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IV 물리칠 힘과 도구를 찾는다
HIV 물리칠 힘과 도구를 찾는다
The Life of a Virus Hunter 오늘이 토요일이라면 이곳이 분명히 나이로비군. 벨기에 출신인 페터 피요(57) 박사는 케냐 대초원의 눈부신 태양을 힐끗 쳐다봤다. 스위스 제네바로부터 밤새 비행기를 타고 와 이제 막 내렸다. 그는 산업 노동자들이 거주하는 마젱고 빈민가를 가로질러 걸어갔다. 내일 밤에는 르완다로 갈 예정이다. 두 나라를 1주일 간 공식 방문하는 떠들썩한 고위 인사 한 무리를 안내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엔 에이즈 계획(UNAIDS)의 사무국장으로 전 세계 에이즈 퇴치 노력을 진두지휘 중인 그에게 오늘의 출장은 의전 행사만이 아니다. 일종의 성지(聖地) 순례에 가깝다. 에이즈 출현 25주년에 즈음하여 자신이 에이즈와 싸우는 법을 배웠던 바로 그 장소를 다시 찾아왔기 때문이다. 마젱고가 의학계의 성지로 보이지는 않는다. 흙벽돌로 만든 초라한 오두막들과 노천 시장들이 뒤범벅된 장소일 뿐이다. 장돌뱅이 행상인들이 중고품 티셔츠를 소리쳐 팔고, 여성들은 몇 푼을 벌자고 몸을 파는 곳이다. 그러나 공식 명칭이 ‘품와니’인 이 피폐한 동네는 지난 20년간 의학적 발견의 묘상(苗床)이었다. 바로 이곳의 자그마한 성병 진료소에서 연구원들은 에이즈 바이러스(HIV)가 동아프리카에서 확산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또 포경 수술과 성병 치료로 HIV 확산 속도가 늦춰진다는 사실도 알았다. 일부 사람은 근본적으로 HIV에 면역돼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그런 사람들은 에이즈 바이러스에 오랫동안 노출돼도 계속 HIV 음성반응을 보였다. 가장 중요한 점은 바로 이곳에서 체중 40kg의 열정적인 간호사 엘리자베스 응구기가 에이즈 환자들을 공중보건의 전도사로 변신시키는 방법을 전 세계에 보여줬다는 사실이다. 1980년대 초 마젱고에서 성병 진료소가 문을 열었지만 찾아오는 사람은 없었다. 2000명이나 되는 이 지역의 윤락여성들은 연성하감·매독·임질 등 각종 성병에 걸려도 (심지어 무료인 경우에도) 치료를 받지 않았다. 거만한 의사들에게 인격적인 모욕을 당하는 일이 싫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다수 윤락여성은 남성 고객에게 콘돔 착용을 강요해선 안 된다는 점을 잘 알았다. 콘돔을 싫어하는 고객이 이웃의 다른 매춘부에게로 가버리면 50실링(700원가량)을 손해 보기 때문이다. 응구기는 “그동안 윤락여성은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다”고 말했다. 한쪽에선 피요 박사가 옛 친구들과 포옹하며 인사를 나눴다. 응구기의 설명이 이어졌다. “그래서 진흙탕 길을 걸어가 윤락여성들이 일하는 골목길에서 그들과 대화했다. 이런 식으로 말했다. ‘이봐요, 성병과 관련된 문제가 있어요? 우리가 왔어요! 당신들을 나무랄 생각은 없어요. 당신들은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에요.’” 응구기는 페니실린만 제공하지는 않았다. 윤락여성들이 일치단결해 대응하면 남성들도 좀 더 안전한 섹스를 받아들이게 된다고 응구기는 판단했다. 결국 그 판단이 옳았음이 입증됐다. 윤락여성들이 단결하면서 고객들의 콘돔 사용은 초기 4%에서 90% 이상으로 급증했다. 그 후 매년 HIV 감염자 수는 6000~1만 명 정도 줄었다. 응구기는 걸쭉한 목소리로 웃으며 이렇게 결론지었다. “사람들에게 더 나은 선택을 하라고 말로만 해서는 안 된다. 올바른 선택을 가능하게 하는 ‘힘’과 ‘도구’를 함께 줘야 한다.” 피요는 그런 일이 일어나는 현장을 지켜봤다. 