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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외교 무대에 한국은 없다

공공외교 무대에 한국은 없다

“스탠퍼드대에서 유색인으로는 처음으로 프로보스트(provost·수석 대학 행정관)가 됐습니다. 흑인 여성으로선 처음으로 국가안보보좌관에 발탁됐습니다. ” “뉴스위크에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흑인 여성’이라고도 했지요 ^^.” 알 만한 사람은 콘돌리자 라이스 미 국무장관을 가리켰구나 눈치챈다. 3월 20일 오전 10시 포털 사이트 ‘다음’에 개설된 인터넷 커뮤니티 ‘Cafe USA’는 라이스 국무장관을 비롯해 미국 역사를 발전시킨 여성들로 이야기꽃을 피웠다. 주한 미국대사관 진 밴더우드 지역총괄담당관과 이 카페의 한국인 회원 7∼8명이 1시간30분간의 웹채팅에서 미국 여성 지도자들을 주제로 갖가지 단상을 쏟아냈다. 웹채팅은 주한 미국대사관이 Cafe USA에서 한국 네티즌과 실시간 대화를 목적으로 주로 화요일 진행하는 간판 행사다. 이날의 주제는 미국의 ‘여성 역사의 달’ 3월에 즈음한 미국 역사 속의 여성이었다. 대사관을 대표해 채팅에 나선 밴더우드 지역총괄담당관은 아멜리아 이어하트, 안나 엘레노어 루스벨트, 바버라 조던 등 3명의 여성 지도자 때문에 큰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배견희라는 ID를 가진 네티즌은 “여성 지도자들을 보며 여성으로서 용기를 얻는다”고 호응했다. 웹채팅 말미에 3월 27일 같은 시간대에 미국대사관 질 페리 인사담당관이 대사관 직원 채용을 설명하는 웹채팅이 계획됐다고 예고했다. 4월에는 미대사관 내 통역사나 번역가들과의 웹채팅도 준비된다. 웹채팅은 한국어로 이뤄지며 미대사관의 통역사들이 실시간으로 돕는다. Cafe USA의 웹채팅은 2004년 12월 2일 당시 주한 미국대사였던 크리스토퍼 힐 국무부 동아태담당 차관보가 처음 시작했다. 이후 지금까지 40여 차례 진행됐다. 보통 웹채팅에는 10명 안팎의 네티즌이 참여한다. 역대 채팅엔 버시바우 주한 미국대사를 비롯해 스탠튼 부대사, 줄리아 스탠리 총영사, 미셸 아웃러 부영사, 앤드루 퀸 경제공사참사관, 데이브 모이어 정치담당 서기관, 배유진 2등서기관 등 대사관 내 핵심 외교관 대부분이 참여했다. 이들은 소관 분야별로 미국 정부의 입장을 전하고 한국인들의 여론도 수렴한다. 주한 미대사관은 채팅에 앞서 행사 안내 휴대전화 메시지를 회원들에게 보내는 일도 잊지 않는다. 미대사관은 앞으로 웹채팅을 더욱 활성화할 방침이다. “월 2∼3회의 정기적인 웹채팅을 화요일 오전 10시부터 1시간30분 동안 진행하려 한다”고 박은혜 주한 미국대사관 공보보좌관은 말했다. 올 3월엔 이 카페에 동영상 콘텐트의 총아로 불리는 ‘UCC(사용자 제작 콘텐트 : User-Created Contents)’ 게시판도 만들었다. 미대사관에서 제작하거나 대사관 행사에 관련된 동영상을 올린다. 예를 들면 지난 연말 KBS ‘도전 골든벨’ 왕중왕전에서 문제를 제출했던 버시바우 대사의 동영상, 지난 2월 27일에 Cafe USA에서 미셸 아웃러 부영사가 웹채팅을 나누는 모습 등을 담았다. 주한 미대사관의 외교관들은 오프라인, 즉 실생활에서도 한국인들을 직접 만난다. 예컨대 스피커 프로그램(speaker program·미국 연사 초청 프로그램)이 있다. 미국 내 전문가를 초빙해 한국의 학계나 시민사회와 연결해 준다. 보다 정확한 미국 관련 정보를 한국에 전달하려는 취지다. 또 미대사관 소속 외교관들이 직접 대학 혹은 단체의 강연에 나선다. 요즘 들어 외교관들의 외부강연이 더욱 잦아져 일주일에 평균 3∼4회 강단에 선다고 한다. 