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진정한 인간승리 9·11과 당시 영웅들
새 영화 ‘월드 트레이드 센터’올리버 스톤이 객관적 해석 철저하게 비정치적으로 접근 올리버 스톤의 새 영화 ‘월드 트레이드 센터(World Trade Center)’를 보면 2001년 9월 11일 오전, 항만청 소속 경찰관 윌 히메노는 평소와 다름없이 직무를 수행한다. 버스터미널에서 윤락녀와 거지들을 쫓아내다가 상공에서 나는 굉음을 듣는다. 이때 카메라는 하늘이 아니라 땅 쪽으로 휙 돌아간다. 낮게 나는 비행기의 그림자가 건물 정면을 따라 올라가는 모습이 보인다. 스톤은 두 비행기가 트윈타워에 충돌하는 모습은 보여주지 않는다. 역사가 전개되는 순간을 지상에서 일어난 모습대로, 보통사람의 시각에서 보게 된다는 점을 영화는 처음부터 분명히 한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에서 그려진 경찰관들은 진짜 경찰이며, 스톤의 이야기는 실화다. 그의 영웅들은 눈앞에 다가오는 재앙을 맞이할 태세가 돼 있지 않았다. 존 매클로플린(니컬러스 케이지) 경사가 지휘하는 소규모 팀의 대원들은 대부분 건물 안에 자청해 들어가기를 거부하지만 히메노(마이클 페냐)를 포함한 일부가 앞으로 나선다. 이들은 겁을 먹었다. 사방에서 시신이 떨어지는, 구역질 나는 쿵 소리가 들릴 때마다 더욱더 간이 오그라든다. 재난 영화에 나오는 액션 영웅들처럼 과감하게 건물 안으로 진입하지는 못했다. 대신 천천히 쭈뼛거리며 들어간다. 그래도 무서운 위험 앞에서 임무를 수행한다. 그들의 용기, 그들 가족의 용기, 그들을 구조한 사람들의 용기가 가장 암울한 날을 되살려준다. 이는 사람들이 올리버 스톤에게서 기대했던 9·11 이야기와 거리가 있다. 배경에 도사린 음모가 없다. 다른 속셈도 없다. 5년 전 9·11 사태 직후 스톤은 그 테러를 영화로 어떻게 만들겠느냐는 질문을 받고 테러리즘을 다룬 프랑스의 고전 스릴러 ‘알제리 전투’를 들먹였다. 아랍의 관점과 미국의 관점 양쪽에서 테러의 전개과정을 보여준다는 추적과정 같은 영화구조를 묘사했다. “통상적으로 요구되는 영웅을 찾지 않고 현실에 맞게 만든다면 근사한 범죄영화가 될 성싶다.” 스톤은 당시 뉴욕 영화제에서 기자가 진행을 맡은 ‘중요한 영화 만들기’라는 토론회의 패널로 참석했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한 듯 초췌한 얼굴이었다. 9·11이 터진 지 한 달도 채 안 된 시점이었으며 열기가 뜨거웠다. 독설가인 영국 언론인 크리스토퍼 히첸스는 스톤이 무심코 테러를 가리켜 “폭동(revolt)”이라는 표현을 쓰자 곧바로 공격에 나섰다. 스톤은 흥분한 어조로 자본주의의 고삐가 풀려 영화산업을 망치느니 어쩌니 하고 침을 튀겼다. 언론은 그를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싸운 일이나 자신에 관한 나쁜 기사를 결코 잊는 법이 없는 스톤은 언론이 자기 말을 왜곡했다며 아직도 분을 삭이지 못했다. 마치 자신이 9·11 테러가 기업의 신 세계질서를 겨눈 특정한 반응이라고 말한 양 들리게 했다는 뜻이다. 요즘에는 그가 9·11에 관해 어떤 이론이 있는지 모르겠지만 남에게 털어놓지는 않는다. 자본주의의 행진은 계속된다. 매클로플린과 히메노의 전적인 협조로 만들어진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알제리 전투’와는 너무나 거리가 멀다. 테러리즘에는 관심이 없다. 명백한 주제는 영웅적 행위다. 얼핏 이 영화를 본 일부 관객은 항상 논란을 일으키는 감독의 작품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재래식이라는 생각을 품을지도 모르겠다. 스톤이 직접 대본을 쓰지 않은 보기 드문 작품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톤은 안드레아 벌로프의 인상적인 대본을 처음 읽고 나서 영화를 만들고 싶다는 욕구를 느껴 감독을 자청했다. “대본의 장점은 희망을 제시한다는 점이었다”고 스톤은 말했다. 두 개나 되는 오스카(아카데미상 트로피)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더’를 비롯한 기타 작품의 흥행 실패로 할리우드가 자신을 오염된 상품으로 간주한다고 스톤은 느꼈다. “말하자면 별볼일없는 사람이 됐으니 체포될 일도 없어진 셈이었다.” 그러나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결코 돈이나 벌자고 성의 없이 만든 작품이 아니다. 스톤은 제작에 순수한 열정을 쏟아부었다. 