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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러 “우리를 선택하라” 강요

美, 러 “우리를 선택하라” 강요

1991년 12월 소련 와해는 러시아의 세력권을 현저히 위축시키면서 유라시아 대륙 중심부에 거대한 지정학적 ‘블랙홀’을 남겨놓았다. 제국의 몰락으로 생긴 권력 공백 지대에 독립국가연합(CIS)이라는 새로운 지리적 공간이 탄생했다. 동시에 과거 동·서 냉전의 인위적 양분법에 의해 가려져 있던 ‘중부유럽’이라는 역사적·종교적·문화적 실체도 중요한 정치 단위로 부활했다. 중·동부 유럽과 CIS 지역에서 분출되는 지정학적 역동성은 탈러시아 경향과 자기 충족적인 민족주의 운동의 고양에 의해 강화됐다. 그럼으로써 정치적 불연속선이 만들어졌고, 이는 북대서양조약기구(NATO)를 앞세워 힘의 진공벨트를 흡수하려는 미국과 자국의 전통적 세력권을 보전하고 통제권을 강화하려는 러시아 사이의 격렬한 투쟁으로 더욱 심화된다.

지정학적 블랙홀과 오렌지 혁명 91년 소련의 해체와 함께 주권을 회복한 우크라이나는 ‘포스트 소비에트’ 공간에서 미·러가 엮어내는 지정학적 세력 방정식에서 관건적 위치에 있다. 우크라이나의 대외적 좌표 설정, 즉 친서방 노선 또는 친러 노선 선택 여부에 따라 중·동부 유럽 및 CIS 지역을 둘러싼 미·러 간 세력 상관관계에서 중대한 변동이 초래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미국과 러시아 모두의 관심을 빨아들이는 지정학적 ‘만유인력(萬有引力)’ 지대에 해당한다. 이 점은 미·러의 대리전 양상으로 진행된 2004년 12월 우크라이나 대선에서 명료히 확인할 수 있다. 실제로 오렌지 혁명 당시 워싱턴과 모스크바는 과거 냉전을 연상시킬 정도로 첨예하게 대립했다.


●블랙홀 같은 ‘가치’
유럽인에게는 동방 진출 위한 ‘길목’ 아시아 유목민에겐 유럽 향한 ‘통로’ 러시아엔 바다로 나가는 ‘출구’

●전략가들의 분석은 매킨더… “여기가 바로 심장 지대(Heartland)” 브레진스키… “우크라이나 없이 제국 없다”

●강대국의 전략은 푸틴… 어느 땐 목 죄고, 어느 땐 ‘영원한 동반자’ 부시… “유셴코를 친미주의자 ‘슬라브의 무바라크’로”

●‘곡예 외교’하는 우크라이나는 에너지 아쉬워 러시아 외면 못하고, ‘당근’ 많은 미국에도 손짓 인구의 절반은 여전히 ‘친러’ 노선 요구 결국 “우리는 동도 서도 아닌 세계로 간다”
친서방 성향의 빅토르 유셴코와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의 대결로 압축된 대선 과정에서 미국과 러시아는 각기 자국에 우호적인 후보를 당선시키기 위해 선거에 깊숙이 개입했고, 배후에서 치밀하게 영향력을 행사했다. 결국 재선거까지 치른 우여곡절 끝에 미국과 서방이 지원한 유셴코가 승리했지만, 대선의 결과는 우크라이나 사회에 국론 분열이라는 적잖은 후유증을 남겼다. 오렌지 혁명을 보면서 한 가지 의문이 제기된다. 과연 어떤 이유 때문에 미국과 러시아가 서로 경쟁적으로 우크라이나를 포섭해 자국의 세력권으로 편입시키려고 그렇게 혈안이었느냐는 점이다. 이에 대한 해답은 다음 두 가지 요인에서 찾을 수 있다. 하나는 우크라이나가 지닌 잠재적·현실적 국력이고, 다른 하나는 서유럽과 러시아를 잇는 전략적 요충지로서 우크라이나가 차지하는 지정학적 가치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몇 가지 객관적인 국가 개황을 설명하면 아마 독자들은 이 나라가 지닌 국가적 잠재력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게 될 것이다. 먼저 우크라이나는 강대국으로서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3박자’ 즉 인구·영토·자원 모두를 구비하고 있다. 4700만 명의 우크라이나 인구(2005년 말 기준)는 독일·영국·프랑스·이탈리아에 이어 유럽에서 다섯 번째 위치를 차지한다. 영토 면적에 있어서만큼은 이들 국가를 압도한다. 한반도의 세 배에 이르는 공간 규모(60만3700㎢)는 프랑스보다 크고 독일보다 넓다. 세계 육지면적의 8분의 1과 11시간의 광활한 시·공간대를 차지하고, 동쪽 끝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해가 뜨면 동시에 서쪽 끝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해가 지는 나라 러시아에 비할 바는 못 되지만, 러시아가 유럽과 아시아에 걸쳐 있는 유라시아 국가이기에 우크라이나가 사실상 유럽 최대의 영토 대국이다.

