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작 시리즈의 재부팅
대작 시리즈의 재부팅
후속편 계속 나오면서 황당의 극치로 치달아 수명 재촉…원점으로 돌아가야 인기있는 영화 시리즈가 완전히 궤도를 이탈하는 순간은 언제나 분명하다. 미묘한 탈선이란 없는 법이다. 조지 클루니가 배트맨 복장으로 젖꼭지를 보여준 순간 ‘배트맨’ 시리즈는 수명을 다했다. 로키가 냉전을 끝낸 순간도 그렇다. 수퍼맨이 세계평화를 달성한 순간도 마찬가지. 한니발 렉터가 레이 리오타의 머리 꼭대기를 잘라내고 뇌를 퍼내 그에게 먹이는 순간 더 이상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윽’ 소리 말고)? 할리우드의 최장수 시리즈인 007 중에는 데니즈 리처즈가 핵물리학자로 나온 영화가 있다. 제대로 된 안경을 끼지 않았다면 결코 해내지 못할 배역이었다. 그러나 이 대하 시리즈의 수명을 재촉한 장면은 따로 있었다고 007의 공동제작자 마이클 윌슨은 말했다. 2002년 나온 ‘다이 어나더 데이(Die Another Day)’에서 제임스 본드가 투명 자동차의 운전대에 앉는 순간이었다. “표류를 시작하는 순간이 오게 마련”이라고 윌슨은 말했다. “우리의 공상이 도를 넘었다. 관객을 다시 사로잡을 필요가 있다.” 그러나 시리즈가 첫선을 뵌 지도 44년이 지났고, 제작된 영화가 20편이며 본드 역에만 배우 다섯 명이 거쳐갔고, 섹스를 이용한 유치한 말장난이 세기도 힘들 만큼 많은 요즘 무슨 수로 관객을 다시 사로잡는단 말인가? 재부팅이 정답이다. 11월 17일 개봉되는 새 시리즈 ‘카지노 로얄(Casino Royale)’에서는 금발에 푸른 눈동자의 대니얼 크레이그가 새 본드로 나온다. 007이 살인면허를 얻는 과정이 마침내 밝혀진다. “전부터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라고 윌슨은 말했다. 최근의 할리우드에선 모두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다. 소위 기원 이야기(무엇무엇이 어찌어찌해서 무엇무엇이 됐는가)가 유행이다. “옛날에는 프랑켄슈타인이 애버트나 코스텔로(코미디언들)와 싸우는 영화도 있었다. 그런 순간이 오면 새출발을 해야 했다”고 공포영화 작가 롭 좀비는 말했다. 그는 요즘 ‘핼러윈’ 시리즈의 재부팅에 바쁘다. “우리가 다시 만드는 캐릭터들은 우상 격이다. 명작의 소재는 영원히 명작이다.” ‘스타워즈’ 전편(prequel)과 지난해 여름의 ‘배트맨 비긴스’는 둘 다 일급 주인공들의 뿌리를 추적하는 줄거리로 금맥을 캤다. 요즘 극장에서는 전기톱 살인마 레더페이스[텍사스 살인마: 비기닝(The Texas Chainsaw Massacre: The Beginning)]에 관해 알고는 싶었지만 무서워서 묻지도 못했던 모든 사항을 알게 된다. 내년에는 마이클 마이어스(‘핼러윈’)와 제이슨 부어히스(‘13일의 금요일’)의 어린 시절이 밝혀지고, 2월에는 ‘한니발 라이징(Hannibal Rising)’에서 역시 한니발 렉터의 과거가 밝혀진다. 악명 높은 그의 인육 생식 습관은 나치 병사가 누이동생을 먹은 60년 전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을 설명한다. 어쩌면 약간의 파바빈(콩)과 맛있는 키안티(포도주)를 곁들여서. 모험 기피가 할리우드의 본질인 이상 영화사는 관객들이 여전히 좋아하는 브랜드를 포기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잘 아는 제목이 있으면 전투의 절반은 이긴 셈”이라고 드림웍스의 마케팅 본부장 테리 프레스는 말했다. 