이 대열의 선두는 알렉산더 버시바우 대사다. “긍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주려 하기보다는 미국을 정확하게 이해하도록 돕는 목적”이라고 주한 미대사관 공보과의 데럴 젱스 문정관은 강조했다. 주한 미대사관이 한국 국민 속으로 마구 뛰어들어 온다. 한국 정부와 여론 주도층에 국한되던 ‘전통 외교(traditional diplomacy)’ 기조는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일반 국민을 직접 상대하는 ‘공공외교(public diplomacy)’가 광범위하게 펼쳐진다. ‘경성 권력(hard power)’의 대명사 격인 미국이 외국인 개개인에게 나긋나긋한 모습으로 다가서는 이유는 뭘까? 젱스 문정관은 “한·미 관계를 잘 풀어나가자면 양국 국민이 서로를 있는 그대로 봐야 하고 오해가 없어야 한다. 그러자면 직접 만나 대화하고 (한국에서는 특히) 사이버 공간이 아주 효과적이다.”

시대가 변하면 외교의 정의도 바뀐다. “외교란 해선 안될 말을 가려내는 기술(Diplomacy is the art of knowing what not to say)”이라는 매튜 트럼프의 정의는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외교관들은 이제 말을 많이 해 자국을 널리 알려야 하는 시대다. 문민정부 초대 외교장관을 역임한 한승주 고려대 총장서리에 따르면 공공외교는 원래 1960년대 민주주의 확산에 따른 민간 부문의 정치적 영향력 증대와 발언권 강화에 뿌리를 둔다. 국익을 보다 원활히 관철하려면 상대국 국민의 여론을 유리하게 조성할 필요가 생겼다. 주재국 국민과 함께 호흡하면서 자국의 문화와 역사, 사회를 알려 자신들을 더 잘 이해하고 호감을 갖게 하는 행위다. “일국의 정부가 상대방 나라의 대중으로부터 신뢰받을 때 외교는 더 효과적으로 수행된다”고 한 총장서리는 공공외교의 효용성을 설명했다(공공외교의 주체는 정부와 기업, 민간 등 누구나 가능하다. 이 글에선 일단 정부 단위의 활동에 초점을 맞춘다). 특히 IT 기술 발전과 인터넷 확산에 힘입어 외교정책 수립과 집행 과정에서 민간 부문의 참여가 대폭 증가했다. 정부가 배타적이고 독점적으로 최종 권한을 행사하던 시대는 막을 내렸다. 상대국 국민의 동의와 참여를 이끌어내려 노력해야 한다. 군사력이나 압도적인 국력만으로는 특정 국가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어렵다. 눈에 보이지 않는 국가의 명성과 이미지가 힘을 발휘한다. 미국은 특히 2001년 9·11 테러 이후 미국의 대외 이미지 개선 필요성을 절감하고 공공외교를 더욱 강화했다. 미국 정부는 텍사스 주지사선거 시절부터 조지 W 부시 대통령을 보좌해 온 캐런 휴스 전 백악관 고문을 2005년 국무부 공공외교와 대외홍보담당 차관에 임명했다. 휴스 차관의 지난해 12월 발언은 미국 정부가 왜 공공외교를 중시하는지 잘 설명해준다. “부시 대통령과 미국민은 에이즈 퇴치에서부터 아동 교육, 최빈국 식량원조에 이르기까지 인도주의적 활동에 적극 참여해 왔다. 하지만 아직도 소수의 미국인과 세계적으로 극소수의 사람만 이런 사실을 안다. 이유는 간단히 말해 나쁜 소식들(이라크 전쟁 등)로 인해 선의의 행동들이 설 자리를 잃기 때문이다. 지금처럼 전쟁 중일 때는 반가운 얘기들이 우울한 사망 소식에 가려 무색해진다. 미국이 다른 나라 사람들의 삶의 질을 높이는 일에 힘을 기울여 적극적으로 ‘평화를 수행한다’는 사실을 우리 스스로, 그리고 전 세계가 알도록 하는 노력이 중요하다.” 미 국무부에 따르면 미국의 공공외교는 크게 세 가지 전략적 목표를 지향한다. 지구촌 사람들에게 희망과 기회라는 긍정적 전망을 전파한다. 또 폭력적 극단론자들은 고립시키고 전제주의와 증오 이데올로기에 맞선다. 마지막으로 미국인들과 국적, 문화, 신앙이 다른 국민 간 공통의 이익과 가치들을 폭넓게 이해하도록 한다는 목표다.