그때의 경험 덕분에 피요는 UNAIDS 사무국장으로서의 비전을 세웠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 25년간 무엇인가를 배웠다면, 그것은 지역사회가 에이즈 문제를 통제할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다. 우리의 역할은 그들을 구조하는 일이 아니다. 그들을 지원하는 일이다.” (피요가 시끄러운 마젱고 거리를 걷는 동안 곁에선 경호원 한 명이 늘 따라다녔다.) 문제는 지원 방법이다. 이는 다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문제다. 세계적으로 매년 약 500만 명이 HIV에 감염되고, 300만 명이 에이즈로 죽어간다. 이들 중 90%는 개발도상국에 있다.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렀을까, 사태를 호전시킬 방법은 없을까? 피요의 생애는 그 두 가지 질문에 힌트를 제공한다. 의사이자 과학자로서 그는 세계 각국의 지도자들이 거의 20년간 이 문제를 외면하는 모습을 지켜봤다. 에이즈 퇴치 운동의 대변자로서 그는 최근의 폭발적인 관심과 지원금을 이끌어내는 데 일익을 담당했다. 그러나 요즘 들어 공직자로서는 훨씬 더 어려운 도전에 직면했다. 그는 그 도전을 “자금이 효력을 발휘하도록 만드는 일”이라고 표현했다. 80억 달러의 자금과 많은 사람의 선의만 있다면 에이즈가 근절될까? 장애물은 과거 어느 때보다도 높아졌다. 하지만 피요는 지금처럼 큰 희망을 느낀 적이 없다. 이 기사는 그의 삶에 관한 이야기다. 킨샤사의 괴질 피요는 ‘유엔 사무 부총장’입네 하고 직함을 내세우는 스타일이 아니다. 호리호리한 체구에 편안한 미소와 부드럽고 운율적인 목소리를 지닌 학자 타입이다. 정장 차림보다는 열대지역 특유의 화려한 티셔츠와 청바지를 즐겨 입는다. 물론 여러 나라 대통령·총리들과 자주 어울려 다니긴 하지만, 연구원들이나 풀뿌리 운동가들과 함께 있을 때 가장 편안하게 느끼는 듯하다. 그는 벨기에의 작은 농촌 마을 케르베르겐에서 성장했다. 몇 세기에 걸친 식민통치에서 아프리카를 해방시킨 개혁가들은 소년 피요의 우상이었다. 그는 18세에 집을 떠나 헨트 대학에서 의학을 공부했다. “교수님들은 전염병 연구의 전망이 없다는 점을 확신시켰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난 전염병 분야를 전공으로 택했다”고 피요는 회상한다. 의대 졸업 후 결혼한 그는 앤트워프의 열대 의학 연구소에서 제의한 연구원직을 받아들였다. 바로 그 연구소에서 우연히 접한 소포 꾸러미가 그의 인생 행로를 결정지었다. 그 소포는 1976년 자이르(옛 벨기에령 콩고)의 수도 킨샤사로부터 도착했다. 안에는 사망한 수녀의 간(肝) 조각들이 들어있었다. 그 수녀는 자이르 내륙 오지에서 발생한 치명적인 신종 출혈열로 사망했다. 그 질병은 열과 설사로 시작해 출혈·쇼크·조직손상으로 급속히 진행됐는데, 그 원인은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피요와 동료는 머리를 짜내 가며 그 간 조각들을 연구했다. 그때 세계보건기구(WHO)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그 전염병을 연구하려고 자이르에 파견되는 특별 조사단에 참가하겠느냐고 묻는 전화였다. 며칠 뒤, 당시 27세의 피요는 꾀죄죄한 차림새로 아프리카 중부의 열대우림 한가운데에서 겁먹은 환자들을 검역했다. 그 자신도 조만간 환자들과 같은 운명을 걷게 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처음에 우리가 아는 내용은 사람들이 죽어간다는 사실뿐이었다. 음식 때문일까? 아니면 물? 섹스? 모기? 우리는 아무런 단서도 없었다”고 그는 회상한다. 조사 결과 신종 병원균이 등장했다. 바로 공포의 에볼라 바이러스였다. 