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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미인계 쓴 ‘동아百’ 6개월 후 인수

[이호 기자의 공개 못한 취재수첩] 미인계 쓴 ‘동아百’ 6개월 후 인수

조선의 젊은 거상 박흥식 화신 사장이 우에노 조선 총독을 만나 동아백화점을 1년 안에 망하게 하겠다고 독설을 남기고 돌아나온 것이 1932년 정월이었다. 원래 동아백화점은 옛 파고다 아케이드가 있던 자리에 ‘동아부인상회’를 운영하던 최남씨가 백화점 허가를 얻어 오픈한 것이다. 이후 민규식씨가 근대식 건물을 지어 당시로서는 웅장한 4층 건물로 꾸몄다. 최남씨가 잡화점을 운영했던 경험이 풍부한 인물이었기 때문에 박 사장은 상대가 되지 못했다고 했지만 상품도 다양했고 결코 만만한 적수가 아니었다. 동아백화점이 총독의 계략 때문이라고는 하지만 허가를 냈다는 것은 대단한 일 아닙니까? “나로서는 불쾌했지요. 당시에 듣기로는 4층짜리 건물로 허가를 얻었다는 것인데, 솔직히 내가 오만해서가 아니라 당랑거철(螳螂拒轍·사마귀가 앞발을 들고 수레바퀴를 가로막는 무모한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동아는 내 상대가 아니었어요. 물론 조선 상인들끼리 싸움질하라고 화신 옆에다 허가를 해줬고 조선인들의 화합을 깨뜨리자는 전략도 있었지만 그런 내막을 알든 모르든 허가가 났습니다. 그래서 내가 허가를 내줬다는 소리를 듣고 오히려 총독한테 인사를 갔습니다. 딱 이렇게 인사했습니다. ‘총독 각하, 내 능력을 우리 조선 상인들뿐 아니라 일인 거상들한테도 다시 확인시킬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동아백화점한테 내가 1년 안에 항복을 받아내겠습니다. 미스코시도 곧 문을 닫도록 만들갔습니다.’ 나는 뱃속에 들어있는 말을 다 토해내지 않으면 소화가 안 되기 때문에 똑바로 쳐다보면서 그렇게 감사 인사를 했더니 총독이 부르르 떨면서도 참아요. 이놈이 자기 속을 들여다보고 있다는 거겠지요.”