▶(왼쪽부터) 부시 미국 대통령. 유셴코 우크라이나 대통령. 푸틴 러시아 대통령.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가치는 이 나라가 지닌 국가적 잠재력을 웃돈다. 지리적으로 우크라이나는 동과 서(유럽과 아시아), 남과 북(발틱해와 흑해)으로 이어지는 유라시아 대륙의 교차로에 위치해 있다. 서쪽으로는 몰도바와 루마니아, 북서쪽으로는 폴란드·슬로바키아 및 헝가리, 북쪽으로는 백러시아, 북동쪽으로는 러시아연방과 접해 있고, 영토의 남단에는 돌출된 크리미아 반도가 흑해와 아조프해 사이를 가르고 있다. 일찍이 지정학(Geopolitics) 개념의 창시자 매킨더의 ‘심장지대 이론(Heartland Theory)’이 여기에 딱 들어맞는다. 그는 1919년 『민주적 이상과 현실』이라는 저서에서 유라시아 대륙 내의 중앙적 위치(동유럽)를 장악하는 자가 결국 전 세계를 지배할 수 있다는 논리를 제시했다. 그 이론을 대입해 볼 때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위치가 바로 이 심장지대에 해당한다.

당근과 채찍 내미는 푸틴 매킨더는 유라시아 중앙부의 심장 지역이 사방으로의 팽창·진출이 용이하고 국가 발전 및 전쟁에 유용한 지하자원과 옥토가 풍부한 관계로,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에 기초해 그로부터 향외(向外)하면 유라시아 지배, 나아가 세계 지배를 쉽게 할 수 있다고 설파했다. 이는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환경과 정확히 일치한다. 과거 유라시아 헤게모니 국가들의 지정학적 팽창 및 그 지배 과정을 추적해 볼 때 우크라이나가 역사적으로 유라시아대륙 패권 장악을 위한 권력 투쟁의 주무대였다는 사실이 매킨더 이론의 적실성을 입증한다. 요컨대 우크라이나는 유럽인에게는 동방 진출을 위한 ‘길목’이었고, 아시아 유목민에겐 유럽을 향한 ‘통로’였으며, 러시아인에겐 바다를 향한 ‘출구’였던 것이다. 그래서 우크라이나는 13세기 몽골 침입 이후부터 소련이 해체될 때까지 오랜 기간 이민족의 말발굽 아래 신음해야 했다. 결국 800년 동안이나 주변 강대국의 분할 지배를 받아왔다. 신생 독립국으로 등장한 지 15년에 불과한 오늘날에도 우크라이나의 그러한 지리적 현실과 역사적 조건은 제국주의적 야심국들, 특히 냉전의 관성이 여전히 작동되고 있는 미국과 러시아에 유용하게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동시에 이들에게 상호 제로섬적·지정학적 목표를 제시한다. 미국의 대표적 국제문제 전략가 즈비그뉴 브레진스키는 우크라이나를 유라시아 대륙을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러시아의 제국적 부활을 원천 봉쇄하는 데 있어 중요한 지정학적 ‘추축(樞軸)’ 국가로 분류한다. 그는 모스크바에 의해 주도되는 CIS 통합 노력이 제국주의적 본성을 지니고 있다고 판단하고 미국 중심의 세계 지배체제 구축을 위해서는 우크라이나를 러시아로부터 철저히 격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에 종속될 경우 중·동부 유럽 및 CIS 지역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행사가 어려워지고 궁극적으로 소련의 후속체로서 러시아·우크라이나·카자흐스탄으로 이어지는 유라시아 제국이 발현해 미국의 지정학적 운신의 폭을 크게 제약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따라서 독립적이고 민주적이며 강력하고 번영된 우크라이나를 적극 지원해 서유럽의 정치경제 구조 안에 편입시킬 것을 워싱턴의 정책 결정자들에게 권고한다. 브레진스키의 충고를 요약하면 “우크라이나 없이는 러시아가 제국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제국적 야망을 억제하는 지정학적 ‘급소’라는 것이다.