피요는 섹스의 살상력에 새로운 경외심을 안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연구원들은 감염 지역 남성들의 정액 표본을 수거했었다(“그것은 정말로 힘든 임무였다. 우리는 손짓으로 정액을 뽑는 시늉을 했지만 그 의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듯했다”고 그는 회상한다). 덕분에 성적 접촉이 감염 경로의 하나였음은 확인됐다. 섹스가 이토록 치명적인 바이러스를 전염시켰다면 다른 병원균을 전염시킬 가능성도 있지 않을까? 시기적으로 적합한 질문이었다. 1970년대 말에 성병은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였다. 피요는 성병을 연구할 기회를 어렵지 않게 찾았다. 그 후 미국 시애틀에서 2년을 보냈다. 워싱턴대 연구원들과 함께 임질·매독부터 헤르페스와 인간 유두종 바이러스까지 온갖 병원균의 발병을 추적했다. 성병 유행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사람은 남성 동성애자들이었다. 그들의 문제는 훨씬 더 다양했다. 시겔라·람블편모충증·아메바증 등이 목욕탕을 통해 맹렬히 번져갔다. 1981년엔 훨씬 더 괴이한 질병이 등장했다. 앤트워프로 돌아간 직후 피요는 로스앤젤레스에서 보내온 보고서를 읽었다. “적극적인 동성애자”인 다섯 명의 젊은 남성을 연구한 보고서였다. 그들은 여러 달째 구강칸디나증·발열·체중 감소를 겪다가 뉴모시스티스성 폐렴(PCP)으로 사망했다. 무엇인가 그들의 면역 체계를 망가뜨렸지만, 의사들은 그것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동성애 생활방식의 어떤 측면”이 한 가지 원인인지도 모른다고 추측할 뿐이었다. 괴질이 확산되면서 그런 인상은 더욱 굳어졌다. 그러나 그 괴질이 단순히 동성애와 관련된 전염병은 아니라는 사실이 곧 명백해졌다. 미국과 유럽 곳곳에서 주삿바늘 사용자, 혈우병 환자, 수혈자들도 같은 증상으로 앓기 시작했다. 그런데 프랑스와 벨기에에서 발생한 초기 환자의 다수는 앞서 언급한 어떤 범주에도 해당되지 않았다. 그들은 평범한 중산층에 이성애자였다. 한 가지 공통점은 모두 아프리카 적도 지방에서 왔다는 사실이었다. 1983년 가을, 피요와 벨기에인 동료는 네 명의 미국인과 함께 3주 동안 킨샤사에 가서 지냈다. 그곳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아보려는 목적에서였다. 킨샤사에 있는 마마 예모 병원의 어지러운 병동들을 보는 순간 진상은 명확해졌다. “복부를 한 대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내 또래 사람들이 병상 하나에(심지어 병상 아래에까지) 두세 명씩 누워있었고, 모두 죽어갔다”고 그는 회상했다. 피요의 연구 팀은 새로 입원한 환자들을 3주간 집중 관찰했다. 그 결과 자이르에서 에이즈가 이성 간의 성적 접촉으로 확산되는 중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몇 달 뒤 영국의 의학 잡지 랜싯은 그들의 연구 논문을 게재했다. 자이르의 이웃인 르완다 상황을 연구한 비슷한 보고서도 함께 실렸다. 피요 팀은 이렇게 결론지었다. “전염병학적 차원에서 볼 때 중앙아프리카 상황은 이 세계적인 질병의 새로운 전염 환경을 보여준다. 이성애자 사이에서도 대규모 전염이 가능하다는 뜻이다.” 이는 앞으로 아프리카를 비롯한 전 세계에 닥칠 운명을 정확히 기술한 결론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각국은 그런 결론을 외면하면서 그 후 15년의 세월을 낭비했다. 여기에는 에이즈 문제가 없다 1983년 말께 에이즈는 28개국에서 발병했다. 본격적인 과학 연구가 봇물을 이루기 시작했다. 피요는 1980년대 중반 앤트워프와 킨샤사를 오가며 미국과 자이르의 보건 전문가들과 협력했다. 