“자네는 단기(檀紀)를 쓰는구먼” 총독의 계략에 분노해서 동아백화점을 반드시 잡겠다고 선언하셨겠지만 상대도 당대의 거물급 상인 아니었습니까? “생각했던 것보다 막상 붙어보니까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어요. 세간에서는 조선 상인들끼리 붙었다고 누가 이길지 흥미를 보이고, 마치 동원한 고객들처럼 우르르 몰려다니는데 그들이 어떤 평가를 내릴지도 알 수 없고, 신경이 여간 쓰이는 게 아니었지요. 그런데 동아가 가만 보니까 개점 첫날부터 아주 늘씬한 미모의 여점원들을 대대적으로 모집해서 배치했습디다. 목적은 뻔하지요. 미녀들을 점포마다 배치시켜 놓고 일종의 미인계를 쓰는 거야요. 그것도 상술이고 고객 유치에 도움은 됩니다. 그러나 그걸 보는 순간 나는 오히려 자신 있다고 장담을 했습니다.” 어떤 이유에서입니까? “백화점은 물건을 파는 곳이지 미인을 파는 곳이 아니지요. 더구나 목적을 가지고 웃는 미인은 금방 식상합니다. 그것도 매일 점원들을 바꾼다면 모르지만 똑같은 여자에 똑같은 유혹을 받으면 신선하다는 생각이 들겠습니까? 그 당시 나도 젊었던 사람인데 영 호감이 가지 않아요. 허-.” 화신 쪽에도 대응 전략이 있어야 했을 것 아닙니까? “우리는 어떻게 했느냐, 일본 오사카 서구에 지하 1층 지상 3층짜리 건물을 임대해놓고 거기서 각종 물건들을 직접 제조회사로부터 공장도 가격으로, 그것도 현금으로 전부 할인구매를 해서 직수입했습니다. 그러니 가격 경쟁에서 우리를 당할 수 있겠습니까? 총독부에서도 깜짝 놀라고 장안에 온통 화제가 됐던 전대미문의 상술을 내가 진두지휘해서 대대적으로 전개했습니다.” 그것이 당시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고 국내 최초로 시도된 현금 교환권, 상품권, 사은 대매출 할인 판매였다. 특히 현금 교환이 가능한 답례용 상품권은 공전의 히트를 했다. 누구도 시도하지 못했던 상술이었고 흔히 ‘와이료’를 주고 싶어하던 사람들에게는 상품을 사든 현금으로 바꾸든 최고의 안성맞춤이었던 것이다. “허-, 장안의 한량이라는 한량들은 동아백화점에 다 모였습디다. 그렇지만 미녀 손 한 번 슬쩍 만져보고 나가는 사내들은 애당초 구매에는 관심이 없는 거야요. 물건은 안 보고 미녀 눈이나 맞추려고 하는데 장사가 됩니까? 매출이 오를 리 없어요. 장사는 실속이 최고지 뭘 봅니까? 그런데다가 동아가 결정적으로 사람을 잘못 채용했습니다. 여점원을 채용하는 간부가 여자 여럿을 농락했다가 신문에 터졌단 말이지요. 그놈도 재주가 메주였는지 어디 여자가 없어서 회사가 거덜날 짓을 합니까, 그래. 허-. 결국 동아백화점은 결정타를 맞았고 우리가 상품권 판매를 시작할 때는 이미 휘청거리면서 기울어갔던 겁니다.” 점술가의 예언처럼 1년 안에 항복을 받겠다던 박흥식의 독기 어린 다짐이 현실화됐다. 동아백화점은 개점 후 불과 6개월여 만인 1932년 7월 16일 일본요리점 남산장에서 박흥식과 최남이 만나 계약서에 서명함으로써 출생신고하고 첫돌 상도 못 받아먹고 화신백화점에 흡수됐다. 총독부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었다. 조선 상권의 말살 계획이 불과 서른 남짓한 박흥식에게 도리어 분쇄당하고 서울 인구 8할을 점하는 조선인들의 자긍심만 높여준 꼴이 됐으니 총독의 체면도 말이 아니게 된 것이다. “바로 그날입니다. 총독이 직접 화신으로 오겠다는 연락이 왔어요. 방문 이유도 밝히지 않고 오겠다니 기분이 영 찜찜합디다. 총독이 화신에 온 건 그날이 처음입니다. 나로서는 전하도 모셨고 총독까지 온다면 영광이지요. 그런데 야노 비서를 대동하고 화신에 도착하더니 입구만 잠깐 쳐다보고는 매장 안은 둘러보지도 않고 곧바로 내 방으로 직행해요.”

▶1980년대 초, 살아 생전의 박흥식 회장.

백화점에 왔으면 물건들도 살펴보고 점원들 격려도 하는 게 보통일 텐데 왜 그랬을까요? “조선 상인이 경영하는 백화점에 총독이 관심을 보였다는 여론이 돌까봐 그랬겠지요. 그날 내가 일본 차를 접대했는데 입에 대지도 않고 목적을 드러냅디다. 그만큼 고압적이고 권위적이고 그렇습니다. 과거를 생각해보면 내가 참 어려운 시절 지내왔습니다.” 그때 얘기를 정리하면 이렇다. “내 앞에서 독을 내뿜듯이 1년 안에 동아백화점을 죽이겠다고 하더니 그때가 소화 7년 1월이었는데 6개월 만에 잡아먹었구먼.”(우에노) “그렇습니다. 시작할 때가 단기 4265년 정월이었습니다.”(박흥식) “자네는 단기로 세월을 세고 있구먼! 언제까지 배일 감정을 드러낼 건가! 자네 습관인가, 고칠 수 없는 질병인가? 그러면 미스코시도 문을 닫도록 만들 작정인가.”

