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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무대 뛰는 ‘굴뚝 없는 공장’

세계 무대 뛰는 ‘굴뚝 없는 공장’

▶에너지개발사업은 종합상사의 새로운 주 수익 모델로 떠올랐다. 사진은 대우인터내셔널의 미안마 가스전.

종합상사가 부활하고 있다. 외환위기 이후 그룹의 위기를 불러오고, 구조조정의 대상이었던 모습과는 딴판이다. 30년 전부터 해외 사업을 하며 축적된 노하우와 인력으로 해외 사업의 개척자로 떠오르고 있다. 이제 종합상사는 카자흐스탄에서 석유를, 베트남에서는 가스를 캐낸다. 동유럽에서는 알루미늄 공장을 운영하고, 중국에서는 패션사업을 한다. 종합상사의 이런 활약은 개별 회사의 부활 이상의 의미가 있다. 공장에서 10년 뒤 먹고살거리를 찾을 수 없다면 종합상사의 무형 자산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한국 경제도 이제 물건만 만들어 파는 구조에서 벗어날 때가 됐다.
세계 최대 스포츠 용품 회사인 나이키는 전 세계에 단 하나의 공장도 없다. 지난해 매출액 1194억 달러(약 111조원)인 이 회사는 전 세계 160개국에서 스포츠 의류와 용품 등을 팔고 있다. 자체 공장 하나 없이 전 세계 50개국 600여 공장으로부터 물건을 납품받고 있다. 나이키의 경쟁력은 마케팅력이다. 제조시설이라는 실체 없이도 나이키는 자신의 왕국을 꾸준히 넓혀가고 있다.세계적인 투자회사 골드먼삭스는 98년 외환위기로 법정관리에 들어간 진로의 채권을 인수한다. 논란의 여지가 많았던 이 거래 결과 골드먼삭스는 약 7년 후 1조원의 매각차익을 챙겼다. 공장이 없으면 경제가 돌아가지 않을까? 공장은 우리가 꼭 지켜야 할 보루인가? 이건희 삼성 회장을 비롯해 많은 경제인이 “10년 후 무엇을 먹고 살지가 걱정”이라고 한국 경제의 앞날을 걱정하고 있다. 과연 10년 후 한국은 어떤 산업으로 먹고살 것인가?

자원개발 하나로 ‘대박’ 한국 경제의 기관차인 자동차도 장담할 수 없다. 미국 빅3는 주춤하고 있지만 도요타, 혼다 등 일본 업체는 승승장구하고 있고, 머지않아 중국도 추격할 태세다. 반도체, LCD도 마찬가지다. 세계 최고 수준의 제조왕국인 일본의 부활과 세계 최대의 제조국가인 중국의 협공을 어떤 산업도 피하기 어렵다. 만약 우리 경제에서 공장을 빼면 어떻게 될까? 왜 한국에는 나이키 같은 회사가 나오지 않는 것일까? 왜 한국에는 골드먼삭스처럼 전 세계를 상대로 투자해 수익을 올리는 노하우가 없을까? 만약 이런 실력이 한국에도 있다면 10년 뒤 뭘 먹고 살지가 여전히 걱정될까? 문제는 한국 기업들이 지나치게 물건을 파는 것에 익숙하다는 점이다. ‘제조업 강국’이 오늘날의 한국을 만들었지만 ‘서비스업 부재’가 내일의 한국을 불투명하게 하고 있다. 한국 기업은 평생 중국과 피 말리는 경쟁을 해야 하는가? 다행히 최근 종합상사의 행보를 보면 해결의 실마리를 볼 수 있다. 대우인터내셔널은 2004년 실패 위험을 무릅쓰고 최대 100억원에 달하는 개발비용을 투자했다. 그리고 그 도박에서 가스층을 발견했다. 미국계 공인기관이 인정한 총 매장량은 1360억~2435억㎥(액화천연가스화할 경우 최소 시가 40조원 상당). 국내 연간 액화천연가스 소비량의 최소 5년치 물량이다. 이 가스전에 60%의 지분이 있는 대우인터내셔널은 자원개발 투자 하나로 수십조원의 수익을 올렸다. LG상사는 90년대부터 지금까지 세계 각지에서 석유화학 및 정유플랜트 등 총 17개의 대형 프로젝트를 수주했다. 그동안 축적한 다양한 사업경험과 경쟁력을 바탕으로 ‘LG상사형 고부가가치 프로젝트’ 모델을 완성해냈다.
현대종합상사는 2004년 11월 국내상사 최초로 1만~2만t급의 중소형 선박 건조가 가능한 중국 조선소를 인수해 ‘청도현대조선’을 만들었다. 여기에 지난 30여년간 구축해온 세계 판매 네트워크를 활용해 지난해 3억 달러가 넘는 대규모 수주를 성사시켰다. 향후 3년간의 일감을 확보한 것. 이런 성공이 가능한 것은 중국 조선소의 제조능력이 아니라 현대종합상사의 기술과 노하우 덕분이었다. 삼성물산은 최근 미국 패션시장에 자사 브랜드인 ‘푸부(FUBU)’를 성공적으로 진입시켰고, 90년 인수한 루마니아 국영 스테인리스 공장인 ‘오텔리녹스’를 인수 2년 만에 현지 최고의 외자기업으로 탈바꿈시키는 등 해외투자에서도 실적을 거두고 있다. 삼성물산은 90년대 중반 카작무스를 위탁 경영해 한때 삼성물산 해외법인이 벌어들이는 수익의 45%를 벌어들였다. SK네트웍스는 마케팅 부문을 강화하고 있다. 패션, 자동차 판매 등 50여 개의 상품군과 6000여 개의 유통 채널을 보유한 실질적인 마케팅 회사로서의 면모를 갖췄다. 특히 패션 브랜드인 ‘아이겐포스트’는 중국 명품 여성복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불과 진출 1년여 만에 베이징, 상하이 등의 고급백화점 30여 개소에 입점하는 등 빠르게 시장을 확대해 나가고 있다. 해외 시장에 대한 정보와 마케팅 능력만으로 공장 없이 사업을 펼치고 있다. 아직 초보단계지만 종합상사들은 이렇게 새로운 영역에 뛰어들고 있다. 과거에 그저 그룹계열사의 수출대행을 해 주던 것과는 딴판이다. 세계를 상대로 먹을 것이 없나 샅샅이 살피고 있다. 철이 없는 나라에는 철을 갖다 팔고, 돈이 없는 나라에는 돈을 넣고 석유를 캐고 있다. 외국 공장을 운영해 생산된 제품을 대신 팔아 수입을 올리기도 한다. 남의 공장 기계를 가지고 와 다른 나라에 공장을 지어주고 생산된 제품을 해외로 팔기도 한다. 자기 공장 없이 아이디어 하나로 세계를 상대로 비즈니스를 하고 있다. 현대종합상사의 노영돈 사장은 “종합상사의 일은 딱히 정해진 게 없다고 보면 된다”고 했다.