남자들의 집단생활, 서민층의 동지애, 용기의 본성 등을 조명한 이 영화의 몇 가지 특성은 20년 전 ‘플래툰(Platoon)’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짜릿할 정도로 감동적이고 완전히 비정치적인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관객을 사로잡는다. 단순한 차원에서는 구난(救難) 영화다. 매클로플린(53)과 히메노(38)가 인명을 구조하러 나서는 순간 건물이 무너져 내린다. 스톤은 건물이 안에서 파열하는 모습(특히 그 소리)을 무시무시하게 재현했다. 건물 안에 있던 사람들이 어떤 기분이었을지를 관객들에게 전달한 영화는 이것이 처음이다. 그 장면의 충격은 영영 잊지 못하겠다. 화면이 컴컴해진 뒤 죽은 듯 잠잠해진 바로 그 순간 관객은 밀실에 갇힌 두려움을 강하게 느낀다. 그때 어둠 속에서 타워의 잿더미에 묻혀 꼼짝 않는 매클로플린의 몸이 처음 보인다. 우리는 “매클로플린과 히메노가 탈출할까?” 라고 묻지 않고 좀 더 이기적으로 ‘우리’가 탈출하게 될까를 묻게 된다. 그것은 스톤이 이 프로젝트에 덤비면서 익히 예상했던 질문이다. 관객의 인내심은 어디까지일까? 감독은 언제, 얼마나 자주, 이야기를 지상으로 끌고나가야 할지 궁리해야 했다. 지상에서 우리는 실종자들의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는 매클로플린과 히메노의 가족을 만나고, 폐허를 뒤지며 생존자를 찾는 구조요원들의 뒤를 쫓는다. 어느 시점에서 관객의 시야를 봉쇄할까? 스톤의 계산을 보면 그가 타고난 이야기꾼임을 알게 된다. 그는 관객을 괴롭히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러나 그의 걱정은 예술작품에서 9·11을 재현할 때 등장하는 의문들이기도 하다. 관객들은 얼마나 견뎌낼까? 예술은 그날을 어떻게 조명해야 할까? 예술가는 생존자들의 입장을 고려해 제약을 받아야 하나? 이 역사적 사건을 두고 무엇은 말해도 되고 무엇을 말해선 안 된다는 판단은 누가 내리나? 폴 그린그래스의 ‘플라이트 93(United 93)’이 개봉된 지 몇 달 지나지 않아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개봉된다는 사실은 9·11로부터 5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적어도 할리우드의 반응이라는 점에선 인식이 180도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9·11 직후에는 모든 영화에서 타워 빌딩의 모습이 디지털 기술로 삭제됐다. 영화제작진은 ‘세렌디피티(Serendipity)’ 같은 해롭지 않은 낭만 코미디에서조차 그 빌딩 모습이 언뜻 비쳤다가는 관객들의 공상이 확 깨는 일이 있을까봐 뉴욕의 지평선을 다시 그렸다. ‘스파이더맨’에선 주인공이 그 빌딩 사이에서 거미줄을 엮는 장면이 삭제됐다. 그러나 2005년이 되자 스티븐 스필버그는 ‘뮌헨’의 막바지에서 뉴욕의 스카이라인에 트윈타워를 디지털 합성으로 집어넣어 영화 속의 테러리즘과 장차 다가올 9·11 테러를 연결했다. 이제 스톤은 우리를 불타버린 그라운드 제로(무너진 빌딩 부지)의 한복판으로 데려간다. 문화 정신분석가라면 큐블러 로스가 말한 죽음의 5단계론을 인용해 이것은 우리가 부인(否認)에서 인정(認定)의 단계로 옮아간 전조라고 주장할 법도 하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날을 향한 우리의 집단적 반응은 그리 단순하지도, 깔끔하지도 않다. 비극에서 예술을 만드는 일은 인간의 원초적 반응이다. 뉴욕에서는 그 일이 9월 12일 시작됐다. “뉴욕시 곳곳에서 희생자들의 명복을 비는 작은 빈소들이 생겨난 모습을 보고 감동받았다”고 미술 평론가 아서 단토는 말했다. 그는 지난해 9월 ‘9·11 예술’이라는 전시회를 주최했다. “사람들은 그런 작은 빈소를 이용해 바로바로 자신의 감정을 자발적으로 표현했다. 사람들이 미(美)를 통해 재앙에 반응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첫 반응은 역시 사진기자들이 보였다. 거꾸로 뒤집힌 한 도시의 자극적인 이미지를 기록하는 일이야말로 가장 직접적이고 시급한 반응으로 생각됐다. 스스로 노래를 지어 부르는 가수들은 장르를 불문하고 음악적 진정제를 찾아 나섰다. 나중에는 극작가·안무가·화가·작곡가·소설가들이 가세해 미래를 바꿔놓은 그날의 의미를 해석하려 했다. 그린그래스의 표현대로 “갑자기 어느 누구도 공포에서 벗어날 길이 없는 세상이 됐다.” 