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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하지 말라, 한국은 아직 멀었다”

“착각하지 말라, 한국은 아직 멀었다”

일본의 세계적 경영 컨설턴트 겸 경제평론가인 오마에 겐이치(大前硏一 ·62)는 한국에 대한 독설로 ‘악명(惡名)’ 높다. 그의 한국 비판은 정치인과 관료, 재벌과 기업인 등 대상을 가리지 않는다. 그의 독설에서 ‘한국은 도저히 일본을 넘어설 수 없다’는 국수주의적 우월감이 느껴진다고 말하는 이들도 있다.

그런 그의 눈에 삼성전자의 약진과 소니의 부진은 어떻게 비치고 있을까. 또 일본 열도를 강타하고 있는 한류(韓流) 열풍에 대해서는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 원자력공학 박사로 핵 전문가이기도 한 그는 북한 핵 위기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을까.

독도와 역사 교과서 문제로 한·일관계가 다시 경색 국면을 맞고 있는 가운데 그가 배명복 중앙일보 국제문제담당기자와 만나 자신의 생각을 또 한 번 거침없이 털어놨다. 인터뷰는 지난 3월 도쿄(東京) 시내 지요다구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2시간 동안 진행됐다.

-당신은 한국을 200차례 이상 방문했다. 그래서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잘 아는 일본인이라는 말도 듣는다. 하지만 당신은 한국에 지나치게 비판적이다. 일본의 전통적 보수우익의 시각에서 한국을 폄하하는 게 아니냐는 의심까지 받고 있다.

“일본의 보수우익 정부를 나만큼 신랄하게 비판해온 사람은 없다. 자민당 정부의 최장수 공적(公敵) 1호가 바로 나다. 이런 내가 어떻게 일본의 보수우익을 대변할 수 있다는 것인지 내가 되레 궁금하다. 고객에게 쓴소리를 하는 것이 나의 직업이다. 나를 고용한 CEO들 치고 쓴소리를 듣지 않은 사람이 없다. 쓴소리를 많이 들은 회사일수록 좋은 성과를 냈다. 그 덕분에 나는 전세계에서 가장 비싼 경영 컨설팅 수임료를 받아 왔다. 내가 한국을 말하는 것이 듣기 싫으면 안 들으면 그만이다. 나는 한국과 관련을 맺지 않고도 잘 살 수 있다. 그러나 당신이 정말로 한국을 위한다면 어떻게 하면 한국이 더 잘 될 수 있는지 말해야 하고, 그 말은 솔직하면서 직설적이어야 한다.”

-지난해 삼성전자는 순이익에서 소니를 완전히 압도했고, 현대자동차도 미국 시장에서 괄목할 성과를 거뒀다. 한국인 중에는 한국 경제에 대한 당신의 부정적 인식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로 삼성전자와 현대자동차의 성적표를 제시하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 같다.

“삼성전자는 예외적인 경우다. 하지만 삼성을 한국 기업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삼성은 위치만 한국에 있을 뿐이지 일본 기업의 강점과 장점을 철저히 내화(內化)해 자기 것으로 만든 기업이다. 삼성은 일본이라는 모체와 탯줄로 연결돼 있다. 나는 삼성의 여러 중역과 많은 얘기를 나눴는데 그들 스스로 ‘삼성의 힘은 일본에 대한 이해에 있다’고 말한다. 또 삼성은 한국에서 일본 제품의 최대 수입자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핵심부품과 장비를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삼성의 성공만을 피상적으로 보고 ‘우리가 일본을 앞질렀다’고 생각한다면 이는 한국의 실력에 대한 심각한 오해다.

지난해 현대자동차가 미국 시장에서 좋은 성적을 올린 것은 사실이다. 오로지 싼 값을 무기로 미국 시장을 공략했던 10년 전에 비해 질적인 발전을 이룩한 것은 틀림없다. 실소비자 평가인 JD파워 순위에서 좋은 성적을 올린 것도 축하할 일이다. 하지만 미국 자동차 시장에서 안정적 지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서너 차례의 모델 교체 과정을 성공적으로 통과해야 한다. 보통 20년이 걸린다. 도요타(豊田)나 렉서스 차를 산 고객이 모델 교체 후에도 다시 도요타나 렉서스로 돌아오듯 현대차도 그런 단계가 됐을 때 비로소 미국 시장의 안정적 참여자라고 할 수 있다.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돼 일제차가 한국 시장에 제한 없이 들어간다면 현대차는 고전할 수밖에 없다. 현대는 도요타나 혼다(本田), 새로 변신한 닛산(日産)의 경쟁력을 주의 깊게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차는 아직 완전한 시장 개방에 대한 준비가 덜 돼 있다.”