미국, 영국 등 많은 나라 공공외교 치중 영국도 공공외교에 힘쓰긴 마찬가지다. 민간 온실가스 감축을 의무화하는 기후변화협약법 초안 발표(2007년 3월 13일)가 좋은 예다. 1990년 기준으로 2020년까지 이산화탄소 배출량을 26~32%, 2050년까지 60% 줄인다는 내용이다. 토니 블레어 총리는 “이런 혁명적 법안은 영국이 온실가스 문제 해결에 앞장서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주한 영국대사관은 지난 21일 영국계 기후 변화 컨설팅 업체인 SD3, 국제규격 인증업체인 BSI와 함께 기후변화협약 관련 워크숍을 대사관저에서 열었다. 기후변화협약과 지속 가능 경영을 돕는 최신의 정보와 전문지식 교환이 목적이다. 한국에서는 삼성전자, 포스코, KT, 현대건설, 유한킴벌리 등 20여 개 기업과 환경운동연합 등 NGO 단체도 참여했다. 또 4월 20일엔 ‘기후 변화 커뮤니케이션 NGO 비디오 콘퍼런스’를 주최한다. 영국대사관은 “양국의 국민, 언론과 정책 입안자들이 기후 변화 커뮤니케이션과 관련해 성공적 업무수행 사례를 교환하고 경험과 아이디어를 나누는 자리”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사실은 지구온난화 대책 같은 범세계적 문제 해결에 기여하는 영국의 이미지를 극대화하겠다는 의도가 다분한 공공외교 사례다. 영국 정부의 공공외교는 2005년 카터 영국 상원의원이 작성한 ‘카터 보고서(Carter’s Review)’에 뿌리를 둔다. 카터 상원의원은 공공외교의 의미를 “영국 이해를 높이고, 영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 해외의 개인과 단체들에 정보 제공을 목적으로 하는 활동”으로 정의했다. 또 공공외교가 해외 국민과의 접촉을 통해 영국이 정한 전략적 우선순위 과제를 달성하는 과정이어야 한다고 했다. 나아가 영국 외무부는 공공외교 활동을 통해 달성해야 할 10대 과제를 선정했다. 테러와 대량살상무기로부터 더 안전한 세상 만들기, 강력한 국제 체제를 통한 분쟁 예방과 해소, 지속 가능한 저탄소 경제로 신속하게 전환함으로써 기후 안전을 확보하는 일, 지속 가능한 발전이나 빈곤 해소 촉진 등이 있다. 인류가 공동으로 안은 난제를 공공외교를 통해 해소해 국제사회에 기여하고, 지도력도 제고하는 이중 효과를 노린다. 영국 정부는 매년 6억 파운드(약 1조982억원)를 공공외교 예산항목에 배정한다. 영국대사관 톰 워릭 정치공보담당은 “영국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홍보하던 방식에서 좀 더 현지 국민에게 쉽게 다가가는 공공외교를 강조하는 쪽으로 정부의 정책이 변했다”고 설명했다. “한국 국민은 변화를 크게 못 느끼겠지만 영국대사관은 이런 과정들을 통해 한국민에게 다가간다.” 미국과 영국이 상대적으로 앞서지만 국내에 진출한 여타 국가 대사관의 공공외교도 비교적 활발하다. 중국도 2000년을 전후로 공공외교에 많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고 진준걸 주한 중국대사관 공보관은 말했다. 지난해 11월 24일은 주한 중국대사관은 수교 이후 처음으로 바자를 열었다. 대사관 측은 이 바자 수익금 5000달러를 대한적십자사에 기증했다. 진 공보관은 닝푸쿠이 주한 중국대사가 “피부에 와닿는 행사를 계속 열어” 양국 국민 간 이해의 폭을 넓히려 한다고 말했다. 주한 중국대사관 홈페이지에 수록되는 중국 관련 정보도 모두 한국어로 전달된다. 