그들은 ‘프로젝트 SIDA’(프로젝트 AIDS)로 알려진 연구 노력을 시작했고,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전 세계적으로 의학적 발견의 속도가 빨라졌다. 그 후 몇 년간 프랑스와 미국에서는 과학자들이 그 괴질을 일으키는 바이러스를 집중적으로 연구했다. 활동성이 약한 이 바이러스는 아프리카의 영장류 동물을 감염시키는 유사한 병원체의 후손인 듯했다. 마침내 HIV를 검사하는 혈액 테스트 방식이 처음으로 출시됐다. 1986년께 과학자들은 실패한 항암 치료제 AZT가 HIV 활동을 억제한다는 사실도 밝혀냈다. 그 발견은 생물의학계에 혁명의 발판을 마련했다. 물론 한 종류의 치료제만으로 억제하기에는 HIV가 너무 교활하다는 점이 나중에 밝혀졌지만 말이다. 그러나 과학계와 달리 정치적 차원에서는 그다지 진전이 없었다. 획기적인 킨샤사 연구에 참가한 미국인 중 한 명인 조셉 매코믹 박사가 처음으로 정치의 벽에 부닥쳤다. 그가 3주간의 조사를 마치고 귀국하자 미 질병관리센터(CDC)의 상급자들은 연구 결과에 큰 감명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레이건 행정부의 보건후생부 차관에게 조사 결과를 보고하려고 애틀랜타에 있는 CDC 본부의 전화기 스피커폰 둘레에 모였다. 매코믹은 1997년 출간된 자신의 회고록 ‘레벨 4(Level 4)’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회고했다. “모든 문제를 가능한 한 단순하고 명확하게 설명하려 애썼다. 그러나 전화 상대방은 오랫동안 침묵했다.” 침묵을 마친 보건부 차관은 그 뒤 20분간 오히려 매코믹에게 충고했다. 이성 간의 성행위로도 전염된다는 얘기는 매코믹이 분명히 잘못 파악한 것이니 차라리 에이즈 확산에서 모기의 역할을 조사해 보라고 제안했다. 매코믹은 모기를 매개로 하는 질병과 성적 접촉은 상관관계가 없다고 설명하려 애썼지만 소용이 없었다. 회고록에서 그는 이렇게 썼다. “내 말을 믿지 않으려는 그의 태도가 너무 완강해 무척 놀랐다. 에이즈에 관한 설명이 설득력을 가지려면 정치적·사회적으로 좀 더 받아들여질 만한 분위기가 필요했다.” 레이건 대통령조차 1987년 이전까지는 공개석상에서 ‘에이즈’라는 단어를 결코 사용하지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레이건은 섹스에서의 절제(예방적 노력에 불과하다)를 권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HIV 양성 반응을 보이는 외국인들의 미국 입국을 금지하는 법을 만들었다. 다른 나라들의 에이즈 대응 태도 역시 소극적이었다. 우간다 같은 예외적인 나라들도 있었지만(1980년대에 에이즈가 극성을 부리자 우간다는 과감하고 대대적인 의식 개혁 운동을 벌여 HIV 확산을 억제했다), 대다수 국가의 정치 지도자들은 에이즈와 관련된 나쁜 소식에 침묵으로 일관했다. 피요 박사가 1985년 나이로비의 마젱고 지역에 들어와 1년간 활동할 때 케냐에서는 나쁜 소식이 많지 않았다. 그러나 케냐는 분명히 에이즈에 취약한 상황이었다. 마젱고는 에이즈가 창궐하는 탄자니아 카게라 지역(르완다·우간다와 접해 있다)에서 들어온 가난한 여성들의 집결지였다. 또 중부 아프리카 전역에서 오는 화물 트럭의 중간 기착지였다. 그렇다면 HIV가 조용히 잠복하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장소가 아니었을까? 과학자들은 이를 확인하려고 현지 윤락업소 종사자 60명의 혈액 표본을 분석했다. 놀랍게도 그들 중 66%가 HIV 양성 반응을 보였다. 인근 성병 진료소에서 치료받던 남성의 경우는 8%, 그리고 나이로비 전역의 병원 근로자 2%도 양성 반응을 보였다. 