-한국과 일본 간 FTA가 시기상조라는 말인가.

“한국이 일본에 FTA 협상을 먼저 제안했을 때 나는 한국 경제에 득보다는 실이 될 가능성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을 했었다. 한국 입장에서 준비가 덜 돼 있다고 봤기 때문이다. 당시만 해도 일본 경제가 ‘잃어버린 10년’의 장기 침체로 고전하고 있어 일본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는 분위기가 한국 사회 일각에 만연해 있었다. 그러나 한겴?양국이 시장을 100% 개방하면 살아남을 한국 기업이 많지 않을 걸로 봤기 때문에 나는 일본 기업들의 강점과 장점을 넓고 깊게 관찰해 보라고 한국 기업들에 충고했던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 미국에서 교육받은 한국의 엘리트들은 자유무역은 무조건 좋은 것이고, 따라서 FTA는 많이 체결할수록 좋다는 순진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한국 입장에서 FTA에는 부정적 효과 못지않게 긍정적 측면도 큰 것 아닌가.

“물론 그렇긴 하다. 시장 개방을 통해 한국 기업들이 더 강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중장비 생산업체인 캐터필러(Cater-pillar)와의 경쟁을 통해 일본의 고마쓰는 더 강해졌다. 미국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은 일본 기업들은 글로벌 기업이 됐다. 한국 기업들도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것은 인정사정없는 혹독한 ‘필터링(filtering)’ 과정이다. 이는 장기적으로는 약이 되겠지만 내가 아는 한 한국 기업들은 아직 그런 시험을 통과할 준비가 덜 돼 있다.”

-너무 일방적인 평가로 들린다. 경제는 실적이 말해주는 것 아닌가.

“한국의 수출 기업들이 좋은 실적을 올리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중국 효과’ 때문이다. 많은 한국 기업이 조립공장을 중국의 옌타이(煙臺) ·칭다오(靑島) ·톈진(天津) ·다롄(大連) 등으로 옮겼다. 황해를 국경 없는 내해(內海)로 만든 결과다. 부품을 가져다 중국 내 보세구역에서 조립해 만든 완제품이 부산항을 거쳐 그대로 수출선박에 실리고, 이것은 통계상 한국의 수출이 된다. 그 결과 지난해 한국의 대미(對美) 수출은 29% 늘었다. 하지만 이는 농담 같은 수치다. 왜냐하면 그 수출 상품은 사실 ‘메이드인 차이나(Made in China)’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한국의 진짜 경제라고 할 수 있는가. 또한 한국은 일본과의 교역에서 막대한 적자를 보고 있다. 핵심부품과 장비를 일본에 의존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

-한국 기업들이 어떻게 해야 한다는 소린가.

“대부분의 한국 재벌은 광대한 전선(戰線)을 커버하느라 정신이 없다. 이에 비해 삼성은 몇몇 분야만 골라 세계 최고를 목표로 깊이 파는 전략을 택했다. 이 점에서도 삼성은 예외다. 한국 기업들의 실력을 규모로 판단하는 것은 위험하다. 넓이에 비해 깊이가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기계나 부품에 평생을 바치겠다는 생각이 한국 기업인들에게는 없다. 하지만 일본은 반대다. 어떤 기업들은 금형(金型)만 하고, 어떤 기업들은 소형 모터만 한다. 그러다 보니 품질로 따져 일본 제품을 사지 않을 수 없게 돼 있다. 중국도 한국과 똑같이 깊이보다는 넓이를 추구하고 있다. 산업 측면에서 한국의 강점은 인프라에 있지 않고, 최종 조립에 있다. 일본과의 FTA가 한국 기업들에 득보다는 실이 될 것으로 보는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FTA로 한국 기업들이 득을 보게 되는 분야도 있지 않을까.