일본 5대 상사 두 자릿수 성장 70년대 전성기를 구가했던 종합상사들이 2000년대 들어 완전히 변신했다. 변신의 결과 종합상사도 부활했지만 더 큰 수확은 답답한 한국 경제에 새로운 성장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동안 기업들은 공장을 짓고, 대규모 설비투자를 하고, 그 제품을 해외에 팔아 국민소득 2만 달러까지 한국 경제를 만들었다. 하지만 3만, 4만 달러로 가기 위해서는 제조업만으로는 불가능하다고 전문가들이 입을 모으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도 올해 한 TV와의 대담에서 “3만 달러로 가는 데는 금융업의 역할이 필요하다”는 취지로 말했다. 세계적인 기업 GE가 90년대 들어 부활한 데는 가전제품과 엔진 제작 중심의 사업구조를 금융과 인프라 개발 등으로 전환한 것이 주효했다. 이처럼 금융과 서비스·투자·무역·지식산업·정보를 한데 종합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종합상사다. 사실 종합상사의 사업영역은 구체적으로 한정하기 힘들다. 단순 수출대행에서, 삼각무역, 해외투자, 국내 유통, 해외 유통, 해외 공장 운영, 국내 공장 운영 등 이루 말할 수 없다. 투자한 업종도 다양하고, 무역의 내용도 천차만별이다.

▶대우인터내셔널 상사맨들이 해외시장 개척과 관련, 회의를 하고 있다.

카멜레온처럼 변신할 수 있는 것이 종합상사의 가장 큰 장점이다. 대우인터내셔널의 김상욱 팀장은 “종합상사는 그동안 노하우와 인맥으로 정보와 판단력을 갖추고 있어 자금만 확보되면 언제든지 투자회사로 변신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이런 추세는 이미 일본에서도 시작됐다. 한국 종합상사의 원조 격인 일본 종합상사는 이미 투자회사라고 불러야 할 판이다. 미쓰비시상사는 지난해 4~12월 동안 3492억 엔의 순익을 올렸다. 지난해 같은 기간 대비 25% 증가한 수치다. 같은 기간 미쓰이상사 52%(2442억 엔), 스미토모상사 17%(1539억 엔), 이토추상사37%(1505억 엔), 마루베니 54%(956억 엔) 등 5대 상사가 모두 두 자릿수 성장을 기록했다. 이런 성장은 해외 에너지나 원자재 투자사업에서 일궜다. 전통적인 상사 본연의 업무였던 무역업 비중은 이제 뒷전으로 밀린 지 오래다. 앞으로 2년간 6대 종합상사가 계획 중인 투자금액은 약 4조1600억엔(약 32조원)에 달한다. 여기에 일본 종합상사들은 영화나 병원 같은 국내 산업에도 투자하고 있다. 영위하는 사업들을 보면 자원부터 의료, 엔터테인먼트 등 다양하다. 최근에는 기업 인수합병(M&A)에까지 손을 뻗고 있다. 일본의 종합상사들도 변화된 환경에 적응해 단순 무역서비스 외에 투자와 해외 자원개발 등에 힘을 쏟고 있다. 이처럼 종합상사들은 이름만 그대로일 뿐 사업 내용은 급격히 바뀌고 있다. 변화는 이제 시작이고 앞으로 이런 변화는 더욱 빨라지고 심해질 것이다. 어쩌면 한국의 종합상사 중 한 곳이 나이키나 골드먼삭스 같은 일을 할지도 모른다. 한국 경제가 종합상사의 변화를 주시해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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