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동 격랑 헤쳐가는 부시
중동 격랑 헤쳐가는 부시
밀착취재: G8 정상회담 막후에서 지켜본 위기 대처 과정의 긴박한 순간들 미 대통령 전용기 맨앞에 위치한 스위트룸은 조용하고 조명이 어두운 공간이다. 대통령이 잠자고, 운동하고, 3만피트(약 9km) 상공에서 자유세계를 이끄는 개인적 성역이다. 독일을 경유해 주요 8개국(G8) 정상회담이 열리는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로 가는 8시간의 비행이 시작될 무렵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서재에서 회의실로 이어지는 긴 복도를 오가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전날 밤 워싱턴이 잠든 사이 중동의 또 다른 한구석에서 폭력사태가 발생했다. 레바논 내 무장세력 헤즈볼라가 이스라엘군 순찰대에 치명적인 매복공격을 가하면서 일어난 사태다. 그와 함께 애초 이란 핵과 러시아 민주주의가 주요 의제였던 정상회담이 테러와의 전쟁으로 초점을 옮기게 됐다. 기내에서 부시는 스티븐 해들리 국가안보 보좌관에게 새로운 상황보고를 계속 요구했다. 해들리는 보좌관실에 틀어박힌 채 상황을 더 잘 파악하려고 전 세계 관리들에게 단축 전화 다이얼을 돌렸다. “이스라엘의 계획이 어떻게 되는지 더 정확히 파악하라”고 부시는 해들리에게 지시했다. 부시는 보좌관들에게 자신이 G8 정상회담 참석차 스코틀랜드를 방문한 지난해 이맘때도 런던 지하철에서 자살폭탄 테러공격이 발생했음을 상기시켰다. G8 정상회담이 열릴 때마다 위기가 발생한다는 말은 농담치고는 섬뜩했다. 부시의 하루는 이제 막 시작됐지만 그가 민주주의 구축을 목표로 그토록 애써 온 중동은 전면전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지난 5년 동안 테러와 유혈사태가 잇따르면서 위기는 부시에게 일상사가 됐다. 고국에서라면 바로 곁에 있는 참모들, 그리고 전화만 걸면 연결되는 세계 지도자들과 함께 비공개적으로 사태에 대응해도 되는 여유가 있다. 그러나 이번엔 정반대다. 부시는 완전히 공개된 세계적인 정상회담 와중에 폭력사태에 대응해야 했다. 그런 회담에선 정상들이 서로 카메라 앞에서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보고싶어 한다. 그뒤 며칠간 부시는 각국 대통령과 총리들을 만나 9·11 사태 이후 자신이 얼마나 먼 길을 걸어 왔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마나 달라지지 않았는지 보여주었다. 부시는 이 새로운 전쟁은 이 지역 문제에 관한 자신의 초기 판단이 옳았음을 보여준다고 믿는다. 다시 말해 선과 악, 문명과 테러리즘, 그리고 자유와 이슬람 파시즘 간의 투쟁 말이다. 아직도 부시는 전쟁과 테러에 관한 한 세계의 지도자들은 자신이 어느 편에 서 있는지 결정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러나 이라크전 이후 그런 지도자 중 다수는 선뜻 부시 편을 들기 힘들다고 느끼게 됐다. 그 때문에 부시는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 애써 왔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 이후 지난 3년간 부시는 선택의 폭이 좁아졌다. 따라서 그로서도 외교적 수사를 더 유창하게 하는 법을 배울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시는 여전히 무엇이 올바른지 알려주는 자신의 본능을 믿으며 아직도 다른 사람들이 자신을 따르기 기대한다. 부시에게 외교는 협상을 통해 타협을 도출하는 기술이 아니라, 바라는 목적을 달성하는 보다 부드러운 방식일 뿐이다. 특히 이란과 북핵 문제에서 보듯 모든 다른 선택이 고갈되면 더욱 그렇다. 지난주 레바논 사태가 악화되자 여러 우방은 부시가 유엔을 통한 해결보다 특사를 파견하는 방안을 내놓길 바랐다. 절차에 소요되는 시간 낭비를 없애고 평화 도모에 더욱 힘쓰는 방식이다. 그러나 부시의 목표는 휴전 중재가 아니라 헤즈볼라를 무장 해제시키고, 이 테러단체를 지원하는 세력들이 야심을 단념하도록 만드는 일이다. 레바논 사태 발발을 계기로 뉴스위크는 언론사로는 드물게 대통령과 그의 측근들에게 가까이 접근할 기회를 얻었다. 그 결과 공중이나 지상에서 부시를 겹겹이 에워싼 보안 장벽 뒤에서 그들과 함께 여러 시간을 보냈다. 세계 지도자들과의 회담 중간중간 부시는 기탄없는 인터뷰 네 차례와 수백 장의 가식 없는 사진촬영에 기꺼이 응했다. 그는 특유의 외교 스타일, 간단히 말해 자신이 통제 가능한 1대 1의 만남에선 편안한 태도를 보였다. 그러나 정상회담의 공식행사와 지도자 간 집단토론에선 인내심을 보여주지 못했다(그런 집단토론에선 부시의 목소리도 여러 참석자 중 하나에 불과하다). 부시는 이례적으로 편안한 기분으로 뉴스위크의 인터뷰에 응했다. 집권 2기 최대의 외교적 위기를 맞아 때론 장난기 있고, 때론 심사숙고했으며, 때론 완고하고, 때론 수용적인 모습을 보였다.