영국의 의학잡지 뉴 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신은 그런 조사 결과를 1986년 2월호에 게재했다. 마젱고의 윤락업소 종사자들은 오늘날 유명해진 에이즈 예방 노력을 자발적으로 시작했다. 피요와 한 캐나다인 동료 연구원이 자신들의 조사 활동에 관해 토론을 벌인 내용이 한 영국 신문에 보도되자 케냐 정부는 그들을 구금했다. 피요는 이렇게 회상했다. “케냐 당국자들은 우리를 한 방에 가둬놓고는 국외 추방 여부를 의논했다. 마치 우리가 국가 기밀을 누설했다는 분위기였다.” 메시지와 메신저들 WHO 관리들은 에이즈라는 재앙의 확산을 예의주시했고, 공포감이 엄습하기 시작했다. 누군가 전 세계에 경각심을 불러 일으킬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WHO는 그런 일을 할 준비가 안 돼 있었다. 그래서 WHO 간부들은 도와줄 능력이 있는 사람을 찾기 시작했다. 결국 그들은 원하던 사람을 찾았다. 젊은 미국인 전염병 학자 조너선 맨 박사였다. 자이르에서 프로젝트 SIDA를 주도해오던 인물이었다. 하버드대 의사이자 노련한 에이즈 전사인 짐 킴(한국명 김용·47) 박사는 “조너선은 세계 보건 사업 분야에서 최초의 록스타 같은 인물이었다. 그는 누구도 해보지 못한 충격적인 방식으로 에이즈의 위험성을 알렸다”고 말했다. 맨은 1986년 WHO에 합류했다. 그리고 불과 3년 만에 국제적인 에이즈 프로그램을 만들어냈다. 프로그램 관계자 400명이 수십 개국의 에이즈 퇴치 계획을 지원했다. 그러나 맨이라는 별은 떠오를 때만큼 빠른 속도로 떨어졌다. 연간 9000만 달러 규모의 에이즈 프로그램을 후원하던 기증자들은 맨이 주장한 만큼의 신속한 결과가 나오지 않자 시큰둥한 태도로 변했다. 그리고 1989년 WHO는 시무룩한 표정의 나카지마 히로시 박사를 새로운 사무총장으로 영입했다. 하지만 그는 에이즈에는 관심이 별로 없었고 맨 박사의 홍보 노력에도 도움이 안 됐다. 두 사람의 관계는 나쁜 정도를 넘어 참지 못할 정도로 악화됐다. 결국 1990년 3월 11일 두 사람은 결별했다. 맨은 비통한 내용의 사임계를 제출하고 미국으로 돌아갔다. 8년 뒤 맨이 탑승한 스위스 항공 여객기가 뉴욕에서 제네바로 가는 도중 추락해 그는 사망했다. 피요는 80년대에 맨과 긴밀히 협력했다. 그리고 지금도 맨의 활력과 이상주의를 존경한다. 그러나 에이즈와의 전쟁에서 두 사람은 전략적으로 근본적인 차이를 보였다. 맨은 국제사회가 효율적으로 대응하려면 표준화가 가장 중요하다고 믿었다(지금도 많은 전문가는 그렇게 믿는다). 그의 꿈은 HIV 감염을 추적·예방·치료하는 효과적인 모델을 만들어내는 일이었다. 그리고 에이즈가 창궐하는 국가에 긴급 재난 구조 차원에서 그 모델을 패키지로 제공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피요는 제네바(WHO 본부가 있다)에서 구상한 청사진이 각자 독특한 상황에 처한 모든 나라와 지역에 충분히 적용된다고 믿지 않았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외부에서 들어와 포스터나 붙이는 방법으론 효과가 없다. 현지인들에게 확신을 심어줘야 한다. 그들에게는 싸워서 지켜야할 권리가 있으며, 상황이 개선된다는 확신 말이다. 그래야만 각종 검사 및 포스터와 콘돔도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한다.” 피요는 마젱고에서 그런 일이 일어나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리고 1992년께는 다른 지역에서도 그런 현상을 봤다. 유럽과 미국에서는 동성애자들이 가두 행진을 벌이며 좀 더 안전한 섹스를 홍보하고 좀 더 효능있는 치료약을 요구했다. 우간다에서는 TASO라는 명칭의 전국적인 상조회가 결성돼 에이즈 환자들과 에이즈 때문에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돌봐줬다. 