사회주의 냄새가 전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세심하고 친절하다. 특히 경제상무처, 문화처, 교육처 등 3개 코너에는 항목별 각종 자료가 촘촘하다. 경제 규모에서 한국(2005년 국민총소득 7930억 달러)에 조금 뒤지는 호주(6548억 달러)도 공공외교에 열심이다. 주한 호주대사관 공보실 명칭부터가 ‘Public Diplomacy’다. 1990년 말까지 ‘Public Affairs’로 표기하다가 공공외교의 필요성이 강조되면서 바꿨다. 호주 외교부는 산하에 공공외교를 전담하는 호주 이미지국(Images of Australia Branch)을 두고 해외 각국의 국민에게 외교와 통상 정책을 설명하고, 현지 언론에 잘못 전달된 호주 관련 정보를 바로잡는다. 호주 외교통상부는 공공외교 분야에 매년 9350만 호주 달러(약 698억원)가량을 지출했다. 그렇다면 한국은 어떨까? “한국은 국력에 걸맞은 산(山)을 갖지 못했다”고 지난해 9월 한국국제교류재단 창립 15주년 기념회의에 참여한 제임스 루이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는 말했다. 외국인들이 한국을 거의 모른다는 지적이다. 그는 “인지도는 산을 쌓는 것과 같다”고 설명했다. 토대부터 차근차근 쌓자면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한국의 이미지는 한국이라는 산을 여러 각도에서 힐끗 본 결과다. 따라서 이미지를 좋게 하려면 산부터 먼저 만들어야 한다고 그는 주문했다. 세계 무대에서 한국은 아직 조그만 언덕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가다. 그나마 일본과 미국에서는 한국이라는 산이 잘 보이는 편인데 한국 인지도가 낮은 유럽에서는 야트막한 구릉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도 중국과 일본에 가려져 거의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공공외교, 즉 외국인에게 한국을 알리는 일이야말로 산을 높이 쌓는 방편”이라고 루이스 교수는 말했다.

한국은 공공외교 감도 못잡아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가 펴낸 ‘2005 국가 이미지 현황 및 시사점’ 보고서는 공공외교가 왜 필요한지 잘 보여준다. 세계 70개국 100개 도시의 소비자 5000명에게 한국 이미지를 물었다. 유럽 응답자의 39.4%, 북미 응답자의 30.4%가 한국에 아무런 호감이 없다고 했다. 한국과 연상되는 이미지를 묻는 질문(복수 응답)에 유럽인은 한국전쟁(55.5%), 자동차(53.4%), 올림픽·월드컵(52.6%) 순으로 답했다. 북미에서는 한국전쟁(60.1%), 북핵 문제(58.6%)가 자동차(49.4%)보다 앞섰다. 첨단 기술과 스포츠 강국이라는 긍정적 이미지보다는 전쟁과 핵무기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더 짙었다. 그런데도 외교통상부 차원의 공공외교는 아주 미흡하다. 공공외교를 담당하는 부서와 예산 항목은 아예 없다. 또 공공외교를 공식적으로 논의조차 안 한다고 외교부는 밝혔다. 그러면서 익명을 요구한 한 외교관은 “외교부 산하 148개 재외공관과 국정홍보처 소속 해외홍보원, 문화관광부 산하 재외한국문화원, 한국국제교류재단, 한국국제협력단 등이 해외에서 하는 활동 모두가 공공외교”라고 말했다. 