우크라이나 빠진 CIS는 유명무실 우크라이나의 지정학적 중요성에 대한 크렘린 전략가들의 인식 또한 미국과 동일하다. 그것은 과거 블라디미르 레닌이 “우크라이나를 잃으면 우리는 머리를 잃는다”는 언술 속에 명확히 함축돼 있다. 레닌의 지적처럼 오늘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국익 수호와 영토적 안전 보장 그리고 위대한 강대국 러시아의 재건을 좌우하는 생사여탈적 위치를 차지한다. 우크라이나의 모스크바 영향권 이탈은 러시아의 전략적 옵션을 크게 제한한다. 그뿐만 아니다. 유라시아 지정학적 좌표 체계를 근본적으로 수정해야 하는 치명적인 타격으로 다가온다. 구체적으로 짚어보자. 첫째는 러시아의 야심 찬 프로그램인 ‘CIS 통합’을 유명무실화시킨다는 점이다. 94년 초 러시아의 입장을 배려치 않은 NATO의 활동영역 확장이 본격화된 후 크렘린은 자구적 차원에서 NATO의 동진 팽창 속도에 비례해 느슨한 연합체 형태의 CIS를 견고한 통합체로 심화 발전시키기 위한 국가적 노력을 서둘렀다. 이 중차대한 문제에 대한 실천적 조처는 95년 9월 이례적으로 발표한 ‘러시아와 CIS의 전략적 노선’이라는 외교 문건으로 표현됐다. 러시아 대통령령(令) 형식으로 공표된 이 문건에서 보리스 옐친 전 대통령은 CIS 국가들과의 역사적·안보적·지정학적 특수 관계를 강조하면서 CIS 통합의 필연성과 당위성을 역설했다. 핵심을 요약하면 앞으로 CIS에 대한 영향력과 통제력을 강화하겠다는 러시아 정부의 강한 의지 표현이다. 이후 러시아는 CIS를 전 가맹국이 참여하는 명실상부한 정치·경제·안보 공동체로 고착시키기 위한 외교적 노력에 심혈을 기울여 왔다. 그럼에도 우크라이나는 계속 CIS 통합에 미온적인 태도를 보였고, 오히려 공개적으로 NATO·EU 가입 희망을 피력해 왔다. 따라서 우크라이나가 CIS에서 완전 이탈해 서유럽 세계의 일원으로 흡수될 경우, 파편화된 CIS는 그 유기적인 작동이 마비되고 단지 몇몇 친러시아 국가만의 ‘친목단체’ 수준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둘째는 유럽 방면에서 러시아의 안보적 취약성 노출이다. ‘동구행 NATO호’ 열차가 중부 유럽에 이어 우크라이나를 가로지를 경우 러시아는 NATO와의 안보적 완충지대를 상실하게 된다. 그야말로 직접 유럽을 대면해야 한다. 이는 러시아의 장기적·지정학적 목표인 중·동부 유럽의 중립화를 난망케 한다. 뿐만 아니라 러시아의 전략적 방어 ‘종심(縱深)’을 훨씬 동쪽으로 후퇴시켜 안보적 취약성을 영속화시킨다. 셋째는 전략적 요충지인 흑해 연안 지역에 대한 독점적 지배권 종식이다. 18세기 말 예카테리나 여제 이래 부동항 흑해는 지중해로 나가는 유일한 출구로서, 전통적으로 러시아제국의 성장과 유럽 열강으로서의 국제적 지위 확보에 기여한 대단히 중요한 전략적 통로였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독립 이후 흑해 함대는 분할됐고, 그 모항 세바스토폴 항구와 크리미아 반도는 우크라이나에 귀속됐다.

▶2001년 푸틴과 쿠치마의 회동.