단편소설 작가 데버러 아이젠버그는 ‘초인들의 황혼(Twilight of the Superheroes)’이라는 단편소설에서 그런 감정을 인상적으로 변화시켰다. “아, 그날이여! 충격적인 그날이 없던 상태로 돌아가 원래대로 진짜 미래, 과거가 암시해온 미래가 전개됐으면. 매시간, 매달 그날이 없던 상태로 돌아가기를 기다리노라. 그러나 그날은 일어나고야 말았다. 이제는 항상 일어난 일로 자리 잡으리.” 애초부터 문화적 타당성을 놓고 첨예한 자의식이 있었다. 사람들이 자기 스스로 부과하는 제약 가운데 일부는 타인의 감정을 고려한 행위며 우리 감정의 생생함에 보인 반응이었다. 텔레비전에서 재난영화가 사라졌다. 제작 중이던 영화 가운데 폭력성이 짙은 작품은 (일시적으로) 취소됐다. 클리어 채널은 자사 라디오 방송에서 내보내기 곤란한 노래들의 독특한 긴 목록을 발표했다(‘Imagine’도 있다고? 정말로?). 때 이르게 아이러니의 죽음이 선포됐다. 그러다가 마침내는 경박스럽게 연예인들의 일거수 일투족에 관심을 쏟던 시절은 막을 내린다는 예언이 나왔다. 사람들은 “입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다.
생존과 희생정신 다룬 영화 스톤의 영화가 뉴스 장면을 통해 세계인들이 충격에 빠져 지켜보는 모습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듯, 세계의 동정심은 미국 편이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9·11의 정치화가 시작됐다. 공포와, 깃발을 흔드는 애국의 분위기에서 머지않아 선제공격이 예상되는 가운데 예술가들은 용의자 신세로 변했다. 우파 언론은 스티브 얼이 ‘John Walker Blues’라는 노래를 쓴 반역자라고 비난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체포된 젊은 미국인 탈레반 전사의 의식을 이해하려고 애쓴 노래였다. 좌파는 9·11 이후 토비 키스가 부른 ‘Courtesy of the Red, White and Blue’라는 노래의 선동적 가사에 당혹감을 느꼈다. “9·11 이후 모두 줄 서서 같은 북소리에 맞춰 행군해야 하는 분위기를 느꼈다는 사실은 예술의 역사에서 진정으로 애석한 순간”이라고 마이클 무어는 말했다. 시사만화가 아트 스피겔먼은 예술가들이 느꼈던 부담감을 회고했다. “2002년 말에는 황색 경보나 오렌지색 경보를 훨씬 넘어서는 두려움이 있었다”고 테러공격에 보인 자신의 개인적 반응을 기록한 책 ‘노 타워의 그림자에서(In the Shadow of No Towers)’의 저자는 말했다. “모든 점이 봉쇄됐다. 아이러니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 불충으로 비칠지도 모를 코미디와 정치적 대화가 봉쇄됐다.” 그러나 2004년 그 책이 나왔을 때 스피겔먼은 해빙 분위기를 느꼈다. “대대적 변화의 시작이었다.” 예술가란 원래 법칙을 스스로 정하고 구속되기를 몹시 싫어한다. 목적만 이루면 그만이다. “예술에선 무엇이든 통한다. 통하면 그만”이라고 존 업다이크는 말했다.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신작 ‘테러리스트(Terrorist)’는 뉴저지에서 자란 18세 무슬림 소년 자폭범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작가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표지판은 없어야 한다. 커트 보네거트는 홀로코스트를 몸으로 직접 겪은 사람만 그것을 다루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9·11은 경우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현장에 있었던 대다수 사람은 지금 말을 못한다고 본다. 우리는 겁내지 말고 그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극장에서 그린그래스의 ‘플라이트 93’ 시사회가 열렸을 때 일각에선 그 체험을 되살리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언 맥이언이 소설 ‘토요일(Saturday)’을 너무 이르게 출간하지 않았느냐고, 소설가 조너선 새프런 포어가 ‘지나치게 시끄럽고 엄청 가까운(Extremely Loud and Incredibly Close)’을 너무 일찍 쓰지 않았느냐고, 또는 그 전에 시청률이 높았던 A&E 방송의 TV 영화 ‘플라이트 93(Flight 93)’이 너무 이르지 않았느냐고 따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할리우드가 같은 행위를 하면 문제가 제기됐다. 