄여 살아남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기태 사장은 “당시엔 휴대전화를 제외하면 브랜드 구축에 활용할 만한 제품이 그리 많지 않았다”고 털어놓았다. 삼성전자 북미통신법인의 휴대전화 담당 상무보인 피터 스카르진스키(Peter Skarzynski)는 “위기가 성공을 향해 달려 나아가야 하는 큰 압박으로 작용했다”고 들려줬다. 삼성전자가 휴대전화 시장에서 승승장구하려면 전광석화와 같은 기동성에 군살이 없는 모습으로 탈바꿈해야 했다. 게다가 고가제품으로 달러를 더 많이 벌려면 기존 기술보다 훨씬 앞서 나아가야만 했다. 따라서 메모리 ·LCD 사업부문에서 벌어들인 수익을 기술혁신과 대대적인 마케팅에 투입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하지만 이런 방안은 서울 본사의 대대적인 구조조정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96년말 삼성전자 총괄대표이사 발령을 받은 윤종용 부회장은 대표 취임 1년 만에 가공할 금융위기와 맞닥뜨리게 됐다. 그는 삼성전자가 철저히 변하지 않으면 자멸할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나 위기가 곧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점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위기 덕에 구조조정을 단행할 수 있는 운신의 폭이 생겼다”고 회상했다. 윤 부회장은 정부의 구조조정 노력에 발맞춰 8만4,000명에 이르던 인력 가운데 30%를 정리해고했다. 강성 노조로 유명한 한국에서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120억달러에 달하던 부채를 줄이는 것도 당면 과제였다.
윤 부회장은 52개 제품라인을 폐쇄했다. 공장 신설 계획을 유보하고, 회사 차량 유지 같은 비핵심 부문은 아웃소싱했다. 골프 회원권을 비롯한 임직원의 특전도 없앴다. (현재 삼성전자의 부채는 80억 달러이며, 7년 전 300%에 이르던 부채비율은 30%대까지 떨어졌다.) 이사진에는 외국인들이 영입됐다. 마침내 삼성전자는 새로운 기업으로 다시 태어났으며, 윤 부회장은 새로운 방식으로 사업을 운영하기 시작한 것이다.
위계질서가 엄격한 한국에서 효율과 속도를 중시하는 윤 부회장은 독불장군이나 다름없다. 그는 서울대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하고 66년 졸업과 함께 삼성그룹에 입사했다. 77년에는 삼성전자 도쿄(東京) 지점장으로 발령받았다. 그는 일본어 구사가 가능하며 영어를 듣고 이해하는 수준이다. 80년대부터 8개 사업부문을 두루 거친 그는 경영능력으로 이 회장에게 깊은 인상도 심어줬다. 윤 부회장의 성공담 가운데 하나는 일본 업체들이 기술 이전을 기피하는 상황에서 VCR 개발에 성공했다는 점이다. 이후 조립라인 단축으로 VCR 생산속도를 높였다. 통상 석달이 걸리는 일을 5일 만에 해냈다.
휴대전화 급성장엔 디자인 개선도 한몫
윤 부회장은 휘하 간부들에게 많은 재량권을 부여했다. 연공서열을 바탕으로 한 보수 ·승진 제도도 철폐했다. 대신 직원들은 각 부서의 실적에 따라 성과급을 받는다. 성과급에는 임원 900명에게 회사 지분 4%를 분배한 스톡옵션도 포함된다. 윤 부회장의 옵션 가치는 4,000만 달러(약 450억원)다. 윤 부회장은 각 사업부문을 독립적인 사업단위로 만들었다.
반도체와 LCD 부문은 삼성 계열사든 외부 기업이든 동일한 가격을 제시한다. 특혜는 없다. 주우식 삼성전자 전무(경영지원총괄 IR팀장)는 “삼성이 계열사를 우대하는 다른 재벌들, 심지어 일본 ·미국 대기업과 다른 점은 바로 그것”이라고 지적했다. 애플 ·HP를 비롯한 고객기업들이 차별 문제를 제기하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더욱이 계열사 특혜가 사라지면서 고객기업들의 구매패턴을 제대로 파악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정보도 얻을 수 있게 됐다.
김병국 부사장은 “휴대전화가 실용품에서 패션제품으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며 “전에는 ‘카메라폰을 누가 원하겠느냐’고 말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전했다. 현재 삼성전자의 카메라폰 시장 점유율은 12%다. NEC에는 훨씬 처져 있지만 노키아에는 불과 1%포인트 뒤지고 있다. 공상과학영화 <매트릭스> 2 ·3편에 삼성전자의 환상적인 휴대폰이 등장하면서 멋진 디자인을 크게 부각시키는 데 한몫했다. 미국에서 스프린트와 일찌감치 맺은 계약도 많은 도움이 됐다. 스프린트의 무선 네트워크는 삼성전자가 채택한 부호분할다중접속(CDMA) 표준을 사용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휴대전화 매출은 지난 5년 사이 4배 이상으로 증가해 180억 달러를 기록했다. 단말기 가격도 경쟁업체보다 44% 비싸다.