공공외교를 통째로 관장하는 부서가 외교부에 마련되지 않았다 해서 공공외교에 손놓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물론 정부 각 부처나 기관들도 공공외교의 수행 주체이기는 하다. 하지만 정부 부처는 ‘state diplomacy(국가 외교)’ 담당기관이라는 자부심이 강해 공공외교의 자각이 약하다고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반박했다. 또 재외공관과 국정홍보처 소속 해외홍보원, 문화관광부 산하 재외한국문화원, 한국국제교류재단, 한국국제협력단, 재외동포 재단 등 공공외교를 수행하는 기관들의 업무를 조율해야 할 외교부에 공공외교의 기본 방침이 없는 데서 오는 문제도 많다. 박철희 교수는 “외국에서 공공외교를 수행하는 우리 기관 간 횡적인 연계나 조직적 네트워크가 없어 각개 약진에 그친다”고 평가했다. 그러다 보니 “한국에서 발산되는 이미지는 분열적인 경우가 많고, 때에 따라서는 퇴행적”이라고까지 덧붙였다. 같은 대학원의 이근 교수도 “개별 기관들이 해온 공공외교는 단지 한국을 알리겠다는 일념에서 비롯될 뿐 국가적 전략이나 목표와 동떨어져 있다”고 평가했다. 한국이 전통 문화와 예술을 해외에 전파하는 일은 잘 하지만 그 외 한국 관련 의제와 현안을 현지인에게 제대로 전달하지 못 한다는 얘기다. 외교부 정책홍보팀 나세주 서기관도 “해외 한국문화원, 대사관, 각종 민간단체, 체육단체를 통해 다방면에서 이뤄지는 공공외교 활동과 관련한 중장기적 전략이나 정책적 모토가 필요한 시점이라는 지적에 전적으로 동감한다”고 말했다. 외교통상부가 미처 다 못 하는 공공외교를 한국국제교류재단, 재외 한국문화원 등이 메워주리라는 단순한 기대는 너무 안이하다.

한국이 전통 외교에만 매달려온 이유 외교통상부는 국회 외교통상위 최재천 의원에게 제출한 자료에서 “재외공관의 공공외교 활동에 대한 실태를 일괄적으로 파악한 바는 없다”고 했다. 외교통상부 한혜진 정책홍보담당 팀장은 “외교통상부가 공공외교를 챙기지 못한다는 지적이 있음을 안다”고 수긍했다. 하지만 한 팀장은 “현실 여건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했다. 여건이란 결국 인력과 예산이다. 이한곤 외교부 의전장은 1980년대부터 8개국에서 외교관 생활을 하면서 인력 부족을 절감했다고 한다. 국가 홍보는 간단하다. 외교관이 다리품을 더 팔고 주재국 국민과의 접촉을 강화하면 그들의 마음도 움직인다. 그러나 “대사를 포함해 외교부에서 파견된 직원이 4명 이하인 공관이 전체의 70% 선에 달한다. 대민 접촉 등 공공외교를 하고 싶어도 물리적인 시간을 내기 힘들다.” 주재국 정부나 의회, 학술기관 상대만으로도 시간이 빠듯하다는 말이다. 그나마 기존 인력마저도 맘대로 활용할 형편이 못 된다. 재외공관의 한국 외교관들이 정작 본업보다는 한국에서 오는 귀빈 접대에 치인다는 얘기는 널리 알려졌다. 국회 외교통상위 이해봉(65) 의원은 젊은 날 외교관을 꿈꾸며 행정고시를 준비했다. 그러나 6회 행정고시에 합격한 뒤엔 내무부를 비롯해 다른 부처에서 일했다. 1996년 15대 총선 때 국회에 입성한 다음 11년 동안의 의정생활을 거치면서 내린 결론은 좀 엉뚱하다. “내 자식은 외교관을 시키지 않겠다.” 동료 의원들과 외국을 방문하면서 너무나 자주 봐 온 광경 때문이다. “국회의원들이 가면 현지 대사가 공항까지 나와 안내한다. 다음 날 오전 7시에 와서는 아침식사 대접을 한다. 