영화의 감성적 위력(그날 타워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마치 재난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었는지 잊지 말자)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이자 할리우드를 향한 일반인들의 의심의 눈길이 여전하다는 증거다. 9·11에 관한 예술작품이 쏟아져 나오는 현상은 그날이 미국인들의 국민적 정체성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확실히 말해준다. 예술가가 무슨 수로 그것을 회피하겠는가? 그보다 분명치 않고 좀 더 모호한 점은 9·11 예술을 원하는 일반인들의 욕구가 그것을 만들지 않고는 못 배기는 예술가들의 필요에 필적하느냐의 여부다. ‘플라이트 93’은 시네마 베리테(핸드 카메라와 가두 녹음으로 현장감을 살리는 수법) 스타일의 뛰어난 작품이지만 줄거리의 결말을 아는 많은 사람은 그 체험을 거부했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씁쓸한 뒷맛만 남았다. 스톤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아주 다른 스타일의 영화다. 우선 전혀 들어보지 못한 줄거리다. 더 중요한 점은 희망을 제시한다는 사실이다. 생존과 희생정신을 다룬 이야기다. ‘플라이트 93’과의 공통점은 정치에 오염되지 않은 눈으로 사태를 바라보려는 욕구다. 보수파나 진보파 모두 기꺼이 이 영화를 포용해야 마땅하다(패러마운트사는 워싱턴에서 사전 시사회를 열어 보수파의 환심을 사기에 바쁘다). 적어도 2시간9분 동안은 보수와 진보의 구별이 무의미해진다. 스톤을 ‘J.F.K’‘닉슨(Nixon)’ ‘살바도르(Salvador)’를 만든, 논쟁을 즐기는 감독으로 생각한 사람들에게는 그 사실이 놀랍다. 직설적이고 정통 속도로 진행되는 이 영화에는 ‘올리버 스톤의 킬러(Natural Born Killers)’에 나온 광기나 ‘7월 4일생(Born on the Fourth of July)’을 때때로 보기 싫게 만들어버린 지나친 감정적 대응이 없다. “ 이 영화의 스타일은 그 주제나 단순성과 소박함이, 또 그 서민적 뿌리가 규정한다”고 스톤은 말했다. 그가 본받고자 애쓴 영화는 근엄한 프랑스 감독 로베르 브레송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였다. 주로 주인공의 얼굴에서 전개되는 정신 여행을 다룬 영화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여러 의미를 지녔다. 하나의 기념행위이자 좌불안석의 심정으로 구경하는 구난영화이며, 그라운드 제로에서 목숨을 걸었거나 목숨을 바친 모든 사람에게 바치는 감동적 찬가다. 스톤의 생각에 존 매클로플린과 윌 히메노에게 세상을 살 이유를 준 결혼생활을 점검하는 가족 드라마이기도 하다(팽팽하게 긴장한 파란 눈의 마리아 벨로가 도나 매클로플린으로 나오고, 히스테리 일보 직전의 신경질적 모습을 보여주는 매기 질렌할이 앨리슨 히메노로 나온다. 둘 다 탁월한 연기를 선보였다). 스톤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한 가지 의문을 파고든다. “무엇이 사람의 목숨을 유지하는가?” 과묵한 팀장으로 나온 케이지는 살려내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자책을 느낀다. 그보다 젊은 페냐는 경찰관이 되는 꿈을 꾸며 자랐다. 두 주인공은 영화의 대부분 장면에서 고요함이라는 제약 아래 연기하면서 이 솔직한 사나이들이 겪는 내면의 고통을 조명하는 일을 훌륭하게 해낸다. “9·11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스톤은 말했다. “이 영화는 세계를 위해 만들었다. 나의 희망대로 됐다면 9·11을 초월한다. 마드리드의 폭발이건 지진이건 지진해일이건 어디서나 죽음의 맛을 느끼는 모든 사람에 관한 영화다. 갇힌다는 동일한 주제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이 구해 주러 오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나도 옛날에 아들과 함께 발리에서 물에 빠져 죽을 뻔했는데 누가 구해줬다. 베트남에서도 몇 차례 위기가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깨닫게 되는 일들이다. 그것을 보여 줄 기회가 생겨 고맙게 생각한다.”
