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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인은 저축만 한다고?

아시아인은 저축만 한다고?

Frugal Is So Over

거시경제학의 파이 차트 세계에서 아시아 소비자의 ‘부재’를 질타하는 게 다시 유행하고 있다. 미국인들은 수입보다 지출을 많이 하기 위해 쉽게 빚을 낸다는 말을 듣고 있다. 반면 유럽인들은 경쟁력을 강화하기보다 주4일 근무제를 고수하려 들고, “아시아 소비자들은 실종된 지 오래됐다.”

이는 모건 스탠리의 수석 경제전문가 스티븐 로치가 지난해 말 ‘어떻게 세계를 구할 것인가’(How to Fix the World)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주장한 내용이다. 이런 낯익은 분석에 따르면, 심각할 정도로 균형을 잃은 세계경제를 바로잡는 방법은 간단하다. 미국인들은 저축을 늘리고, 유럽인들은 효율성을 늘리며, 아시아인들은 지쳐 쓰러질 때까지 쇼핑을 해야 한다.

적어도 아시아인들에게 이런 처방은 비교적 쉬워 보인다. 위의 논리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12가지 요리가 나오는 식사를 끝낸 후 허리끈을 조여야 하고, 유럽인들은 핵심 산업들을 합리화해야 한다. 반면 세계경제의 회복을 위해 아시아가 해야 할 일은 근면·저축·희생이라는 낡은 문화를 거부하고 쇼핑몰로 달려가 소비하고 소비하고 또 소비하는 것이다. 그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아 보인다. 그러나 미 경제 회복의 불꽃이 꺼지는 조짐이 계속 나오면서 “왜 아시아인들은 소비하지 않는가”라는 질문이 여느 때보다 절박하게 제기되고 있다.

사실상 아시아인들은 유례없이 지출을 많이 하며 저축을 적게 하고 있다. 수치상으로 보면 아시아 소비자들의 ‘무단결근’은 사실이 아니라 허구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 따르면 현재 일본의 가계는 독일이나 프랑스의 가계 가처분소득의 절반 미만을 저축하고 있다. 2004년 일본인들은 수입의 5.1%만을 저축했다. 오사카(大阪)대 경제학자 찰스 호리오카의 예측에 따르면 이런 비율은 인구 노화가 지속되면서 계속 낮아지다가 2007년께는 제로 내지 마이너스가 된다. 한국의 가계는 1988년 수입의 25%를 저축했지만 2003년에는 6.1%만 저축했다. 그리고 공식 통계에 따르면 88년 이후 태국의 개인 저축률은 14.8%에서 6.0%로 떨어졌다.

아시아의 다른 대다수 국가들은 가계저축률을 공표하지 않는다. 하지만 좀 더 광범한 추세가 크게 다르리라고 생각할 이유는 없다. 아시아 지역 전체의 가계 지출을 추적한 사람은 없다. 그러나 1인당 국민소득이 급증하고 저축률이 떨어지고 있다면 개인 지출이 늘고 있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이는 아시아에서 소비금융 산업의 급성장과 함께 상가·부티크·대형상점이 확산되고 있다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다. 서방세계 스타일의 소비 습관이 서울에서부터 상하이와 뭄바이에 이르기까지 뿌리를 내리고 있다.

그런데도 혼란이 빚어진 한 가지 이유는 각국 정부가 국민총저축(GNS)이라는 비교적 광범한 저축 지표를 사용하기 때문이다. GNS는 봉급생활자·기업·정부의 저축률과 무역수지상의 요소들을 일괄적으로 취급한다. 20년 전 아시아에서 가계저축은 GNS의 대부분을 차지했다. 그러나 최근에는 급증하는 기업 이윤과 무역 흑자가 GNS 비율을 크게 높이면서 가계저축의 급격한 감소를 눈에 띄지 않게 만들었다.

국민총생산(GNP) 비율로 볼 때 아시아의 민간 소비 수준은 여전히 유럽이나 미국보다 낮다. 로치가 지적하듯이 2000년 이래 일본의 수출은 민간소비보다 약 8배나 빠르게 증가했다. 다른 아시아 지역에서는 수출 신장속도가 3배 빨랐다. 로치는 2004년 중국의 국내소비가 GDP의 42% 선으로 기록적으로 낮아졌다고 지적한다. 그런 불균형의 원인은 아직도 미국 소비자들만 겨냥하는 아시아의 수출주도형 성장모델에 있다. 그러나 아시아에서 활동하는 경제 관측통들은 한국·태국·말레이시아 같은 나라들이 아시아개발은행(ADB)에서 “보다 균형잡힌 성장전략”이라고 부르는 내용을 포용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들은 또 실종된 가장 중요한 ‘소비자들’은 개인이 아니라 기업과 정부라고 지적한다.

아시아 저(低)소비론은 1970년대 이후부터 맹위를 떨쳐왔다. 당시 일본은 세계적인 무역대국으로 부상했지만 자국민들에게는 국제무역의 열매를 제공하지 않았다. 아시아 각국은 일본의 선례를 따라 (전략산업에 대한 투자를 위해) 저축률 증가와 가계지출 억제를 위한 규제조치들을 시행했다. 내집 마련을 열망하던 개인 소비자들은 높은 부동산 가격과 얻기 힘든 부동산 담보 대출 때문에 소위 전문가들이 말하는 ‘강요된 저축’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현금 결제 전통을 유지하기 위해 신용카드는 거부됐고, 높은 관세 때문에 외제 사치품은 극소수 상류층만이 구입할 수 있었다.