“조선과 철강 ·가공식품 ·일반 건설업 분야에서는 한국 기업들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특히 한국 건설업체들이 일본 기업들보다 강하다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래서 나는 오래 전부터 한국 건설업체들의 일본 시장 진출을 허용해야 한다고 주장해 왔다. 이것이 일본 경제에도 도움이 될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미국은 쌍둥이 적자로 고전하고 있다. 그래서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달러 약세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달러 약세가 동아시아 경제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는가.

“일본 경제는 세 차례의 기록적인 엔화 절상 충격을 견뎌냈다. 달러당 300엔이었던 환율이 무려 84엔까지 떨어졌었다. 지금은 100엔 선에서 비교적 안정세를 보이고 있다. 일본은 어떤 환율 조건에서도 막대한 대미 무역흑자를 기록해 왔다. 요컨대 일본 경제는 통화중립적이 됐다.

지난 20여 년 동안 경영 컨설턴트로서 내가 한 일은 기업들이 정부를 믿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즉 정부 정책을 기업의 최종 고려 사항에 포함시켜서는 안 된다고 충고해 왔다. 통화 전쟁은 기본적으로 정부 간 정치 싸움이다. 절대로 싸움에 휘둘리지 않도록 대비하라고 나는 일본 기업들에 강조해 왔다.

경제가 강해지면 당연히 통화가치도 올라간다. 나는 한국 국민이 강한 원화를 원해야 한다고 본다. 강한 원화는 전세계에서 들어오는 저렴하고 품질 좋은 제품과 한국의 비싼 상품 사이에서 선택의 폭을 넓혀줌으로써 한국인의 삶의 질 향상에 기여할 것이다. 그런데도 한국 언론과 기업인, 정치인들은 입버릇처럼 약한 원화를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결국은 미국이 원하는 대로 갈 것이다. 이것이 현실이다.

앞으로 5~10년 동안 달러는 약세로 가고, 원화는 강세로 갈 것이다. 지금의 두 배, 어쩌면 세 배까지 원화가 절상될지도 모른다. 플라자합의 이후 20년 동안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한국도 환율 생존게임에서 살아남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는 수밖에 없다. 삼성조차도 이런 정도의 도전에는 직면해본 적이 없다. 한국 경제는 이제 진정한 시험을 앞두고 있다. 행운을 빈다.”

-중국의 급속한 경제성장은 주변국에 기회이면서 동시에 도전이 되고 있다. 한겵?일 3국이 유럽연합(EU)을 모델로 경제통합을 추진해 나갈 수 있다고 보는가.

“로마조약에서 시작해 EU가 창설되기까지 40년이 걸렸다. 파편화되고 역사 박물관으로 전락한 유럽에 대한 위기감이 통합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그리고 유라톰(EURATOM겳坪米?기술개발겳П맙?평화적 이용을 목적으로 창설된 유럽원자력 공동체)에서 출발해 철강겴奐?표준 단일화 등 수많은 단계를 거쳐 경제공동체를 이룩했다.

그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공동체 전체의 선(善)을 위해 자국의 특권을 포기하는 결단을 내린 정치 지도자들의 리더십이었다. 프랑스의 지스카르 데스탱이 그렇고, 독일의 헬무트 슈미트가 그랬다. 프랑수아 미테랑과 헬무트 콜이 바통을 이어받았다. 이들의 리더십이 없었다면 유럽통합은 현실화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동아시아는 어떤가. 통합의 비전을 이야기하는 지도자를 본 적이 있는가. 없다. 슈미트나 데스탱은 ‘우리 독일’이나 ‘우리 프랑스’ 대신 ‘우리 유럽’을 이야기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동북아 중심국가의 비전에 대해 많은 얘기를 했는데….

“한국에서는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일본에서는 들은 바 없다. 국내용 립서비스일 뿐이다. 김포~하네다(羽田) 셔틀 항공편을 늘려야 한다고 그가 말한 것은 들었지만 동아시아 공동체의 원대한 비전과는 거리가 먼 얘기다. 그렇다고 중국의 후진타오(胡錦濤)가 그런 말을 하는가. 그는 국내 문제에만 골몰할 뿐이다. 일본의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는 어떤가.

