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O들의 와인 스트레스] 와인,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CEO들의 와인 스트레스] 와인,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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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국순당의 배중호 사장은 서울 압구정동에 있는 영국의 와인 교육기관 WSET를 수료했다. 배 사장은 사석에서 기자를 만나 “최근 와인 열풍 때문에 어디를 가도 와인 이야기밖에 하지 않는다”며 “적을 알고 나를 알아야지 경쟁에서 이기지 않겠느냐”며 토로했다. 그는 “와인을 체계적으로 배우다 보니 마케팅 관점에서 전통주에 응용할 게 많았다”며 “어쨌든 와인을 배우고 나니 속이 후련하다”고 웃었다. 현재 WSET 과정을 듣는 CEO는 배 사장뿐만이 아니다. 김일주 수석무역 대표, 성백환 레뱅드매일 대표, 김영근 PDP와인 부회장 등 WSET 강의실은 주류업계 CEO들로 빼곡하다. WSET 관계자는 “주류회사 CEO들에 대해선 당연히 와인을 잘 알고 있을 거라는 사람들의 선입관이 있다”며 “그래서 와인 공부에 더 적극적인 것 같다”고 설명했다. 삼성경제연구소가 얼마 전 국내 CEO 404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의 결과에 따르면 응답자의 11.6%가 ‘와인 지식은 비즈니스에서 매우 중요하다’고 답했다. ‘와인 지식은 어느 정도 중요하다’, ‘가끔 중요할 때가 있다’고 답한 CEO도 각각 51.7%, 32.2%였다. 설문에 응한 CEO 중 무려 95%가 비즈니스에서 와인이 차지하는 비중을 높게 평가한 셈이다. 특히 이 조사에서 눈길을 끌었던 것은 ‘와인과 관련된 지식이 없어 스트레스를 받은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CEO가 84%에 달했다는 점이다. 스트레스를 받는 이유에 대해선 33.9%가 ‘와인을 선택하라는 주문을 받을 때’라고 답했고, ‘와인의 맛과 가격 등을 구분하지 못할 때’(25.7%), ‘와인 용어를 잘 모를 때’(20.5%)란 답이 뒤를 이었다. 이와 함께 응답자 대부분이 와인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전문가 교육’(44.8%), ‘와인 관련 친목 모임’(18.8%) 등에 참여하고 싶다는 의견을 밝힌 점도 눈에 띄었다. 설문조사엔 대기업 오너와 함께 전문경영인, 그리고 임원들이 포함돼 있다. 이 중 대기업 오너들은 와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이유가 없다. 대부분의 오너들은 어릴 때부터 집안에서나 외국 유학을 통해 자연스럽게 와인의 매력에 빠지고, 이를 통해 와인을 ‘열공’하는 오너들이 많다. 안양베네스트클럽의 서홍진 식음료 팀장은 “오너들은 대부분 와인을 잘 알고, 몰라도 그것에 대해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철형 와인나라 사장은 “와인은 스트레스의 탈출구로 마셔야지, 와인 자체가 스트레스가 된다는 것은 아이러니”라며 “와인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기업인들은 와인 애호가를 오너로 둔 전문경영인들이나 임원들이 대부분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전문경영인이나 임원들의 경우 오너들의 와인 수준과 취향을 따라가자니 스트레스가 가중됐다는 설명이다. 최근 거래선을 찾기 위해 한국을 찾은 글로벌 정보기술(IT) 회사의 임원이 겪은 에피소드는 이를 잘 반영한다. 그는 한국에 도착해 어느 중견기업의 회장과 저녁 식사를 함께 했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회장이 한 병에 300만원이 넘는 프랑스 와인 ‘샤토 페트뤼스’를 주문하고선 잔에 따른 와인을 벌컥벌컥 ‘원샷’을 했다. 