7월 14일 금요일:전용기에서 중동정상과 전화 외교 백악관을 떠난 지 이틀 뒤 부시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친분을 쌓으며 멧돼지 요리를 즐겼다. 그 사이 부시의 측근들은 위기 대처에 분주했다. 정보를 수집하고, 이 지역을 오가며,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지상에선 이스라엘군이 베이루트 공항 활주로를 파괴하고, 베이루트의 헤즈볼라 본부를 초토화했다. 그 보복으로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3대 도시인 하이파에 로켓을 발사했으며 레바논 근해의 이스라엘 군함에도 공격을 가했다. 이제 부시가 나설 때였다. 독일을 거쳐 러시아의 G8 정상회담장으로 향하는 전용기에 다시 탑승한 부시는 해들리 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함께 나무 패널로 만든 긴 회의실에 앉았다. 두 측근은 정보 관리와 군 당국에 적군의 향후 행동을 예측하도록 요구하는 등 이번 사태의 추이를 논의해 왔다. 하지만 초기부터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과연 부시가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에게 전화를 해야 할까. 사실 올메르트는 부시의 친한 우방이자 친구다. 그러나 중동의 미묘한 외교에서 직접적 대화는 역효과를 거두기 십상이다. 만일 부시가 올메르트에게 직접 전화한다면 십중팔구 언론은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알고 싶어 한다. 부시는 폭격 목표를 승인하거나 불허한 듯한 인상을 주기 싫어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선 부시는 아랍 우방 지도자들의 지지 확보에 역점을 뒀다. 도청 안 되는 전화기를 앞에 두고 부시는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그리고 푸아드 시니오라 레바논 총리에게 할 말을 예행연습 했다. 부시는 그들에게 자신은 이스라엘 측에 베이루트의 신생 정부를 전복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까지 사태를 진정시키려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위험 요소로 간주하는 점도 함께 알려줬다. 예컨대 이란은 이 지역을 장악하려 노력 중이고, 이스라엘은 레바논의 새 정부를 무너뜨릴지 모르며, 시리아는 레바논을 되찾으려 할지 모른다는 등이었다. 그러나 부시의 주요 목표는 헤즈볼라가 문제라는 합의를 그들로부터 이끌어 내는 일이었다. 동시에 그들 모두가 이 극단주의 단체를 지지하는 바샤르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압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의 실제 원흉은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군사 조직”이라고 부시는 강조했다. 전화외교는 성공적이었다. 전화 연락을 받은 아랍 지도자들은 부시의 말에 동의했다. 정상 간 통화 내용을 함께 듣던 해들리는 부시에게 두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고, 라이스도 싱긋 웃었다. 부시는 인명 희생을 안타까워하면서 동시에 이번 위기를 엄청난 기회로 여겼다. 전화외교를 한 지 얼마 뒤 부시는 뉴스위크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번 사태를 불안 조장 세력들이 약점을 탐지하는 과정으로 본다. 그들은 우리의 결의를 여러 방식으로 시험 중이다. ” 대통령 휘장이 새겨진 ‘에어포스 원’ 재킷을 착용한 부시는 가죽의자를 뒤로 젖힌 채 앉아 있었다. 부시는 이번 폭력사태가 자신의 말보다 더 효과적으로 그 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무력을 언급하면 세계가 이를 경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나라가 우리와 함께 보조를 맞추게 하려면 때로는 내가 말로 할 때보다 더 설득력 있는 상황이 지상에서 발생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물론 늘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이라크의 경우 지상에서 벌어진 상황은 오랫동안 부시에게 불리하게 작용해 우방들이 멀어지도록 만들었다. G8 정상회담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먼저 약간의 사교 시간이 주어졌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 부부와의 만찬이었다. 부시와 푸틴의 관계는 그간 기복이 심했다가 최근엔 매우 냉랭해졌다. 부시는 앞으로 며칠간 푸틴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사이좋게 지내기를 희망했다. “대개는 어머니로부터 배웠지만 내가 우리 부모에게서 배운 교훈 중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도록 유도하는 능력”이라고 부시는 말했다. 그 말은 부시가 다른 나라 지도자의 ‘개인적 영역’을 침범한다는 뜻도 된다(실제로 그는 러시아에서 아무 예고 없이 메르켈 독일 총리의 어깨를 주물러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푸틴에게 그런 마사지가 통하긴 어렵다. 푸틴이 받는 압박감은 언론의 집중적 관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전 세계 언론이 그를 취재하러 러시아로 달려왔다”고 부시는 말했다. 푸틴은 반짝이는 갈색 정장 차림으로 자신의 오래된 러시아산 자동차를 자랑하며 부시와 로라 여사를 맞았다. 그러자 부시도 이에 질세라 푸틴에게 자녀들의 안부를 물었다. “아버지에게 딸들에 관해 말하게 하는 일은 언제나 좋은 일”이라고 부시는 나중에 말했다. 부시와 푸틴 부부는 음료수를 든 채 사진촬영을 위해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시는 술 대신 물을 마시면서 아래에 진을 친 기자들에게 소리쳤다. “어디 가서 러시아 보드카나 한잔 하고 좀 쉬도록 하시오. ”
7월 15일 토요일: 푸틴과의 신경전 이튿날 콘스탄티노프스키 궁전의 땅 위에 마련된 부시 진영의 분위기는 훨씬 더 삭막해졌다. 냉전이 끝난 지 한참 지났지만 경호원들은 대통령과 측근들이 항상 감시받는다고 믿었다. 경호팀은 러시아 첩자가 엿듣지 못하도록 백악관 사람들에게 ‘블랙베리’ 단말기와 휴대전화기를 반납하도록 했다. 러시아 측 보안당국은 수영장과 헬스장을 완벽히 갖춘, 판에 박은 양식의 별장에 도청장치가 설치돼 있는지 사전에 조사하지 못하게 했다. 인근의 상공에는 흰색 통신용 풍선이 떠 있다. 부시 측은 그 풍선이 옥외에서 이뤄지는 자신들의 대화를 모두 기록한다고 믿었다. 유일하게 안전한 곳은 장갑에 방음 장치까지 설치된 부시의 리무진이었다(백악관이 러시아로 공수해 왔다). 부시의 보좌관들은 푸틴에 관한 전략을 짤 때마다 드라이브 웨이에 주차된 그 자동차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별장의 방 중 한 곳에는 대통령 경호팀이 검은 텐트를 설치해 측근들이 벽이나 가구에 숨겨진 카메라에 전혀 잡히지 않고 비밀문서를 다룰 수 있도록 조치했다. 부시는 양국 정상회담장인 그 별장으로 이동하려 밖에서 푸틴을 기다리는 동안엔 특히 신중했다. 