그는 애초 그런 일을 하기에는 부적격자다. 그는 늙은 일본 군인을 연상시킨다. 그는 2차 세계대전 이전의 강하고 자랑스러운 일본을 재건해야 한다고 믿는 일본의 우파 정치인 가운데 한 명일 뿐이다. 글로벌리스트가 아니다. 고이즈미의 염색체에는 우익의 인자가 들어 있다.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그토록 중시하는 것도 바로 그래서다. 나는 야스쿠니에 봉안돼 있는 A급 전범의 위패를 야스쿠니 밖으로 옮겨 분사해야 한다고 일본에서 가장 먼저 주장했다. 야스쿠니는 국적에 관계없이 전쟁 피해자의 위패를 봉안하는 곳이 돼야 한다. 역대 총리 가운데 유일하게 고이즈미만 야스쿠니를 정기적으로 참배하고 있는 것은 염색체 탓으로 볼 수밖에 없다.”



오마에 겐이치는
‘미스터 스트래티지(전략)’란 별명을 갖고 있는 오마에 겐이치는 23년간 세계적 경영 컨설팅 회사인 매킨지에서 일했다. 전략적 사고에 바탕을 둔 독창적 컨설팅 기법으로 전세계 수많은 다국적 기업의 경영 성과를 개선해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영국 시사주간지 <이코노미스트> 는 1994년 피터 드러커, 톰 피터스 등과 함께 그를 ‘세계의 사상적 지도자(경영 분야)’ 5인 중 한 명으로 선정했다. 경영 ·정치 ·사회 ·글로벌라이제이션 등을 주제로 활발한 저술 활동을 벌여 지금까지 140여 권의 책을 냈다.

영어로 쓴 10번째 저서인 <더 넥스트 글로벌 스테이지>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 출간)가 3월 미국에서 먼저 출판됐다. <국경 없는 세계> · <닷컴 쇼크> · <국민국가의 종말> · <보이지 않는 대륙> 등 16권의 책이 한국어로 번역돼 있다.
-결국 동아시아의 EU는 부질없는 꿈이라는 얘긴가.

“한 ·중 ·일 3국은 매우 밀접하게 얽혀 있다. 한국에는 평균 한 달에 한 번, 중국은 두 달에 한 번 정도 가는데 그때마다 3국이 정말 가깝다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서로를 엮어줄 만한 리더가 없다. 특히 일본의 경우 기득권을 포기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런 주장을 할 수 있는 인물이 없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이 점에서 한국의 역할에 기대를 걸고 있다. 유럽통합에서 베네룩스 3국이 담당했던 역할을 한국이 해줄 수 있다면 얘기는 달라질 수 있다. 베네룩스 3국은 독일과 프랑스 사이에서 항상 중립을 지켰다. 어느 한 쪽에도 기울지 않고 중립을 유지함으로써 양국의 신뢰를 얻었다. 한국은 유럽경제공동체(EEC) 결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 베네룩스 3국의 사례를 잘 연구해 볼 필요가 있다.

고려대와 이화여대에서 가끔 강의를 하면서 나는 한국의 젊은 세대가 과거의 민족주의적 선입견에서 자유롭고, 국제 무대에 적극 진출할 의지를 갖고 있다는 걸 발견한다. 이들을 볼 때마다 한국의 미래가 밝다고 느낀다. 그래서 나는 그들과 대화하는 것을 좋아한다. 한국은 대학개혁에서 일본보다 5~10년은 앞서 있다.

한국의 대학에서 교육받고 있는 젊은이들이 앞으로 아시아의 리더가 되는 날이 올 수도 있다. 그들이 한국인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되도록 훈련받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들이 리더가 될 수 있도록 돕고 싶다.”

-경제의 글로벌화가 심화되면서 국가나 국제적 차원에서 양극화 현상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고 있다. ‘빈익빈 부익부(貧益貧 富益富)’ 현상이다. 당신이 말한 대로 일등이 모든 것을 독식하고, 적자(適者)만이 생존하는 세상이 됐다. 살벌하지만 현실이다. 양극화 현상에 대한 대책이 있는가.