실제 인물들의 충실한 재현 베트남전 참전용사인 스톤은 할리우드의 동세대 감독들 중에서 특이한 존재다. 그의 인생 지식은 단지 옛 영화들에서 배우지만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존경하는 프랭크 캐프라 같은 옛 감독들과 닮았다. 캐프라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혹자가 감상적이라고 딱지 붙일 만한 영역에 발 들여놓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톤은 매클로플린과 히메노의 체험을 사실 그대로 충실하게 재현할 각오를 다졌다. 그러다 보니 스톤의 영화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장면도 등장한다. 히메노는 실제 예수의 환영 덕분에 긴 시련을 견뎌낸다. 스톤은 히메노가 봤음직한 그 환영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페냐는 그 순간을 멋지게 소화해낸다. 경건한 신앙심뿐 아니라 어린이 같은 기쁨으로 그 장면을 연기한다. 매클로플린과 히메노를 가장 먼저 발견하는 두 사람 중 하나는 데이비드 카니스 예비역 병장(마이클 섀넌)이다. 시사회의 많은 관객은 그가 순전히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라고 잘못 생각했다. 해병대 출신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며 9·11 당시 코네티컷에서 회계원으로 일했던 카니스는 그라운드 제로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다. 머리를 빡빡 깎고 옛 군복을 입은 다음 차를 몰고 뉴욕으로 달린다(실은 포르셰 911 스포츠카를 타고 갔는데 그 모습을 보여줬다가는 너무 엉터리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영화에선 생략했다). 카니스는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고 경찰 보안선을 통과한 뒤 기적적으로 폐허 속에 묻힌 두 사람을 찾아낸다. 정의의 열정으로 불타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도덕적으로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한 구조요원의 말마따나 “또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은 그의 영웅적 행위가 인명 구조에 도움이 됐다는 점이다. 스톤은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벌로프가 쓴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대본을 발견했을 무렵 스톤에겐 본인의 구원이 절실했다. 역사 대작 ‘알렉산더’를 만드느라 여러 해 공을 들였다. “엄청난 경험이었다. 여러 절정으로 점철된 내 영화 인생의 한 절정이었다.” 따라서 그 작품이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고 미국에서 흥행에 실패하면서 ‘3중고’를 겪었다. “할리우드는 가혹하고 용서를 모른다.” 제작자 마이클 섐버그와 스테이시 셰어는 스톤이 자신들과 같은 영화를 구상한다는 사실에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원래 데브라 힐이 제작을 맡았지만 지난해 암으로 숨졌다). 처음 대면한 지 20분도 지나지 않아 스톤과 벌로프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청사진을 바닥에 펴놓고 주인공들이 쇼핑몰을 돌아다니면서 지나가는 궤적을 좇았다. 감독 특유의 집중력이 느슨해지는 법은 없었다. “그를 데리고 매클로플린 가족과 히메노 가족을 처음 만나러 갔을 때가 기억난다”고 셰어는 말했다. “마치 대질신문 시간 같았다. 그는 황색 괘선지 수첩을 휴대했다. 올리버와 함께 일하면 검사를 따라다니는 기분이 든다.” 구조활동의 촬영은 프로덕션 디자이너 잰 뢸프스가 플레이야비스타(캘리포니아)의 넓은 땅에 재현해 놓은 정교한 세트에서 이뤄졌다. 스톤은 9·11 현장 경험이 있는 진짜 소방수, 의료요원, 구조요원들을 배치하고 대사가 정확하지 않으면 교정을 지시했다(카니스가 ‘그라운드 제로’에 있었다고 말하면 어폐가 있다. 그 용어는 나중에 생겼으니 말이다. 따라서 그냥 ‘트레이드 센터’라고 해야 옳다). 스톤은 수시로 배우와 스턴트맨 대신 진짜 구조요원을 투입했다. 기어가는 공간이 정확히 얼마나 좁았는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영화의 모의 시사회 때 패러마운트사는 청소년들의 열광적 반응에 깜짝 놀랐다. 일부 청소년의 경우는 이 영화를 계기로 심란하게 흐릿하기만 했던 이 사건의 초점이 보다 명확해졌다. 스톤은 자신이 만든 다른 영화보다 모든 연령대의 반응이 더 좋게 나왔다고 말했다. 영화사는 물론 ‘플라이트 93’(그래도 3200만 달러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을 보기 겁냈던 그 모든 관객이 6300만 달러를 들여 만든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보러 몰려 오기를 바란다. 