정상회담 주최자인 푸틴은 부시를 골프 카트에 태우고 회담장으로 가기로 했다. 푸틴은 카트를 직접 몰기를 고집했다. 뉴스위크는 푸틴이 사적인 자리에서도 KGB 출신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을 계속 지었는지, 또 문 닫힌 회담장 안에선 보다 느긋한 태도를 보였는지 물었다. 그러자 부시는 첩보용 풍선을 쳐다보며 똑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런 험악한 표현은 당신이나 쓰지, 나는 안 써요. ” 푸틴은 흰색 골프 카트를 타고 도착했다. 부시는 카트에 올라탄 뒤 라이스와 해들리에게도 함께 타자고 불렀다. 라이스는 아침 내내 중동으로 전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피곤해서인지 카트에 오르면서 운전자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푸틴이 고개를 돌려 라이스에게 미소를 짓자 그녀도 운전자가 러시아 대통령임을 깨달았다. 푸틴이 라이스를 포옹하려 몸을 기울이자 라이스는 “아니, 안녕하세요? 대통령 각하”라고 말했다. 부시는 푸틴과 하루 동안 빡빡한 일정을 앞뒀다. 그러나 보좌관들은 부시와 함께 사전에 논의해야 할 안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회담 전 브리핑에서 보좌진은 폭넓은 사안에 걸쳐 부시에게 논지를 주입시키려 했다. 그러나 세세한 문제에 휘말리기 싫어하는 부시는 들을 만큼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대체 안건 목록이 얼마나 길어야 하나”라고 쏘아붙였다. 적어도 부시로선 의례적인 인사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인사말은 어젯밤 만찬에서 이미 충분히 나눈 터였다. 부시는 “미리 그렇게 해두면 회담장에서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가 더 쉽다. 딱딱한 분위기를 깨려 애쓸 필요도 없으니까”라고 말했다. 두 정상의 가장 시급한 의제는 중동 위기였다. 러시아가 시리아·이란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아는 부시는 푸틴에게 개입을 촉구했다. 그러면서 “국가는 테러리즘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스스로를 지킬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체첸 반군과의 갈등 탓에 푸틴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표현이었다. 그후 부시는 “시리아 측에 그들도 이 자들을 통제할 의무가 있음을 상기시키면 큰 도움이 된다. 이는 이란 측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두 정상의 회담은 늦게까지 진행돼 ‘큰 행사’에 대비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큰 행사란 기자들에게 쓸 거리를 제공하려 의무적으로 갖는 기자회견이다. 전 세계 언론이 기다리는 대규모 기자회견장으로 가기 전 부시와 푸틴은 별장에서 각각 측근들과 상의했다. 보좌관들은 부시에게 예상 질문과 모범답안을 제시했다. 그들은 부시에게 요점을 적은 카드 두 장을 건넸다. 그러나 부시는 평소대로 원고를 무시하고 카드 한 장을 뒤집은 뒤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몇 분 내로 두 정상은 복잡한 복도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푸틴이 메모지 몇 장을 쥐고 있는 것을 보고 부시는 몸을 푸틴 쪽으로 기울이며 농담으로 “정말 거기 적힌대로 말할 거요”라고 물었다. 푸틴은 고개를 들어 부시를 노려보다 이내 농담임을 알아챘다. 부시는 자신의 빨간 넥타이를 추스르며 푸틴의 등을 슬쩍 두드렸다. 푸틴과 함께 카메라 플래시 세례 속에 회견장에 들어서며 부시가 말했다. “잘해 보시오. ” 부시는 푸틴도 나름대로 농담을 준비한 사실을 몰랐다. 러시아의 민주화 상황에 관한 뻔한 질문이 나오자 푸틴은 이렇게 맞받아쳤다. “솔직히 말하지만 우리는 분명 이라크와 똑같은 민주주의는 원치 않습니다. ” 그러자 러시아 기자단에선 파안대소가, 미국 기자단에선 너무 심한 얘기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통역을 통해 그 말뜻을 알아들으려 애쓰던 부시는 무심코 따라웃었지만 이내 웃음을 멈췄다. 부시는 “조금만 기다려 보시오”라고 맞받았지만 입가에선 점차 미소가 사라졌다. 기자들이 기자회견장에서 드러난 긴장의 의미를 분석하느라 바쁜 와중 속에도 회견을 끝내고 밖으로 나온 두 정상은 보다 즐거운 농담을 나눴다. 부시는 나중 “그는 농담을 잘한다. 그 농담은 꽤 괜찮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시는 푸틴과의 회담이 삐끗했다는 언론 분석을 무시하며 “이런 걸 보면 기자들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기사를 써두는 듯하단 말야”라고 말했다. 부시는 푸틴이 러시아의 자존심 때문에 그런 농담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러시아는 동등한 파트너가 되고싶어 한다. 이번 회담의 목표도 바로 그 점을 확인하는 일”이라고 부시는 강조했다. 푸틴도 부시와 마찬가지로 분위기를 주도하기 좋아한다. 나중 오찬에서 푸틴은 다른 정상까지 끌어들여 또 한 차례 농담을 했다. “앞으로 이틀간 우리의 과제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음식에 관해 불평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지요. ” 그날 저녁이 되자 다른 정상들도 도착했다. 공식적인 정상회담은 호화로운 축하연과 함께 시작됐다. 페테르 대제가 지은 페테르호프 궁전에서의 만찬은 환상적이고 서사시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역사적 위대성, 정치적 권력, 그리고 세속적인 유행을 함께 결합시킨 러시아 특유의 분위기였다. 러시아 측은 캐비아와 러시아 일반인이 즐기는 쇠고기 요리(푸틴이 시라크의 불평을 예상한 것도 이해가 간다) 등으로 구성된 일곱 가지 코스의 식사를 제공했다. 시중은 은발 가발을 착용한 웨이터들이 들었다. 만찬장 밖에선 핑크빛 물방울 무늬가 박힌 녹색 발레복을 입은 곰 한 마리가 묘기를 부렸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만찬장 안에서 희귀 야생 곰 한 마리가 최근 독일에서 날뛰다 사살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갑자기 자신이 아는 영어단어 중 곰(bear)과 관련된 단어를 쏟아냈다. “테디 베어, 우리는 비판을 감내해야 한다. 참기 어렵다(Teddy bear, We must bear criticism. Unbearable).” 고이즈미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 말을 들먹였지만 정상들은 모두 킬킬대며 웃었다. 나중 푸틴은 러시아의 민주주의에 관한 진지한 견해를 나눴다. 부시가 그에게 러시아에서 판사가 어떻게 임용되며 그들이 독립성을 유지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푸틴은 “옛 소련 시절엔 그리 독립적이지 못했다”며 “사법부를 손질할 필요가 있다”고 대답했다.
