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안서 잘 써서 발탁된 사장들…“e-메일 한 통으로 CEO 됐다”
제안서 잘 써서 발탁된 사장들…“e-메일 한 통으로 CEO 됐다”
누가 21세기의 장량인가? 『삼국지』에 등장하는 명재상 제갈량(諸葛亮)과 비견되는 인물이 『초한지』의 장량(張良)이다. 유방의 책사였던 장량은 역발산기개세(力拔山氣蓋世)의 항우를 제압하고 한나라를 연 일등공신으로 꼽힌다. 『초한지』에서 장량은 시황제 암살에 실패한 후 황석(黃石) 을 만나 태공병법(太公兵法)을 배우고 『태공망병법서』를 받는다. 이 병서를 익힌 그는 유방의 군사(軍師)로 발탁되면서 탁월한 전략가로 이름을 떨쳤다. 이를 두고 조선을 창업한 책략가 정도전은 “유방이 장량을 등용한 것이 아니라 장량이 유방을 이용한 것”이라고 해석한다. 정도전은 두 사람의 인연을 빗대 “나라를 창업할 때는 임금이 신하를 발탁해 쓸 수 있으나 반대로 신하가 임금이 될 만한 그릇을 찾아 같이 나라를 세울 수도 있다”고 말했다. 600년 후 정도전의 이 말은 “디지털 시대엔 유능한 기업인이 성공할 만한 기업을 선택할 수도 있다”는 말로 수정돼야 할지 모르겠다. ‘21세기의 장량’이 나타나서다. 이 시대의 장량에겐 『태공망병법서』 대신 e-메일과 매력적인 보고서가 들려 있다. CEO로 발탁되는 경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과거나 지금이나 자신이 속한 조직에서 한 계단씩 승진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이다. 최근엔 간부급에서 하루아침에 CEO로 ‘벼락 출세’하는 사례도 부쩍 늘었다. 또 ‘CEO 시장’에서 공채로 뽑히는 일도 잦아지고 있다. 흔하지는 않지만 CEO를 ‘개척’하는 경우도 있다. 김 사장의 사례처럼 ‘e-메일 도전’이 대표적이다. 2∼3년 전 큰 인기를 끌었던 ‘바퀴 달린 신발’ 열풍은 e-메일을 통해 가능했다. 바퀴 달린 신발 브랜드인 ‘힐리스’는 대학생이던 이광석(29·전 컬쳐쇼크 사장)씨의 e-메일 제안을 통해 우리나라에 처음 선보였다. 2001년 8월 “바퀴 달린 신발이 미국에서 인기리에 판매되고 있다”는 기사를 읽은 이씨는 ‘사업 아이템으로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어 미국 본사에 판매 계약을 하자는 내용의 e-메일을 보냈다. “두세 번 메일을 보내도 답장이 없으니까 오기가 생기더군요. 며칠씩 고민해 마케팅 기획안을 보냈지요. 그러던 어느 날 경상도 사투리를 쓰는 한국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걸려 왔습니다." 알고 보니 힐리스 제품을 납품하는 부산 생산 공장으로부터 연락이 온 것. 결국 이씨는 국내 독점 판권을 따낼 수 있었다. 한때 힐리스는 월 30억원대 매출을 올리면서 승승장구했지만 지금은 인기가 시들해진 상태. 이씨도 다시 대학으로 돌아갔다. 거꾸로 해외에서 e-메일 연락이 온 사례도 있다. 2002년 3월 정보 보안업체인 시큐어소프트의 김홍선 사장(현 이사)은 장문의 e-메일을 한 통 받았다. 발신지는 일본의 도쿄. 현지 유학생 출신의 강승욱(37)씨가 보내온 것이었다. 강씨는 “시큐어소프트 홈페이지에 실린 김홍선 사장의 칼럼을 읽으면서 이 회사의 높은 기술력과 비전을 읽을 수 있었다”며 “함께 일하고 싶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마침 김 전 사장도 “세계 시장에서 승부를 걸어야 한다”고 고심하던 터였다. 한 달 뒤 강씨는 재팬시큐어소프트 사장이 됐다. 현재 재팬시큐어는 히타치제작소·NEC·후지쓰·일본HP 등과 거래를 트면서 일본 보안업계의 다크호스로 떠오르고 있다. CEO로 발탁된 것은 아니지만 은행가에서 e-메일 한 통이 신선한 바람이 된 적이 있다. 최근 어린이 경제 교육에 팔을 걷어붙이고 있는 국민은행. 사실 국민은행이 경제 교육에 투자하기 시작한 것은 한 통의 e-메일이 계기가 됐다. 이 은행에 근무하던 박철(37) 전문연구원은 2002년 8월 김정태 전 행장에게 A4용지 8장짜리 e-메일을 보내“어린이 금융 교육이 절실히 필요하다”며 교육 프로그램안을 제출했다. 이에 공감한 김 전 행장은 박 연구원을 곧바로 금융교육 태스크포스에 발령냈고, 이후 국민은행은 ‘키드뱅크 프로그램’을 만들어 은행가에 ‘금융 교육 바람’을 일으켰다. 보수적인 은행 분위기에서 일반 행원이 CEO에게 메일을 보낸 것도 파격적이지만, 이 제안을 즉시 수용한 CEO의 자세도 파격적이었다. e-메일이 아니라 보고서 발표를 잘해 CEO에 발탁된 사례도 있다. 김효준(49) BMW코리아 사장이 대표적이다. 