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금융DNA 정말 뛰어나요”
“한국인 금융DNA 정말 뛰어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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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가 왜 웃었을까? 이유는 영어 문화권에서 한 조각의 케이크는 우리말로 ‘누워서 떡 먹기’에 해당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메뉴판을 ‘누워서 케이크 먹기’라고 읽었던 셈이다.
어느 말을 그대로 옮길 수 있다고 외국어를 유창하게 한다고 할 수 있을까. 문화를 모르고는 어느 나라 말을 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다시 한번 느낀 순간이었다.
이번 바 토크에서는 한국어를 ‘좀 한다’는 외국인 CEO와 만났다. 바로 맥쿼리증권 한국주식시장그룹의 러스 그레고리 대표다. 한국어를 정말 잘할지 반신반의한 상태로 그를 만났지만 이 말을 듣고 절반의 의심도 사라져버렸다.
“정말 그림의 떡이네요.”
사진을 찍던 중 그가 이렇게 말했다. 보통 와인 한 잔을 들고 건배하는 포즈를 취하는데, 사진 찍느라 와인은 입에도 못 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누워서 떡 먹기, 웬 떡이냐, 어른 말을 잘 들으면 자다가도 떡이 생긴다 등 한국 사람은 ‘떡’ 얘기를 많이도 하네요. 왜 그렇죠?”
속담을 읊어가며 서로 연관된 의미를 궁금해 할 정도인데, 한국어 공부를 오죽 열심히 했겠느냐는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오늘 바 토크는 지금까지와 달리 한국어로만 진행됐다. 아마 그레고리 대표만큼 유창한 사람은 메트라이프생명의 솔로몬 스튜어트 대표 정도가 아닐까 싶다.
사진 촬영이 끝나자 그는 마침내 와인을 마실 수 있었다. 와인은 쉬라즈. 자신이 호주인이라 호주 와인을 권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그레고리 대표의 한국과의 인연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 쉬라즈 와인, 모로코식 저녁 정찬이 놓인 풍성한 식탁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눠보았다.
그레고리 대표가 한국에 처음 발을 디뎠을 때는 1996년. 당시 그는 멜버른대 학생이었다. 한국에 온 이유는 간단하다. “외국문화와 외국어를 배우고 싶었고 한국이 좋았다”는 것이다.
“한국 사람들은 정이라고 표현을 하죠. 서로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뜻한다고 생각하는데 미운 정, 고운 정 이런 뜻을 이제야 조금씩 알아가는 것 같습니다.”
배낭여행 중 한국에 정이 든 그는 연세어학당에서 한국어를 배우기 위해 다시 한국을 찾은 것이다. 당시 그가 머물렀던 곳은 신당동의 한 하숙집.
“집에 뜨거운 물이 나오지 않더라고요. 할 수 없이 공중목욕탕에 갔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저 혼자 외국인이었는데 특정부위만 모두 쳐다보더라고요.”
하숙집 친구들과 목욕탕에서 겪은 난감한 일까지 얘기하며 그는 그때 일을 추억했다. 지금 한국어에 능숙한 것도 모두 그때의 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란다.
1997년 한국을 떠난 뒤 전공을 살려 호주와 홍콩에서 변호사 일을 했다. 흔히 변호사 하면 상상할 수 있는 법정에서 남을 변론하는 업무는 초기에 잠깐 했을 뿐이다. 대부분의 시간을 다국적기업을 상대로 계약서를 작성하는 등의 업무를 했다.
“개인적으로 홍콩은 참 편한 도시였습니다. 모든 게 영국과 닮아 있으니까요. 호주도 그렇고요. 퍼브(호프집)만 해도 그렇죠. 전 크게 불편한 점 없이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헤드헌터인 친구에게서 맥쿼리 한국지사에 자리가 난 것을 알게 되었다. “딱 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수학을 전공했고 MBA도 했고 파생상품 시장의 법도 해석할 수 있었죠.
다시 말하면 상품설계도 할 수 있고, 고객 입장에서 생각할 줄도 알고, 파생상품에 대한 복잡한 법 규정을 이해할 수 있다는 점에서 파생상품 업무라면 잘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게다가 한국이라니요.” 또 한 번 그는 미련 없이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정오되면 모두 어딜 가는거죠?”