이런 상황에서 우크라이나의 상실은 흑해에 대한 러시아의 접근을 제한하면서 제해권 장악에 제약을 가하고, 러시아 해군력의 대 유럽 투사 능력을 저하시킬 뿐만 아니라 러시아가 처해 있는 지정학적 안보 체계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준다. 넷째는 카스피해 유전지대 개발 및 송유관 건설을 둘러싼 러시아의 경제이익 침탈이다. 현재 미국과 러시아는 카스피해산 원유의 지배권 장악을 놓고 치열한 영향력 경쟁을 전개 중이다. 흑해 연안의 우크라이나는 이 유전지대 외곽에 자리 잡고 있으나, 카스피해가 내해(內海)인 관계로 흑해를 거쳐 유럽으로 향하는 원유 수송에 있어서는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따라서 우크라이나의 이탈은 카스피해 연안지역의 막대한 원유·가스 자원에 대한 장악력을 저하시킨다. 마지막으로 제국적 복원의 추동력 상실을 지적할 수 있다. 역사적·민족적·언어문화적·종교적 동질국인 4700만 우크라이나 인구와 그 영토 규모는 향후 러시아의 제국적 부활을 견인할 수 있는 중요한 물적·인적 자원이다. 그러하니 키예프가 모스크바와 결별할 경우 ‘수퍼 파워’로서 러시아 제국의 재건은 상당한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슬라브家 내홍 즐기는 미국 이처럼 우크라이나는 그 지리적 위치와 국가적 잠재력으로 말미암아 미국과 러시아 모두 결코 포기하고 양보할 수 없는 지정학적 ‘경혈’에 해당한다. 미국으로 대표되는 서방에게 우크라이나의 포섭은 NATO의 세력권 확장과 EU의 공간적 범위 확대를 보장해줄 뿐만 아니라 막대한 에너지 자원의 보고(寶庫) 카스피해 연안 지역에 대한 접근을 용이하게 해준다. 따라서 미국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최대한 지원하면서, 동시에 다양한 유인책을 제시하면서 우크라이나의 대러 밀착을 견제하려는 전략을 구사한다. 구체적으로 NATO와의 평화를 위한 동반자협정(PFP) 체결과 합동군사훈련을 통한 심리적 안보 우산 제공, 대규모 국제통화기금(IMF) 차관 공여, WTO·EU 가입 문호 개방에 대한 묵시적 약속, 2004년 오렌지 혁명에 대한 배후 개입 등이 적절한 사례가 될 것이다. 역으로 러시아 입장에서 우크라이나의 슬라브 공동체로의 유인은 NATO의 동진 팽창을 차단하는 ‘방역선’이자 중·동부 유럽지역에 대한 영향력 확장의 ‘징검다리’이며, 흑해와 CIS 지역에 대한 헤게모니 장악의 필수불가결한 전제조건이다. 러시아로 하여금 CIS 나라 가운데 가장 우선적으로 우크라이나를 포용하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를 세력권으로 끌어들이지 않으면 안 될 절체절명의 과제를 부과한다. 그런 연유로 러시아는 ‘당근’과 ‘채찍’ 전략을 혼용하면서 우크라이나의 반러화를 방지하기 위한 지난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런 현상은 특히 2000년 블라디미르 푸틴 정권 출범 이후 현저하다. ▶그의 첫 해외 순방국 중 하나가 우크라이나였다는 점이나 ▶2001년 5월 중량급 인사인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전(前) 총리를 우크라이나 대사에 기용하고 ▶매년 1~2차례 이상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정상 회동을 하며 ▶2003년 1월 줄곧 러시아 대통령이 맡아왔던 CIS 회의 의장에 처음으로 당시 레오니트 쿠치마 우크라이나 대통령을 천거했고 ▶2004년 우크라이나 대선에서 친러 인사 빅토르 야누코비치 총리에 대한 공개 지지 선언 등은 모두 러시아 정부가 우크라이나에 어느 정도 공을 들이고 있는가를 잘 보여주는 대목들이다. 그러나 슬라브 형제국 우크라이나는 불안정하고 탐욕스러운 러시아와 전략적 운명을 같이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 오히려 크라브추크 초대 대통령 때부터 독자적인 민족주의를 고양하면서 탈러 원심력적 추세를 서서히 강화해 나갔다. 독립 초기 우크라이나의 서구 지향적 대외정책은 러시아의 반작용을 불러일으켰다. 이는 ▶러시아 의회의 우크라이나 국경 승인 거부 ▶크리미아 반도에 대한 우크라이나의 권리 적법성 제고 천명 ▶흑해 함대의 모항 세바스토폴 항구에 대한 치외법권적 통치권 요구 등으로 표현됐다. 러시아 정부의 이런 조치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를 반러시아적 방향으로 인도했고, 급기야 양국 간 전방위적 마찰을 야기했다. 이를테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주도의 CIS 통합과 슬라브연방 창설을 거부하면서 형성된 정치적 한랭 전선, 우크라이나에 대한 러시아의 부채상환 독촉과 유럽으로 향하는 가스 도용을 둘러싼 경제 대립, 우크라이나의 독자적 핵 통제권 행사를 놓고 벌인 안보 설전, 흑해 함대 분할 조건에 관한 이견으로 조성된 군사적 긴장, 크리미아 반도 소유권을 둘러싼 영토 마찰, 심지어 정교회의 주도권 장악을 둘러싼 종교 분쟁 등이 발생했다. 양국의 축적된 앙금은 급기야 2005년 12월 말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로 향하는 가스관을 잠그고 가격을 대폭 올리는 가스 분쟁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모스크바가 키예프를 길들이기 위해 우크라이나의 아킬레스건을 건드리고 목을 죄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관계가 갈등의 측면만 있는 것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경제 구조의 대러 의존성, 러시아의 대외적 공간 특히 유라시아 대륙 서남 방향에서 우크라이나가 차지하는 전략적 중요성, 인종·언어·문화적 공통성에 기초한 슬라브적 형제애 등이 양국 간 반목이 첨예한 대립으로 비화하는 것을 억제해주고 있다. 2004년 12월 우크라이나 대선에서 승리한 친서방 성향의 유셴코가 러시아와의 앙금을 씻어내고 관계 회복을 위해 취임 이후 첫 해외 순방지로 모스크바를 선택했다는 사실에서, 그리고 푸틴과의 정상회담에서 언명한 “러시아는 전략적 파트너”라는 외교적 수사에서 크렘린과의 갈등 확대 재생산을 원치 않는 우크라이나의 입장을 우회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미국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간 갈등의 증폭을 멀리서 흐뭇하게 즐기고 있다. 슬라브가(家)의 ‘내홍’이 미국에 전략적 이익을 안겨주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강대국화를 견제하는 미국은 즐기는 차원을 넘어서 그런 절호의 기회를 이용하고 있다. 미국은 우크라이나에 안전 보장의 제공과 다양한 경제적 미끼를 던지면서 NATO의 견고한 동맹세력으로 끌어들이려는 계획을 갖고 있다. 궁극적으로 미국의 대(對)우크라이나 정책은 강력한 러시아의 부활 억제라는 전략의 연장선상에 놓여있다. 따라서 미국의 우크라이나 전략의 초점은 이집트의 호스니 무바라크 대통령을 아랍 세계의 친서방주의자로 변신시킨 것처럼 유셴코를 슬라브권의 ‘호스니 무바라크’로 만드는 데 있다. 우크라이나는 ‘줄서기’를 강요하는 국제정치적 현실 속에서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방황하지 않을 수 없다. 미국을 따르자니 눈을 부릅뜨고 신경질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는 거인 러시아로부터의 항구적 ‘안전 보장’이 어렵고, 러시아를 따르자니 경제가 어려워지며 우크라이나가 간절히 바라는 EU와 WTO 가입도 요원해진다. 이처럼 우크라이나는 양 가위의 날개에 끼인 형국처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아주 곤혹스러운 입장에 처해 있다. 이러한 상황이 미국과 러시아라는 샌드위치에 낀 우크라이나에 ‘곡예 외교’를 강요하고 있다.