인도 콜카타(캘커타의 공식 명칭)에서는 나이로비의 경우처럼 가난한 윤락여성들이 서로 단결해 보다 안전한 근로 환경을 요구했다. 유엔 산하 기구였다면 이런 노력을 세계적으로 확산시켰을까? 맨의 후임자가 궁지에 몰린 WHO 에이즈 프로그램의 한 직책을 피요에게 제의하자 그는 자신의 시험관들을 챙겨서 제네바로 날아갔다. 1992년 피요가 합류한 뒤에도 WHO의 에이즈 프로그램은 계속 위축됐다. 새로운 구상이 모색되기 시작했다. 에이즈로 죽는 사람은 이미 연간 100만 명에 달했다. 그 후유증도 커졌다. 아이들은 부모를 잃고, 학교는 교사들을 잃었으며, 경제계는 근로자들을 잃었다. 몇몇 유엔 기구들이 그런 문제들과 씨름했지만, 그런 노력을 통합 조정하는 사람이 없었다. 새로운 구상이란, 그 에이즈 프로그램을 확대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해서 에이즈 관련 통합 조직인 UNAIDS(U. N. Program on HIV/AIDS)가 탄생했다. UNAIDS는 한 기구에 소속되지 않고 모든 관련 기구들을 이끌며 에이즈를 퇴치하는 응집력 있는 노력을 기울였다. 맨의 프로그램을 승계한 WHO의 전문가 마이클 머슨 박사는 그 새로운 체제를 적극적으로 가동했고, 유엔은 1994년 말 그 기구를 승인했다. 이론상 에이즈 통제에는 이제 밝은 새 시대가 열렸다. 현재 예일대 공중보건 대학원 원장으로 근무하는 머슨은 이렇게 말했다. “당시 나는 우리들이 유엔의 모든 기구를 동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모두가 협력해 윤락·마약·저개발 등 에이즈를 창궐시키는 모든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할 길이 열렸다고 생각했다.” 피요도 신이 났다. 유엔은 이 새로운 프로그램을 이끌 책임자로 저명한 에이즈 전문가 6명을 검토한 끝에 피요를 UNAIDS 초대 국장으로 임명했다. 문제는 돈이다 그러나 온기(溫氣)는 오래가지 않았다. “UNAIDS가 창설되자마자 문제가 터지기 시작했다. 저항은 도처에서 일어났다”고 머슨은 말했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지지했던 국가들은 태도를 돌변해 프로그램 실행보다는 예산 삭감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미국과 영국의 해외 원조 당국자들은 특히 공격적이었다. 그들은 관련 예산을 연간 4000만 달러로 줄이고 UNAIDS의 활동을 제네바에 국한시키려 했다(이런 요구를 놓고 피요와 영국의 고위 관리는 초기의 공개 회의에서 심각하게 대립했다). 유엔 내부의 분위기도 더 이상 우호적이지 않았다. UNAIDS의 감독을 받게 된 기구들은 자체적인 에이즈 프로그램을 고사시켜가면서 UNAIDS의 감독을 피했다. 자신들의 세력권을 지키려는 의도였다. 1996년 UNAIDS가 업무를 개시한 뒤에는 WHO·세계은행·유니세프가 에이즈 예산을 삭감했다. 1990년대에는 상황이 그다지 호전되지 않았다. 피요는 고위급 정책결정자들 사이에서 고립됐고 그들을 어떻게 끌어들여야 할지도 몰랐다. 그는 “좀 더 과감하게 행동했어야 했는지도 모르겠다. 내게 어느 정도의 재량권이 있는지 몰랐다”고 말했다. 그래서 피요는 자칭‘증거에 입각한 활동 방식’으로 회귀했다. 그는 각 지역의 에이즈 퇴치 계획에서 중요한 교훈을 주는 사례들을 물색했다. 예컨대 주삿바늘 교환 프로그램이 마약 사용자들의 에이즈 감염률을 낮춘다는 사례가 있었다. 또 훌륭한 의료시설이 없는 지역에서도 치료가 가능하다는 사례도 있었다. 피요는 그런 계획들에 적지만 보조금을 제공했다. 그리고 과학자들을 파견해 각국 정부와 구호기관들이 에이즈와 그 영향에 관한 복잡한 통계자료들을 정리하도록 도와줬다. 그렇게 해서 나온 그림은 끔찍했다. 1997년 UNAIDS 추산에 따르면 세계적으로 3000만 명이 HIV에 감염됐다. 