“그 말에도 일리는 있지만 사실을 왜곡하는 측면이 있다는 걸 알아야 한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했던 나라인 중국이나 인도를 보라. 과거 빈곤에 허덕이던 많은 사람이 지금은 중산층의 생활을 누리고 있다. 중국과 인도는 말할 것도 없고, 태국 ·베트남 ·러시아 등 과거에는 생각도 못했던 여러 나라에서 수많은 승자(勝者)들이 생겨나 부(富)의 축적에 참여하고 있다. 기술, 특히 정보기술(IT)의 급속한 발전이 배울 의지를 가진 사람들에게 경쟁에 참여할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만든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한 달 전 필리핀 마카티에 가보니 4만 명의 인력이 인터넷 전화로 미국의 콜센터에서 걸려오는 전화를 영어로 받고 있었다. 3년 전만 해도 필리핀에 그런 일자리는 전무했다. 이제는 일자리를 찾아 멀리 미국까지 가지 않더라도 영어와 일정 수준의 지적 능력만 갖추면 미국에 있는 콜센터 직원들보다 더 효과적으로 일하면서 돈을 벌 수가 있다. 미국 고객들의 입장에서도 환영이다. 미국인 직원보다 훨씬 친절하고 책임감도 강하기 때문이다. 이들은 월평균 임금이 40~50달러인 나라에서 그 열 배를 받고 있다. 따라서 승자가 모든 걸 독차지하는 게 아니라 인터넷 라인을 타고 고소득 일자리가 국경을 넘어 배분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문제는 글로벌 경제에 참여할 의지가 있느냐는 점이다. 교육을 받고, 지식을 활용할 의지가 있고, 글로벌 경제에 적극 참여할 의사가 있다면 출신국가나 배경, 성(性)에 상관없이 돈을 벌 수 있다. 기술 발전이 전세계적인 부의 재분배를 가능케 하고 있다.”

-기업들이 상시적인 구조조정 압력에 시달리면서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채용이 일상화하고 있다. 이에 따라 근로자들은 높은 실업률과 고용 불안에 시달리고 있다. 일자리 창출은 미국에서 한국까지 모든 나라의 화두가 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근로자 개개인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는가.

“인류 역사상 고용의 안정성이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산업혁명 이후 영국에서도, 미국에서도,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였다. 2차 세계대전 이전 일본은 자본가들의 천국이었다. 지난 30여 년간 한국 경제가 급속히 발전하면서 고용의 안정성이 한국에 마치 있었던 것 같은 착각을 할지 모르겠지만 그것은 정상적인 상황이 아니었다.

산업화가 확산되면서 영국의 일자리는 미국으로, 그것은 다시 일본으로, 또 한국과 인도네시아로 넘어갔다. 지금은 중국으로 넘어갔다. 과거 많은 유럽인이 미국과 호주로 이주했듯이 옛날에는 일자리에 따른 인구의 역외 유동현상이 심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인터넷 라인이 일자리 자체를 옮기기 때문이다. 아일랜드와 인도에 가만히 앉아서도 미국의 일자리를 구할 수 있는 세상이 된 것이다.
고용 안정성은 산업사회의 스탠더드가 아니다. 고용 안정성은 경제가 급속히 성장함에 따라 해고가 필요 없었던 시절의 일시적 현상이었을 뿐 결코 보장된 게 아니었다.”

-한국의 막강한 노조단체들이 들으면 펄쩍 뛸 얘기 같은데.

“노조의 문제가 바로 여기에 있다. 노조는 아주 짧았던 호시절의 비정상적 상황만을 생각하고 모든 요구 조건을 단체협약에 담자고 주장하고 있다. 전후 일본 근로자들이 누려왔던 고용 안정성이 많이 훼손됐지만 일본 근로자들은 큰 불평이 없다. 현실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업률이 높다지만 그래도 5% 선에 머물고 있다. 아직도 사회적으로 가족의 유대가 강한 편이라는 점도 있다. 35세 미만 미혼 자녀의 35%가 부모에게 얹혀 살고 있다. 그래서 청년 실업 문제가 심각한 사회 불안요인이 되지는 않고 있다. 이것이 미국과 다른 점이다. 가족적 유대의 끈을 잃지 않는 것은 과도기 사회에서 불가피한 대량해고가 사회적 무질서로 발전하지 않도록 막아주는 중요한 방파제가 될 것이다. 이 점은 전통적으로 가족적 유대가 강한 한국도 마찬가지다.

