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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가니스탄 엑소더스

아프가니스탄 엑소더스

아프가니스탄에서 10년째 의료활동을 해온 외과의사 서기용씨는 심혈을 쏟는 사업이 하나 있다. 이 나라에서도 의료 사각지대로 통하는 중부 키싸우 지역의 1층짜리 병원을 현대식으로 재단장하는 일이다. 준비기간 1년에 건축 기간만 2년이 걸렸다. 도로가 파손되거나 강물의 수위가 높아져 건축자재를 실은 트럭이 오가지 못하는 일이 잦았고, 공사비도 제때 조달하지 못한 탓이다. 이제 병원은 9월 마무리 작업이 끝나는 대로 새로 문을 연다. 그런데 서씨는 개원식에 참석하지 못한다. 한국 대사관에서 교민 철수 공고를 냈기 때문이다. 개정된 여권법에 따라 아프가니스탄에 거주하는 한국 교민은 원칙적으로 8월 31일까지 출국해야 한다. 이를 어기면 1년 이하의 징역이나 300만원 이하의 벌금형을 받는다. 전과자가 되지 않으려면 떠나야 한다. 서씨도 3년간 공들인 병원 사업을 뒤로하고 출국하기로 마음먹었다. 서씨처럼 타의에 의해 아프가니스탄을 떠나야 하는 한국인이 100명을 훌쩍 넘길 전망이다. 7월 말 현재 아프가니스탄에는 다산, 동의 부대원 200여 명을 제외하더라도 대사관과 한국국제협력단(KOICA) 직원 10여 명, 기업 근로자 60명, 현지 거주 교포 38명, NGO 관계자 113명 등 220여 명이 머물고 있다. 정부는 현지 거주 한국인에게 철수를 권고하는 e-메일을 보냈다. 대사관 및 KOICA 직원은 전원 체류하고, 기업체 근로자도 충분한 안전대책을 갖추면 머물러도 된다. 자영업자 등 생계를 위해 체류하는 교민은 철수를 원칙으로 하되, 현지 대사관의 건의가 있는 경우 예외적인 체류를 허가한다. 8월 10일까지 안전대책 등 증빙서류를 첨부한 체류허가 신청서를 현지 대사관에 제출하면 정부는 여권심의위원회를 열어 10일 내에 허가 여부를 결정한다. 하지만 NGO는 8월 말까지 예외 없이 철수해야 한다. 서씨는 의료 NGO인 ‘글로벌 케어’의 아프가니스탄 지부장이기도 하다. 아프가니스탄에는 글로벌 케어를 비롯한 한국 단체 7곳을 포함해 국내외 10여 개 NGO에서 한국인들이 일한다. NGO들은 일단 정부의 방침에 따르기로 했다. 여권법과 시행령에 따라 여행금지국가로 지정된 아프가니스탄에 법을 어기면서까지 머물 도리가 없는 데다 피랍사건 이후 해외 교민 안전을 걱정하는 여론이 증폭되는 현실도 감안해야 한다. 아프가니스탄에 직원이 나가 있는 국내 NGO들은 최근 모임을 갖고 정부의 결정을 수용키로 했다고 민간 단체인 ‘해외원조단체협의회’ 오수용 사무총장은 전했다. 그러나 정부의 일 처리 방식에는 불만이 많다. 정부의 철수 결정과 철수 절차 모두 못마땅하다. 우선 교민 철수는 정부가 현지 사정을 도외시한 채 국내 여론에 휘둘려 졸속으로 결정했다고 오 총장은 말했다. 신변위협이 큰 지역에서의 철수는 이해하지만 안전이 확보된 지역의 NGO까지 일괄적으로 철수를 요구한 것은 무리라는 주장이다. 박재복 카불 한인회 총무는 “아프가니스탄은 부분적으로 위험하고 부분적으로 안전한 곳”이라고 말했다. NGO나 교민들이 주로 거주하는 수도 카불은 안전지대로 분류된다고 덧붙였다. 아프가니스탄에 4명의 직원을 파견한 봉사 NGO ‘개척자들’의 이용우 간사는 카불에서 활동하는 NGO까지 전원 철수하라고 명한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법 적용에 융통성이 전혀 없다”고 비판했다. ‘아시아협력기구’의 강성한 중앙아시아 책임자도 “정부가 아프가니스탄 지역별로 안전 가이드라인을 정해 주면 되는데 국가 전체를 일괄적으로 방문 금지한 것은 편의주의 행정”이라고 반발했다. 하지만 업무 특성상 이동성이 강한 NGO가 꼭 안전한 지역에만 머무른다는 보장이 없어 일괄 금지할 수밖에 없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준비 기간도 너무 짧아 질서정연한 출국이 어렵다는 불평도 있다. 카불의 한국대사관이 현지 교민들에게 철수 공고를 e-메일로 보낸 때가 8월 3일이다. 철수 시한은 독신의 경우 8월 10일, 가족과 함께 체류하는 경우는 8월 31일이다. 철수 시한을 넘어 체류하면 여권법에 따라 처벌된다고 제재 방침도 함께 밝혔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지 않은 교민이나 NGO는 하던 일을 당장 접어야 할 처지다. 그러다 보니 ‘글로벌 케어’의 서씨처럼 황망하게 출국하는 사례가 잇따른다. NGO 중 가장 많은 30여 명의 직원을 아프가니스탄에 파견한 ‘한민족복지재단’은 벌여 놓은 사업이 많아 수습에 진땀을 뺀다. 아프가니스탄 정부로부터 위탁 받은 현지의 병원을 칸다하르에서 운영 중이다. 