심지어 관광 일정까지 따라다닌다. ‘대사가 왜 이런 일을 하느냐’고 타박도 주지만 트집 잡히지 않으려면 그렇게 해야 한다고 한다. 외교부 인력이 모자라기도 하지만 더 큰 문제는 불필요한 영역에 인력을 낭비한다는 점이다.” 그러나 이한곤 외교부 의전장은 손사래를 친다. “예전에 그랬지만 요즘은 많이 나아졌으며 혹여 있어도 순전히 국회의원 개인의 문제”라고 말했다. 17대 국회 들어 많이 좋아졌다는 말이다. 박영숙 주한 호주대사관 문화공보실장은 “공무가 아닌 용무로 방한하는 정치인들은 주한 호주대사관에 연락도 하지 않거니와 대사관에서도 관여하지 않는다”고 했다. 한국도 사정이 비슷하다고 말하기는 아직 어렵다. 외교부 재정기획관실이 작성한 ‘세계 주요 20개국 외교부 예산 및 인력의 비교’ 자료에 따르면 2005년 기준으로 한국 정부예산(기금과 특별회계 포함)에서 외교부 예산이 차지하는 비중은 0.43%다. 한국과 국민총소득(GNI)이 엇비슷한 캐나다(0.9%), 스페인(0.8%), 호주(1.5%)보다 많이 떨어진다. 외교관 수에서도 캐나다 4700명, 스페인 6000명, 호주 2000명인데 한국은 1700명 선이다. 외교부 정규 직원 수도 15년 전보다 적다. 지난해 6월 현재 외교관 수는 1906명으로 91년(1954명) 수준을 밑돈다. 인구가 우리와 비슷한 스페인(6091명), 캐나다(4702명), 이탈리아(5208명)에도 한참 뒤진다. 그래서 외교부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외교부 예산을 정부 전체 예산의 1% 선까지 올려야 한다”는 주장이 나온다. 박철희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전쟁에 대비하는 국방비에는 엄청난 예산(전체 예산의 10.3%)을 투입하면서 평화 상태를 만들고 전쟁을 예방하는 외교예산에는 투자가 너무 인색하다”고 지적했다. 최성홍 전 외교부 장관도 “한국은 세계 11위의 중진국으로서 공공외교를 확대해야 하는데 예산과 인원 부족 때문에 활성화가 어렵다”고 예산 증액의 시급성을 강조했다. 하지만 국가 예산을 짜는 기획예산처 입장은 다르다. 기획예산처에서 외교부 예산을 다루는 일반행정재정과의 류중재 사무관은 “부처별 배정 예산은 구체적 수요를 판단해 결정한다”고 했다. 그래서 국가별로 재정 수요가 다르고, 사정도 제각각인데 외국과 단순 비교해 예산을 맞춰달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외교부에서 비교대상으로 제시하는 국가 중 한국만큼 국방 예산 비중이 큰 국가가 있느냐”고 되묻는다. 복지, 교육, 국방 등에 뭉텅이 예산이 투입되는 한국의 특수성을 고려하면 결국 외교부가 기대하는 만큼의 예산 확보는 어려워 보인다. 그렇지만 지난해 8700억원이던 외교부 예산은 올해 1조950억원으로 26%나 늘었다. 2007년도 일반회계나 특별회계 예산 증가율 5.8%보다 훨씬 높다. 기획예산처 류중재 사무관은 “6자회담을 비롯한 국제관계가 급변하면서 외교부 예산이 타 부서보다 늘었다”고 말했다. 따라서 여기서 더 많이 늘어날 가능성은 그만큼 작다는 말이다. 제반 정황으로 따져보면 외교부 인원과 예산이 획기적으로 증가하긴 어렵다. 그러나 공공외교의 중요성은 날로 확대된다. 외교부가 언제까지 예산 타령만 해선 안 된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뛰어난 IT 기술과 인터넷 환경을 제대로 활용한다면 지금도 얼마든지 효과적인 공공외교가 가능하다고 말한다.