그러나 그때부터 한국이란 나라는 이제 호기심의 대상이 아닌 전쟁터였다. 예전처럼 낭만과 향취를 느낄 수만은 없는 일. 그는 처음 맥쿼리 직원으로서 우리은행에 3년간 자문을 하기도 했다. 술 문화나 조직문화에 익숙지 않으니 고생했던 것은 당연한 일이다. “탁 털어 원샷 하는 것”이 그에게는 힘든 일이었다.
특히 그레고리 대표가 한국문화 중 재미있다고 느낀 것은 점심시간 문화. 12시 ‘땡’하면 모두 일어나 우르르 식당으로 나오는 것이 꽤 낯설었다고 한다. 호주 맥쿼리 직원이 한국에 왔을 때 그레고리 대표에게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민방위훈련이라도 하는 것인가요. 왜 모두 사무실에서 일제히 나가는 거죠?”
외국인의 눈에는 점심시간에 대체로 사무실에서 샌드위치를 먹거나 나가더라도 서로 다른 시간에 나가는 것이 보통이니 이상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것은 문화의 한 모습이니 즐겁게 생각하고 받아들였다고 한다.
“한국에서의 적응기간은 끝났죠. 이젠 도약할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자신뿐 아니라 맥쿼리증권에서 준비해온 주식워런트증권(ELW) 얘기다. 워런트란 매수자에게 특정 주권의 가격 또는 주가지수의 변동과 연계해 미리 약정된 방법에 따라 주권의 매매 또는 금전을 수수하는 권리를 부여하는 증명서를 말한다.
ELW를 쉽게 말하면 주식 혹은 주식군을 사면서 이것이 오를지 내릴지 예측해 부가적인 조건을 걸어 이익은 크게, 손실은 작게 만들 수 있는 맞춤형 주식상품인 셈이다. 언뜻 옵션과 비슷해 보이지만 주식계좌를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서 거래가 편리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맥쿼리증권 한국주식시장그룹은 이 ELW 인가를 받기 위해 꼬박 3년을 투자했다.
“인가를 받기 위해서는 자기자본 1000억원 이상, 영업용 순자본비율 300% 이상, 그리고 파생금융상품 전문인력 확보 등 까다로운 요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맥쿼리 내에서 많은 것을 투자한 셈이죠. 무려 3년을 기다렸으니까요. 이런 말이 맞겠네요. 고진감래. 선진시장에 걸맞은 상품을 오래 준비한 만큼 저희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고 생각합니다.”
그의 말처럼 이제 훨훨 날기만 하면 되는데 걱정되는 것이 있다고 한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홍콩에서는 ELW에 대한 기초적인 정보를 제공하기 위해 콘퍼런스를 열면 800석의 강당이 넘치죠. 1시간 30분 동안 강의하는데 아무도 자리를 떠나지 않더군요. 금융시장이 10년, 15년 여문 나라에서 보이는 현상이죠. 그러나 한국은 아직 홍콩만큼 다양한 금융상품에 대해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그런데 아이로니컬하게도 한국이 ELW 거래대금으로 따지면 세계 5위라는 것이다. “한국인의 투자 특성을 잘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합니다. ‘모 아니면 도’라고 하죠. 1만5000명 정도밖에 참여하지 않고 있는데 왜 이렇게 거래대금이 많으냐 하면 그들 대부분이 데이트레이더이기 때문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사고파는 사람이 많죠. 대단해요.”
그는 ‘장기’라는 것도 나라마다 다르다며 기자에게도 몇 년이 장기투자라 생각하는지 물어보았다.
“한국인은 장기가 보통 3년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아요. 여러 상품을 만들려면 고객의 특성도 조사하는데, 역시 ‘빨리빨리’라는 게 이런 데서도 드러나더군요.”
그러나 한국인의 금융 DNA에 약점만 있는 것은 아니라고 그는 설명했다.