7월 16일 일요일: 정상들의 대화 중동 사태가 심화되는 동안 카메라가 미치지 않는 정상회담 한 켠에선 분주한 움직임이 있었다. 레바논 국경 너머로 로켓탄과 포탄이 교차하고 있었다. 부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국가안보 보좌관들이 조찬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위기 해결을 모색하는 정상회담 성명서 작성에 착수했다. “시라크와 부시 대통령이 모두 본국에 있었다면 전화통화를 주선하는 데 한나절 기다려야 했을지 모른다”고 조슈아 볼턴 백악관 비서실장은 말했다. “하지만 여기선 의사소통이 즉각적이고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위기가 한창일 때는 그것이 유리하다. ” 앞으로 부시의 측근들은 그 성명을 평화 로드맵으로 고수할 듯하다. 반면 비판자들은 폭력사태의 조기 종식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16일의 첫 번째 정상회담 전 부시는 차례로 블레어, 그리고 시라크와 무릎을 맞댔다. 그리고 시리아와 이란에 압박을 가하면서 헤즈볼라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 금세 의견 일치를 보았다. “시라크는 헤즈볼라, 그리고 시리아와 이란이 중동의 시아파 세력을 이룬다는 인식을 매우 강력히 지지했다”고 부시는 나중에 밝혔다(몇몇 수니파 아랍 지도자는 이란에서 이라크·시리아·레바논에 이르는 ‘시아파 초승달’의 부상에 관해서도 우려했지만 대부분 이라크 내 시아파 세력의 부상 때문이다). 부시는 정상회담이 비공개로 업무를 처리하기가 쉬운 자리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공개석상에서 실수할 기회도 그만큼 더 많아진다. 정상회담 중 부시 대통령은 하루에 서너 차례 기자회견을 한다. 그는 즉흥발언을 하며 자주 말을 바꾼다. 하지만 중동위기 동안엔 위험한 습관이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철저히 분석되기 때문이다. 부시는 지난 6년간 아랍-이스라엘 갈등에 직접적 개입을 피했다. 따라서 표현의 미세한 차이가 낯설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부시는 첫 번째 기자회견에선 시리아와 이란이 헤즈볼라의 후원자라는 말을 깜빡 빠뜨렸다. 백악관은 이미 성명서에서 양국을 언급했다. 이틀 뒤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섰을 때는 아예 이란을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 측엔 레바논 정부를 전복시켜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일도 잊었다. 정책이 갑자기 바뀌었다고 생각한 기자들은 부시 측에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다음에는 블레어 영국 총리와 함께 기자회견 할 차례였다. 부시의 측근들은 이번에는 말을 빠뜨리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켰다. 부시는 자신의 실수에 화를 내며 처음부터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데 불만을 드러냈다. 전체 설명문이 190단어에 달했다. “사안을 총체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사실을 그에게 일깨워줬다”고 댄 바틀릿 백악관 고문은 말했다. “한 가지 분석만 제기해서는 안 된다. 모든 측면을 골고루 언급해야 한다. ” 기자들의 질문도 까다로웠겠지만 부시에겐 장시간의 정상회담이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듯했다. 협상은 오래전에 마무리됐고, 이제 남은 일은 공허한 성명서 작성뿐이었다. 다른 정상들은 부시보다 더 잘 견뎌냈다. 오찬을 곁들인 장시간의 회의 뒤 부시는 숙소로 돌아가면서 마치 녹초가 된 듯 비틀거리며 방에 들어섰다. 정상회담의 빡빡한 첫날 일정 중 겨우 절반이 지난 시점이었다. 보통 외국에서 고작해야 하룻밤 이상 보내지 않는 부시에게 4일간의 러시아 여행은 영원과도 같았다. 부시는 오찬회의 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러 갔다. 그러나 후 주석은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중국이 G8의 정식 회원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러시아 측은 후 주석에게 육상로를 통한 이동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푸대접 때문에 후 주석은 어쩔 수 없이 물 위에 뜬 채 가는 수중익선을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콘스탄티노프스키 궁전 사이를 가로지르는 핀란드만을 건넜다. 그 수중익선은 고장이 자주 나고 매연까지 내뿜었다. 지난 며칠 사이에만 여러 척이 고장났다. 결과적으로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숙소 밖에서 선 채로 기다려야 했다. 그는 중국 보안요원과 잡담하며 시간을 때웠다. 부시는 그의 영어에 관해 질문을 던졌다. “영어 공부는 그동안 해왔소?” 잠시 후 보안요원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그 젊은이는 짧은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섰다.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 한 미국 대통령과의 대화를 중단할까, 아니면 그냥 음성메시지를 남기도록 할까. 요원은 휴대전화를 열고 몇 걸음 떨어졌다. “휴대전화 반칙!” 하고 부시가 소리쳤다. 그의 보좌관들은 긴장된 웃음을 흘렸다. 부시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휴대전화 벨소리다. “이 친구는 규칙을 몰랐으니 한 번 봐주지.” 부시가 말했다. 그날 오후 중동 관련 성명서의 최종 문안이 완성된다는 보고가 지도자들에게 전달됐다. 헤즈볼라에 로켓 공격 중단을 촉구하고 이스라엘에는 무력공세의 종식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약속된 4시가 돼도 문서는 도착하지 않았다. 5시에도 소식이 없었다. 부시는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다. “나는 이만 돌아가겠소”하고 방안을 가득 메운 대통령과 총리들에게 말했다. “샤워나 해야겠소. 회의라면 이제 물렸소. ” 일부 정상은 다함께 이견을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시는 더 이상 점잖게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나는 한심한 발상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고 부시는 나중에 말했다. “초점을 잃고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려 했을 게 분명하다. ” 블레어가 나서서 상황을 수습했다. “내가 문제를 해결해 보겠소”라고 부시에게 장담한 뒤 푸틴과 함께 옆방으로 사라졌다.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합석했다. 알고 보니 샤워하러 가려는 부시의 발목을 잡은 변수는 마지막 한 가지 흥정이었다. 테러리스트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무리들’을 모두 언급해야 하느냐는 문제였다. 부시는 이란과 시리아를 명시하려 했지만 그 때문에 합의가 안 되는 일은 원치 않았다. 부시는 뻔한 문제를 두고 그렇게 오랜 시간 왈가왈부한 데 발끈했다. “누가 헤즈볼라를 후원하는지는 모두가 다 안다”고 그는 나중에 말했다.