디자인 개선도 한몫을 톡톡히 했다. 삼성전자는 디자인 연구소를 6개 거느리고 있다. 그 가운데 5곳이 해외에 자리 잡고 있다. 5년 전만 해도 엔지니어가 디자이너에게 제품을 이렇게, 저렇게 디자인 해달라고 요구하는 구조였다. 하지만 이제 사정이 달라졌다. 정국현 전무(디자인 전략팀장)에 따르면 요즘은 거꾸로 디자이너가 엔지니어에게 자신이 원하는 기능을 요구한다. 삼성전자 디자인센터장을 겸하고 있는 정 전무는 지난 2년 사이 디자인 인력을 50% 더 확충해서 450명으로 늘렸다.
영국 런던 소재 삼성전자 디자인센터의 클라이브 굿윈(Clive Goodwin)과 디자이너 18명은 유럽 시장에 맞는 색다른 디자인을 만들고 있다. 투명 플라스틱 스피커가 달린 플라스마 TV, 키패드가 아래 ·위로 오르내리는 휴대전화가 좋은 예다. 굿윈은 “배우와 관객의 교감이 중요한 연극처럼 제품과 소비자의 교감도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뒤져있는 가전부문서 ‘영광 재현’ 안간힘
디자인에 대한 삼성전자의 집념은 다양한 방식으로 열매를 맺고 있다. 삼성전자는 올해 미국 산업디자이너협회(IDSA)가 주최하는 국제디자인 공모전 ‘IDEA 2004’에서 다른 기업보다 많은 5개 부문에서 상을 받았다. 최근 미국인 소비자들을 대상으로 삼성전자의 휴대전화가 어떤 자동차 브랜드에 비유될 수 있겠느냐고 물은 설문조사에서는 응답자중 대다수는 일본 도요타의 최고급 승용차 렉서스(Lexus)를 꼽았다. 삼성전자의 새로운 디자인 개발 노력이 결실을 맺은 전형적인 예가 매끈한 ‘SGH-E700’ 모델이다. 조가비처럼 생긴 SGH-E700은 안팎의 두 LCD 패널, 디지털 줌 기능을 갖춘 내장 카메라가 특징이다. 디자이너들은 기술진에 거추장스럽게 외부로 돌출된 안테나 대신 내장 안테나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SGH-E700은 출시한 지 1년도 안 돼 세계 전역에서 1,000만 대나 팔려나갔다.
삼성전자는 멋진 디자인을 숨가쁠 정도로 속속 선보이고 있다. 과거에는 제품 하나를 출시하는 데 14개월이 걸렸다. 하지만 지금은 5개월에 불과하다. 제품주기가 짧아지고 가격이 낮아졌으며 직원들의 사기는 높다. 삼성전자 미주법인의 메모리 세일즈 ·마케팅 담당 부사장인 11년차 베테랑 토머스 퀸(Thomas Quinn)은 “합의도 중요하지만 실천 속도와 임직원에 대한 권한 부여도 중요하다”고 지적했다.
삼성전자는 휴대전화의 후광이 가전 제품군으로 이어지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사실 가전은 삼성의 사업부분 가운데 실적이 가장 부진하다. 가전제품이 전체 순이익에서 차지하는 비율은 5%에 불과하다. 5년 전 10%에서 뚝 떨어진 것이다. 입사 후 상당 기간을 가전과 TV 부문에서 일한 윤 부회장이 직접 독려에 나서면서 실적은 조금 개선되고 있다. 올해 1분기 가전 매출은 16% 증가해서 20억 달러에 이르렀다. 삼성전자는 MP3 플레이어 부문에서 애플 ·i리버(iRiver) ·RCA에 이어 세계 4위, DVD 플레이어 부문에서 소니 ·도시바에 이어 세계 3위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삼성전자는 미국에서 스테레오나 랩톱 컴퓨터를 판매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소비자들의 브랜드 인지도 면에서 소니보다 불리할 수밖에 없다. 이런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삼성전자 미주법인의 전략 마케팅 담당 수석 부사장 피터 위드팰드(Peter Weedfald)는 할리우드 ·음반업계와 제휴하는 독창적인 마케팅 기법을 선보이고 있다. 그는 “브랜드 이미지의 각인이 중요하다”며 스타벅스 ·나이키를 예로 들었다. 그는 지난 6월 영화사 뉴 라인 시네마(New Line Cinema)와 계약을 맺었다. 삼성전자 제품을 영화제작에 활용하기 위해서다. 삼성전자는 온라인 광고에서 뉴 라인 시네마의 새 개봉작 <노트북> (The Notebook)을 선전했다. 네티즌은 <노트북> 예고편을 내려받은 다음 삼성전자의 캠코더와 할리우드 시사회 여행권 경품에 응모할 수 있었다.