금전상 안전제일을 추구하다 보니 역설적으로 영화사는 창의적 모험을 시도할 핑계를 얻기도 한다. ‘한니발 라이징’의 감독을 맡은 피터 웨버가 전에 만든 장편영화라고는 ‘진주 귀걸이를 한 소녀(Girl With a Pearl Earring)’ 단 한 편이었다. 네덜란드 화가 요하네스 베르메르에 관한 영화이며 아카데미상 후보로 지명된 사극이다. 웨버는 프랑스 배우 가스파르 울리엘에게 앤서니 홉킨스가 단골로 맡던 살인마 배역을 맡겼다. “속편이나 전편을 얕잡아보고 ‘폴리스 아카데미 47’에 출연하는 기분으로 생각하기 쉽다”고 웨버는 말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그런 식이었다면 시작도 안 했다.” ‘한니발 라이징’은 편리하게도 전작 렉터 영화들의 출발점보다 훨씬 앞선 시점에서 끝난다. 따라서 성공하면 속편도 가능하다. 기원 이야기는 다루기가 만만치 않다. 관객들이 이미 끝을 다 알고 들어오기 때문이다. 주인공들의 과거 사연에서 드라마가 나와야 한다. 평범한 사람이 어쩌다 특별한 인물로 바뀌었는지 알아내야 하기 때문이다. “줄거리에 긴장이 담기는 경우도 있다”고 웨버는 말했다. “관객들은 내가 차를 몰고 뉴욕에서 로스앤젤레스까지 가는 줄은 알지만 어떤 길로 갈지는 모른다. 뉴올리언스를 거칠지, 시카고를 거칠지.” 통상적 전략은 주인공과 관련된 상징물을 골라 거기에 살을 붙이는 방법이다. ‘카지노 로얄’의 경우 관객들은 본드가 즐겨 타는 자동차 애스턴 마틴을 카드 테이블에서 땄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그런 자세한 내역들이 팬들을 만족시키고 이런 주인공들에 관해 전설 이상으로 아는 바가 없는 신세대 관객을 유인하는 데 도움이 된다. 개봉 예정인 모든 리부팅 작품 중에서 ‘카지노 로얄’의 위험 부담이 가장 크다. 다른 시리즈들과 달리 007은 여전히 생명력이 강하기 때문이다. ‘다이 어나더 데이’는 007 시리즈 중에서 가장 높은 흥행수익을 기록했다. “역대 최고의 흥행기록을 수립한 영화를 성공적으로 끝낸 시점에서 이제는 판형을 깨야 한다고 하면 투자자들이 반길 리 없다”고 윌슨은 말했다. “그러나 창의적 측면에선 그 길로 가야 한다. 그렇게 해도 그만한 돈을 벌지 누가 아는가?” ‘카지노 로얄’에서 제작진은 냉철한 매력으로 이름난 주인공을 “좀 더 단호하고 강인하며 어두운 성격의 사나이”로 만든다고 윌슨은 말했다. 영화 속의 본드는 이언 플레밍의 1954년 원작에 나오는 본드와 같다. 하루 담배 70개비를 피우고, 술을 과음하며, 솔직히 말하자면 사람들에게 총 쏘기를 즐기지 않는다. 크게 성공하거나 망하거나 둘 중 하나다. 시리즈 영화들이 재부팅하고 현실적으로 나가리라는 점은 익히 예상했던 바다. 지나치게 부풀어 멍청해진 시리즈를 손보는 논리적 수순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늘 그렇게 말하지만 두고 보라. 새 007 영화에는 폭발 장면과 멋진 자동차와 미녀들이 수없이 나올 것”이라고 프레스는 주장했다. 물론 그럴 것이다. 그러나 제작진은 ‘카지노 로얄’이 과거의 제임스 본드와는 다르다고 강조했다. “분위기를 잡으려고 첫 장면은 본능적이고 동적인 모습으로 시작하고자 했으며, 결국 건물들 옥상에서 벌어지는 추격전으로 끝났다”고 대본작가 로버트 웨이드는 말했다. “부드러운 요원의 모습보다는 생생하고 폭발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그러면 이번에는 투명 자동차가 없을까? “레이저를 갖춘 우주정거장도 없다”고 웨이드의 집필 파트너 닐 퍼비스는 말했다. “적어도 몇 해 동안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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