7월 17일 월요일: 회견없이 귀국길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날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단지 싸늘하고 습한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 마지막 오찬 석상에서 정상들은 외부 초청인사들과 마주 앉았다. 그중엔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도 끼어 있었다. 사실 G8 정상들은 방금 합의에 도달했다. 납치한 이스라엘군 병사들을 되돌려 보내고 로켓 발사를 중단하라고 헤즈볼라 측에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난은 그 이전에 이스라엘이 먼저 공격을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시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시리아에 압력을 가해 헤즈볼라가 이런 ‘빌어먹을 짓’을 못하게 하면 그만인데 말이오.” 부시가 블레어에게 말했다. 그 발언은 사적인 대화였지만 마이크를 통해 회담장 밖 기자들에게도 새나갔다. 라이스가 한 달 전 모스크바를 방문해 라브로프와 날카로운 설전을 벌일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라이스는 “우리가 러시아에 갈 때마다 대화가 새나간다”고 말했다. 부시는 오찬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공항으로 달려갔다. 다른 정상들이 으레 하는 기자회견도 외면했다. 러시아의 정상회담 공식 웹사이트엔 ‘미국 대통령, G8 정상회담 뒤 언론을 기피하다’란 제목이 올랐다. 대통령 전용기에서 샤워하고 휴식을 취한 부시가 회의실에 앉았다. 분명 귀국길에 오르게 돼 들뜬 표정이었다. 앞에는 큰 그릇 가득 팝콘이 놓였고, 부시는 계속 한움큼씩 입에 집어넣었다. 가끔씩 다이어트 코크를 마실 때만 손길을 멈췄다. 부시는 러시아에서 보낸 시간을 곰곰이 돌이켰다. 그러곤 정상회담과 이번 위기에 대한 자신의 대응 방식에 만족한 듯했다. 통상문제에서 약간의 진전이 있었고, 북한과 이란 핵문제를 둘러싸고 확실한 합의를 보았으며, 중동 문제에서도 강력한 성명 발표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레바논 사태가 악화하면서 부시의 우방과 비판론자들은 그의 외교적 해결의지가 얼마나 확고한지 의문을 제기한다. 정말 유엔을 인정할까, 아니면 완만한 외교 절차를 이용해 이스라엘군에 헤즈볼라를 소탕할 시간을 벌어주려는 속셈일까. 이스라엘의 공습이 한 주 더 지속돼도 온건한 아랍 국가들이 여전히 지지할까. 정작 부시는 많은 세상 사람이 오랫동안 자신에게 요구한 연합의 구축을 이행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게 바로 친구·우방과 함께 협력해 문제를 해결하는 외교 정책”이라고 부시는 뉴스위크에 말했다. “문제가 발생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 부시는 그런 외교적 수사를 배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을 실천하려면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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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금요일:전용기에서 중동정상과 전화 외교 백악관을 떠난 지 이틀 뒤 부시는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와 친분을 쌓으며 멧돼지 요리를 즐겼다. 그 사이 부시의 측근들은 위기 대처에 분주했다. 정보를 수집하고, 이 지역을 오가며,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지상에선 이스라엘군이 베이루트 공항 활주로를 파괴하고, 베이루트의 헤즈볼라 본부를 초토화했다. 그 보복으로 헤즈볼라는 이스라엘 3대 도시인 하이파에 로켓을 발사했으며 레바논 근해의 이스라엘 군함에도 공격을 가했다. 이제 부시가 나설 때였다. 독일을 거쳐 러시아의 G8 정상회담장으로 향하는 전용기에 다시 탑승한 부시는 해들리 안보보좌관, 콘돌리자 라이스 국무장관과 함께 나무 패널로 만든 긴 회의실에 앉았다. 두 측근은 정보 관리와 군 당국에 적군의 향후 행동을 예측하도록 요구하는 등 이번 사태의 추이를 논의해 왔다. 하지만 초기부터 한 가지 의문이 생겼다. 과연 부시가 에후드 올메르트 이스라엘 총리에게 전화를 해야 할까. 사실 올메르트는 부시의 친한 우방이자 친구다. 그러나 중동의 미묘한 외교에서 직접적 대화는 역효과를 거두기 십상이다. 만일 부시가 올메르트에게 직접 전화한다면 십중팔구 언론은 무슨 대화가 오갔는지 알고 싶어 한다. 부시는 폭격 목표를 승인하거나 불허한 듯한 인상을 주기 싫어했다. 그런 상황에서 우선 부시는 아랍 우방 지도자들의 지지 확보에 역점을 뒀다. 도청 안 되는 전화기를 앞에 두고 부시는 압둘라 2세 요르단 국왕,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그리고 푸아드 시니오라 레바논 총리에게 할 말을 예행연습 했다. 부시는 그들에게 자신은 이스라엘 측에 베이루트의 신생 정부를 전복하지 말라고 경고하면서까지 사태를 진정시키려 노력 중이라고 말했다. 자신이 위험 요소로 간주하는 점도 함께 알려줬다. 예컨대 이란은 이 지역을 장악하려 노력 중이고, 이스라엘은 레바논의 새 정부를 무너뜨릴지 모르며, 시리아는 레바논을 되찾으려 할지 모른다는 등이었다. 그러나 부시의 주요 목표는 헤즈볼라가 문제라는 합의를 그들로부터 이끌어 내는 일이었다. 동시에 그들 모두가 이 극단주의 단체를 지지하는 바샤르 아사드 시리아 대통령을 압박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의 실제 원흉은 하마스와 헤즈볼라의 군사 조직”이라고 부시는 강조했다. 전화외교는 성공적이었다. 전화 연락을 받은 아랍 지도자들은 부시의 말에 동의했다. 정상 간 통화 내용을 함께 듣던 해들리는 부시에게 두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고, 라이스도 싱긋 웃었다. 부시는 인명 희생을 안타까워하면서 동시에 이번 위기를 엄청난 기회로 여겼다. 전화외교를 한 지 얼마 뒤 부시는 뉴스위크에 이렇게 말했다. “나는 이번 사태를 불안 조장 세력들이 약점을 탐지하는 과정으로 본다. 그들은 우리의 결의를 여러 방식으로 시험 중이다. ” 대통령 휘장이 새겨진 ‘에어포스 원’ 재킷을 착용한 부시는 가죽의자를 뒤로 젖힌 채 앉아 있었다. 