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파른 원화 절상 … 한국 벼랑끝으로 몰리나
가파른 원화 절상 … 한국 벼랑끝으로 몰리나
급락하는 원-달러 환율에 외환딜러들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다. |
미국 뉴욕시장에서 달러 가치는 6개 주요 통화 바스켓에 대해 지난 1995년 이래 최저로 떨어졌다. 원-달러 환율은 97년 이후 최저치(11월 22일 현재 1천65.30원)를 기록했으며 유로에 대한 달러 가치는 사상 최저 수준으로 떨어졌다. 달러당 엔 환율도 1백3엔대에 들어서 4년 6개월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 달러 약세 현상은 아시아는 물론 남미지역으로까지 확산됐고, 환율이 고정된 중국에서는 달러화 투매 현상까지 나타났다.
이는 미국의 고위 금융 당국자들이 잇따라 약 달러 용인, 즉 강 달러 정책 포기를 시사하는 발언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린스펀 FRB 의장은 11월 19일(현지시간) 프랑크푸르트에서 열린 유럽 금융인회의 연설을 통해 “미 경상수지 적자 규모가 커 향후 달러 매도가 예상되며 중앙은행의 시장 개입엔 한계가 있다”고 밝혔다.
그는 일정 시점에는 분명히 달러 매도와 가치 하락이 일어날 것으로 내다봤다. 금융시장 전문가들은 그린스펀의 발언이 달러 약세가 불가피한 대세임을 확언하는 것으로 해석돼 조만간 유로화는 1.40달러, 대 엔화 환율은 1백엔선을 하회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에 앞서 11월 17일 런던을 방문 중인 스노 재무장관도 약 달러 용인을 시사하는 발언을 했다. 그는 또 “경상수지 적자 부담은 나눠가져야 한다”며 “다른 나라들의 성장이 가속화되면 미국의 경상적자도 줄어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렇게 미국의 주요 금융 당국자들이 약 달러 용인을 시사하는 발언을 하고 있는 것은 미국 정부가 ‘쌍둥이 적자’(재정 적자와 경상수지 적자)를 해결하지 않고는 경제 현안을 풀어갈 수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미국 달러화는 쌍둥이 적자에도 불구하고 해외 투자자의 미국 자산(채권·주식) 매입 덕에 강세를 유지할 수 있었다.
미국 정부가 채권 등을 발행해 재정 적자에 필요한 자금을 조달할 수 있었다는 얘기다. 하지만 지난 몇년 동안 무역 적자 규모는 해외 자본 유입량을 넘어섰고, 저금리는 외국인의 미국 자산에 대한 투자를 감소시켰다. 외국돈으로 재정 적자를 메우기에는 한계에 부닥친 것이다.
그린스펀 의장이 “해외 투자자들이 달러화 자산을 지속적으로 사들이며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를 메워주지는 못할 것”이라고 밝힌 것도 이같은 상황 인식에 따른 것으로 풀이된다. 막대한 경상수지 적자로 볼 때 일정 시점이 되면 달러 수요는 감소할 것이며 이는 달러 약세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다. 미국의 2분기 경상수지 적자는 1천6백62억달러로 국내총생산의 5.7%에 달했다.
이러한 미국의 약 달러 전략에 따라 전세계적으로 원화를 비롯한 각국 통화들이 달러에 대해 동반 강세를 보이고 있다. 삼성경제연구소 정영식 수석 연구위원은 “미국 무역수지 적자의 40%가 동아시아 4개국에서 발생하고 있어 한국을 포함한 이 지역의 통화에 대해서는 철저히 관리하고 통상 압력도 높여 갈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원화가 달러에 대해 강세(원-달러 환율 하락)를 보인다고 해서 한국에 부정적인 영향만 주는 것은 아니다. 동전의 양면처럼 모든 경제 현상은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을 동시에 갖고 있다. 원-달러 환율이 떨어지면 수출 기업은 수출 경쟁력이 떨어져 수출이 줄어들지만, 수입업체는 예전보다 더 싼 값에 물건을 수입할 수 있다.
이러한 환율 변화의 ‘손익’계산은 이론적인 것일 뿐 요즘은 우려의 목소리에 힘이 더 실려 있다. 내수 침체로 휘청거리고 있는 한국 경제가 그나마 현 상태에서 버티고 있었던 것은 수출이 버팀목 역할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환율 급락으로 수출이 크게 줄면 한국 경제가 벼랑 끝으로 몰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것도 바로 수출 주도형 한국 경제에 기인한다. 이헌재 경제부총리는 환율 급락에 대해 “경상수지에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라고 말했다.