90년대 미국·유럽·세계무역기구(WTO) 등은 아시아 시장을 열고 환율을 합리화하라고 막대한 압력을 가했다. 일단 그렇게 되자 아시아인들은 서양식 소비행태를 신속히 받아들였다. 그러나 97~98년 금융위기 후 새로운 저축 패턴이 등장했다. 통화 붕괴 사태로 자극받은 기업들은 경제가 회복되자 은행융자를 줄이고 현금 보유량을 대량으로 늘리기 시작했다. 이는 국내 투자가 줄어들었다는 뜻이다. 골드먼 삭스의 경제전문가 아담 르 므쥐리에는 이렇게 말했다. “순수저축액이 엄청나게 남아도는 부문은 가계가 아니라 기업 부문이다. 소비자 부채는 분명히 늘고 있고, 그 이유는 개인들이 소비를 위해 더 많은 빚을 지기 때문이다.”

오늘날 이런 획기적인 변화가 가장 명백한 곳은 한때 유교적 근검정신으로 유명했던 한국이다. 한국 정부는 사치품 시장을 개방한 후 2000년에 소비 증진을 위한 신무기를 내놓았다. 바로 신용카드다. 수입 패션 명품, 해외 여행, 정보기술(IT) 제품 등의 비용을 신용카드로 처리하는 물결이 일면서 소비자 부채의 거품이 GNP의 약 66%나 차지할 정도로 커졌다. 결국엔 거품이 터졌다. 그러나 장재철 삼성경제연구소 수석연구원은 “신용카드 대란 사태가 올해 말이나 내년에 진정되면 소비 패턴이 되살아난다”면서 “우리는 이미 저축이 아니라 소비가 미덕인 세계에 살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다 해도 한국은 (새로워진 지출 행태에도 불구하고) 세계적으로 높은 수준의 GNS 비율(2003년 32.6%)을 유지하고 있다. 그 이유는 한국 주식회사가 기록적으로 많은 무역흑자를 기록하면서 기업은 부채를 상환하고(일종의 기업 저축), 정부는 국민연금제도를 위해 대규모 재정흑자 잉여금(정부 저축)을 관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요컨대 정부가 급속한 산업 발전을 위해 수십 년간 가계지출을 억눌렀던 중상주의적 패턴은 사라졌다.

아시아 전역에서 비슷한 형태가 나타났다. 오늘날 홍콩·싱가포르·대만·일본의 기업들은 저축왕들이다. 반면 가계는 수입의 대부분을 써버린다. 따라서 현금 지출을 늘려 세계무역 불균형을 시정할 위치에 소비자들이 있지 않으며, 개인들의 지출 증대가 관건이라면 그 시정은 이미 이뤄지고 있다.
오늘날 중국은 지출의 약소함으로 가장 많은 비판을 받고 있다.

현재 중국의 GNS 비율은 47.6%다. 2004년 국내소비는 GDP의 42% 선으로 감소했다. 민간 부문 평가에 따르면 중국의 가계저축률은 18~24%다(정부는 공식통계를 밝히지 않는다). 전성기의 일본처럼 중국은 수출 급증세를 영속화하기 위해 저평가된 통화 정책으로 세계시장에서 섬유제품을 덤핑으로 판매하면서도 수입시장은 열지 않고 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그러나 중국에서조차 오늘날 저축의 상당 부분은 사용되지 않은 무역흑자 형태를 취하고 있다. 그중 더 많은 돈을 투자할 경우 GNS 비율은 분명히 낮아진다. 그러나 어디에 투자해야 하나? 중국 경제는 이미 연간 10%씩 성장하고 있다. 2004년 중반에는 거품 붕괴 두려움으로 정부가 신규 제철소, 도심 부동산, 심지어 2008 올림픽용 스타디움에 대한 투자마저 부분적으로 억제했다. JP모건 도쿄 지사의 경제전문가 간노 마사키(菅野雅明)는 만일 중국이 무역흑자 전액을 재투자한다면 “중국 경제는 연간 20%씩 성장한다”고 말했다. 경제가 폭발해버린다는 뜻이다.

아시아 전역에 걸쳐 장기적인 해법은 훨씬 더 광범하게 기반을 둔 소비사회 건설이라고 개발전문가들은 말한다. 몇몇 나라에서는 이미 그런 과정이 진행되고 있다. 탁신 시나왓 태국 총리는 2001년 집권 이후 농촌 개발을 통해 내수를 진작시키는 정책을 시행했다. 현재 경제성장률은 6%를 넘어 내수가 강해졌음을 보여준다. 모건스탠리의 동남아 담당 경제전문가 대니얼 리언은 탁신이 “보다 균형잡힌 성장전략”을 시행해 “태국 경제를 경쟁적인 세계 시장에 복귀시켰다”고 말했다.

마닐라의 ADB 수석 이코노미스트 이프잘 알리 같은 개발문제 전문가들은 중국과 인도가 ‘개발붐에서 소외된 사람들’을 주류 소비자 대열에 합류시키는 데는 미흡했다고 말한다. 대신 이들 나라는 도시 중산층이 소수의 수혜층으로 구성되는 이중경제를 건설했다. 시골 개발을 가속화하기 위한 프로그램들도 시행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 과정이 고생스럽고, 아시아 대륙에 거대한 새로운 시장들이 생긴다는 약속은 미래에나 실현될 전망이다. 안타깝게도 그렇게 되기 훨씬 전에 미국과의 무역 불균형은 위기의 수준까지 악화할 수 있다. 알리는 “미국 소비자들이 하루만 소비를 중단하기로 결정해도 아시아에서는 재앙이 일어난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그런 일이 발생한다 해도 아시아의 개인 소비자들을 탓하지는 말라.

With B. J. LEE in Seoul,
HIDEKO TAKAYAMA in Tokyo,
SONIA KOLESNIKOV-JESSOP in Singapore,
JOE COCHRANE in Bangkok and JONATHAN ADAMS in Taipei
장병걸 cbg58@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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