전년도의 부정확한 통계에 비해 800만 명이 늘어난 수치였다. 그리고 지난 1년 사이에 약 230만 명이 에이즈로 사망했다. 이제 HIV는 인도·방글라데시·네팔·미얀마 등 남아시아 국가들로 빠르게 확산돼갔다. 그 지역의 감염자 수는 약 300만 명이나 됐다. 그러나 보건 전문가들은 UNAIDS의 그런 노력에 감명을 받았지만 정치인과 언론은 여전히 무관심했다. 그레그 버먼이 2004년 출간한 자신의 저서 ‘보이지 않는 사람들(The Invisible People)’에서 지적했듯이, 90년대 내내 미국의 국제 에이즈 퇴치 예산은 연평균 1억 달러에 불과했다. 반면 국내 에이즈 예산은 100억 달러로 늘었다. 밀레니엄이 다가올 무렵 피요는 어떤 깨달음을 얻었다. “스스로에게 물어봤다. 정치인들이 진정으로 무엇에 관심을 가질까? 보건 문제는 아니었다. 정답은 경제와 안보였다. 보건은, 정치인들이 다른 문제들을 다 처리하고 난 뒤에도 돈이 남았을 때 언급하는 문제였다. 에이즈 문제를 우선순위가 높은 사안으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피요는 새로운 홍보전략을 개발했다. 외교관, 재계 지도자, 외교정책 결정권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에이즈는 이제 단순히 인도주의적 차원의 위기가 아니라고 그는 주장했다. 만일 가난한 나라에서 에이즈가 계속 학교·병원·공공시설의 핵심 인력을 앗아간다면, 수십 년에 걸쳐 이룩된 경제 발전이 무위로 돌아가고 세계 안보가 위협받게 된다고 설득했다. 갑자기 그의 말을 경청하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2000년 1월 유엔에 주재하는 미국 대사 리처드 홀브룩과 앨 고어 부통령이 그 문제를 유엔 안보리에 상정하면서, 역사상 처음으로 질병을 주제로 한 안보리 회의가 열렸다. 2001년에는 유엔 총회도 뒤따랐다. 100여 개국 대표가 에이즈 문제를 논의하는 5일간의 특별 회의에 참가했다. 한때 에이즈 문제를 외면하던 나라들은 20쪽에 달하는 선언문에서 에이즈를 “인간의 생명과 존엄성을 위협하는 가장 두려운 도전 중 하나”로 인정하고 에이즈 퇴치를 겨냥한 야심적인 목표들을 채택했다. 물론 선언문은 구속력이 없다. 그러나 새천년이 시작되면서 자금이 모이고 공약이 만발했다. 1990년대 말께 미국과 유럽에서는 에이즈 사망률이 급감했다. 제약회사들이 새로운 에이즈 퇴치 약품들을 개발하고, 과학자들이 그것들을 섞어 강력한 혼합제제를 만들어낸 덕분이었다. 21세기가 시작되면서 그런 약품들의 가격은 급락했다. 하지만 개발도상국의 에이즈 환자 600만 명 중 95%는 여전히 그런 약품을 이용하지 못했다. 미 컬럼비아대 메일맨 공중보건대학원의 앨런 로젠필드 원장은 이렇게 말했다. “가만히 앉아 다른 사람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태도는 이제 더 이상 용납되지 않는 시점이 됐다. ‘우리가 보유한 자원으로 무엇이 가능한가’라는 자세에서 ‘에이즈 위기를 극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라는 자세로 문제의식이 변했다.” 첫 번째 돌파구는 2002년 찾아왔다. 50개국 대표가 모여 ‘세계 에이즈·결핵·말라리아 퇴치 기금’을 창설했다. 그리고 2003년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미국이 독자적으로 5년간 150억 달러의 예산을 배정하는 에이즈 계획을 발표했다. 유엔 기구들도 적극 동참하겠다는 뜻을 재천명했다. 그리고 2003년 12월 WHO는 하버드대의 김용 박사를 세계적인 에이즈 퇴치 운동의 책임자로 기용했다. UNAIDS가 공동후원하는 소위 ‘3·5 이니셔티브’는 원래 목표(2005년 말까지 300만 명을 치료한다는 목표)에는 못 미쳤지만, 2년 만에 치료약을 이용하는 사람 수를 세 배로(40만 명에서 130만 명으로) 늘렸다. 