부시는 이번 폭력사태가 자신의 말보다 더 효과적으로 그 점을 보여준다고 생각했다. 그는 자신이 무력을 언급하면 세계가 이를 경계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다른 나라가 우리와 함께 보조를 맞추게 하려면 때로는 내가 말로 할 때보다 더 설득력 있는 상황이 지상에서 발생해야 한다”고 그는 말했다. 물론 늘 상황이 그렇게 돌아가지는 않았다. 이라크의 경우 지상에서 벌어진 상황은 오랫동안 부시에게 불리하게 작용해 우방들이 멀어지도록 만들었다. G8 정상회담이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나 먼저 약간의 사교 시간이 주어졌다. 푸틴 러시아 대통령 부부와의 만찬이었다. 부시와 푸틴의 관계는 그간 기복이 심했다가 최근엔 매우 냉랭해졌다. 부시는 앞으로 며칠간 푸틴의 지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고 사이좋게 지내기를 희망했다. “대개는 어머니로부터 배웠지만 내가 우리 부모에게서 배운 교훈 중 하나는 사람들로 하여금 긴장을 풀고 편안하게 시간을 보내도록 유도하는 능력”이라고 부시는 말했다. 그 말은 부시가 다른 나라 지도자의 ‘개인적 영역’을 침범한다는 뜻도 된다(실제로 그는 러시아에서 아무 예고 없이 메르켈 독일 총리의 어깨를 주물러 그녀를 깜짝 놀라게 했다). 하지만 푸틴에게 그런 마사지가 통하긴 어렵다. 푸틴이 받는 압박감은 언론의 집중적 관찰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전 세계 언론이 그를 취재하러 러시아로 달려왔다”고 부시는 말했다. 푸틴은 반짝이는 갈색 정장 차림으로 자신의 오래된 러시아산 자동차를 자랑하며 부시와 로라 여사를 맞았다. 그러자 부시도 이에 질세라 푸틴에게 자녀들의 안부를 물었다. “아버지에게 딸들에 관해 말하게 하는 일은 언제나 좋은 일”이라고 부시는 나중에 말했다. 부시와 푸틴 부부는 음료수를 든 채 사진촬영을 위해 발코니에 모습을 드러냈다. 부시는 술 대신 물을 마시면서 아래에 진을 친 기자들에게 소리쳤다. “어디 가서 러시아 보드카나 한잔 하고 좀 쉬도록 하시오. ”
7월 15일 토요일: 푸틴과의 신경전 이튿날 콘스탄티노프스키 궁전의 땅 위에 마련된 부시 진영의 분위기는 훨씬 더 삭막해졌다. 냉전이 끝난 지 한참 지났지만 경호원들은 대통령과 측근들이 항상 감시받는다고 믿었다. 경호팀은 러시아 첩자가 엿듣지 못하도록 백악관 사람들에게 ‘블랙베리’ 단말기와 휴대전화기를 반납하도록 했다. 러시아 측 보안당국은 수영장과 헬스장을 완벽히 갖춘, 판에 박은 양식의 별장에 도청장치가 설치돼 있는지 사전에 조사하지 못하게 했다. 인근의 상공에는 흰색 통신용 풍선이 떠 있다. 부시 측은 그 풍선이 옥외에서 이뤄지는 자신들의 대화를 모두 기록한다고 믿었다. 유일하게 안전한 곳은 장갑에 방음 장치까지 설치된 부시의 리무진이었다(백악관이 러시아로 공수해 왔다). 부시의 보좌관들은 푸틴에 관한 전략을 짤 때마다 드라이브 웨이에 주차된 그 자동차 안으로 들어가야 했다. 별장의 방 중 한 곳에는 대통령 경호팀이 검은 텐트를 설치해 측근들이 벽이나 가구에 숨겨진 카메라에 전혀 잡히지 않고 비밀문서를 다룰 수 있도록 조치했다. 부시는 양국 정상회담장인 그 별장으로 이동하려 밖에서 푸틴을 기다리는 동안엔 특히 신중했다. 정상회담 주최자인 푸틴은 부시를 골프 카트에 태우고 회담장으로 가기로 했다. 푸틴은 카트를 직접 몰기를 고집했다. 뉴스위크는 푸틴이 사적인 자리에서도 KGB 출신 특유의 무뚝뚝한 표정을 계속 지었는지, 또 문 닫힌 회담장 안에선 보다 느긋한 태도를 보였는지 물었다. 그러자 부시는 첩보용 풍선을 쳐다보며 똑똑한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그런 험악한 표현은 당신이나 쓰지, 나는 안 써요. ” 푸틴은 흰색 골프 카트를 타고 도착했다. 부시는 카트에 올라탄 뒤 라이스와 해들리에게도 함께 타자고 불렀다. 라이스는 아침 내내 중동으로 전화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피곤해서인지 카트에 오르면서 운전자에게 눈길도 주지 않았다. 그러나 푸틴이 고개를 돌려 라이스에게 미소를 짓자 그녀도 운전자가 러시아 대통령임을 깨달았다. 푸틴이 라이스를 포옹하려 몸을 기울이자 라이스는 “아니, 안녕하세요? 대통령 각하”라고 말했다. 부시는 푸틴과 하루 동안 빡빡한 일정을 앞뒀다. 그러나 보좌관들은 부시와 함께 사전에 논의해야 할 안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회담 전 브리핑에서 보좌진은 폭넓은 사안에 걸쳐 부시에게 논지를 주입시키려 했다. 그러나 세세한 문제에 휘말리기 싫어하는 부시는 들을 만큼 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대체 안건 목록이 얼마나 길어야 하나”라고 쏘아붙였다. 적어도 부시로선 의례적인 인사말은 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 인사말은 어젯밤 만찬에서 이미 충분히 나눈 터였다. 부시는 “미리 그렇게 해두면 회담장에서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가 더 쉽다. 딱딱한 분위기를 깨려 애쓸 필요도 없으니까”라고 말했다. 두 정상의 가장 시급한 의제는 중동 위기였다. 러시아가 시리아·이란과 각별한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아는 부시는 푸틴에게 개입을 촉구했다. 그러면서 “국가는 테러리즘의 공격을 받을 때마다 스스로를 지킬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체첸 반군과의 갈등 탓에 푸틴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표현이었다. 그후 부시는 “시리아 측에 그들도 이 자들을 통제할 의무가 있음을 상기시키면 큰 도움이 된다. 이는 이란 측도 마찬가지”라고 덧붙였다. 두 정상의 회담은 늦게까지 진행돼 ‘큰 행사’에 대비할 시간이 별로 없었다. 큰 행사란 기자들에게 쓸 거리를 제공하려 의무적으로 갖는 기자회견이다. 전 세계 언론이 기다리는 대규모 기자회견장으로 가기 전 부시와 푸틴은 별장에서 각각 측근들과 상의했다. 보좌관들은 부시에게 예상 질문과 모범답안을 제시했다. 그들은 부시에게 요점을 적은 카드 두 장을 건넸다. 그러나 부시는 평소대로 원고를 무시하고 카드 한 장을 뒤집은 뒤 거기에 자신의 생각을 적었다. 몇 분 내로 두 정상은 복잡한 복도에서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며 서 있었다. 