패러마운트는 그래야 마땅하다는 듯이, 이 영화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한다. “9·11 이후 5년 동안 그 사건에 관한 많은 대화는 정치적 동기의 간섭을 받아왔다”고 매기 질렌할은 말했다. “모든 측면에서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이 그 사건에 관한 대화나 생각을 꺼리게 됐다. 그래서 나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그 와중에서 스톤은 용케도 정치적이든 개인적이든 다른 동기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화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의 용기를 기리는 작품이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우리를 한데 묶는 인간관계, 우리를 계속 움직이게 만드는 구속, 그날의 공포를 힐책하며 돋보이는 선행(善行)을 기념한다. 어쩌면 앞으로 좀 더 도전적이거나 논쟁적이거나 파괴적인 미래 비전을 요구하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 현재로선 우리에게 딱 필요한 9·11 영화 같다. With SEAN SMITH and LORRAINE ALI in Los Angeles, and JOSHUA ALSTON, JAC CHEBATORIS, DAVID GATES, DEVIN GORDON and RAMIN SETOODEH in New York
생존과 희생정신 다룬 영화 스톤의 영화가 뉴스 장면을 통해 세계인들이 충격에 빠져 지켜보는 모습을 우리에게 상기시키듯, 세계의 동정심은 미국 편이었다. 그러나 오래가지는 않았다. 9·11의 정치화가 시작됐다. 공포와, 깃발을 흔드는 애국의 분위기에서 머지않아 선제공격이 예상되는 가운데 예술가들은 용의자 신세로 변했다. 우파 언론은 스티브 얼이 ‘John Walker Blues’라는 노래를 쓴 반역자라고 비난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체포된 젊은 미국인 탈레반 전사의 의식을 이해하려고 애쓴 노래였다. 좌파는 9·11 이후 토비 키스가 부른 ‘Courtesy of the Red, White and Blue’라는 노래의 선동적 가사에 당혹감을 느꼈다. “9·11 이후 모두 줄 서서 같은 북소리에 맞춰 행군해야 하는 분위기를 느꼈다는 사실은 예술의 역사에서 진정으로 애석한 순간”이라고 마이클 무어는 말했다. 시사만화가 아트 스피겔먼은 예술가들이 느꼈던 부담감을 회고했다. “2002년 말에는 황색 경보나 오렌지색 경보를 훨씬 넘어서는 두려움이 있었다”고 테러공격에 보인 자신의 개인적 반응을 기록한 책 ‘노 타워의 그림자에서(In the Shadow of No Towers)’의 저자는 말했다. “모든 점이 봉쇄됐다. 아이러니뿐 아니라 어떤 면에서 불충으로 비칠지도 모를 코미디와 정치적 대화가 봉쇄됐다.” 그러나 2004년 그 책이 나왔을 때 스피겔먼은 해빙 분위기를 느꼈다. “대대적 변화의 시작이었다.” 예술가란 원래 법칙을 스스로 정하고 구속되기를 몹시 싫어한다. 목적만 이루면 그만이다. “예술에선 무엇이든 통한다. 통하면 그만”이라고 존 업다이크는 말했다.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신작 ‘테러리스트(Terrorist)’는 뉴저지에서 자란 18세 무슬림 소년 자폭범을 주인공으로 삼았다. “작가의 상상력을 제한하는 표지판은 없어야 한다. 커트 보네거트는 홀로코스트를 몸으로 직접 겪은 사람만 그것을 다루는 글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9·11은 경우가 다르다고 생각한다. 현장에 있었던 대다수 사람은 지금 말을 못한다고 본다. 우리는 겁내지 말고 그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극장에서 그린그래스의 ‘플라이트 93’ 시사회가 열렸을 때 일각에선 그 체험을 되살리기에는 아직 “너무 이르다”는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이언 맥이언이 소설 ‘토요일(Saturday)’을 너무 이르게 출간하지 않았느냐고, 소설가 조너선 새프런 포어가 ‘지나치게 시끄럽고 엄청 가까운(Extremely Loud and Incredibly Close)’을 너무 일찍 쓰지 않았느냐고, 또는 그 전에 시청률이 높았던 A&E 방송의 TV 영화 ‘플라이트 93(Flight 93)’이 너무 이르지 않았느냐고 따진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할리우드가 같은 행위를 하면 문제가 제기됐다. 영화의 감성적 위력(그날 타워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이 마치 재난영화를 보는 기분이었다는 말을 얼마나 많이 했었는지 잊지 말자)이 그만큼 크다는 증거이자 할리우드를 향한 일반인들의 의심의 눈길이 여전하다는 증거다. 9·11에 관한 예술작품이 쏟아져 나오는 현상은 그날이 미국인들의 국민적 정체성에서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확실히 말해준다. 