쿠치마 “東, 西 아닌 세계로 간다” 현실 정치적 맥락에서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시선을 일방적으로 외면하면서 서방에만 무한정 몸을 팔 수 없다. 지정학적으로 바로 코앞에 인접해 있어 영토적 안전보장을 훼손당할 수 있고, 인구의 절반 가량이 여전히 친러 노선을 요구하고 있으며, 경제 회생을 위해서도 서방의 경제 지원 못지않게 러시아로부터 저렴하고 안정적인 에너지 자원의 공급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칫 러시아의 신경을 예민하게 할 경우 경제 이익을 대신해 안보 이익을 희생당할 수도 있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양국 간 쌓인 정치적 앙금이 흑해 함대와 크리미아 반도 문제로 불똥이 튀어 군사적 긴장으로 비화될 가능성을 전혀 배제할 수 없다. 또 러시아에 대한 높은 에너지 의존도와 막대한 국가 채무가 우크라이나의 무분별한 러시아 궤도권 이탈을 제한한다. 우크라이나가 곡예 외교를 펼칠 수밖에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가 어디로 향하는가’라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쿠치마 전 대통령은 항상 이렇게 대답했다. “우크라이나는 ‘동’(러시아)이나 ‘서’(유럽)로 가지 않고 세계로 간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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