푸틴이 메모지 몇 장을 쥐고 있는 것을 보고 부시는 몸을 푸틴 쪽으로 기울이며 농담으로 “정말 거기 적힌대로 말할 거요”라고 물었다. 푸틴은 고개를 들어 부시를 노려보다 이내 농담임을 알아챘다. 부시는 자신의 빨간 넥타이를 추스르며 푸틴의 등을 슬쩍 두드렸다. 푸틴과 함께 카메라 플래시 세례 속에 회견장에 들어서며 부시가 말했다. “잘해 보시오. ” 부시는 푸틴도 나름대로 농담을 준비한 사실을 몰랐다. 러시아의 민주화 상황에 관한 뻔한 질문이 나오자 푸틴은 이렇게 맞받아쳤다. “솔직히 말하지만 우리는 분명 이라크와 똑같은 민주주의는 원치 않습니다. ” 그러자 러시아 기자단에선 파안대소가, 미국 기자단에선 너무 심한 얘기 아니냐는 반응이 나왔다. 통역을 통해 그 말뜻을 알아들으려 애쓰던 부시는 무심코 따라웃었지만 이내 웃음을 멈췄다. 부시는 “조금만 기다려 보시오”라고 맞받았지만 입가에선 점차 미소가 사라졌다. 기자들이 기자회견장에서 드러난 긴장의 의미를 분석하느라 바쁜 와중 속에도 회견을 끝내고 밖으로 나온 두 정상은 보다 즐거운 농담을 나눴다. 부시는 나중 “그는 농담을 잘한다. 그 농담은 꽤 괜찮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부시는 푸틴과의 회담이 삐끗했다는 언론 분석을 무시하며 “이런 걸 보면 기자들이 현장에 도착하기 전에 미리 기사를 써두는 듯하단 말야”라고 말했다. 부시는 푸틴이 러시아의 자존심 때문에 그런 농담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 열쇠는 바로 여기에 있다. 러시아는 동등한 파트너가 되고싶어 한다. 이번 회담의 목표도 바로 그 점을 확인하는 일”이라고 부시는 강조했다. 푸틴도 부시와 마찬가지로 분위기를 주도하기 좋아한다. 나중 오찬에서 푸틴은 다른 정상까지 끌어들여 또 한 차례 농담을 했다. “앞으로 이틀간 우리의 과제는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이 음식에 관해 불평하지 못하도록 하는 일이지요. ” 그날 저녁이 되자 다른 정상들도 도착했다. 공식적인 정상회담은 호화로운 축하연과 함께 시작됐다. 페테르 대제가 지은 페테르호프 궁전에서의 만찬은 환상적이고 서사시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역사적 위대성, 정치적 권력, 그리고 세속적인 유행을 함께 결합시킨 러시아 특유의 분위기였다. 러시아 측은 캐비아와 러시아 일반인이 즐기는 쇠고기 요리(푸틴이 시라크의 불평을 예상한 것도 이해가 간다) 등으로 구성된 일곱 가지 코스의 식사를 제공했다. 시중은 은발 가발을 착용한 웨이터들이 들었다. 만찬장 밖에선 핑크빛 물방울 무늬가 박힌 녹색 발레복을 입은 곰 한 마리가 묘기를 부렸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만찬장 안에서 희귀 야생 곰 한 마리가 최근 독일에서 날뛰다 사살된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는 갑자기 자신이 아는 영어단어 중 곰(bear)과 관련된 단어를 쏟아냈다. “테디 베어, 우리는 비판을 감내해야 한다. 참기 어렵다(Teddy bear, We must bear criticism. Unbearable).” 고이즈미는 특별한 이유도 없이 그 말을 들먹였지만 정상들은 모두 킬킬대며 웃었다. 나중 푸틴은 러시아의 민주주의에 관한 진지한 견해를 나눴다. 부시가 그에게 러시아에서 판사가 어떻게 임용되며 그들이 독립성을 유지하는지 물었다. 그러자 푸틴은 “옛 소련 시절엔 그리 독립적이지 못했다”며 “사법부를 손질할 필요가 있다”고 대답했다.
7월 16일 일요일: 정상들의 대화 중동 사태가 심화되는 동안 카메라가 미치지 않는 정상회담 한 켠에선 분주한 움직임이 있었다. 레바논 국경 너머로 로켓탄과 포탄이 교차하고 있었다. 부시,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의 국가안보 보좌관들이 조찬모임을 가졌다. 그리고 위기 해결을 모색하는 정상회담 성명서 작성에 착수했다. “시라크와 부시 대통령이 모두 본국에 있었다면 전화통화를 주선하는 데 한나절 기다려야 했을지 모른다”고 조슈아 볼턴 백악관 비서실장은 말했다. “하지만 여기선 의사소통이 즉각적이고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위기가 한창일 때는 그것이 유리하다. ” 앞으로 부시의 측근들은 그 성명을 평화 로드맵으로 고수할 듯하다. 반면 비판자들은 폭력사태의 조기 종식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았다고 말할 것이다. 16일의 첫 번째 정상회담 전 부시는 차례로 블레어, 그리고 시라크와 무릎을 맞댔다. 그리고 시리아와 이란에 압박을 가하면서 헤즈볼라에 어떻게 대처해 나갈지 금세 의견 일치를 보았다. “시라크는 헤즈볼라, 그리고 시리아와 이란이 중동의 시아파 세력을 이룬다는 인식을 매우 강력히 지지했다”고 부시는 나중에 밝혔다(몇몇 수니파 아랍 지도자는 이란에서 이라크·시리아·레바논에 이르는 ‘시아파 초승달’의 부상에 관해서도 우려했지만 대부분 이라크 내 시아파 세력의 부상 때문이다). 부시는 정상회담이 비공개로 업무를 처리하기가 쉬운 자리라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공개석상에서 실수할 기회도 그만큼 더 많아진다. 정상회담 중 부시 대통령은 하루에 서너 차례 기자회견을 한다. 그는 즉흥발언을 하며 자주 말을 바꾼다. 하지만 중동위기 동안엔 위험한 습관이다. 그의 말 하나하나가 철저히 분석되기 때문이다. 부시는 지난 6년간 아랍-이스라엘 갈등에 직접적 개입을 피했다. 따라서 표현의 미세한 차이가 낯설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부시는 첫 번째 기자회견에선 시리아와 이란이 헤즈볼라의 후원자라는 말을 깜빡 빠뜨렸다. 백악관은 이미 성명서에서 양국을 언급했다. 이틀 뒤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섰을 때는 아예 이란을 언급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스라엘 측엔 레바논 정부를 전복시켜서는 안 된다고 경고하는 일도 잊었다. 정책이 갑자기 바뀌었다고 생각한 기자들은 부시 측에 질문공세를 퍼부었다. 다음에는 블레어 영국 총리와 함께 기자회견 할 차례였다. 부시의 측근들은 이번에는 말을 빠뜨리지 않도록 주의를 환기시켰다. 부시는 자신의 실수에 화를 내며 처음부터 다시 반복해야 한다는 데 불만을 드러냈다. 전체 설명문이 190단어에 달했다. “사안을 총체적으로 다뤄야 한다는 사실을 그에게 일깨워줬다”고 댄 바틀릿 백악관 고문은 말했다. “한 가지 분석만 제기해서는 안 된다. 