예술가가 무슨 수로 그것을 회피하겠는가? 그보다 분명치 않고 좀 더 모호한 점은 9·11 예술을 원하는 일반인들의 욕구가 그것을 만들지 않고는 못 배기는 예술가들의 필요에 필적하느냐의 여부다. ‘플라이트 93’은 시네마 베리테(핸드 카메라와 가두 녹음으로 현장감을 살리는 수법) 스타일의 뛰어난 작품이지만 줄거리의 결말을 아는 많은 사람은 그 체험을 거부했다.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이다. 씁쓸한 뒷맛만 남았다. 스톤의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아주 다른 스타일의 영화다. 우선 전혀 들어보지 못한 줄거리다. 더 중요한 점은 희망을 제시한다는 사실이다. 생존과 희생정신을 다룬 이야기다. ‘플라이트 93’과의 공통점은 정치에 오염되지 않은 눈으로 사태를 바라보려는 욕구다. 보수파나 진보파 모두 기꺼이 이 영화를 포용해야 마땅하다(패러마운트사는 워싱턴에서 사전 시사회를 열어 보수파의 환심을 사기에 바쁘다). 적어도 2시간9분 동안은 보수와 진보의 구별이 무의미해진다. 스톤을 ‘J.F.K’‘닉슨(Nixon)’ ‘살바도르(Salvador)’를 만든, 논쟁을 즐기는 감독으로 생각한 사람들에게는 그 사실이 놀랍다. 직설적이고 정통 속도로 진행되는 이 영화에는 ‘올리버 스톤의 킬러(Natural Born Killers)’에 나온 광기나 ‘7월 4일생(Born on the Fourth of July)’을 때때로 보기 싫게 만들어버린 지나친 감정적 대응이 없다. “ 이 영화의 스타일은 그 주제나 단순성과 소박함이, 또 그 서민적 뿌리가 규정한다”고 스톤은 말했다. 그가 본받고자 애쓴 영화는 근엄한 프랑스 감독 로베르 브레송의 ‘어느 시골 사제의 일기’였다. 주로 주인공의 얼굴에서 전개되는 정신 여행을 다룬 영화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여러 의미를 지녔다. 하나의 기념행위이자 좌불안석의 심정으로 구경하는 구난영화이며, 그라운드 제로에서 목숨을 걸었거나 목숨을 바친 모든 사람에게 바치는 감동적 찬가다. 스톤의 생각에 존 매클로플린과 윌 히메노에게 세상을 살 이유를 준 결혼생활을 점검하는 가족 드라마이기도 하다(팽팽하게 긴장한 파란 눈의 마리아 벨로가 도나 매클로플린으로 나오고, 히스테리 일보 직전의 신경질적 모습을 보여주는 매기 질렌할이 앨리슨 히메노로 나온다. 둘 다 탁월한 연기를 선보였다). 스톤의 입장에서 이 영화는 한 가지 의문을 파고든다. “무엇이 사람의 목숨을 유지하는가?” 과묵한 팀장으로 나온 케이지는 살려내지 못한 사람들 때문에 자책을 느낀다. 그보다 젊은 페냐는 경찰관이 되는 꿈을 꾸며 자랐다. 두 주인공은 영화의 대부분 장면에서 고요함이라는 제약 아래 연기하면서 이 솔직한 사나이들이 겪는 내면의 고통을 조명하는 일을 훌륭하게 해낸다. “9·11은 미국뿐 아니라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스톤은 말했다. “이 영화는 세계를 위해 만들었다. 나의 희망대로 됐다면 9·11을 초월한다. 마드리드의 폭발이건 지진이건 지진해일이건 어디서나 죽음의 맛을 느끼는 모든 사람에 관한 영화다. 갇힌다는 동일한 주제다. 그럴 때 우리는 다른 사람이 구해 주러 오기를 기다리는 신세가 된다. 나도 옛날에 아들과 함께 발리에서 물에 빠져 죽을 뻔했는데 누가 구해줬다. 베트남에서도 몇 차례 위기가 있었다. 마지막 순간에 깨닫게 되는 일들이다. 그것을 보여 줄 기회가 생겨 고맙게 생각한다.”
실제 인물들의 충실한 재현 베트남전 참전용사인 스톤은 할리우드의 동세대 감독들 중에서 특이한 존재다. 그의 인생 지식은 단지 옛 영화들에서 배우지만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자신이 존경하는 프랭크 캐프라 같은 옛 감독들과 닮았다. 캐프라와 마찬가지로 그 역시 혹자가 감상적이라고 딱지 붙일 만한 영역에 발 들여놓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스톤은 매클로플린과 히메노의 체험을 사실 그대로 충실하게 재현할 각오를 다졌다. 그러다 보니 스톤의 영화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장면도 등장한다. 히메노는 실제 예수의 환영 덕분에 긴 시련을 견뎌낸다. 스톤은 히메노가 봤음직한 그 환영을 관객에게 보여준다. 페냐는 그 순간을 멋지게 소화해낸다. 경건한 신앙심뿐 아니라 어린이 같은 기쁨으로 그 장면을 연기한다. 매클로플린과 히메노를 가장 먼저 발견하는 두 사람 중 하나는 데이비드 카니스 예비역 병장(마이클 섀넌)이다. 시사회의 많은 관객은 그가 순전히 할리우드가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이라고 잘못 생각했다. 해병대 출신으로 독실한 기독교 신자며 9·11 당시 코네티컷에서 회계원으로 일했던 카니스는 그라운드 제로로 하느님의 부름을 받았다. 머리를 빡빡 깎고 옛 군복을 입은 다음 차를 몰고 뉴욕으로 달린다(실은 포르셰 911 스포츠카를 타고 갔는데 그 모습을 보여줬다가는 너무 엉터리라는 소리를 들을까봐 영화에선 생략했다). 