가족이나 친척이 서로 도와주는 가족적 유대의 끈이 존재하는 한 실업률이 10% 아니라 그 이상이 되더라도 사회 공동체가 지탱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두자릿수 실업률은 산업구조가 새롭게 재편되는 과도기적 상황에서 필요불가결한 현상이다. 모두가 실직하지 않기 위해 기존 일자리에 매달려 있으면 새로운 일자리는 만들어낼 수 없다. 따라서 과도기를 성공적으로 통과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일자리를 잃어야 한다. 그리고 재훈련을 받아야 한다. 그럴 의지가 있는 사람은 일시적 실업의 아픔을 딛고 재기할 수 있다. 산업구조의 이행 과정을 원만하게 하는 데 있어 가족적 유대가 매우 중요하다는 점을 다시 강조하고 싶다. 일본이나 한국이 전통적인 가족적 유대의 틀을 유지할 수 있기를 바라는 것은 이 때문이다. 과도기적 상황에서 그것이 깨지면 미국에서처럼 사회적 문제가 발생한다.”

-당신은 핵 엔지니어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미 매사추세츠공대(MIT)에서 원자력공학 박사학위를 받은 뒤 일본의 히타치(日立)에서 9년간 고속 증식 원자로 설계를 담당했다. 그래서 묻는 말인데 북한의 핵 보유가 명백해지면 일본도 핵무기 개발에 나설 것으로 보는가.

“그럴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일본은 마음만 먹으면 90일 내 핵무기를 제조해 미사일에 탑재할 수 있는 기술적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핵무기 제조에 필요한 모든 실험 과정을 30~40년 전에 다 끝냈다. 일본은 50t 이상의 플루토늄을 비축하고 있다. 핵폭탄 2,000개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다. 일본이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국민 정서 때문이다. 약 90%의 일본인이 핵무기 개발에 반대하고 있다. 핵무기의 유일한 희생자였던 일본인들은 지금도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의 비극을 잊지 못한다. 하지만 북한 핵무기의 직접적인 위협이 현실화하는 상황이 되면 여론이 핵무장 쪽으로 확 돌아설 것으로 본다.”

-그러나 미국이 반대하지 않겠는가.

“꼭 그렇다고 보지 않는다. 미국과 일본은 군사적으로 너무나 가까운 동맹이 되었다. 우리가 이라크에 병력을 파견한 것은 일본 자위대나 미군이나 마찬가지라는 미국 측 판단 때문이다. 일본의 핵 무장을 미국의 핵 무장과 동일한 것으로 미국이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일본의 핵 무장은 핵확산금지조약(NPT)에 의해 금지돼 있는데.

“미국만 결심하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는 문제다. 만일 일본이 북한 핵무기의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는 상황이 되면 고이즈미 총리는 부시 대통령과 담판해 일본 핵 무장에 대한 지지를 얻어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부시와 고이즈미는 위험할 정도로 가깝다. 미국이 당장은 이라크나 이란 ·시리아 등 중동지역에 힘을 집중하고 있지만 한국이나 일본이 북한의 실체적 위협에 직면하는 상황이 되면 힘을 이쪽으로 옮길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재정적 또는 물리적으로 도저히 감당하기 어렵다고 느끼게 되면 일본이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갖추는 것을 허용할 것으로 본다. 일본은 이미 북한 미사일의 위협에 맞서 미국과 미사일 방어(MD)체제를 공동 개발하고 있다.”

-6자 회담으로는 북핵 문제를 결코 해결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대안이 있는가.

“미국과 북한이 담판을 짓는 것이다. 그게 안 된다면 북한의 핵 위협을 철저히 무시하면서 북한과의 경제 교류를 완전히 중단하는 것이다. 서로 속셈과 입장이 다른 6개국이 모여 합의를 도출한다는 발상은 농담 같은 이야기다. 중국의 역할에 기대를 걸고 있지만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중국의 공산당 지도자들은 지금도 북한 지도층과 연대의식을 갖고 있다. 그들은 북한 정권이 유지되기를 바라고 있다. 북한이 철저히 혼자 힘으로 살아가야 하는 상황이 되면 결국 북한은 붕괴의 길로 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 과정에서 한국이나 일본을 향해 미사일을 발사하는 사태도 발생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는 각오해야 한다. 걸프전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텔아비브를 향해 날아오는 이라크 미사일의 공포 속에서도 자제하며 버텼다. 북한 미사일 때문에 수백 명, 아니 수천 명의 희생자가 발생하더라도 그 정도는 감내해야 한다. 일본에서 매년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만 1만 명이다. 북한의 위협에 질질 끌려다니기보다는 차라리 이 정도 피해를 감수하는 편이 낫다.”