김 사장은 수입차 업계에 들어오기 전에는 증권·보험·제약 업계에서 잔뼈가 굵었다. BMW코리아로 옮기기 전, ‘신텍스’라는 외국계 제약회사 한국지사 대표를 지내던 그는 신텍스가 스위스 로슈에 매각되면서 새로운 운명을 맞는다. 한국신텍스가 한국로슈에 흡수되면서 100여 명의 신텍스 직원들을 정리해고하는 악역을 맡게 된 것. 이때 김 사장은 자신은 실업자가 되면서까지 직원들에게 재취업 자리를 알선해주는 등 깔끔하게 구조조정 문제를 매듭지었다. 위기가 기회라고 했던가? 실직이 김 사장에겐 기회였다. 신텍스 직원들의 재취업을 위해 고용한 헤드 헌터가 김 사장을 눈여겨봤던 것. 모 헤드헌팅 업체에서 BMW 입사를 제안했다. 95년 그는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또 다른 후보 두 명과 독일에서 면접을 보게 된다. 이때 그는 ‘한국의 수입차 시장 현황’이라는 80여쪽짜리 두툼한 보고서를 준비해 갔다. 보고서를 검토한 본사에서는 김 사장을 BMW코리아 상무로 영입했고, 2000년 가을 그는 CEO로 승진했다. 이후 한국에서 BMW의 ‘질주’가 시작된 것은 유명한 얘기다. ‘보고서’ 하면 또 한 명 떠오르는 인물이 방일석(42) 올림푸스한국 사장이다. 방 사장은 삼성 출신이다. 삼성재팬의 주재원으로 삼성전자 플래시메모리의 주고객사였던 올림푸스와 자주 접촉할 기회를 가졌던 것이 그에게 인생의 전환점이 됐다. 당시 그는 플래시메모리 시장의 잠재력을 전망하면서 올림푸스 최고경영진에게 디지털카메라 시장에 대한 보고서를 올렸는데, 이 회사 경영진이 보고서의 내용에 감탄했다고 한다. 2000년 9월 올림푸스에 스카우트된 방 사장은 올림푸스한국을 설립 3년 만에 한국 디지털카메라 1위 업체로 키워냈다. 5명의 직원으로 설립된 올림푸스한국은 매출 3000억원대, 공장 직원을 포함해 350명이 근무하는 중견업체로 성장했다. “검증 없이 발탁은 없다” 보고서 한 권으로 발탁된 사례는 대기업에도 있다. 미국 경영대학원에서 재무학을 전공한 A(42)씨. 귀국해 금융당국에서 조사 업무를 보던 그는 하루아침에 연봉만 수억원을 넘게 받는 삼성그룹 상무에 스카우트됐다. 고급 자동차에 타워팰리스 한 채도 제공받았다. 이유인즉, 이건희 삼성 회장이 우연한 기회에 A씨가 쓴 ‘기업 소유지배구조에 관한 보고서’를 봤는데 “탁월하다”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는 것. 이에 이학수 구조조정본부 부회장이 나서서 ‘삼성행’을 권유하면서 그는 ‘S급 인재’로 스카우트됐다. 한 통의 e-메일, 한 권의 제안서가 인생을 바꾸고 회사를 바꾼 것이다. 그러나 e-메일 ‘한 방’으로 팔자가 바뀐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실력’이 있어야 ‘발탁’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김영섭 사장은 “무엇보다 프로페셔널이 기본. 그 다음이 유연한 기업 문화”라고 강조한다. 김 사장은 “알아보니 ARM에 e-메일 제안을 한 한국인만 10명이 넘었다”면서 “이런 때는 제안을 받은 쪽에서 철저하게 검증을 한다”고 말했다. 유연한 기업 문화와 ‘궁합’도 맞아야 한다. 이들이 e-메일 한 통, 보고서 한 권으로 발탁된 데는 ‘열린 문화’가 바탕이 됐다. 한 통의 e-메일이라도 허투루 여기지 않는 기업의 유연한 문화가 이런 깜짝 인사를 가능하게 한 것이다. 결국 장량의 ‘책략’도 중요하고, 그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준 유방의 ‘안목’도 중요하다는 얘기다. 김영섭 ARM코리아 사장 한국IBM 출신으로 ARM 본사에 1997년 ‘e-메일 제안서’ 내면서 사업 시작. 아태지역 총괄하면서 ARM그룹 전체 매출 3500억원 가운데 10% 넘게 기여. 김효준 BMW코리아 사장 한국신텍스 대표로 있다가 본사가 로슈에 합병되면서 ‘실직’. 95년 BMW코리아 상무로 옮길 때 ‘한국의 수입차 시장 현황’ 보고서가 독일 본사의 마음을 움직임. 방일석 올림푸스한국 사장 삼성재팬 시절 올림푸스에 올린 디지털카메라 시장 리포트를 통해 올림푸스한국 CEO에 발탁. 현재는 아시아·차이나 사업 총괄임원으로 스포트라이트. 강승욱 재팬시큐어소프트 사장 2002년 시큐어소프트의 김홍선 사장에게 “시큐어의 높은 기술력과 비전을 공유하고 싶다”는 e-메일 보내 재팬시큐어 사장에 스카우트. 이광석 전 컬쳐쇼크 사장 “바퀴 달린 신발 미국에서 인기”라는 기사 읽고 미국 본사에 e-메일. 한국 총판 계약 따내면서 한때 월 매출 30억원 올리기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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