인력과 예산 타령은 이제 그만 주한 미국대사관의 데럴 젱스 문정관은 지난 1월 초 민간 사이버 외교사절단 반크(Vank : Voluntary Agency Network of Korea)의 서울 성북구 보문동 사무실을 찾았다. 반크는 인터넷과 해외 출판물에 잘못 기록된 한국 관련 정보를 찾아내 바로잡는 네티즌 단체로 유명하다. 8억 명에 달하는 해외 네티즌에게 한국의 모습을 올바로 알리겠다는 포부가 야무지다. 젱스 문정관이 이 단체를 찾은 이유는 반크를 배우겠다는 취지다. 어떻게 하면 다수의 민간인이 아무런 대가없이 자발적으로 국가 홍보와 외교 활동에 참여하게 될까. 지난해 12월 현재 회원 수가 1만5000명이고, 해외 거주자 5000명 중 90%는 외국인 같다고 박기태 반크 단장은 말했다. 반크는 민간 사이버 외교관 양성 프로그램도 가동하는 등 활발하게 활동한다. 젱스 문정관은 “반크의 민간 외교는 새로운 유형일 뿐만 아니라 외국인 회원들의 자발적 참여도 매우 인상적”이라고 말했다. 아쉽게도 한국 정부는 이런 반크의 가능성에 그다지 주목하지 않는다. 1999년 반크 출범 이래 한국 외교부에서는 어떠한 연락이나 접촉도 없었다고 박 단장은 말했다. 외교통상부가 이미 진행하는 사이버 국가 홍보도 보완이 필요하다. 외교부가 작성한 ‘2005년도 외교통상부 자체 평가 보고서’를 보자. ‘국민과 함께하는 열린 외교’를 구현하려고 중앙정부 부처 중에서 최초로 본부 홈페이지와는 별도의 포털사이트 e-세상(www. e-world. go. kr)을 만들었다. “정부 부처가 포털사이트를 운영하는 일은 외국에서는 실시하지 않는 공공외교의 사례”라고 자찬했다. 문제는 이 사이트가 한글로만 이뤄져 철저히 내국인용이라는 점이다. 공공외교가 외국인을 상대로 한 국가 홍보라는 기본 사실조차 실종됐다. 지난해 외교부가 내부 검토용으로 작성한 ‘외교 정책 홍보와 Public Diplomacy’에서도 “우리 외교부는 공공외교를 ‘자국민 대상의 대국민 외교·홍보’라는 의미로 관례상 사용하나, 이는 엄격히 말해 용어를 잘못 사용하는 것”이라는 지적이 들어있을 정도다. 또 외국인들이 한국 정보를 얻으려 할 때 가장 먼저 한국대사관 홈페이지를 찾게 된다. 따라서 인터넷을 이용한 국가 홍보를 제대로 하자면 재외공관 홈페이지부터 잘 꾸며야 한다. 외교부는 현재 137개 재외공관 홈페이지를 운영한다. 이 중 110여 개 홈페이지는 외교부 본부가 동일한 디자인을 만들어 제공했다. 방문자 수의 증감은 현지인들의 관심도를 반영한다. 하지만 외교부 본부는 110여 개 홈페이지의 경우엔 방문자 수를 확인하지 못한다고 밝혔다.