“같이 일하면서 더 놀라게 되는 것 같아요. 파생상품 만드는 데는 한국인만 한 사람이 없다고 생각될 정도로 창의적이죠. 앞으로 자본시장통합법이 진행되면 창의력 있는 금융인이 더 필요하게 될 텐데 개인적으로 한국인에 거는 기대가 큽니다. 제가 살던 호주와 비교해봐도 금융상품에 대한 아이디어는 정말 뛰어나죠.”
그는 호주 주식시장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미국의 재채기 한 번에도 영향을 받는다고 할까요? 그것은 사실 세계 어느 지역이나 비슷하겠네요. 아까 말했듯이 파생상품에 대한 관심도 적지 않은데, 한국보다 다양함에서는 뒤처질 수도 있을 것 같군요. 하지만 장기적인 투자가 활발합니다. 장기적인 투자가 활발하면 주식시장이 훨씬 안정적이 될 수 있겠죠?”
디저트가 나왔을 때 아까 그레고리 대표가 물었던 ‘떡’의 의미를 말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떡은 디저트 같은 음식이기 때문이다.
“옛날엔 한 덩이에 밥 몇 덩이가 들어간 떡은 잔치 때나 먹는 귀한 것이니 속담에 자주 등장하는 것 아닐까요?”
그러자 그레고리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 때문에 사실은 너무 쫄깃해 먹기 힘들다”는 것이다. 떡이 쫄깃해서 맛있지만 외국인에게는 그 맛이 익숙하지 않은 것이다.
그 말을 들으니 ELW를 비롯한 파생상품과 떡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즘 금융상품들은 떡 한 덩이에 밥 몇 덩이가 필요한 것처럼 창조적인 아이디어가 집약돼 있다. 파생상품도 일반인에게 보기는 좋은데 목이 메는 먹기 힘든 음식은 아닐까.
그레고리 대표가 이끄는 맥쿼리증권 한국주식시장그룹이 보기도, 먹기도, 몸에도 좋은 떡을 내놓는다면 디저트가 아니라 메인 디시로 금세 오를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맥쿼리은행은… 맥쿼리은행은 호주의 대표적인 기업으로 1985년 금융시장 규제가 완화된 이후 세계적인 은행으로 발돋움할 수 있었다. 현재 맥쿼리은행은 전 세계 24개국에서 1만여 명의 직원이 전문금융 및 투자은행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007년 한국시장 영업매출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체의 29%를 차지했을 뿐 아니라 맥쿼리그룹 전체 해외 총 매출의 9%에 달했다. 한국에서 운용 중인 자산은 아시아·태평양 지역 전체 운용자산의 71%에 달한다. 그레고리 대표의 직함이 맥쿼리증권 한국주식시장그룹 대표로 다소 긴 까닭은 맥쿼리는 분야별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각각 대표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현재 맥쿼리증권한국은 5개 부문으로 나뉘어 있다. 인베스트먼터뱅킹그룹, 부동산그룹, 해외자산위탁운용그룹, 재무 및 상품그룹, 주식시장그룹 등이다. |
마라케시는… | ||
모로코의 이국적 분위기 흐르는 곳
그레고리 대표와는 테라스에 커튼이 드리워진 테이블에 앉았는데 꽤 아늑한 분위기였다. 비즈니스를 위한 식사보다는 연인과 함께 오기에 더 적합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여기 참 괜찮죠? 친구들과 가끔 오는데, 서울 청담동 부근에는 이런 독특한 분위기의 음식점이 자꾸 새로 생겨서 좋은 것 같아요.” 그레고리 대표는 주변 지인들과 함께 새로운 음식점 찾기를 즐기는데, 한국 사람보다 레스토랑 정보에 더 밝다. 한국의 맛집을 스스로 찾아 나서기도 한다고. 모로코 음식이라고 해서 전혀 모르는 맛의 음식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흔히 양식이라고 생각하는 안심스테이크나 연어스테이크에 다른 소스를 즐기는 정도. 그리스나 지중해풍의 청포도가 들어간 소스를 생각하면 된다. 특히 커스터드 크림과 함께 먹는 디저트는 그레고리 대표나 함께 동석한 맥쿼리 직원들도 접시를 싹 비울 만큼 인기가 있었다. 압구정동 디자이너스 클럽 옆 버거킹 골목으로 150m 정도 들어가면 있다.(전화 02-545-99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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