모든 측면을 골고루 언급해야 한다. ” 기자들의 질문도 까다로웠겠지만 부시에겐 장시간의 정상회담이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듯했다. 협상은 오래전에 마무리됐고, 이제 남은 일은 공허한 성명서 작성뿐이었다. 다른 정상들은 부시보다 더 잘 견뎌냈다. 오찬을 곁들인 장시간의 회의 뒤 부시는 숙소로 돌아가면서 마치 녹초가 된 듯 비틀거리며 방에 들어섰다. 정상회담의 빡빡한 첫날 일정 중 겨우 절반이 지난 시점이었다. 보통 외국에서 고작해야 하룻밤 이상 보내지 않는 부시에게 4일간의 러시아 여행은 영원과도 같았다. 부시는 오찬회의 뒤 후진타오(胡錦濤) 중국 국가주석을 만나러 갔다. 그러나 후 주석은 약속 시간에 나타나지 않았다. 중국이 G8의 정식 회원국이 아니라는 이유로 러시아 측은 후 주석에게 육상로를 통한 이동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런 푸대접 때문에 후 주석은 어쩔 수 없이 물 위에 뜬 채 가는 수중익선을 타고 상트페테르부르크와 콘스탄티노프스키 궁전 사이를 가로지르는 핀란드만을 건넜다. 그 수중익선은 고장이 자주 나고 매연까지 내뿜었다. 지난 며칠 사이에만 여러 척이 고장났다. 결과적으로 미국 대통령은 자신의 숙소 밖에서 선 채로 기다려야 했다. 그는 중국 보안요원과 잡담하며 시간을 때웠다. 부시는 그의 영어에 관해 질문을 던졌다. “영어 공부는 그동안 해왔소?” 잠시 후 보안요원의 휴대전화 벨이 울렸다. 그 젊은이는 짧은 순간 선택의 기로에 섰다. 평생 한번 있을까 말까 한 미국 대통령과의 대화를 중단할까, 아니면 그냥 음성메시지를 남기도록 할까. 요원은 휴대전화를 열고 몇 걸음 떨어졌다. “휴대전화 반칙!” 하고 부시가 소리쳤다. 그의 보좌관들은 긴장된 웃음을 흘렸다. 부시가 가장 싫어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휴대전화 벨소리다. “이 친구는 규칙을 몰랐으니 한 번 봐주지.” 부시가 말했다. 그날 오후 중동 관련 성명서의 최종 문안이 완성된다는 보고가 지도자들에게 전달됐다. 헤즈볼라에 로켓 공격 중단을 촉구하고 이스라엘에는 무력공세의 종식을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약속된 4시가 돼도 문서는 도착하지 않았다. 5시에도 소식이 없었다. 부시는 인내의 한계에 도달했다. “나는 이만 돌아가겠소”하고 방안을 가득 메운 대통령과 총리들에게 말했다. “샤워나 해야겠소. 회의라면 이제 물렸소. ” 일부 정상은 다함께 이견을 조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부시는 더 이상 점잖게 앉아 있을 수 없었다. “나는 한심한 발상이라고 생각했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고 부시는 나중에 말했다. “초점을 잃고 모두가 자신의 의견을 반영하려 했을 게 분명하다. ” 블레어가 나서서 상황을 수습했다. “내가 문제를 해결해 보겠소”라고 부시에게 장담한 뒤 푸틴과 함께 옆방으로 사라졌다. 라이스 미 국무장관과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합석했다. 알고 보니 샤워하러 가려는 부시의 발목을 잡은 변수는 마지막 한 가지 흥정이었다. 테러리스트들과 그들을 지원하는 ‘무리들’을 모두 언급해야 하느냐는 문제였다. 부시는 이란과 시리아를 명시하려 했지만 그 때문에 합의가 안 되는 일은 원치 않았다. 부시는 뻔한 문제를 두고 그렇게 오랜 시간 왈가왈부한 데 발끈했다. “누가 헤즈볼라를 후원하는지는 모두가 다 안다”고 그는 나중에 말했다.
7월 17일 월요일: 회견없이 귀국길 러시아에서의 마지막 날 분위기가 썰렁해졌다. 단지 싸늘하고 습한 날씨 탓만은 아니었다. 마지막 오찬 석상에서 정상들은 외부 초청인사들과 마주 앉았다. 그중엔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도 끼어 있었다. 사실 G8 정상들은 방금 합의에 도달했다. 납치한 이스라엘군 병사들을 되돌려 보내고 로켓 발사를 중단하라고 헤즈볼라 측에 촉구하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아난은 그 이전에 이스라엘이 먼저 공격을 중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시는 불만스러운 표정이었다. “시리아에 압력을 가해 헤즈볼라가 이런 ‘빌어먹을 짓’을 못하게 하면 그만인데 말이오.” 부시가 블레어에게 말했다. 그 발언은 사적인 대화였지만 마이크를 통해 회담장 밖 기자들에게도 새나갔다. 라이스가 한 달 전 모스크바를 방문해 라브로프와 날카로운 설전을 벌일 때도 그런 일이 있었다. 라이스는 “우리가 러시아에 갈 때마다 대화가 새나간다”고 말했다. 부시는 오찬이 끝나자마자 서둘러 공항으로 달려갔다. 다른 정상들이 으레 하는 기자회견도 외면했다. 러시아의 정상회담 공식 웹사이트엔 ‘미국 대통령, G8 정상회담 뒤 언론을 기피하다’란 제목이 올랐다. 대통령 전용기에서 샤워하고 휴식을 취한 부시가 회의실에 앉았다. 분명 귀국길에 오르게 돼 들뜬 표정이었다. 앞에는 큰 그릇 가득 팝콘이 놓였고, 부시는 계속 한움큼씩 입에 집어넣었다. 가끔씩 다이어트 코크를 마실 때만 손길을 멈췄다. 부시는 러시아에서 보낸 시간을 곰곰이 돌이켰다. 그러곤 정상회담과 이번 위기에 대한 자신의 대응 방식에 만족한 듯했다. 통상문제에서 약간의 진전이 있었고, 북한과 이란 핵문제를 둘러싸고 확실한 합의를 보았으며, 중동 문제에서도 강력한 성명 발표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레바논 사태가 악화하면서 부시의 우방과 비판론자들은 그의 외교적 해결의지가 얼마나 확고한지 의문을 제기한다. 정말 유엔을 인정할까, 아니면 완만한 외교 절차를 이용해 이스라엘군에 헤즈볼라를 소탕할 시간을 벌어주려는 속셈일까. 이스라엘의 공습이 한 주 더 지속돼도 온건한 아랍 국가들이 여전히 지지할까. 정작 부시는 많은 세상 사람이 오랫동안 자신에게 요구한 연합의 구축을 이행할 뿐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게 바로 친구·우방과 함께 협력해 문제를 해결하는 외교 정책”이라고 부시는 뉴스위크에 말했다. “문제가 발생하는 데도 시간이 걸리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데도 시간이 걸린다. ” 부시는 그런 외교적 수사를 배우는 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것을 실천하려면 좀 더 오랜 시간이 걸리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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