그는 “더욱 황당한 것은 다른 임원들까지 따라서 ‘원샷’을 하더라”며 “어떤 사람이 그런 기업과 거래를 하고 싶겠느냐”며 쓴웃음을 지었다. 글로벌 시대에 접어들면서 외국인과의 모임이 잦아진 것도 CEO가 받는 와인 스트레스의 주범으로 꼽힌다. 와인 마니아로 알려져 있는 이성진 NHN 부사장은 “과거 IBM에 근무할 당시 IBM 본사의 상사가 와인 애호가여서 와인에 입문했다”며 “외국계 회사에서 와인을 모르면 출세는 물론 외국인 상사들과 대화부터 안 될 정도였다”고 회고했다. 파라다이스의 최고재무책임자(CFO)인 박병룡 전무는 “기업의 해외 IR를 담당할 때 와인을 아는 것이 투자자들에게 다가가기에 한결 편한 것이 사실”이라고 밝혔다. CEO마다 ‘와인 스트레스’를 극복하는 방법도 각양각색이다. CEO 사이에 가장 유행하는 것은 임시방편으로 수첩에 와인 리스트를 적어두는 것. 국내 한 외식기업 사장은 유명한 와인들과 그에 대한 설명이 담긴 종이를 축소 복사해 수첩에 끼워 놓고 다닌다. 와인 애호가로 유명한 허태학 삼성석유화학 사장 역시 자신이 마신 와인을 일일이 수첩에 적어 놓는다. 서홍진 팀장은 “와인 애호가인 오너를 수행하는 임원들이 수첩에 적은 와인을 구구단처럼 외우는 경우도 종종 볼 수 있다”고 귀띔했다. 와인 전문교육기관을 찾는 사례도 늘고 있다. 와이니즈와 서울과학종합대학원이 공동으로 운영하고 있는 3개월 코스의 ‘와인 문화 리더스 과정’은 최근 10기까지 배출했다. 기수별로 20~25명씩 다녀 지금까지 2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한 이 과정은 졸업생 중에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을 비롯해 구자열 LS전선 부회장 등 유명 CEO도 많다. 김정미 와이니즈 사장은 “이론보다는 와인 테이스팅 같이 실습 위주로 배우기 때문에 출석률이 매우 높다”며 “과정이 끝나도 기수끼리 한 달에 한 번씩 꾸준히 만난다”고 말했다. 경희대 대학원에서 마스터 소믈리에 과정을 진행하고 있는 고재윤 교수는 “해가 갈수록 소믈리에 과정을 찾는 CEO가 급속도로 늘고 있다”며 “그만큼 CEO들이 와인을 접할 기회가 많기 때문인 것 같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친목 모임을 통해 와인을 배우는 사례도 늘고 있다. CEO들 사이에서 ‘와인 과외 선생’으로 알려져 있는 우종익 아영FBC 사장은 “최근 CEO들로부터 참가할 만한 와인 모임에 대한 문의가 많다”며 “대중적으로 알려진 교육기관에 나가는 것을 부담스러워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급하게 조달된 잘못된 와인 상식으로 망신을 당하는 CEO도 많다. 모엣헤네시의 이미양 과장은 “제과점에 있는 ‘복숭아 샴페인’과 비교해 돔페리뇽 같은 명품 샴페인이 왜 비싼지 모르겠다는 CEO들이 있다”며 “프랑스 샹파뉴 지방에서만 생산하는 샴페인과 시중의 복숭아 진액이 첨가된 술과 가치를 비교하기는 힘들다”고 설명했다. 아영FBC의 윤장복 전무는 “와인을 함께하는 디너에 참석했을 때 브랜드 중심으로만 와인 이름을 외워서 품종 · 지역 · 역사에 대한 지식이 얕은 CEO들이 많더라”며 “이왕 공부를 한다면 체계적으로 접근할 필요성이 있다”고 조언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와인 전문가들은 “피할 수 없으면 와인을 즐겨라”며 “와인 앞에서 솔직한 게 와인 공부의 왕도”라고 입을 모은다. 김정미 사장은 “와인을 잘 모른다면 굳이 아는 척하기보다는 소믈리에에게 도움을 청하는 게 가장 좋다”며 “외국인 바이어를 만나도 좋아하는 품종과 지역을 먼저 물어보고 소믈리에에게 알려주라”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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