그뿐만 아니라 교육사업과 양계장 같은 소득증대 사업을 통해 현지인들에게 도움을 줘왔다. 이런 일들에서 손을 떼면 업무에 많은 차질이 생긴다. 이 단체의 양지선 해외사업담당 주임은 “필수 인원이라도 남겨두지 않으면 시설들이 폐허가 될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더 큰 문제는 어렵게 구축해 놓은 현지인들과의 신뢰관계가 급작스러운 사업 중단과 사후 관리 소홀로 훼손되는 일이다. 당장 의료 공백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나온다. NGO들은 외국 국적을 가진 재외교포나 아프가니스탄인, 혹은 제3국 회원들로 하여금 사업을 이어가려하지만 얼마나 갈지는 장담하기 어렵다. 대부분의 NGO 불만도 이런 데서 연유한다. 당초 외교통상부는 9월 말까지 준비기간을 줄 생각이었다. 하지만 현지 사정이 워낙 급박하다고 판단해 기한을 대폭 줄였다. 외교통상부 재외국민보호과 김병권 서기관은 “기간을 늘려 주면 그 사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고 시한을 앞당긴 사유를 설명했다. 다만 “출국하려는 의지가 있는데 사업상 또는 불가피한 사유로 기한 내 철수가 불가능한 사람은 연장해 줄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정부는 정부 나름의 불가피한 조치였다고 말한다. 이번 피랍사건 외에도 아프가니스탄에서 제2, 제3의 외국인 납치사건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어 서두를 수밖에 없다는 설명이다. 해외 위험지역에서의 안전에 대한 국민적 관심도가 높아진 것도 힘이 됐다. NGO측도 출국하지 않고 버티려 해도 한계가 있다. 비자기간이 만료되면 한국정부의 요청을 받은 아프가니스탄 정부가 연장을 해주지 않을 게 뻔하다. 당장은 그럭저럭 넘어가지만 이런 상황이 장기화하면 NGO와 정부간 갈등이 분출될 소지도 있다. 정부는 올 8월 7일부터 내년 8월 6일까지 1년간을 아프가니스탄·이라크·소말리아 3개국 여행금지 기간으로 정했다. 그런데 NGO 관계자 중에서 1년 후에 아프가니스탄 여행금지조치가 풀린다고 보는 이는 많지 않다. 이라크 전례에 비춰볼 때 금지조치가 매년 연장되면서 결국 아프가니스탄으로 가는 길이 원천적으로 차단된다는 우려다. 이라크의 경우 2004년 6월 김선일씨 피살사건 이후 현재까지 한국정부의 허가를 받지 않은 한국인에게는 이라크 정부가 비자를 내주지 않는다. 이라크에는 정부의 허가를 받은 한국인 60여 명이 활동 중이다. 그전까지 이곳에서 활동했던 ‘개척자들’ ‘아시아협력기구’ ‘굿 피플’ 등 한국의 많은 NGO의 이라크행(行)은 지금도 불가능하다. 아프가니스탄도 이 같은 전철을 밟게 되리라고 관계자들은 전망한다. 국민이 스스로 가서 피랍되면 자기 책임이지만, 정부가 여행금지조치를 푼 뒤 사고가 나면 정부가 책임을 몽땅 뒤집어써야 한다. 정부가 금지 조치를 쉽게 풀지 않으리라고 보는 이유다. 일부 NGO는 분쟁지역에서의 봉사활동을 중요한 사명으로 여긴다. 그런데 여행금지 국가를 지정하는 여권법이 중요한 걸림돌로 인식된다. ‘개척자들’의 이용우 간사는 이렇게 말한다. “사실 우리 단체는 여권법을 굉장히 우려한다. 우리의 주요 활동무대가 분쟁지역이어서 정부와 부딪칠 수밖에 없다. 가급적 법의 테두리 내에서 활동하겠지만 그렇지 않을 경우에는 정부와 충돌하게 된다.” 이 단체가 반드시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활동을 정부가 막는다면 법을 뛰어넘어서라도 강행할 수 있다고 했다. 이 간사는 “불이익을 감수하면서 억지로 남겠다는 데 막을 수 있겠느냐”고 말했다. 예를 들면 정부가 이라크나 아프가니스탄 입국을 막으면 인근 국가에서 국경을 무단으로 넘는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고 장담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다른 NGO들도 말은 아끼지만 불만이 누적돼 가는 인상이다. 해외원조단체협의회 오수용 사무총장은 “정부의 이번 여행금지조치가 합리적이지 않다고 생각하는 NGO가 많아 여행금지가 장기화하면 다른 대책을 세우게 될지 모른다”고 말했다. 아프가니스탄에 진출한 NGO들은 인질들이 무사 귀환하면 9월이나 10월께 모임을 갖고 여권법 개정을 집중 논의한다는 계획이다. 붙잡으려는 정부와 그래도 나가려는 NGO 간의 줄다리기는 국제사회의 분쟁이 증가할수록 격화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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