인터넷 최강국의 장점 살려야 네티즌이 많이 찾는 가상 현실 커뮤니티를 공공외교에 활용하는 방안도 생각해 볼 일이다. 미국 차기 대선주자로 거론되는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상원의원이 얼마전 3차원 가상 현실 커뮤니티인 ‘세컨드 라이프(Second Life)’에서 가상의 사무실을 냈다. 미국에서는 지난해 미디어 업계에서 일어난 가장 놀라운 현상으로 세컨드라이프의 돌풍이 꼽혔다. 미국의 한 공공외교 전문가도 이미 한국 정부에 이 사이트를 홍보 공간으로 활용하라고 제안했다고 한다. 지난해 9월 한국국제교류재단 창립 15주년 기념회의에 참석한 사우스 캘리포니아대 조수아 S 파우츠 공공외교 연구소장이었다. 그는 한국국제교류재단이 세컨드라이프 같은 가상 공간에서 한국문화센터를 만든다면 큰 주목을 받으리라고 말했다. 비용이 문제된다고? 파우츠 소장에 따르면 비용은 1500달러면 충분하다. 그가 밝힌 IT 기술 시대의 외교관론은 눈여겨 볼 만하다. 파우츠 소장은 “유능한 공공외교관이라면 기술을 잘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공공외교에 종사하는 외교관이라면 새롭게 등장하는 기술도구를 민첩하게 사용하는 세대를 어떻게 포용할지 고민해야 한다. 그는 “기술이 여러 세대 사람들의 상호 작용 방식을 변화시키고 변경시키는 세상에서는 공공외교를 담당하는 외교 정책과 조직이 시대의 흐름을 따라야 한다”고 조언했다. 한국 외교부의 반응은 미지근하다. 외교부 사이버 홍보와 웹사이트 관리를 담당하는 유대종 팀장은 “현재로서는 그런 가상 공간에 진출할 계획이 없지만 홍보효과가 있다면 검토해봄 직하다”고 했다. 학계에서는 외교관들의 기본 자세부터 바뀌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는다. 먼저 해외 공관 외교관의 활동 반경이 너무 좁다. 서울대 박철희 교수는 “해외 공관의 한국 외교관들은 주재국 관리들과 주로 접촉하는데 한국의 어젠다를 적극 설파하기보다 견해를 묻기에 바쁘다. 또 여론 주도층이나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하는 활동은 거의 미미한 수준이다. 서로 얼굴을 맞대고 대화하면 가능한 일들도 안 한다.” 또 한국 외교는 북핵, 한·미 동맹 같은 안보에 직결되는 긴박한 현안에 매달려 왔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그러다 보니 정부 간 외교에 치중하고 공공외교는 뒷전이었다. 한승주 고려대 총장서리는 “그때 그때 급한 불 끄기에 급급해 장기적 목표를 세워 준비하고 역량을 키우는 노력은 등한시됐다”고 지적했다. 외교관들은 눈앞의 일처리도 바쁜데 공공외교같이 중장기적이고 간접적인 효과를 낼 사업에 눈을 돌리기 어려웠다. 본질적으로는 인사고과에 연결되지 않는 일에는 의욕을 보이지 않는 외교관의 속성이 공공외교를 가로막는 요인이라는 비판도 있다. 이근 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는 “공공외교가 기저에서부터 우호적 환경을 만들어 가는 장기적인 과제인데 반해 외교관들은 보직과 고과에 도움되는 단기 성과에 연연한다”고 했다. 그래서 공공외교는 처음부터 찬밥 신세였다. 이런 의식구조가 개선되지 않고서는 인원과 예산이 아무리 늘어도 소기의 성과를 거둘 수 없다고 이 교수는 말했다. 공공외교를 제대로 하려면 타성에 젖은 외교부가 아니라 그 보다 상위 개념의 총괄 기구가 필요할지 모른다고 덧붙였다. 동북아 정세는 급변한다. 북·미관계 개선, 중국의 급속한 부상, 일본과 호주의 동맹 같은 변화가 숨가쁘다. 조순 전 경제부총리를 비롯한 일부 인사는 북·미 관계의 급진전은 미국의 세계전략 변화를 함축하는 사건이라고 평가했다. 따라서 “남한도 정치·외교·안보나 경제 운용의 패러다임이 달라져야 한다”고 조 전 부총리는 말했다. 앞서 언급했던 외교부의 내부 보고서 ‘외교 정책 홍보와 Public Diplomacy’는 “공공외교가 21세기 외교의 새로운 경향으로 나타나 전통적 정부 주도 외교의 가정과 수단을 재검토하는 동기가 된다”고 지적했다. 홍규덕 숙명여대 사회과학대학장은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막론하고 외국인을 상대로 다양한 공공외교 활동이 모색돼야 할 시점이라고 강조했다. 김영삼 정부에서 외교장관, 참여정부에서 주미대사, 강단에서는 정치외교학 교수로 살아 온 한승주 고려대 총장서리는 이렇게 말했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하면 앞으로 그만한 효과가 있다. 우리같이 외교가 중시되는 나라에는 공공외교가 더없이 필요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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