마무리수 더 많은 환자를 치료해야 한다는 절박성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의 아프리카 지역 담당 에이즈 특사인 캐나다인 스티븐 루이스는 이렇게 말했다. “지금은 2006년이다. 그런데도 HIV 양성인 임신부 가운데 태아의 감염을 막는 간단한 도움을 받는 비율은 10%도 안 된다. 치료약에 접근하는 환자 수는 20%뿐이다. 이제 수많은 회의와 토론은 그만하고 실천에 나설 때가 됐다.” 그러나 관련 기구들과 운동가들이 그런 부름에 응할 경우 더 큰 문제를 보지 못할 위험이 있다. 에이즈 환자 치료가 생명을 살리고 희망을 부활시키겠지만 그것은 에이즈 자체를 종식시키는 전략이 아니다. 아직도 매년 500만 명이 HIV에 감염되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국제 에이즈 백신 계획의 책임자 세스 버클리 박사는 “예방에 신경 쓰지 않으면 치료약 수요를 감당하지 못하게 된다”고 경고했다. 백신·살균제 등 새로운 기술이 언젠가는 예방을 좀 더 수월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날 에이즈 예방 활동이, 20년 전 엘리자베스 응구기가 마젱고 골목길을 찾기 시작한 때보다 더 매력적이지는 않다. 또 에이즈를 둘러싼 논쟁이 줄어들지도 않았다. 병든 아기가 구명약을 필요로 할 때는 도덕적 합의를 이루기가 쉽다. 하지만 뿌리깊은 편견과 믿음이 개입돼 있을 때는 합의를 이루기가 어렵다. 그러나 피요는 실행가능한 합의를 달성하리라고 믿는다. 그 비결은, 작을지라도 함께 올라설 만한 공통의 기반을 찾는 일이다. 최근 언론 보도에 따르면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콘돔 사용 금지 규정을 재검토하는 중이다. 결혼한 사람들 사이의 HIV 전염을 예방하려는 목적에서다. 피요는 그 보도를 인용하면서“콘돔과 금욕 문제로 논쟁을 벌이는 사람들도 본질적으론 모두 생명을 중시한다”고 말했다. “만일 우리 모두가 섹스 때문에 죽음이 확산돼서는 안 된다는 점에 동의한다면, 그런 일의 발생을 막는 방법도 머리를 맞대고 의논해야 한다. 그리고 만일 콘돔이 한 상황에서 생명을 구한다면, 다른 상황들에서도 생명을 구하게 된다.” 그것은 낙관론을 가능하게 하는 최소한의 기반이다. 4000만 명이 HIV와 함께 살아가고, 8000명이 매일 죽는 상황에서는 그렇다. 그러나 피요는 사람들이 자신의 처지에서 생각하게 마련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다. 세계적인 차원의 그림은 어둡게 보일지 모르지만, 성공의 씨앗들은 곳곳에 있다고 그는 생각한다. 최근까지도 우간다·태국·브라질은 외로운 희망의 등대 같았다. 그러나 이제 아프리카 동부와 중부의 많은 지역에서 에이즈 감염률이 떨어지는 추세다. 케냐의 HIV 감염률은 1990년대 중반 이래 절반으로 낮아졌다. 피요는 르완다의 한 호텔 주점에서 술잔을 기울이며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 “오랜 세월 아프리카의 여러 곳을 돌아다니며 살아왔다. 많은 변화가 진행 중이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가는 곳마다 변화를 느낀다. 이제 남성과 여성들은 절망과 수치심을 덜 느낀다. 지역사회 전체가 스스로의 운명을 장악하려고 나선다. 우리가 그런 에너지를 활용하고 부자 나라의 자원과 결합한다면 향후 몇 년 사이에 엄청난 진전을 보게 된다.” 그런 일이 마젱고에서 일어났다면 다른 곳에서도 일어나야 한다. 장병걸 cbg58@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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