-한반도 주변국들은 모두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을 지지한다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은 립서비스일 뿐 마음 속으로는 현상유지, 즉 분단 상태 유지를 바라고 있다고 한국인들은 의심하고 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국인들과 이야기를 해보면 늘 하는 말이 한국은 독일과 다르다는 것이다. 서독과 같은 경제적 능력도 없고, 독일식 흡수통일을 원치도 않는다고 말한다. 이렇게 말하는 한국인들의 속마음은 북한을 독립적인 국가로 유지함으로써 남한의 5분의 1 내지 6분의 1 비용으로 북한 노동력을 활용하는 데 있는 것 같다. 즉 북한을 사실상의 경제 식민지로 만드는 것이다. 따라서 한국인들은 주변국에 통일을 원하는지 물어볼 게 아니라 가슴에 손을 얹고 스스로 생각해 봐야 한다. 진정 통일을 원하는지, 아니면 단지 북한을 이용해 지금의 번영을 유지하기를 원하는지.

독일의 경우 동서독 주민들의 서로에 대한 감정이 통일 이후 오히려 악화됐다. 통일 전에는 서로 형제고 자매로 생각했지만 막상 합치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서독인들의 눈에 동독인들은 일은 하지 않으면서 사회복지 혜택만 바라는 사람들로 인식되고 있다. 두자릿수 실업률이라는 수치도 동독인들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통일이 되면 한국도 같은 문제에 봉착할 것이다. 많은 한국인과 이야기를 나눠 보고 하는 소리다. 한국인들의 문제는 솔직한 목소리를 스스로 내지 못하고 남을 통해 본심을 드러낸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설령 내가 ‘악마의 변호사’ 소리를 듣더라도 한국인들을 대신해 있는 그대로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돼 기쁘다.”

-독도 문제와 역사 교과서 문제로 한 ·일 관계가 심각한 갈등을 빚고 있는데.

“2002년 한겴?월드컵 공동 개최와 한류(韓流) 열풍으로 모처럼 조성된 양국 간 우호관계에 금이 갈까 걱정된다. 최근 몇 년 사이 한국은 일본 젊은 여성들의 주말 여행 메카가 됐다. 일종의 유행이다. 이는 일본의 젊은 여성들이 한국이라는 나라를 새롭게 ‘발견’한 데 따른 현상이다. 전세계에 만연한 테러 위험 속에서 멀리 갈 것 없이 바로 옆에 안전하고 매력적인 한국이라는 나라가 있다는 사실에 새삼 눈을 뜬 것이다. 그래서 쇼핑과 식도락을 즐기려고 의식적으로 주말 여행지로 한국을 택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한겴?간에는 역사에서 비롯된 앙금이 여전히 남아 있고, 그것은 이런저런 기회에 한국에서 일장기 소각과 같은 사태로 발전한다. 그때마다 일본 정부는 대한(對韓) 관계의 속도를 조절한다. 이에 따라 젊은 일본 여성들의 방한 열기도 영향을 받게 된다. 안타까운 일이다.”

- <겨울 연가> 효과를 어떻게 생각하는가.

“일본의 젊은 여성들과 중 ·장년 여성들의 한류 열풍은 구별해 볼 필요가 있다. 젊은 세대가 실리(實利)를 따져 주말 여행지로 한국을 택했다면 중 ·장년 세대는 감성으로 한국을 택했다고 볼 수 있다. ‘욘사마’ 배용준 때문이다. 지금 일본 중 ·장년 여성들은 욘사마에 푹 빠져 있다. 이들은 정치 상황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는다. 서울 시내에서 일장기가 불타든 말든 전혀 관심이 없다. 막무가내 형(型)이다. 한 편의 드라마가 이런 현상을 낳았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겨울연가> 를 본 일본의 중 ·장년 여성들은 일본에서는 사라진 순수한 사랑이 한국에는 아직 남아 있다는 환상을 갖고 있다.