금융연구원은 원-달러 환율이 10원 떨어지면 수출은 0.2% 감소하고 수입은 0.2% 늘어나는 것으로 추정했다. 환율 하락 폭이 클수록 무역수지 적자가 확대된다는 분석이다. 전국경제인연합회는 최근 3백56개 수출 기업에 대한 설문조사를 통해 원-달러 환율이 1천1백원 이하로 떨어지면 수출이 4.2%(1백억달러) 감소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예를 들어 현대자동차가 올 4분기 수출로 벌어들일 것으로 예상되는 돈은 약 15억달러 수준이다. 15억달러에서 환율이 50원 떨어진다고 가정하면 약 7백50억원의 경상이익이 줄어드는 셈이다.
수출시장에서 한국의 최대 경쟁국으로 꼽히는 일본과 중국의 경우 일본 엔화는 원화처럼 달러에 대해 강세(동조화 현상)를 보이고 있어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고정 환율제를 시행하고 있는 중국은 상황이 다르다. 원화가 강세일수록 중국과의 수출 경쟁에서 한국은 처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이대로 간다면 미국시장에서 중국 제품과 경쟁 자체가 되지 않는다”고 우려하고 있다.
원화의 절상 속도가 다른 통화에 비해 빠른 것도 한국 수출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무역연구소가 11월 21일 한국과 주요 경쟁국의 가격 경쟁력 결정 요소를 비교·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원화 환율은 11월 17일 현재 지난해 연말 대비 8.7% 하락해 일본(-1.5%)·대만(-4.0%)·싱가포르(0.2%) 등에 비해 큰 폭으로 평가 절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환율 하락이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다 줄 수 있다는 분석도 있다. 환율이 떨어지면 원유 등 수입 물가가 싸지면서 물가 안정에 도움이 될 것이란 전망이다. 실질 소득이 증가해 소비가 늘 수 있다는 전망도 나온다. 이와 함께 가격 경쟁력에만 의존해 온 수출 기업들이 환율 하락을 체질 개선의 계기로 삼아 품질 경쟁력을 높일 수 있어 장기적으로 기업들에 도움이 된다는 분석도 있다.
전문가들은 미국이 쌍둥이 적자의 해결책으로 약 달러를 선택한 이상 달러 약세는 대세라고 입을 모은다. 또한 원-달러 환율의 하락 추세가 1∼2개월 안에 끝날 것으로 보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한국 정부의 외환시장 개입이 역부족이라는 판단에서다. 요즘 한국 외환시장에서는 달러가 조금만 오르면 ‘팔자’는 주문이 쏟아지는 반면 ‘사자’는 주문은 거의 없다. 한국경제연구원 허찬국 박사는 “달러 투매 물량이 많기 때문에 정부가 외환시장에 개입하는 것은 ‘강물에 물붓기’밖에 안 된다”고 말했다.
정부가 올해 환율 방어를 위해 확보했던 ‘실탄’이 사실상 바닥나 추가 하락을 막기 위해서는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정부는 올해 18조8천억원의 외환시장 안정용 국고채 발행 한도를 확보했으나 이 가운데 남아 있는 것은 1조8천억원에 불과하다. 여기에 11월 말 만기가 돌아온 3년 만기 외국환평형기금채권 1조2천억원어치를 상환해야 하는 정부는 이를 외환시장 안정용 국고채를 발행해 갚을 예정이어서 외환시장 안정용 국고채 발행 한도는 모두 소진된 것이나 다름없다.
그동안 시장에서는 원-달러 환율의 경우 1천50원선이 바닥이라는데 공감대가 형성돼 왔으나 최근의 추세를 감안하면 1천50원 밑으로 추락할 가능성도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전미경제연구소(NBER)의 모리스 옵스펠드 이코노미스트는 “미국의 경상수지 적자 부담이 완화되더라도 (유로화 대비) 달러 가치는 현재보다 20% 더 떨어질 것”이라며 “만약 미국의 저축률이 증가하지 않거나 적절한 통화정책이 이루어지지 않을 경우 달러화는 40%까지 떨어질 수도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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