카니스는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고 경찰 보안선을 통과한 뒤 기적적으로 폐허 속에 묻힌 두 사람을 찾아낸다. 정의의 열정으로 불타는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면서 도덕적으로 본받을 만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한 구조요원의 말마따나 “또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법하다. 아무도 부인하지 못할 사실은 그의 영웅적 행위가 인명 구조에 도움이 됐다는 점이다. 스톤은 아무런 판단을 내리지 않는다. 벌로프가 쓴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대본을 발견했을 무렵 스톤에겐 본인의 구원이 절실했다. 역사 대작 ‘알렉산더’를 만드느라 여러 해 공을 들였다. “엄청난 경험이었다. 여러 절정으로 점철된 내 영화 인생의 한 절정이었다.” 따라서 그 작품이 평론가들의 혹평을 받고 미국에서 흥행에 실패하면서 ‘3중고’를 겪었다. “할리우드는 가혹하고 용서를 모른다.” 제작자 마이클 섐버그와 스테이시 셰어는 스톤이 자신들과 같은 영화를 구상한다는 사실에 짜릿한 흥분을 느꼈다(‘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원래 데브라 힐이 제작을 맡았지만 지난해 암으로 숨졌다). 처음 대면한 지 20분도 지나지 않아 스톤과 벌로프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의 청사진을 바닥에 펴놓고 주인공들이 쇼핑몰을 돌아다니면서 지나가는 궤적을 좇았다. 감독 특유의 집중력이 느슨해지는 법은 없었다. “그를 데리고 매클로플린 가족과 히메노 가족을 처음 만나러 갔을 때가 기억난다”고 셰어는 말했다. “마치 대질신문 시간 같았다. 그는 황색 괘선지 수첩을 휴대했다. 올리버와 함께 일하면 검사를 따라다니는 기분이 든다.” 구조활동의 촬영은 프로덕션 디자이너 잰 뢸프스가 플레이야비스타(캘리포니아)의 넓은 땅에 재현해 놓은 정교한 세트에서 이뤄졌다. 스톤은 9·11 현장 경험이 있는 진짜 소방수, 의료요원, 구조요원들을 배치하고 대사가 정확하지 않으면 교정을 지시했다(카니스가 ‘그라운드 제로’에 있었다고 말하면 어폐가 있다. 그 용어는 나중에 생겼으니 말이다. 따라서 그냥 ‘트레이드 센터’라고 해야 옳다). 스톤은 수시로 배우와 스턴트맨 대신 진짜 구조요원을 투입했다. 기어가는 공간이 정확히 얼마나 좁았는지,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알기 때문이다. 영화의 모의 시사회 때 패러마운트사는 청소년들의 열광적 반응에 깜짝 놀랐다. 일부 청소년의 경우는 이 영화를 계기로 심란하게 흐릿하기만 했던 이 사건의 초점이 보다 명확해졌다. 스톤은 자신이 만든 다른 영화보다 모든 연령대의 반응이 더 좋게 나왔다고 말했다. 영화사는 물론 ‘플라이트 93’(그래도 3200만 달러라는 준수한 성적을 거뒀다)을 보기 겁냈던 그 모든 관객이 6300만 달러를 들여 만든 ‘월드 트레이드 센터’를 보러 몰려 오기를 바란다. 패러마운트는 그래야 마땅하다는 듯이, 이 영화의 긍정적 측면을 강조한다. “9·11 이후 5년 동안 그 사건에 관한 많은 대화는 정치적 동기의 간섭을 받아왔다”고 매기 질렌할은 말했다. “모든 측면에서 결과적으로 모든 사람이 그 사건에 관한 대화나 생각을 꺼리게 됐다. 그래서 나는 ‘월드 트레이드 센터’가 특별하다고 생각한다. 그 와중에서 스톤은 용케도 정치적이든 개인적이든 다른 동기의 지배를 받지 않는 영화를 만들어냈다. 사람들의 용기를 기리는 작품이다.” ‘월드 트레이드 센터’는 우리를 한데 묶는 인간관계, 우리를 계속 움직이게 만드는 구속, 그날의 공포를 힐책하며 돋보이는 선행(善行)을 기념한다. 어쩌면 앞으로 좀 더 도전적이거나 논쟁적이거나 파괴적인 미래 비전을 요구하는 시대가 올지 모른다. 현재로선 우리에게 딱 필요한 9·11 영화 같다. With SEAN SMITH and LORRAINE ALI in Los Angeles, and JOSHUA ALSTON, JAC CHEBATORIS, DAVID GATES, DEVIN GORDON and RAMIN SETOODEH in New Yor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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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출·코어 이어 '밸류애드' 자금 푸는 국민연금…국내 부동산시장 볕든다
성공 투자의 동반자마켓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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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바이오, 반전 카드 뎅기열 치료제 상용화 로드맵 완성
바이오 성공 투자, 1%를 위한 길라잡이팜이데일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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