‘욘사마’를 보면서 불쌍한 일본 중 ·장년 여성들은 ‘한국 남자는 아직 울 줄도 아네. 여자에게 베풀 친절이 아직 남아 있네’ 하면서 자기 최면에 빠진다. 거만한 일본 남자들은 여성에게 친절하지 않고, 사랑을 위해 흘릴 눈물도 없다고 한탄하면서 ‘욘사마’가 자극하는 순수한 사랑의 아득한 향수에 빠져 버리는 것이다. 이 또한 일종의 유행이지만 아무튼 한 ·일 관계를 위해서는 바람직한 현상이다. 어리석은 과거에서 비롯된 적대감을 뛰어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순수한 사랑을 통해 처음으로 민족 갈등을 넘어섰다는 점은 대단히 의미심장한 일이다. 드라마 자체도 잘 만들었지만 NHK가 이 드라마를 프라임 시간대에 방영한 것은 환상적인 아이디어였다.”

-한류 열기가 얼마나 오래갈 것으로 보는가.

“수백억 원을 들여 할리우드를 본떠 ‘한류우드’를 만든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는 너무 나간 아이디어 같다. 한류우드가 완공되는 5년쯤 후면 순수한 사랑의 붐이 태국으로 옮겨갈지 베트남으로 옮겨갈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나도 한류 현상이 지속되기를 바라지만 한국인들은 이 현상이 특별한 모멘트 때문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일본인들 스스로 부족하다고 막 느끼던 것을 한국 드라마에서 발견했을 뿐이다. 하지만 알고 보니 한국에도 그런 것은 없다고 깨닫게 되면 그 다음은 어디로 갈지 누가 알겠는가.”

-당신이 가진 창조적 에너지의 원천은 무엇인가.

“내 두 다리다. 평균 나는 1년에 25회 이상 해외여행을 한다. 나처럼 세계 각지를 많이 돌아다닌 사람도 드물 것이다. 미국에 살기도 했지만 미국 방문 횟수는 600회가 넘는다. 지난해에는 체코 ·헝가리 ·폴란드 등 중부유럽을 여행했다. 재작년에는 핀란드 ·스웨덴 ·노르웨이 등 북구를 집중적으로 파고들었다.

창조력과 상상력의 원천은 나 자신을 현장에 투사(投捨)하는 것이다. 그리고 느끼고, 보고 듣는 것이다. <차이나 임팩트> (China Impact)란 책도 그렇게 해서 나왔다. 중국어로 번역된 그 책을 읽은 중국인들은 ‘오마에 씨, 당신 책을 읽고 어째서 중국이 번창하고 있는지 비로소 이해하게 됐다’고 나에게 말한다. 중국으로 자본과 기술이 몰리는 이유에 대한 이론적 틀을 내가 제시했다는 것이다. 또 그들은 어떻게 하면 실패하지 않고 계속 발전할 수 있는지 묻는다.

그러면 나는 ‘탈(脫)중앙집권적 중화합중국(中華合衆國)’, 즉 분권적 지역국가에 해답이 있다고 말한다. 베이징(北京)의 중앙정부는 낮은 자세를 취하고, 대신 지방정부들이 세계와 직접 교호(交互)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베이징의 중앙정부 사람들은 이런 충고를 싫어하지만 그것이 바로 중국이 가야 할 길이다. 한국 정부에 대한 나의 메시지도 마찬가지다.

창조적 상상력은 골방에 갇혀 천장을 바라보는 데서 나오는 게 아니라 광범위하게 세상을 돌아보는 데서 나온다. 여수에 가본 적이 있는데 다도해로 이루어진 한려수도는 정말 아름다운 곳이다. 후쿠오카(福岡)와 이 지역을 연계하면 세계적 관광산업의 중심지로 손색 없는 곳이 될 것이다. 서울과 제주도만 한국이 아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게 너무 서울에 집중돼 있다. 일본의 16개 도시가 한국과 비행기로 연결돼 있지만 거의 대부분 서울로 간다. 유럽처럼 한국 내 10개 도시가 일본 내 20개 도시와 항공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날이 빨리 와야 한다. 이것은 정말 흥미로운 다음 단계가 될 것이다.”

-장시간 인터뷰에 응해줘 진심으로 고맙다.

“나로서는 최선을 다했다. 당신도 최선을 다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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