애국선열 자손들 우선 채용 간단하게 그 말만 했다. 그 순간 박 사장은 이런 이유에서 방문했구나 하는 것을 알아챘다. 총독으로서는 동아백화점이 넘어가는 것을 보고 위기를 느낀다는 소리였다. 그런 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는 셈이니 박 사장도 그때까지 쌓였던 분노가 녹고 마음이 움직이더라는 것이다. “미스코시까지 넘어가면 총독 얼굴이 뭐가 되겠습니까? 그 심정을 이해하겠습디다. 나한테 고백을 하는 거 아닙니까? 그래서 긴 얘기 안 하고 선의의 건전한 경쟁을 하겠다, 이 말만 했어요. 그러면서 기회다 싶어 그 자리에서 청을 넣었습니다. 동아하고 화신을 잇는 육교를 건설하고 싶은데 허가해 달라고. 그랬더니 내가 느닷없이 꺼낸 얘기고 자기는 이해를 못 하니까 눈만 껌벅거려요.” 또 하나의 기발한 발상이 나온 셈이다. 화신과 동아의 두 건물을 하나로 연결하는 국내 최초의 공중 육교가 이때 건설되는 것이다. 이것은 서울의 새로운 명물이 되면서 장안의 난봉꾼들이 약속 장소로 애용하기도 했지만 우리나라 육교의 시작이 화신에서 출발했다는 기록도 세웠다. 동아백화점을 합병하고 부족한 직원을 채용하면서 또 한바탕 소동이 벌어지지 않았습니까? 공개적으로는 학벌이나 족벌을 따지지 않겠다고 공시를 해놓고 뒤로는 애국선열의 후손들과 우국 청년들을 채용했다면서요. 호박엿 사건도 그때 일어난 것 입니까? “허-, 그땐 내가 젊어서 그랬는지 자고나면 문제를 일으킨다고 아랫사람들이 죽갔다고 그랬습니다. 그러나 그건 내 탓이 아니었어요. 새로운 상술을 창안하고 남들이 안 하는 일만 하면 문제가 된 건데, 회고해 보면 그렇게 했기 때문에 화신이 승승장구하고 날릴 수 있었던 거야요. 호박엿 사건은 순식간에 일어났어요. 그것도 미스코시 쪽에서 총독부에다가 밀고한 것이 원인이 됐는데, 내가 직원을 채용하면서 표면적으로는 차별이 없지만 내용적으로는 애국선열의 후손들만 채용한다, 그렇게 밀고가 된 거야요. 하니까 즉각 종로서에서 고등계 형사가 나왔습니다. 그때 우리 백화점에서 울릉도 호박엿을 팔고 있었는데 형사가 왔다는 보고를 받고 내가 일부러 호박엿을 이만큼 들고나가서 ‘당신도 응시하러 왔느냐고, 먹으라고, 이걸 먹어야 붙는다고’ 그러면서 냅다 줬더니 그놈이 그걸 또 먹어요. 그런데 갑자기 캑캑거리고 입을 비틀고 어쩔 줄 모르는 겁니다. 그걸 보고 옆에서는 막 웃고 하는데 어? 사색이 되더니 피를 토하면서 쓰러지는 거야요. 의원으로 화급히 옮겨서 수술을 하고 겨우 살렸지만 나중에 보니까 그놈이 틀니를 삼켰어요. 허-, 그걸 내가 죽이려 했고 옆에서 지켜보던 조선인들도 웃으면서 협잡을 했다고 몰아댔던 사건이지요. 혼났습니다 그때.” 총독부에서는 우국 청년들을 채용했다고 시비를 걸었을 것 아닙니까? “내가 우국 청년과 애국선열의 후손들만 채용하라고 지령을 내렸다면 총독이 직접 나를 문초하겠다고 합디다. 눈에 핏발이 섰어요. 그래서 대답을 했지요. ‘일본에서도 나라와 민족을 사랑하고 지키기 위해 천황 폐하 만세를 부르며 죽어간 선열의 후손들한테 영구히 칭호를 주거나 지원하고 있더군요. 그걸 배워서 나도 많은 지원은 할 수 없고 월급쟁이로나마 입사를 시키려는 겁니다.’ 허허허. 그랬더니 뭐 할 말이 있겠어요? 나보고 뭐 이런 놈이 다 있는지 모르겠다고, 허허허.”

전국에 1000개 연쇄점 모집 박흥식 사장은 멈추지 않았다. 또 하나의 거대한 사업 구상을 했다. 그것이 우리나라 근대 상업사에 최초로 기록되고 있는 연쇄점 사업이었다. 전국적으로 체인점을 시도했다는 것도 당시로서는 기상천외한 것이었다. 게다가 규모와 조직이 워낙 방대해 신의주에서 제주도까지 전역을 덮는 구상이었다. 언론에 보도된 1934년 2월 27일자에 보면 ‘오늘부로 그동안 사용하였던 화신상회를 주식회사 화신으로 변경하고 전국에 1000개소의 화신연쇄점을 모집, 설치하야…’로 시작될 정도였다. 이때를 기점으로 박흥식은 회장 직함을 가진다. 이전까지는 화신상회를 운영했던 신태화씨를 회장으로 모시고 있었다. “연쇄점이라는 것이 조선에서만 특별했지 이미 미국에서는 1920년대부터 체인스토어라고 해서 성공한 상술입니다. 그걸 보고 착안했던 건데, 다만 나는 연쇄점을 해서 지방도 발전을 시켜야 한다고 생각을 했던 겁니다. 서울에서 물건을 공급하면 도시와 농촌이 같은 물건을 구입하게 될 테니 그만큼 생활도 향상이 될 것 아닙니까? 국민들 생활은 정치가 향상을 시키는 게 아니야요, 상인이 시키는 것이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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