삼성전자는 현재 ‘디지털 세계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Digitall: Everyone’s Invited)’라는 다소 썰렁한 문구를 슬로건으로 사용하고 있다. 그러나 조만간 인텔의 ‘인텔 인사이드(Intel Inside)’처럼 단순 명료한 문구로 새로운 판촉에 나설 가능성이 있다. 위드팰드는 위험부담을 인정하면서도 ‘파워 위딘(The Power Within)’이 삼성전자의 새로운 슬로건으로 등장할 수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이렇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소비자가 삼성전자 제품에 삼성전자 자체 부품이 들어간다는 사실을 눈여겨볼까. 경쟁업체들이 삼성의 부품을 사서 쓰는 고객기업이기도 하다는 사실에 관심이나 가질까.”
“전성기가 가장 위험한 시기, 위기의식 잃지 말아야”
삼성전자는 소형 스크린과 강력한 플래시메모리 분야의 우위가 유행에 민감한 휴대전화 시장에서 뜰 수 있었던 주요인이었다고 밝혔다. 이는 가전에서도 도움이 될 수 있다. 여기서 스카르진스키의 말을 다시 들어보자. “반도체 사업의 원동력은 PC였다. 그러나 지금 무선 제품이 PC를 대신하고 있다. 플래시메모리와 스크린 기술에서 삼성전자는 독보적인 존재다. ”
D램 생산에서 성장해 떨어져 나와 연간 22억 달러 규모의 시장을 형성하고 있는 것이 플래시메모리다. 삼성전자의 플래시메모리 시장 점유율 20%는 업계 최고 수준이다. 플래시메모리는 데이터 저장형(NAND ·낸드)과 코드 저장형(NOR ·노어)으로 나뉜다. 상대적으로 일찍 선보인 노어는 인텔이 장악하고 있다. 노어보다 늦게 등장한 낸드는 저장매체인 메모리 스틱 등에 사용된다. 삼성전자는 낸드에서 우월한 입지를 확보했다. 세계 시장 점유율이 65%에 이를 정도다. 노어겞슉?모두 무선기기에 많이 쓰이고 있다.
그러나 많은 애널리스트는 앞으로 낸드가 우세승을 거둘 것으로 보고 있다. 투신운용사 프랭클린 템플턴 인베스트먼츠(Franklin Templeton Investments)에서 하드웨어 부문을 담당하고 있는 피터 노리(Peter Nori)는 “현재 노어가 더 빠르지만 저장용량은 낸드가 더 크다”며 “5년 뒤 판도는 바뀔 것”이라고 내다봤다. 프랭클린 템플턴은 10억 달러 상당의 삼성전자 주식을 보유하고 있다. 삼성전자의 황창규 사장(반도체 총괄 겸 메모리 사업부장)은 “낸드 혁신을 가속화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삼성전자는 주문제작으로 칩의 가격변동에 따른 타격을 비켜가고 있다. 삼성전자의 칩 가격은 시장 평균보다 17% 비싸다. 노키아 ·델 ·MS 등의 특별 주문 덕이다. 인텔과 삼성전자는 메모리 ·프로세서를 한 데 묶은 멀티칩 패키지 부문에서 선두로 나서기 위해 경쟁 중이다. 멀티칩 패키지는 휴대전화에 점차 많이 탑재되고 있다. 황 사장은 이 분야에서 현재 2위인 삼성전자가 올해 안에 1위를 차지할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전자가 성장 지속에 매진하고 있는 반면 경쟁업체 소니의 입지는 불안하다. 소니는 현재 대규모 구조조정을 단행 중이다. 지난 3월 31일 만료된 회계연도에 소니의 순이익은 전년 대비 23% 하락한 8억5,000만 달러로 주저앉았다. 삼성전자의 순이익에 비하면 6분의 1에 불과한 수준이다. 그러나 윤 부회장은 삼성전자가 걱정이다. 그는 삼성전자가 97년의 깊은 수렁에서 빠져 나오는 데 도움이 된 전략을 흐트러짐 없이 계속 추진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전성기는 가장 위험한 시기이기도 하다. 삼성전자가 현재 벼랑 끝에 서 있으며, 내일 당장 파산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있어야 한다.” 윤 부회장이 울리는 경종이다. 노트북> 노트북>매트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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